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준]의 사회와 의료
한림대 의대 교수라는 직함보다도 민중의료연합의 회원으로 불러주길 바란다. 한국의료체계의 문제점을 알리고 의료의 공공성과 민중의료의 관점에서 이를 극복해 나가려고 한다. 청진기를 대듯 차분하고 진지한 고찰 속에서 문제를 진단하고, 메스로 수술하듯 거침없이 해법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 직업은 못 속이는 것 같다.
방지거병원 투쟁, 800일
최용준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광진구 일대 전철역을 지나다 차창 밖을 내다보면 큼직한 병원 건물이 쉽게 눈에 띈다. 방지거병원이다. 개원한지 20년째인 이 병원의 규모는 400병상 남짓으로, 서울 동부권에 있는 병원치고는 큰 축에 들어가는, 지역 거점 병원으로 꽤 알려진 병원이다.

병원 측이 고의로 부도를 낸 것이 재작년 6월, 이후 방지거병원 노동자들과 지역 주민들은 이 오랜 지역 병원을 살리기 위한 고단한 투쟁을 시작하였다. 오늘(9월 21일)은 그 투쟁이 꼭 800일째를 맞는 날이다.

처음 투쟁은 병원을 고의로 부도내고 위장 폐업한 사용자에 맞서 일터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병원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시작되었다. 불법 위장 폐업, 그리고 이어지는 단전, 단수 조치. 방지거병원 노동자들은 부도 이전 4개월 전부터 체불되어온 임금에 더하여, 투쟁이 이루어진 그 오랜 기간 동안 누구에게도 한 푼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대로 쓰러지지 않았다. 방지거병원 노동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새 일터를 찾기보다는, 병원을 단지 '정상화'시키는 데서 나아가, 병원 자본가 개인의 이해에 휘둘리지 않는, 따라서 지역 주민들과 병원의 의료인과 노동자들이 즐거이 일하는 '공공병원'으로 만드는 어려운 싸움을 선택했다.

노동자들의 열망에 부응하여 지역의 정치인, 정당, 지역 단체들도 목소리를 모아내어 <시민대책위원회>가 발족했고, 이들은 방지거병원 노동자들과 힘을 합쳐 '방지거병원의 공공병원화'를 지지하는 주민 5만 명의 서명을 받아 서울시장에게 전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그 방지거병원 노동자들과 시민대책위원회가 투쟁 800일 만에 어렵사리 마련한 일일호프가 있었다.

흔히 우리나라 보건의료는 민간 일색이라는 말들을 한다. 그래서 이제는 공공병원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공공보건의료 확충이 필요하되 무늬만 '공공성'을 띠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공공병원으로 분류되는 일급의 국립대학병원들의 행동거지를 들추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의료기관을 누가 소유하느냐 하는 것이 공공성 여부를 가늠하는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결코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기존의 공공의료기관들이 잘 보여준다. 병원이 응당 갖추어야 할 적절한 시설과 장비를 논외로 한다면, 능동적이고 의욕에 찬 의료인과 병원노동자, 참여하는 지역 주민의 존재는 건강한 병원을 보장하는 전제 조건이다. 고단하지만 열망을 지닌 방지거병원 노동자들과 지역 주민들은 800일에 걸친 투쟁 속에서 그 희망의 싹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고단한 투쟁이 헛되지 않도록, 800일을 넘어서는 투쟁이 더 이상 길어지지 않도록, 다시 한번 마음의 끈을 단단히 조여 본다.

※ 방지거병원 공공병원화 시민대책위원회 홈페이지 http://www.bangjig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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