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눈> 이 한 가지 소망

나는 인권이란 자기결정권 곧 자신의 신체에 대한 자율과 통제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자기 또는 자신이란 특수한 개인이다. 세계 전체는 특수한 개인들로 구성되고, 그들은 서로 연관되어 통일된 체계로서 복합적 개인을 형성한다. 따라서 나는 우리가 ‘평택’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미군기지 확장이 아니라 특수한 주민 개개인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60대 후반을 넘긴 주민들은 어린 시절을 보낸 일제 시대를 기억하고 있다. 평화바람 옆집에 사는 주민 민○○ 할아버지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아버지가 농사 진 것을 마름 보는 사람 집 마당에 다 털어 주고 나서 얼마큼 얻어먹는 거여. 그때 당시에 내가 배가 고파서 죽겄는데, 요만헌 바가지에다가 보리 잔뜩 섞인 밥에다가 짠 고등어 요만헌 거를 주면서 ‘빨리 먹어 임마.’ 아버지가 당신이 뭔데, 자기 안 먹고 나 갖다 주고 굶은 거여. 일을 죽도록 해구서. 그때 당시엔 몰랐는데, 기가 멕힌 일이지.”

민 할아버지를 포함해 대추리 주민 약 150세대는 K-6이라고 불리는 커다란 미군기지의 얇은 철조망에 의해 인근 마을들과 분단돼 있다. 케이-6이 들어서기 10년 전인 1942년께 일본은 제2차 세계전쟁을 확대하면서 같은 자리에 비행장을 건설했다. 김○○ 할아버지 가족은 ‘먹고살기 위해’ 공주를 떠나 일본군 기지에 의해 뿌리 뽑혀 지금의 케이-6 자리인 옛 대추리에 자리 잡았다. 이들의 운명은 여러분이 방금 알아차린 그대로다. 반복되는 추방과 이주, 재 정주 그리고 다시 추방의 위협.

이○○ 할머니 고향은 경상도 영천이다. 일제는 만주를 침략하면서 그녀의 고향 마을을 완전히 소개시키고 모든 주민을 만주로 이주시키려 했다. 당시 정세에 따라 주민들이 정주한 곳은 강원도 철원이었다. 그곳에 정착해 농민으로 살던 그녀는 다시 한국전쟁 중반기에 옛 고향을 찾아 한 번 더 피난길에 올랐다. 전쟁 직후 정부는 ‘복귀불능난민 정착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전쟁난민들을 평택에 불러들였다. 바다를 막는 간척노동을 하고 그 일부를 나누어준다는 것이었다. 그 약속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았다. 민 할아버지나 김 할아버지를 불안하게 하는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이 할머니의 그 다음 이야기를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세 분 모두 “이 나이에, 이제 와서, 어디에 가서, 어떻게 살라고 하느냐” 말한다. 이들에게 정부는 보상할 수 있을까? 선조들의 묘가 미군기지 아래 묻힌 것은 그들의 삶의 의미 자체가 상실된 것인데 그들이 어떻게 보상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주민들을 다시 한번 추방할 계획을 세워두고서 대체 농지와 살 곳을 알선해주겠다고 한다. 사랑하는 모든 것이 여기 있는데 그것을 파괴하고서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제 세 사람의 특수한 개인을 통해 주민들이 자신의 소망을 표현하는 다음과 같은 한결같은 이야기가 담고 있는 의미, 그리고 ‘평택’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싫어, 가기 싫어. 여기서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고 싶어!”

두시간(평화 바람 단원)
태그

평화 , 평택 , 평화바람 , 두시간 , 인권의눈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다산인권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