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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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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상대방의 말들을 인용해 놓고,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은 채 말이 안된다느니 아연케 한다느니 하는 식의 비난문구를 덧붙이는 것으로 논쟁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채만수 소장의 논점은 90%가 말꼬리 잡기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고, 게다가 자신의 결론에서 주장한 '실질적인 구제와 자활 대책 요구'라는 것도 사실은 성노동 운동과 그렇게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봐야 한다. 고정갑희 교수가 말한 것도 실질적인 구제와 자활 대책이라는 것이 아예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성매매 여성들을 그것의 대상으로만 대상화시켜서는 안된다는 말일 것이다. 게다가 실질적인 구제와 자활대책이라는 것이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성매매를 폐절할 수 있을 정도로 '실질적'이기 위해서는 한국의 자본주의 구조 자체가 뒤집어져야 가능할 것인데, 그것이 조만간 가능하지 않음을 인정한다면, 채만수 소장의 '실질적 구제와 자활대책' 운운도 사실은 공문구이며 과장된 수사에 불과할 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제는 현재 실존하는 (그리고 앞으로 실존할) 성매매 여성들의 문제인데, 이는 단지 자활대책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 아닌가? 삐까 번쩍한 정부의 자활대책이 나올 때가지 성매매 여성들은 그냥 앉아서 기다리라는 말인가? 성노동운동은 명백히 탈성매매에 대한 반대 운동이 아니며, 성매매의 폐지를 지향하기 때문에(논쟁은 어떤 성매매 폐지를 어떻게 지향할 것인가에 있다), 성매매를 영속화시키려는 성매매 합법화론과 선을 긋고 '비범죄화' 노선을 택하고 있음은 논쟁을 쫓아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다(아마 '다함께' 정도가 이 점에서 아직 분명칠 못한 것 같다). 그렇다면 채만수 소장이 열을 뿜으면서 주장을 했지만 사실 에너지만 헛되이 쓴 것에 다름 없다. 우리는 심지어 성노동자 운동이 탈성매매를 위한 자활대책 등의 요구를 자신의 중심적인 투쟁사업 가운데 하나로 가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신매매' '인신구속' 등에 명확히 반대하는 성노동자 운동은 자유로운 탈성매매가 원할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채만수 소장이 제기한 쟁점은 사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고, 별로 날카롭지도 못한 허깨비 쟁점에 불과하다. 그리고 질문에 대해서 질문으로 답하는 것이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채만수 소장에게 되묻는다. "성상품화 = 노동력"이 아니라면, 이효리의 "성상품화" 또한 "노동력"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효리야 지금 길바닥으로 쫓겨나도 오래 동안 잘 살만큼 돈이 있을 것 아닌가? 반면 성노동자들은 지금 길바닥으로 내쫓기면 더욱 더 무권리의 극단적 폭력이 지배하는 곳으로 음성화되거나 해외로 원정을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자칭 좌파인 채만수 소장은 연예계 부터 정리하고 나서 성노동자들을 길바닥으로 내쫓는 일에 뛰어 들든지 말든지 해야 순서가 맞는 것 아닌가? 마지막으로, 채만수 소장은 자본주의가 여성들을 가족으로부터 불러냈다고 주장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는 오히려 여성들을 가족으로 유폐시킨 대표적인 생산양식이다. '가족임금'(남성노동자의 임금이 여성과 아이들의 임금까지 대표하게 되는)이라는 것이 확립된 과정이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노동은 있다고 할지라도 항상 비공식적인, 주변화된 노동, 혹은 남성노동의 산업예비군적 성격으로나 존재할 뿐이다. 바꿔 말하자면, 그러한 주변적 노동으로서의 여성노동이란 가족 내로의 여성의 유폐를 전제로 한 것이지, 결코 가족으로부터 어느정도 독립해 나와 형성된 노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여성은 가족 내에서의 희생과 주변화된 노동의 초과착취를 강요당하고 있다(성특법의 여성부는 또한 여성가족부임을 잊지말자). 반면, 집요한 편견과는 반대로,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력의 저발전으로 말미암아, 지배계급에 속하는 여성들을 제외한 피지배계급의 여성들은 생산 활동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서도 물론 남녀 위계가 있었지만, 여성 노동력의 가정으로의 유폐는 (자본주의에서와는 달리) '구조적으로' 불가능했었다. 이렇게 봤을 때, 자본주의야말로 역사적으로 가장 성차별주의적인 생산양식이다.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고증했듯, 오히려 19세기에 나타났던 부르주아 가족 모델의 노동자 계급 내로의 수입이야말로 결정적으로 여성의 가족내로의 유폐가 일어났던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이를 통해서만 민족-국가는 자신을 지배적인 양식으로 조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가족 혹은 가족이데올로기가 위기에 처하기 시작했을 때(낙태 문제 등을 둘러싸고), 민족-국가도 함께 위기에 몰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봤을 때, 남자는 밥벌이하는 사람(breadwinner)이 되고, 여성은 집안에서 가정을 돌보는 사람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 전자본주의에 특징적인 현상이 아니다. 사실 이러한 여성의 가족으로의 유폐는 나중에 미국 자본주의의 헤게모니가 확립되던 때(1940년대, 50년대)에도 동일하게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즉 핵가족의 노동계급 내로의 일반화(포드주의와 함께 진행된). 편견에 빠져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채만수 소장인 셈이다. 물론 쟁점은 있다. 성노동자 운동 내에서도 (부지불식간에 혹은 의식적으로--후자는 이성숙씨 등이 대표적일텐데) 성매매의 폭력성을 부인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나도 감지하고 있는 바다. 따라서 성매매의 '궁극적' 폐절이라는 관념에 대해서 다시 이론적으로 생각해 봐야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성매매의 영속화와 실천적으로 구별되지 못할 수 있을 위험성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매매의 형법적 폐절이 아닌 정책적 폐절 혹은 차라리 감소의 노력을 성노동자들의 자기 조직화와 함께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양자는 보기보다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현재의 논쟁의 대립구도는 이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성노동 운동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매매의 폐절을 어쨌든 여하한 방식으로든 지향하고 있다. 이를 무시하고 합법화론과 비범죄화론을 폭력적으로 동치시키려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기본이 안된 자세일 것이다. 또 더 나아가서, 국가는 이제껏 포주의 역할을 도맡아 왔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면, 그러한 포주의 '영업방침 변경'(사실은 개악에 가까운)을 근거로 해서 작은 포주와 큰 포주를 대립시키고 큰 포주의 편에 서는 것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떠벌일 일은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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