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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포츠, '열광'과 '착취'의 공존

우리나라의 스포츠는 국민에게 열광의 기회를 제공하며 무럭무럭 성장했다. 우리나라는 명실상부 스포츠강국이다. 개발도상국은 물론 이른바 선진국 중 국제대회에서 한국만한 성적을 거둔 국가, 프로스포츠가 활성화된 나라는 드물다. 그런데 스포츠의 저변도, 생활체육기반도 취약한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비상식적’인 성과가 가능할까.

한국스포츠의 불가사의한 성장은 물과 불을 가리지 않고 그야말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선수들을 오직 성적만을 추구하는 ‘운동기계’로 만들었기에 가능했다. 여기에서 인간의 자유와 권리와 존엄성은 등한시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시된다. 학생선수들에게조차 그들의 당연한 권리인 학습권은 무시된다. 초등생에게까지 강요되는 합숙훈련은 열 살 남짓한 아이들에게 병영생활을 강요하며 이들의 올바른 성장과 자유로운 사고를 불가능하게 한다. 또 공부라는 걸 구경도 못할 뿐 아니라 친구사귀기나 아르바이트 등 성장기에 필요한 경험도 할 수가 없다. 상황이 이러하니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그만두거나 실업팀이나 프로팀에 가지 못하는 선수들은 ‘불량품’인 채 사회로 떠밀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흔히 감독이나 코치들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다 너희들을 위한 거야.” 정말 그럴까? 아니다. 성적에 대한 집착과 가혹한 훈련은 우선 선수가 소속된 조직을 위한 것이고 바로 지도자 자신들을 위한 것이다. 그래야 자리보전은 물론 신분상승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선수들은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선수들을 훈련시키고 성적을 내는 데에 가장 간편(?)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인 폭행이 빠질 수 없는 훈련방법이 된다. 지도자가 어린 선수들을 때리고 선배가 후배를 때리는, 또 별의별 기상천외한 가혹행위가 활용되는 공간이다. 혹 문제가 생겨도 선수가 희생된다. 그러나 문제는 폭력만이 아니다. 한국의 스포츠시스템은 철저한 억압과 착취구조를 이루면서 선수의 혹사와 희생을 강요한다.

우선 스포츠계에서는 자유로운 선택이 제한받는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학업을 병행하기 위해 선수촌 입촌을 거부한 수영선수 장희진을 수영연맹은 제명해 버렸다. 국가가 우선이라면서. 연맹은 역시 성적이 급했는지 제명을 철회하긴 했는데 당시 어느 체육학과 교수는 신문에 국가를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고 썼다. 왜 그깟 메달 때문에 중학교 2학년 학생의 미래가 희생되어야 하는가. 그는 결국 2001년 국가대표 타이틀을 가볍게 털어버리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국가대표로 선발되면 누구나 합숙을 해야 하는 집단주의가 싫다면서. 지금 주 3회 두시간씩 운동하면서도 한국서 수업을 전폐하고 호들갑 떨며 운동하는 또래보다 월등한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

개인을 무시하는 조직우선의 분위기는 성인스포츠에도 적용된다. 팀과 리그가 살기 위해 선수의 자율적 선택권을 제한한다. 축구의 김종부, 야구의 강혁, 배구의 이경수 등은 선수 본인의 의사가 무시당하고 팀과 리그의 이해관계가 얽혀버리면서 결국 선수생활을 중단해야만 했던 사례들이다. 김종부의 경우엔 재학 중이던 K대학이 학교가 원하는 현대로 가지 않고 대우와 계약한 그를 축구부에서 제명시키고 협회에 선수등록취소통보를 하는 등 교육기관이라 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이경수만이 선수복귀 후 과거의 실력을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제까지 일어났던 스카우트파동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과거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쓸쓸히 퇴장해 ‘비운의 스타’로 팬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작년 여자축구의 샛별로 등장한 박은선도 본인은 돈을 벌기 위해 실업팀으로 가기로 결정했는데 여자축구협회의 내규는 대학여자축구를 살린다는 이유로 모든 고졸선수들의 대학진학을 못박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한다. 이도 지켜볼 일이다.

2000년 있었던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파동 당시 방송사 카메라에 잡힌 모 구단 고위간부가 내뱉은 한마디는 구단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자기들 월급 주는 게 누군데.” 마치 자신들이 갈 곳 없는 사람 먹여살리고 있는 것마냥 말이다. 팀들은 선수들의 항명하면 재계약 거부나 팀해체를, 스카우트 문제가 생기면 대회 보이코트나 특정 팀과의 경기 거부 등을 내세워 협박한다. 선수협의회 파동 당시에도 그랬다. 구단운영이 적자상태인데 사실상의 노조를 결성하면 팀 해체하겠다고. 자주 써먹는 카드이지만 정작 해체한 팀은 이제까지 없다. 그러면 엄청난 적자에도 구단을 운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기업 홍보 등 적자를 상쇄하고도 남을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재벌기업들이 손해 보는 장사 하는 것 본 적 있는가. 그리고 그들은 손익계산에 철저하다. 여러분들은 선동렬, 이종범의 일본진출 당시, 프로선수 계약서를 언론이 ‘노비문서’라 보도했던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언급된 유명선수들의 문제도 문제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이름 없는 선수들이다. 현재 국내에는 2만이 넘는 성인 등록선수, 10만에 육박하는 학생선수가 있다. 이들은 특히 중요한 성장기에 또래들에겐 당연한 공부도 못하고 ‘사육’ 당하듯 훈련받으며 지낸다. 이 중 일부가 그나마 다행히 성인스포츠에 가는데 거기에서도 사회인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하나의 부품처럼 대접받다가 수명이 다하면 용도폐기된다. 그럴 경우 세상으로 나가야 하지만 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으니 아무런 무장 없이 빈손으로 전쟁터에 나가는 꼴이다. 옛날엔 그래도 운 좋게 실업팀에라도 가면 은퇴를 해도 거기서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배려를 기대하기 힘들다.

한국의 스포츠는 이 사회를 근대화시켰지만 정작 스포츠 자체는 대단히 전근대적이다. 금메달의 영광과 프로선수들의 화려함으로 포장된 스포츠의 내면은 수많은 상처와 아픔을 담고 있다. 축구국가대표선수들은 그토록 화려하지만 다른 선수들은 수시로 생존권을 위협받는다. 극소수의 영광을 위해 수백, 수천의 희생과 도태가 전제되는 괴물 같은 시스템이다. 이제 선수들의 승패를 안주 삼지만 말고 그들의 인권과 생존권도 고민해야할 때이다. 이 글은 체육계 지도자들의 문제를 제시했지만 사실 그들도 피해자다. 그들도 이런 환경에서 오랜 세월을 지냈고 또 그들 자신의 생존권조차도 보장 받지 못하니 어쩌겠는가.


정희준, 동아대학교 체육학부 교수/문화연대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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