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우리는 모두 이주노동다>라는 장편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2002년 명동성당에서 농성하고 있던 이주노동자의 투쟁기록이었다. 불행히도 2003년 다시 한 번 이주노동자들은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미디액트는 찾아가는 미디어교육의 일환으로 이주노동자미디어교육을 기획하면서 나에게 교사로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다. 처음 미디어교육에 참여했던 나는 미디어교육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미디어교육이 투쟁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유희처럼 느껴졌지만, 농성투쟁에 지친 이주노동자들에게 위안이 될 거라는 생각에 교육에 참여했다. 그렇게 참여했던 이주노동자 미디어교육을 시작으로 나는 9년째 미디어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2003년 이주노동자 미디어교육을 한다고 했을 때 혹자들은 이렇게 얘기했다. “배불렀구먼?” 그렇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이주노동자가 카메라를 든다는 것은 배부른 행위였다. 나 역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는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해주지 못할 때 카메라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해줄 무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어느 이주노동자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우리 이거 지금 안하면 언제 해보겠어.”
2010년 노인 미디어교육에 참여했을 때도 비슷한 질문을 들었다. “노인들이 그거 배워서 뭐해?” 한 어르신이 말하셨다 “이제야 내 삶을 찾았다고, 지금 하지 못하면 언제 하겠냐고?” 그렇다. “지금 아니면 언제 해 보겠어!”
어르신들은 노인 미디어교육에 왜 참여하는가?
▲ 2010 노인 미디어 전문 교육 최종상영회❘서울노인복지센터 |
노인들은 TV를 가장 많이 보는 세대이지만 TV에게 가장 적게 등장하는 세대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노인 이미지가 우리 사회의 암묵적 금기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디어에서 노인을 다룰 때에는 죽음과 관련된 육체적 노쇠나 복지에 측면에서만 그려질 뿐이다. 아무도 노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지, 일상을 어떻게 보내는지 관심이 없다.
노인 미디어교육이 의미가 있는 것은 이제 노인들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카메라에 담으려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미디어교육에 참여하는 노인들은 대부분 말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지만 자신들의 이야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고 싶은 욕망과 그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폄하하는 모순된 시선을 그들 스스로도 가지고 있다. 교육에 참여하는 어르신들은 자꾸 “이런 얘기해도 되요?”라는 말을 자주하신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자꾸 보잘 것 없이 느껴지시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이들의 시선으로는 노인들은 모두 비슷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 관심이 있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노인 미디어교육에 참여한 어르신들도 서로 다른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살아오면서 서로 마주칠 이유가 전혀 없었던 어르신들이 영화라는 고리를 통해 만났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교육에 참여한 어르신들은 사는 지역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경제적 상황도 다르고 학력도 다르다. 하지만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 그리고 그 표현을 영상으로 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노인 미디어교육에 참여하는 어르신들의 공통점일 것이다.
▲ <욕망은 늙지 않는다>(나두경|2011)의 한 장면 |
욕망은 욕구가 추상화된 것이다. 욕구는 대상을 가지고 있지만 욕망은 대상을 가지지 않고 추상화된 형태이기 때문에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어렵다.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 욕망을 실현시키려면 대상을 찾아야 한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연인을 찾아야하는 것처럼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 연인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을뿐더러, 힘들게 찾은 그 연인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경험한다. 욕망은 손아귀에서 자꾸 빠져나가고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와 같다. 사실 그것이 욕망의 본질이다. 하지만 수많은 실패 속에서도 우리는 지속해서 그 대상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쫓아간다. 우리는 누구나 이러한 노력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지속한다. 하지만 종종 사람들은 노인들은 이 노력을 멈추거나 포기하거나 욕망을 상실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인들도 결코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노인 미디어교육은 욕망의 대상을 찾고 그것을 실현하고 인정받기 위한 시도의 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어르신들이 미디어교육에 참여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젊은 시절 일자리를 찾으러 돌아다니며 우연히 본 영화촬영 현장에 매료되었지만, 생활고 때문에 포기했던 꿈을 이제야 실현하고 싶은 어르신. 남편을 잃고 삶의 의욕을 잃었을 때 남편, 애인이 되어준 컴퓨터와 카메라. 젊을 때 못 배운 한을 미디어교육에서 푸셨다는 여성 어르신 등. 각자 살아온 삶의 궤적만큼 미디어 교육에 참여한 이유는 다양하다. 교육에 참여하시는 어르신들 모두가 자기표현을 하지만 영화를 통해서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싶고 그걸 통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어르신도 있고 영화작업을 하는 거 자체를 즐기시는 어르신도 있다.
교육이 없어도 자율적으로 영상작업을 하고 그렇게 탄생한 작품을 통해 사회적으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고 그 과정을 통해 변화의 지점들을 포착하고 싶은 것이 모든 미디어교사들과 기획자들의 바람일 것이다. 그러나 교육에 참여하는 어르신들이 교육에 의미부여하는 정도는 다양한 수준을 가진다. 어떤 어르신은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서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어르신도 계시고 또 어떤 어르신은 그저 취미생활의 일부분일 뿐이다. 나는 교육을 진행하면서 그저 촬영하고 편집하는 걸 즐기시는 어르신들에게 더 좋은 작품을 만들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표현하는 내용보다 그 활동 자체가 더 소중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어르신들이 영화제작에 ‘목숨’을 거신다. 식사 준비를 하다가 문득 편집수정 할 부분이 생각나서 편집을 하다가 냄비를 여러 개 태워버린 어르신도 있다. 어떤 어르신은 이번 교육만 하고 다시는 영화작업을 안한다고 다짐을 하면서 매년 교육에 참여하시는 어르신들이 있다. 그 다양한 이유들이 기획자나 교사의 바람과 맞지 않을 지라도 교육에 참여한 어르신들에게는 나름의 삶의 이유이다.
나는 왜 어르신들을 카메라를 닮으려고 했을까?
수년째 노인 미디어교육에 참여했다. 교육이 끝날 때 상영회를 진행하면 나의 안타까움은 커져만 간다. 노인복지센터 강당에서 진행되는 상영회에는 수많은 어르신들이 참석한다. 하지만 영화를 관심 있게 보고 감동을 느끼는 건 교육에 참여했던 어르신들과 교사들, 복지사들이 대부분이다. 교육에 참여하지 않은 어르신들과 일반인들은 영화에 시큰둥한 반응뿐이었다. 어르신들의 작품은 대부분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높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영화와 관련이 없는 어르신들에게는 지루한 작품일 뿐이지만, 어르신들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과 어르신들의 개인사를 알고 있는 교사들에게는 큰 감동이 전해지곤 한다. 이러한 감동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 이번 다큐작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다.
▲ <욕망은 늙지 않는다>(나두경|2011)의 한 장면 |
“욕망은 늙지 않는다.” 이 선언적인 문장은 필자가 2011년 현재 제작하고 있는 다큐멘터리의 제목이다. 노인 미디어교육에 몇 년 동안 참여하면서 나는 ‘욕망은 늙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징글징글(?)하게 깨달았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노인 교육에 참여해본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알 것이다.
좌충우돌 제작기-연출자와 교사사이에 방황하다
나는 노인 미디어교육에 참여하시는 어르신들을 기록하면서 이 징글징글(?)한 욕망을 담아보려고 했다. 촬영 초반만 해도 나는 자신감에 차 있었고, 쉽게 작업이 진행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판이었다. 벌써 몇 년째 나와 교육을 같이 했던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나는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어르신들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어르신들의 일상을 찍으려고 시도했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너무 꺼려하시는 어르신들도 있었고, 내밀한 얘기를 잘 하려고 하시지도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교육이 진행되면서 나는 연출자의 정체성을 서서히 잊어버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노인 미디어교육은 거의 일대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참여하신 어르신들의 수준이 다양하기도 하고 컴퓨터를 다루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수업은 거의 질의응답으로 진행된다. 컴퓨터는 자꾸 노망을 부리는데(어르신의 표현이다) 교사가 오면 신기하게 말을 잘 듣기 때문에(이것도 어르신의 표현이다) 교사들은 문제를 해결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더욱이 이번 교육은 팀으로 작업을 했기 때문에 팀 간의 불화로 계속해서 발생했다. 내가 보기에 그 불화의 핵심은 이 팀별 작품제작에 얼만큼 헌신하냐 이다. 어떤 어르신은 팀원들이 좀 더 이번 작품에 시간을 투여하기를 바랐지만 다른 어르신들에게는 영화작업이 수많은 취미생활에 일부분이기에 그렇게 열정을 쏟으려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영화는 혼자 만드실 수 없는 것이기에 어르신들에게 용기를 부여하면서 그렇게 10개월간의 미디어교육은 끝이 났다. 교육은 끝이 났지만 이제 나에게 남은 과제는 영화를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분명 교육을 통해 나는 어떤 울림을 느꼈지만 그 울림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고 나에게 남은 건 해석되지 못한 수많은 이미지의 조각들이었다.
▲ <욕망은 늙지 않는다>(나두경|2011)의 한 장면 |
그래서 편집과정은 일종의 퍼즐의 조각들을 맞추는 과정이었다. 어르신들의 작품은 어르신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창문이었고 어르신들의 촬영모습과 반응들은 단서들이었으며 어르신들의 생애사 인터뷰는 이 단서들을 연결해주는 해석의 틀이었다.
나는 이번 영화를 제작하면서 인터뷰를 여러 번 시도했는데 인터뷰의 주요 방법론은 생애사였다. 나는 카메라를 걸어두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해 주세요.”라는 단 하나의 질문만을 던졌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처음에는 당황 하시다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시고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다. 얘기의 끝은 언제나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다”라고 끝나지만 이야기의 시작점은 다양하다. 예상과는 다르게 연대기 순서가 아닌 경우도 많았다. 이야기에는 수많은 점프컷들이 있었고 수많은 생략과 강조가 있었다. 내가 주목한 점은 그 생략과 강조의 지점들이었다. 사람은 자신의 생애를 서사로 구성하면서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고 그렇게 의미가 부여된 해석의 틀 속에서 현재적 삶을 해석한다. 그 해석의 틀은 지속적으로 변화하지만 그 해석의 틀은 오늘의 그 행위를 이해하는 하나의 준거점을 제시해준다. 나는 어르신들의 해석의 틀 그리고 숨기려하거나 강조하려했던 기억과 해석의 단편들이 어르신들의 작품 속에 녹아있음을 발견했다. 나는 그 과정을 통해 어르신들의 작품을 보다 깊게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 연결고리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다. “아 그게 이런 의미였구나. 왜 나는 그때 그걸 이해하지 못했을까?” 이제 조금 알겠다는 탄성과 어르신들도 많이 답답했을 거라는 후회를 반복적으로 겪으며 나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
작업실에 놀러 오시는 어르신들
이제 몇 명의 어르신들은 이번 영화를 촬영한 친구와 내가 사용하는 작업실을 이따금씩 방문하시곤 한다. 질문거리를 한 아름 씩 안고 본인 작업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시려고 오시는 것이다. 오실 때마다 미안하신지 맥주를 한 박스씩 사다주시고 가신다. “그러지 마시라고, 이러시면 부담스러워서 만나기 힘들다”고 해도 “사람 사이의 정이 어찌 그러나요?”라고 하시며 중국요리까지 시켜주시고 함께 고량주를 마시기도 한다. 교육이 끝나고 나서 어르신들과 나의 관계는 오히려 편안해졌다. 교사와 참여자가 아니라 이제는 언제든지 전화해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술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사이가 됐다. 80대 어르신과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몇이나 있을까? 영화작업이 끝나면 조만간 어르신들을 모시고 거나하게 파티를 해야겠다. □
[필자소개] 나두경(미디액트 미디어교육 교사, 다큐멘터리 감독)
2003년 <우리는 모두 이주노동자다>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영상작업을 시작했다. 2004년 다큐멘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