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6월 영화관 개봉인 무산된 <진실의 문>의 지속적인 상영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인디다큐페스티발2005의 “오픈 마켓”에 참여했다. 이곳에서 만났던 각 지역 상영관계자들과 제작자들 간의 소통이 시작되고 있고, 이와 더불어 독립영화 배급을 위한 여러 가지 활발한 움직임들이 진행되고 있다. 다양성이 하나의 화두인 이 시대, 독립영화의 배급에도 다양한 고민들이 필요하다.
<진실의 문>의 공개부터 개봉 무산까지
19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을 다룬 <진실의 문>의 포스터,
작년 인디다큐페스티발의 개막작으로 상영되었다.
작년 가을, 인디다큐페스티발2004에서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을 다룬 영화, <진실의 문>을 공개한 후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과들이 있었다. 몇몇 잡지에 작품에 관한 기사가 실리고, 서울독립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고(물론 상금도 받고),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으로 DVD로 제작되고, 또 마케팅 용까지 받게 되어 영화관 개봉까지 준비하게 되었으니 독립영화를 제작하시는 다른 분들께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올해 6월 영화관 개봉을 위해 몇몇 영화관들과 상영 일정을 조율하면서 당연히 영화에 출연하여 인터뷰를 해주신 분들에게 알렸는데, 그 중 한분이 영화 개봉에 대해 부정적인 메일을 보내왔다. 자신의 신분 노출이 두렵다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라 당황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를 설득시키기 위해 여러 번 노력을 시도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를 보호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노력들에는 한계가 있었다. 영화에서 그가 나오는 부분만 삭제하고 진행을 시킬 생각도 했지만, 영화 전체에서 그의 비중이 상당했기 때문에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나는 그를 설득하지 못했고 영화진흥위원회의 마케팅 원도 자진취소 시켜야만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좀 여유를 갖고 천천히 일을 진행했경우 그를 설득하거나 그의 인터뷰를 대체할 방법을 찾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 때엔 DVD 출시가 예정되어 있던 9월 전, 그러니까 2, 3개월을 앞둔 여름에 개봉해야한다는 부담 때문에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를 갖지 못했다. 개봉은 무산되었지만, 영화 개봉이나 방송처럼 파급력이 크지 않은 소규모 상영은 계속 진행시킨다는 원칙을 그에게 밝혔고 그도 그 정도는 인정할 수 있다고 양보했다.
인디다큐페스티발2005 오픈 마켓
금년 인디다큐페스티발2005에서 진행된 배급 세미나와 오픈 마켓은 이러한 상황에 있는 나의 관심과 맞닿아 있었다. 각 지역 상영 관계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진실의 문>을 소개하고 더 많은 상영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생겨났다. 영화제 기간 중인 10월 29일에는 독립다큐멘터리의 안정적 상영과 배급을 위한 세미나가 개최되었고, 그 다음날 광화문 미디어센터에서는 작품을 만든 사람이 직접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주로 작년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상영된 작품들과 올해 선보이는 작품들의 감독들이 주어진 시간 내에 준비된 영상을 상영하고 자신의 작품을 홍보하는 시간이었다.
일반 관객이 아닌 특별한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 즉 각 지역에서 영화제를 담당하시는 분들 내지는 여러 단체 관계자분들, 방송사 프로그램 구입 담당자 등 독립영화 배급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 일은 모두에게 생소한 일이기 때문에 약간 어색함이 없지 않았지만, 이러한 시도가 이루어진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성과가 있었던 것 같다. 세미나와 간담회, 그리고 미디어센터에서 있었던 오픈 마켓에 참여하면서 놀랐던 것은 정작 이분들이 어떤 작품을 상영해야하는지, 어디서 그러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를 잘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정보의 과잉시대라고 할 만큼 인터넷이 발달된 요즘이지만 제대로 된 정보, 또는 그 정보를 찾기 쉽게 하는 방법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통의 시작
인디다큐페스티발이 끝난 후 미디어센터의 조동원님이 ‘공동체상영운동네트워크’라는 메일링 리스트를 만들었다. 소통의 장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간담회에서 돌려 적은 메일 리스트를 시작으로 독립영화제작자와 지역상영 관계자들의 공동게시판이 열려 서로의 정보가 오가기 시작했다. 용산인권영화제, 부안영화제 인터넷 상영회, 충주상영회, 원주인권영화제 등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면 몰랐을 각 지역의 상영회 소식들이 올라오고 있다. 또한 독립영화의 온라인 상영에 대한 나루 감독과 오종환 감독의 의견이 올라오는 것처럼 어떤 사안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을 주고받는 온라인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미디어센터 조동원님의 수고로 만들어진 ‘공동체상영운동네트워크’
“사회진보와 영상 문화의 다양성을 위한 전국 각 지역, 각 공동체의
비영리적인 독립영화, 노동영화, 인권영화 상영회 및 영화제의 정보를 공유하고, 상호 지원하는 "공동체 상영운동" 네트워크입니다.”(첫 페이지 안내문 중에서)
이러한 움직임과 더불어 작품을 제작하는 감독들도 예전부터 필요하다고 느껴오던 네트워크를 실행하려고 하고 있다. 요즘은 독립영화 감독들이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통해 자신들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근황의 소식을 전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 중 한국독립영화협회와 상영 및 판매계약을 맺고 배급을 해나가는 감독들도 있지만, 개별적으로 온라인이나 지인들을 통해 배급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나를 비롯한 몇몇 감독들은 이러한 개별적 움직임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조직화하는 것보다는 이들을 네트워크화하여 독립영화 제작자와 상영 관계자, 독립영화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들이 서로의 생각들을 주고 받고, 제작이나 상영회와 관련된 기술적인 정보 등을 공유하고 축적해서 시행착오를 줄이며, 더 나아가 작품의 상영 또는 판매를 유도하는 공간으로 활용되는 싸이트를 구상하고 있다.
작품을 소개하는 페이지를 만드는 경우, 한 관리자가 데이터를 받아서 올리는 식으로 업무가 집중되는 형식이 아니라 작품을 만든 연출자 자신이 몇 개의 이미지와 텍스트로 작품을 소개하고 자신의 홈페이지나 블로그로 링크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이렇게 되면 작품정보에 대한 오류도 없앨 수 있고, 수정 기능을 통해 연출자가 직접 작품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지속적으로 전할 수 있다.
한국독립영화협회 독립영화데이터베이스 개편의 필요성
그동안 한독협이 ‘독립영화데이터베이스’, http://www.indiedb.net(인디디비넷)라는 싸이트를 통해 한국의 독립영화들을 소개하고 판매까지 진행시켜오고 있지만, 접근성의 부족과 전면적인 리뉴얼이 필요하다는 점이 계속 지적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한국독립영화에 대한 정보가 가장 많이 있는 싸이트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제작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각 작품의 소개는 매우 제한적이고 작품을 만든 제작자들 간의, 또는 상영을 원하거나 작품을 구입하려는 일반인들 간의 네트워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운영 중인 독립영화데이터베이스 싸이트.
최근 ‘정보트러스트 어워드2005 인터넷 문화일반 분야’에 선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가지 반가운 소식은 이 싸이트가 최근 ‘정보트러스트 어워드2005 인터넷 문화일반 분야’에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싸이트가 갖는 사회적 기여도나 보존 가치를 인정받음 셈이다. 하지만 이 싸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한독협은 별도의 예산을 마련하지 못해 제대로 된 개편 작업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제작자들이 주축이 되어 준비되는 “네트워크 싸이트”는 독립영화데이터베이스 싸이트의 개편을 위한 중요한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두 개의 싸이트가 상호 배타적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닌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한독협 배급팀과 상영 및 판매 계약된 작품의 경우 “네트워크 싸이트”에서 작품에 관한 이미지와 글로 자세히 소개되면서 자연스럽게 “인디디비넷(독립영화데이타베이스)”으로 링크되어 판매나 상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네트워크 싸이트”는 제작자와 상영관계자, 일반인들의 교류를 중시하는 성격으로 나아가고 “인디디비넷”은 전문적인 상영, 판매가 이루어지는 배급 싸이트로 개편, 발전되는 모습을 제안해 본다.
독립영화 배급의 다양성을 꿈꾼다
앞으로 독립영화의 배급은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이다. 그것은 그간 독립영화인들이 해온 노력과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자하는 시대적인 분위기 덕분일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독립영화가 부딪칠 수 있을 난관들에 대한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예를 들자면, 작품의 내용상 명예훼손의 위험이 있는 작품의 배급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송에 대비하여 법적 대응에 대한 시스템을 구축한다든지, 영리적 목적의 기업에 적용하는 세금 체계를 독립영화의 배급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 관계기관의 협조요청을 구하는 등의 일은 독립영화인의 몫이 아닌 단체나 지원기관의 일이다.
한편, 작품이 만들어진 후 몇몇 영화제에서 상영된 후 점점 작품의 상영기회가 없어지는 상황이 올 때 가장 착찹한 느낌을 갖는 사람은 감독이지만, 그러한 상황에 대해 가장 크게 책임을 느껴야 하는 것도 감독이다. 감독 자신이 적극적으로 끊임없이 작품의 상영과 판매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한다고 생각된다. 사실 이 말은 개봉이 좌절된 후 엄청나게 의기소침해 있었던 나 자신에게 하는 충고다.
독립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은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 각종 독립영화 제작지원 기금들을 비롯해서 촬영, 편집장비의 경량화는 창작의 문턱을 현저하게 낮추었고 각종 영화제들에 출품되는 독립영화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영화를 만드는 것이 그렇게 쉽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어렵다. 그렇지만, 안정적인 배급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결과물들의 진행방향이 낭떠러지를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독립영화에 배급에 관한 무수한 논의들이 있었다. 이제는 그러한 논의들을 안정화시켜야 한다. 제작자나 독립영화 관계자들 모두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며, 논의의 단계를 뛰어넘어 실행하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공감대가 퍼져있다. 현재 독립영화 협회의 배급위원회가 조직되어 방송, 극장 배급 등에 관한 데이타를 축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와 같은 국가기관의 지원도 예전보다 훨씬 많아지고 다양해졌다. 이러한 고무적인 상황을 적극 활용하여 독립영화의 다양한 배급 형태를 모색해 나간다면, 저급한 상업영화들이 판치는 이 사회의 영화배급 구조를 보다 건강하고 다양하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