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이 방송을 말릴 수 없었다
▲ FM와이와이 방송국 전경 |
“지진이 나자 지역에서 각종 소문과 유언비어가 난무했어요. 지진에 대한 정확한 소식을 한국어, 베트남어로 알려주는 것이 우리 방송의 목적이었지요. 하지만 저희는 방송면허가 없는 50와트(w)의 해적방송이었어요. 그러나 누구도 이 방송을 말릴 수 없었습니다. 왜? 일본사람 뿐 아니라 외국 사람에 대해 구체적 정보를 가지고 있는 건 FM와이와이 뿐이었으니까요.”
방송면허도 없이 시작한 50w의 해적방송은 1년 후에 중앙정부로부터 방송허가를 받게 된다. 부탁한 게 아니라 중앙정부가 먼저 허가를 내 주었다. 왜 정부가 불법 해적방송에게 허가를 해줬을까? 준이치 대표는 공동체 라디오가 재난 상황에서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고베 대지진을 계기로 몇 개 되지 않았던 공동체 라디오는 일본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현재 248개의 방송국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서는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공동체 라디오가 늘었다. 태풍이 불고 지진이 날 때마다 주파수가 올라갔다. 1w 출력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20w까지 높였다. 1w로는 재난 상황을 제대로 지역 주민들에게 알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일본 동북부 대지진 당시에는 재난방송을 위해 임시방송국 25개가 활동하였으며, 출력도 50w에서 150w까지 올린 지역도 있다.
일본 정부는 공동체 라디오 허가의 조건으로 재난 방지와 사후 대책 방송을 의무화하고 있다. 재난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지리적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공동체 라디오가 지역 재난 방송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난방송은 커뮤니티가 핵심이다
▲ 1996년 정부 라이선스를 받은 후 FM와이와이 개국식 |
이 소소해 보이지만 아주 구체적인 주민들의 요구를 큰 방송사에서 수용할 수 있을까? 아무리 국가적 수준의 재난이 발생하여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는 지역적이고, 삶에 밀착된 구체적인 정보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서로 커뮤니티로 연결되어 있을 때에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재난방송을 할 수 있다. 토론회에서 준이치 대표가 가장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이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었다.
“재난방송에서는 4개의 매뉴얼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전 경계, 둘째는 긴급 대처, 셋째는 복구와 재건, 넷째는 사후 대비. 이 네 가지 모두를 잘 하기 위해서는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공동체를 만드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사람들이 스스로 공동으로 정보 교환을 하는 것입니다. 성, 세대, 직업에 관계없이 공동체에서 역할을 하면서 소통하는 것이지요. 정보만이 아니라, 소통이 더 중요합니다.”
▲ 2011년 동일본 대지진 현장과 공동체 라디오 방송을 하는 이주민 |
2005년 초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 지역을 강타했을 때에 허리케인으로 피해를 입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처 대피할 차량이 없어 피해 지역을 벗어나지 못했던 가장 취약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전국 네트워크 계열의 상업방송사들이 음악방송을 내보내고 있었을 때,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들은 전기가 끊기고 물이 차오르는 환경에서도 재난방송을 계속했으며 영어가 아닌 제3세계 언어권의 이주민들에게도 그 나라 언어로 재난방송을 실시했다.
지금이 재난이다
일본 대지진, 원전사고 이후 한국사회에서도 재난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공영방송 KBS는 재난방송 체계 구축을 위해 향후 5년 동안 165억 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지역 재난방송 구축을 위해 공동체 라디오를 허가, 지원하겠다는 이야기는 없다. 재난방송 토론회도 공동체 라디오 활동가들의 십시일반 노력으로 겨우 열릴 수 있었다. 토론회에 참석한 FM분당에서는 지역밀착형 재난방송을 자발적으로 추진하려고 했지만, 법적, 행정적 문제로 시작조차 어려웠음을 토로했다. 지역에서 재난방송이 필요하다는 인식 자체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재난은 무엇인가? KBS가 하는 전국적 규모의 재난방송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지진, 태풍 급의 큰 규모의 자연재난이거나 건물붕괴, 폭발과 같은 인명 피해가 큰 재해를 재난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커뮤니티 차원에서 재난이 재규정될 필요가 있다. 일주일이 넘게 계속된 구미의 단수사태나 칠곡 미군기지 고엽제 매몰로 발생한 환경오염문제, 강남 포이동 재건마을 화재와 같은 것은 중앙방송 9시 뉴스에 한두 번 보도되는 정도로 끝날 수 없는 지역 차원에서는 매우 중대한 재난이다.
재난상황에서 절실한 것은 재난의 발생을 알리는 일회적 보도가 아니라 재난 당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구호 정보와 치유, 그리고 재난자들을 도와줄 사회적 지원을 연계시키는 커뮤니티 활동이다. 이 활동을 매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공동체 라디오이다. 스마트폰 등 새로운 뉴미디어들이 등장하고 소셜미디어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어린이, 노인, 장애인 등 재난에 가장 취약한 사회적 약자들의 접근은 아직까지 제한적이다. 일본 정부가 대지진 상황에서 올드미디어인 라디오 수신기를 4만대나 재난 지역에 보급하였던 사실만 보아도 라디오는 결코 뒤떨어진 기술이 아니다.
▲ 2011. 07. 26 서울 광화문 ‘지역 재난방송과 공동체 라디오’ 국제 토론회 현장 |
전국에 통 털어 7개뿐인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 이마저도 1w 출력에 갇혀 있다. 들리지 않는 방송으로 어떻게 재난방송을 할 수 있을까? 참으로 무서운 상상이지만, 일본의 사례에서와 같이 대재난 상황이 벌어진 후에야 재난을 막으려 안간힘을 써야 하는가? 앞으로 재난은 국지적으로 발생하지만, 그 재앙의 정도는 국가적 수준을 넘어설 거라는 무서운 경고도 들려온다. 그러니 제발 미리 준비하자. 수 조 원짜리 주파수를 경매하는 일의 반의반만큼이라도 방송통신위원회가 지역 재난방송 체계 구축과 공동체 라디오 허가에 관심을 기울여주기를 바란다. 지역 재난방송에 대한 법적 의무가 마련되어 있지 않지만, 지방정부는 자율적으로 지역 재난 방송 체계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현재 있는 7개 방송국이 있는 지역만이라도 우선적으로 지역 재난방송을 시작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공동체 라디오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자치와 커뮤니티 유지의 중대한 문제다.
“우리는 재난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 위험을 줄일 수는 있다. 그러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공동체 라디오이다.” 준이치 대표 발표 자료 가장 마지막에 있던 결론이다. FM와이와이의 16년 경험에서 보고 배워야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
[필자소개] 박채은
전국공동체라디오협의회에서 교육 및 정책 관련 일을 하고 있다. 현재는 성남에서 미디어센터 설립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