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고대학생들에게 고함

젊음은 물리적 나이로 측정할 수 없다. 나이가 열일곱이더라도 늙을 수 있다. 사상과 생각이 젊지 못하면 생물학적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콧니어링이 백살을 마치고 죽음을 선택했지만 그를 젊은이로 기억하고 있다. 자신 죽음을 자연과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선택한 그의 사상과 생명을 늘 푸른 나무처럼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충분히 젊은 나이에 노쇠의 길, 죽음의 길을 걷는 이들이 많다. 그/그녀들의 이른 쇠락은 물론 사회적 산물이다. 신자유주의, 자본의 세계화가 강요한 우리 삶의 문제이다.

밥 먹고 집 짓고 하는 일련의 과정이 만만하지 않은 팍팍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 박탈의 공포 때문에 그/그녀들은 노쇠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젊음을 발산조차 하지 못하고 앞으로 그 길고 긴 인생의 고단함을 어떻게 통과하겠나하는 걱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일명 고대 사태라 불리는 이건희 명예박사 수여식 헤프닝 이후에 고려대 총학생회가 탄핵 위기에 처 해있다는 언론 보도를 접할 때, 고대학생들의 노쇠함을 심각하게 걱정하게 된다. 특히 고대 총학생회 퇴진에 동의한 2300명, 배움의 과정에 있는 이십대 초 중반의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몰양심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총학생회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폭력 사태’에 대한 평화적 요구라는 것은 사실 ‘삼성이란 기업에 입사해서, 중산층으로 진입할 것을 열망’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미 학문을 돈주고 사는 일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치부하는 잘못’을 포장하는 도구쯤으로 보인다.

진정한 평화란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만을 뜻하지 않는다. 평화는 사람이 사람됨을 보장받는 세상을 일컫는다. 공장에서 쫒겨 난 노동자가 원직 복직하는 것이 평화, 가고 싶은 곳을 장애인도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평화, 땅을 일궈 온 농민들이 더 이상 땅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평화(평화가 무엇이냐-문정현 신부 연설문 중에서)이다.

다행히 오늘 밤 고대 전체학생간부들은 총학생회 퇴진을 학생 총투표에 부칠 사안은 아니라고 결정했다. 또한 관련자들의 징계가 부당하다는 것에 동의하는 학생도 많다고 알려졌다. ‘대학은 시장이 아니라고, 무노조 경영을 딛고 노동자들의 절망을 밟고 선 삼성 그룹의 이건희 회장의 박사 학위를 부끄러워했던’ 학생들이 너무나 당연한 요구를 했다는 이유로 고통받고, 자신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는 일련의 일들이 종지부를 찍는 것 같아 반갑다.

아직 학생 간부 5명에 대한 징계여부가 결정되지 않았고, 2300명의 총학생회 퇴진 동의 학생들이 있기 때문에 고대사태는 마무리 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삼성 그룹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객관적으로 내려지지 않았기에 불씨는 남아있다. 이제부터라도 고대학생들이 젊음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쇠락의 길에서 벗어나, 희망의 메시지를 크게 외쳐주길 바랄뿐이다.
태그

노동 , 삼성 , 다함께 , 고대 , 기자의눈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다산인권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