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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신드롬 유감

지난 5월 19일 영국 런던 ‘사이언스 미디어 센터’에서 생명공학계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부를 법한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배아복제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서울대 황우석 교수가 난치병 환자의 체세포를 복제하여 치료용 배아 줄기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공개한 것이다. 기자회견장에 몰린 수백 명의 보도진들은 놀라움과 당혹감에 휩싸이며 이 충격적인 사실을 긴급 속보로 전세계에 타전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배아복제 기술의 성공담은 차라리 과학적 담론이기보다는 인류에게 던지는 ‘훈훈한 미담’처럼 들릴 법도 하다. 배아복제의 비밀 코드를 하나씩 풀어가는 황교수의 연구 성과는 온전히 난치병에 시달리는 수많은 환자들과 가족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척수마비로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는 가수 강원래씨에게 재활의 메시지를 전달한 황교수는 이 시대의 과학자이기에 앞서 진정한 휴머니스트의 반열에 오를 만하다.

베아복제를 둘러싼 생명윤리의 문제가 국제적인 논쟁의 수면 위로 강력하게 떠오르지 못한 것도 아마 불치병, 난치병에 시달리는 수천 만 지구촌 환자들의 간절한 염원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복제양 돌리 탄생 전후로 제기되었던 생명공학의 치열한 윤리논쟁에 비하면, 이번 발표내용에 대해 윤리 문제를 제기하는 담론들은 예상 외로 미비하다. 오히려 기자회견에 동석한 옥스퍼드대 줄리언 살버레스쿠 교수는 생명윤리만을 강조하는 유럽의 보수과학 정책을 문제삼는가하면, 미국 피츠버그대 재럴드 새턴 교수는 이번 발표를 산업혁명에 비유하며 황교수를 가진 한국인이 부럽다는 예의 외교적 찬사를 보낸다.

한류민족주의로서의 ‘황교수 신드롬’

이쯤 되면 황교수의 모국민들은 그를 칭송하기에 합당한 열혈 서포터즈로 활약하기에 충분하다. 전지구의 변방에 불과한 한국의 한 수의학 교수가 세계가 놀란 위대한 연구성과를 연이어 발표했으니 한국인이 정서적으로 오버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지난 2 주간 계속된 황교수에 대한 국가적, 국민적 관심과 그에 부응하는 미디어의 광적인 보도는 2002년 월드컵 신드롬 이후 최대의 대중적 패닉을 야기시켰다. “국보급 교수”, “차기 노벨상은 따놓은 당상”, “황교수, 대통령급 경호받아”, “황교수 생가에 사람들 발길 이어져”, “황교수 저서 구매폭증”, “황교수 팬큽럽 사이트 급증”, “최고과학자 1호 사실상 확보” 등등의 찬란한 수사를 받은 사람이 해방 이후 일찍이 누가 있었을까?

정부 역시 일명 “황교수일병구하기” 작전에 팔을 걷고 나섰다. 청와대는 황교수 연구에 필요한 모든 재정적, 제도적, 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배아복제의 실용화에 따른 윤리문제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생명윤리연구센터”를 설립하겠다고 나서는가 하면, 그가 제안한 “국제줄기세포은행” 설립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보건복지부는 한국인 유전자연구를 위해 2010년까지 1000억원의 재원을 투입하여 한국의 생명공학연구의 인프라를 든든하게 하겠다고 말했다. 평소 기초과학 분야 투자에 인색한 정부가 이리도 신속하게 대대적 투자를 발표한 것도 이례적이다. 정부 각처와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발표하고 있는 지원정책은 마치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빅히트를 치고 난 후 문화관광부를 위시해 관광공사, 외교통상부, 청와대, 국무총리실, 재정경제부가 나서서 지원정책 방안을 만들겠다고 나선 것과 흡사하다.

너무 냉소적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른바 ‘황교수 신드롬’은 국가주의에 기반한 한류민족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적, 대중적 관심의 정도로 보자면 내게는 황교수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이순신이나 일본 아줌마들의 연인이 된 배용준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황교수 신드롬은 과학에의 친근한 관심의 반증이라기보다는 개인을 신화화하는 일종의 팬덤문화 현상같다. ‘배아복제한류’, 혹은 ‘과학한류’라고할까 대중적 자부심이나 국가의 개입수준에 있어 황교수의 연구는 이제 개인의 과학적 성취를 넘어서 국운을 건 한류 프로젝트가 된 것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모든 미디어들은 이 국가프로젝트에 대한 이성적 윤리적 성찰없이 오로지 황교수 신드롬을 재생산하는 집단적 광기를 드러낸다. 황교수의 연구업적이 야기할지도 모르는 생명윤리 문제나 자본에의 포섭 가능성, 인간복제로의 이행 위험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 방송과 언론은 여지껏 본적이 없다. 과연 황교수의 연구가 미디어에서 일방적으로 찬사를 받을 많큼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배아복제 기술의 문제들

내가 보기에 황교수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가장 많이 우려하듯이 황교수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배아줄기 세포를 복제하기 위해 복제에 필요한 배아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연구를 위해 생명체의 인위적인 탄생과 죽음을 조절하는 윤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배아를 생명, 혹은 인간으로 볼 것인가하는 문제가 의학적인 논쟁을 야기시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윤리적인 차원에서는 생명의 인위적인 조작과 통제라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배아를 치료의 목적을 위해 끊임없이 탄생시키고 살상시키는 행위가 과연 정당한가 하는 문제는 의학적인 필요성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배아복제의 목적이 난치병, 불치병 환자에게 필요한 장기나 세포를 제공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이후에 조절 통제가 되지 않을 경우 장기복제를 넘어서 인간복제로 갈 수 있는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SF 영화에서 간혹 보게되는 안드로이드의 탄생을 위한 의학적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우려할만한 사실이다.

둘째, 생명공학의 무차별 자본흡수가 또다른 ‘생명격차’(bio-divide)를 낳을 여지를 안고 있다. 현재 세계 자본의 흐름은 크게 금융자본과 기술자본이 주도하고 있다. 그 중 기술자본은 정보기술과 생명공학기술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특히 생명공학(BT: bio-technology)은 앞으로 거대한 자본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배아복제 연구성과가 만들어 내는 기술 특허권은 배타적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배아복제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치료기술은 한정될 수밖에 없고, 전세계 수천만명에 해당되는 난치병 환자들에게 공급되기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자원을 갖고 있다. 이럴 경우 거대한 생명공학 자본에 의해서 배아복제 기술이 독점화될 수 있으며, 이러한 의학적 성취의 혜택을 받게 되는 사람들은 소수의 상류층에 불과할 것이다. 치료의 대중화를 위해 엄격한 제도적, 기술적 통제를 완화할 경우, 순수하게 치료의 목적으로 사용되어야할 연구가 인간복제나 장기매매의 문제로 확대할 소지를 간과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황교수의 연구에 대한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이 과연 충분한 과학연구 정책의 기초 위에 이루어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주지하듯이 한국의 기초과학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대단히 열악하다. 물리학, 화학, 천체우주학, 지질학, 생명공학과 같은 기초과학 분야에 투자하는 재원은 다른 선진국가나 경제적 규모가 유사한 국가들에 비해서 낮은 것이 사실이다. 이번 황교수의 연구를 기점으로 생명공학 분야에 투자되는 재원은 그런 점에서 전향적이면서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런 식의 ‘투기성’ 지원이 항상 연구의 결과로 입증될 때에만 진행된다는 점이다. 물론 집중과 선택이라는 지원의 원칙을 반대하지 않지만, 황교수 연구에 대한 집중지원은 적어도 다른 기초과학분야에서의 지원정책과의 연계 속에서 그 타당성을 검증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 발표된 지원정책들은 기초과학 분야에 대한 장기지원 계획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즉흥적이고 인위적인 면이 많다.

인문학적 견제와 성찰을 위한 논쟁

나는 유럽 사회가 과학적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배아복제 기술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문화적, 철학적 근거가 여전히 타당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비판주의의 승리이고 과학의 진보에 대한 이성적, 철학적 견제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현재 유럽연합 41개국 중 24개 국가가 배아분리, 세포핵 이식과 같은 생명공학의 핵심 기술들의 연구를 법적으로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최근 배아복제 기술을 허용하는 한국의 관대한 제도를 본받자는 유럽과 미국 학계 정치계의 주장에는 종교적 보수주의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지만, 다른 한편에는 기술주의와 생명공학 자본에 투항하려는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스며들어 있다.

나 역시 종교적 보수주의에 기반한 부시의 반대 논리를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또한 과학, 특히 생명공학의 진보가 인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익한 과학적 진보는 인문학의 견제와 비판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지 이러한 집단적 광기를 동반한 기술의 독주를 통해서 성취되지 않는다. 황교수의 연구는 그것이 인류의 참다운 발전을 위해 활용되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적 비판과 견제를 통해 재평가되어야 한다. 인문학의 비판과 견제는 다름 아닌 황교수 연구의 기술주의와 자본의 개입에 철학적 제어장치를 마련하는 것과 ‘황교수 신드롬’을 신민족주의로 확대재생산하는 국가와 주류미디어와 일정한 담론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황교수 연구결과로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일대 논쟁이 예상됨에도 이처럼 조용한 걸 보면 국운와 자본에 앞에 무력한 지식(인)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씁씁하다. 지식(인)의 생산적인 논쟁이 촉발되길 기대하며, ‘황교수 신드롬’을 국가주의로 환원하려는 정부와 미디어의 광기도 이쯤에서 냉정을 되찾았으면 한다.


이동연, 문화사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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