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0년|11월|이달의 노래]비정규직 철폐 연대가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 (2003년 김성만 글·곡)

                                                            민중가수  최 도 은


1절.
나의 손 높이 솟구쳐 차별철폐를 외친다
쓰러진 또 하나의 동지를 보듬어 안고
한걸음 다시 한걸음 철폐연대에 발맞춰
굳세게 더 강하게 당차게 나선다
가자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단결 투쟁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꼭 찾아오리라

2절.
나서라 하청노동자 탄압착취를 뚫고서
굴욕과 상대적인 박탈감 장벽을 넘어
눈물과 설움 떨치고 반쪽 희망을 찾아서
굳세게 더 강하게 당차게 나선다
가자 노동자의 연대를 위해 해방 투쟁으로
동지여 동지여 꼭 찾아오리라
(동지여 동지여 꼭 찾아오리라 비정규직 철폐! 투쟁)


오늘 우리들의 현실을 대표하는 노동가요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비정규직 철폐연대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노래는 2003년 노동가수 김성만씨가 만들었습니다. 서른이 넘어서부터는 나이 먹는 걸 잊어 먹었다며 한사코 자신의 나이를 숨기는 김성만씨는 노동자 출신 민중가수입니다. 70년대 가난한 민중의 아이들은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 교복이 아닌 몸에 맞지도 않는 땀에 쩔은 작업복을 입고 제 밥벌이를 하러 공장으로 가야 했습니다. 김성만씨의 성장 과정도 가난한 집의 아들로서 그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어려서는 왕십리 판자촌에 살면서 신문배달을 하였고, 16살 때 인천에 있는 삼익악기 피아노 조각반에서 기름밥을 먹기 시작하여 이 공장 저 공장을 떠돌며 자신의 밥값을 벌어야 했다고 합니다.

민중가수 김성만 (사진=프레시안) 피아노 조각 일을 시작으로 플라스틱 사출, 가구목수 등 여러 공장을 전전하던 김성만씨는 가구공장에 다니던 어느 날 커팅 작업을 하다가 오른손 네째 손가락이 조금 잘리는 사고를 당했는데, 산재 보상도 받지 못하고 회사에서 쫓겨났다 합니다. 산재보상 한 푼 받지 못하고 쫓겨난 후 김성만씨는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노동부로 가서 일주일을 싸웠다고 합니다. 혼자의 힘이었지만 일주일을 노동부에 가서 싸운 끝에 산재보상금 26만원을 받았는데 그 돈으로 외상값도 갚고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했는데, 그 중에 남은 돈으로 기타를 하나 사게 되었다 합니다. 김성만씨의 말에 의하면 아마도 어릴적 피아노 공장에서 일을 한 게 인연이 된 것 같다 하십니다. 기타 하나를 구한 김성만씨는 우연히 국민학교 동창을 통해 성남지역의 노동야학을 다니게 되었고, 그 친구를 통해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합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자취방을 오가면서 민중가요 테잎을 듣게 되었고 그를 통해 노동가요를 알게 되었고, 이후 민중가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작곡 공부도 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조합들이 성남지역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 노래로 연대하는 문화노동자로 활동하는 힘이 되었고, 이후 1990년 성남지역 노동자 노래패 ‘다영글’을 만드는 계기로까지 발전하였다 합니다.

김성만씨는 1991년 <불패의 전사들>이라는 노래로 ‘전노협’ 노동가요공모전에서 대상을 받는 등 노동문화운동가로서 맹렬히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92∼3년을 거치면서 ‘다영글’의 활동이 중단되고, 김성만씨의 운동과 삶 그리고 생계의 터전이었던 주점 ‘다영글’이 문을 닫으면서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공연 활동을 중단하고 이천지역으로 이주하여 주업으로는 아동복 장사를 하면서 민노총 이천지구협의회에서 비상근으로 문화부장 일을 했습니다.

‘다영글’활동을 접고 10여년이 흐른 2003년 김성만씨는 ‘불안전노동철폐연대’에서 진행한 비정규직 음반 제작 작업에 함께 하게 되면서 다시금 전업가수로 문화운동에 나서게 됩니다. 그가 만든 노래 ‘비정규직철폐연대가’는 집회 문건을 보면서 만들었다 하는데, 2003년의 투쟁이 이 노래를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현대중공업 비정규직노조, 현대자동차 아산 비정규직,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투쟁 등 전국 곳곳에서 터져 나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배달호 열사의 분신으로부터, 이현중 열사, 이해남 열사, 이용석 열사, 김주익 열사, 곽재규 열사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투쟁 속에서 ‘비정규직철폐연대가’는 살아있는 투쟁의 노래로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10년 이라는 공백 기간이 길다면 길 수 있을텐데, 김성만씨는 특유의 뚝심과 고집으로 지난 7년여를 힘들게 투쟁하는 사업장 노동자들과의 연대에 앞장섰습니다. 김성만씨의 열성적인 활동의 결과로 혜화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2008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김성만 동지를 그 해의 <아름다운 청년 이용석 노동자상> 수상자로 천거하는데 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오늘 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1,400만 전체 노동자의 60%인 850만에 이르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의 문제는 남의 문제가 아니고 너와 나를 가릴 것 없이 우리들 전체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는 우리사회의 불평등을 해결하는 주요한 뇌관이 되었습니다.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되어 무려 1,895일이라는 긴 시간동안 목숨을 건 농성을 전개한 기륭의 노동자들과2003년 10월 26일,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분신한 이용석 열사의 영결실 장면 (사진=뉴시스) 구사대 용역깡패의 폭력과 고소고발에 맞서 5년여 동안 기아자동차의 원청 사용자성인정과 원직복직을 요구하며 투쟁해온 동희오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 철폐연대가’는 지난 5∼6년간의 싸움 속에서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나팔소리였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노동자들에게 이 노래가 함께할 지 그 끝을 알기 어려운 것이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인 것 같습니다.

2003년 10월 서울의 종묘공원에서 ‘전국 비정규직 노동자대회’가 처음으로 조직되어 열린 의미 깊은 날 행사 진행 일정상 이 노래가 함께 배우는 노래로 설정 되어 민중가수 류금신씨의 진행으로 집회에 참석한 전체 대오에게 알려졌는데, 당일 집회가 끝나갈 무렵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조합 광주지역본부장 이용석 동지가 온몸에 불길을 뒤집어 쓴 고통속에서 “비정규직 철폐하라! 아악∼ 아∼”하고 외치던 절규가 이 노래에 묻어 있는 시대정신이 아닐까 생각 해 봅니다. 지금 이 시간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절한 외침과 힘겨운 투쟁을 생각하며 <일터> 11월의 노래로 ‘비정규직철폐연대가’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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