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정체성을 올곧게 세워
생기와 역동성을 찾아야 할 때.”
▸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 현미향 동지
▸ 인터뷰 & 정리 _ 한노보연 선전위원 타래
현미향 동지는 말씨가 느리다. 말투는 콩비지처럼 담백하다. 그러나 듣고 있으면 결코 편안하지만은 않은 주제인데도 곱게 갈려나와 차분차분 진국으로 가라앉는 얘기를 편안히 귀 기울이게 된다. 하나도 놓칠 게 없다. 깊은 고민이 스물스물 밀려 나와 어느 새 수북이 쌓인다. 현미향 동지는 부지런히 맷돌을 돌리는 사람 같다. 콩 한 알 그냥 흘리지 않는 섬세함과 진중함, 그리고 끈기의 활동가.
얼마 전 농성을 푼 현대자동차 비정규직투쟁의 가족대책위를 맡아 혹한 속에서 울고, 웃고, 구르고 한 터라 지금 갑작스럽게 돌아온 일상에 적응이 안 돼 ‘좀 몽롱한’ 상태라고 한다.
그래도 안경너머 반짝이는 눈이 뭔가 듬뿍 기운을 얻은 듯하다.
일터 독자들에게 간단한 소개 부탁드려요.
울산 산재추방운동연합은 99년 준비위를 거쳐 2000년 1월 정식출범을 하게 되었고 준비위 시절지금까지 12년차 활동을 해오고 있어요. 울산산재 추방운동연합이 생기기 전에는 울산에 이런 단체도 없었고 민주노총 차원에서도 노안활동이 잘 안되고 있었는데 마창지역 금속노조 조합원 활동을 하던 당시 알게 된 마창거제 산재 추방운동연합의 이은주 동지가 울산에서도 이런 활동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받아 상근을 시작한 게 벌써 12년이 되었네요.
마창지역 금속노조 조합원 활동이요?
창원공단 인근에 차룡단지라고 있어요. 차룡단지는 작은 공장들이 상당히 많이 모여 있는데 주로 전자조립, 기계가공 이런 업종들로, 한 사업장에 10명부터 100 명 정도 되는 규모였구요. 한 사업장에 노조가 생길 수 있는 여건이 안 되었죠. 만들었다하면 깨지고... 나는 삼성 하청 카메라공장에 들어갔는데 같이 일하던 동료가 해고되면서 그걸로 ‘작은공장모임’이라는 곳에 상담하게 됐는데 그걸 계기로 조합원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먼 타지(제주도)에서 차룡단지로 들어와 조합원 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운동이 무너지니, 마니 그럴 때였어요. 그때가 소련이 망하고 사람들이 짐 싸고 떠날 때였는데 세상이 변했다고 떠나가더라고. 근데 난 별로 세상이 변한 거 같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혼자서 끙끙대다가 ‘노동현장에서 생활을 하면서 다시 생각해보지 뭐.’ 그러면서 공장에 취업하게 된 거죠. 그러다 일하던 동료가 회식에서 술 많이 마시고 다음 날 하루 결근했다고 해고 되었어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작은공장모임’ 사람들과 계속 만나게 됐고 작은공장모임은 5년 동안 노조설립 준비를 했고 그러다가 정식노조를 출범을 할 때 조합원으로 가입을 했죠.
마창지역 금속노조활동을 하던 당시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면?
회사에서 내가 노조에 가입되어 있는 거랑 자꾸 근로기준법 준수 이런 얘기를 하는 게 거슬리니까 저에게 사무실 대기를 시키더군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하루종일 있는 일이었죠.그때 지역에 금속 연맹 소속 노조들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사무실 대기에 대해 부당하다고 팩스를 노동조합별로 돌아가면서 넣은 거죠. 우리 지역 노조가 열악하니까 큰 노조에서 지지 투쟁을 해준 건데 여기가 삼성 하청이다보니-그 당시엔 물량보고 등 모든 업무가 팩스로 이뤄지던 시절이었거든- 집단 팩스로 사무실에서 업무를 못 보는 거예요. 그래서 5일 만에 복귀했죠. 그 때 연대해준 것이 굉장히 고마웠어요.
또 하루는 사장 부인이 나타나더니 엄청 욕을 하더군요. 쌍욕. 자기네 회사 들어 와서 노조활동 하고 그런다면서, 하여튼 듣도 보도 못한, 내가 태어나서 세상에서 욕이 이렇게 많은지 첨 알았는데 그래서 기분이 나빠져서 “나한테 욕하면 똑같이 당신한테 욕할테니까 욕하지 마라.” 그랬거든. 근데 무시하고 나한테 계속 욕을 하더라고. 그래서 똑같이 따라서 욕을 했죠. 그랬더니 사장 부인이 부글부글 하다가 쓰러지고 실려 갔어요 그 후로는 사무실에 안 나타나더군요.
그리고 작은 공장 모임에 상담하러 갔다가 남편(서쌍용 동지)을 첨 만났어. 아주 성실하다는 인상을 받았죠. 뭐든 열심히 하고 솔선수범하는 모습, 혼자 담배꽁초도 다 줍고...그 땐 그런 인상을 받았는데 살아보니까 꼭 그렇진 않더라구.
그렇다면 노안활동은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으로 첨 시작한 것인가요?
그렇죠. 그 전에는 노안에 대한 깊은 고민은 없었어요. 하나도 모르는 상태였죠. 금속노조 조합원 활동 하다가 울산에 왔을 때도 1년 반 동안 학습지 교사를 했구요. 산추련 첨에 시작할 때 어려움을 많이 겪었어요. 민주노총 울산본부에 책상 하나 두고 민주노총 울산본부 산안부도 함께 담당하는 조건으로 상근을 시작했는데 출근한 첫날부터 상담전화가 왔어요. 요추부 염좌 상담이었는데 병명도 잘 모르겠고 어떻게 처리하는 지도 몰라서 일단 연락처 받고 마창 산추련에 물어서 다시 상담해주고 다른지역에서 활동하는 동지들에게 물어보고 부딪히고 배우면서 알게 되었고 자리 잡는데 오래 걸렸죠.
지금은 산재상담을 많이 하시는 것으로 아는데...
울산 산추련 출범하고 지금까지 산재상담을, 전화상담을 제외한 방문상담만을 기준으로 했을 때 1년에 100명 이상, 아주 많은 해에는 250 명 정도 해왔어요. 상담을 하다보면은 각 사업장 별로 사업주의 태도,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는 노동조합활동, 그리고 산재 노동자들의 생각, 근로복지공단의 행정처리 태도를 다 읽을 수가 있어요. 그런 과정에서 산재보험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고 그러다보니 교육에 있어서도 산재보험과 관련된 교육이 많이 차지하고 있죠.
울산 산재추방운동연합은 어떻게 구성되어 운영되는 단체인가요?
회원으로 운영되는데 개인회원이 있고 노조 회원이 있어요. 전현직 노안활동가들이 개인회원으로 많이 가입해있고 우리가 이제 12년 차 되니까 그동안 활동하면서 다양한 활동이나 투쟁으로 만나게 된 동지들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고요.
노조회원은 99년 당시 산추련을 만들기 위해 준비했던 분들이 소속되어 있던 노조들이 가입이 돼 있고 예를 들면 현대자동차 지부, 지회 이런 식으로 열세 개 노조가 가입 돼 있고.. 폐업을 하거나 하지 않으면 보통은 인수인계가 되어서 회원으로 유지가 되죠.
노조회원들 같은 경우는 주로 교류는 노안 교육, 산재상담, 산재 실무지원, 노안 현안에 대해서 의논하고 그렇게 함께 활동을 하는데 아무래도 젤 많은 건 노조교육과 산재상담이고 조합원 안전교육 이런 것도 같이 기획하고 직접 우리가 교육을 담당하는 경우도 있어요.
노조회원의 경우 계속해서 회원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에 문제는 없나요?
현대 중공업 같은 경우는 산추련이 만들어 지는 데 많은 지원을 했어요. 2004년에 박일수 열사가 비정규직이다 보니까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의 산재 은폐에 대해서 많이 폭로를 했었죠. “현대 중공업이 죽음의 공장”이라고 계속 문제제기하고... 그 투쟁 하고 나서 현대중공업이 산추련을 탈퇴했죠. 현중노조가 그런 것처럼 미포조선 같은 경우도 이홍우 동지 대책위에서 활동하고 나서 우리와의 관계가 단절됐고... 그런 문제 들어가면 노조와 단절되는 경우도 있죠.
비정규직의 건강권문제는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의 건강권 쟁취를 위한 방법이 없을까요?
일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기 조직을 갖는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조합을 통해서 건강권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젤 좋은 방법인거 같고 실제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상담이 증가하게 된 계기도 04년, 05년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이 만들어 지면서인데 그런 것이 상당히 중요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요.
울산 산재추방운동연합의 현안 활동은 무엇인가요?
작년 하반기부터 지금까지 주요한 고민은 산재보험개혁문제 고민을 하고 있어요. 민주노총이 2010년 상반기에 산재보험개혁 관련해서 노동자 건강권 쟁취투쟁 권역별 공대위구성을 제안했는데 이에 부산 울산 경남이 모여 권역별 공대위를 구성해 참여를 하고 있고요, 또 하나는 작년하반기에 국정감사에서 2009~10년 연달아서 쟁점이 된 업무상 질병판정위원회 문제와 관련한 것인데 노동부하고 근로복지 공단에서 제출한 업무상 질판위에 개선 방안 즉 ‘통합운영안’에 대한 대응활동인데요, 민주노총과 전국의 노안단체들이 모여 산재보험개혁 대책위를 구성했고 거기에 참여하고 있어요.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여성노동자의 건강권 관련 인식과 참여정도는 어떤가요?
울산지역에 의자캠페인을 공동으로 진행했던 연대단위가 있는데 의자캠페인이 끝나고 ‘이 상태로 해산하는 것은 아깝다, 여성 노동자들의 문제를 지역에서 공동대응하자.’ 이렇게 의자캠페인 단위들이 해산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울산여성노동연대인데 2010년에 울산지역에서 여성노동자, 절반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했었죠. 건강권 관련해서도 몇 가지 조사를 했어요. 대부분이 건강권에 있어서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대답했고 반 정도가 산재의 경험이 있는데 산재신청을 한 경우는 10%도 되지 않더군요.
또 산추련이 참여하고 있는 것 중에 ‘상담소 연석회의’-울산지역에서 노동상담을 하는 단위 5개 단체가 연대사업을 공동으로 하는데 이주노동자 관련단체, 비정규직 관련단체도 있고 우리 같은 산재문제와 관련한 단체도 있어요. 상담소 연석회의를 4년 째 같이 하면서 실태를 공유하고 공동 대응책을왼쪽에서 세 번째가 현미향 동지(사진=울산노동뉴스) 마련하고 있어요. 거기 참여해 주목해서 보는 것은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여성노동자들의 건강권 실태에 대해서 접하게 되고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심각하고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해서, 여성노동자 문제는 여성노동연대를 통해서 이주노동자는 지역 상담단체 노동자 연석회의를 통해서 접하게 되는 상황이고 거기 맞춰서 건강권 문제는 우리가 지원을 하거나 같이 대응을 하고 있어요.
울산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대공장과 강성 노조 등 노동자 의식에 있어 운동적 여건이 좋지않은가요?
노조 조직력이 탄탄하고 노안활동의 경험들이 쌓인 지회 같은 경우, 단협이나 법적으로 처리하는 부분 관련해서는 기본적인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요. 그런데 활동을 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 같고...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여성노동자의 경우, 법은 멀고 법적 기준이나 제도들이 당사자에겐 아무런 영향을 못 미치는.. 전체적으로 지역에서 노안활동에 대해 얘기를 하자면 많이 정체되어 있는 것 같아요. 활동들을 끌어갈 수 있는 단위들은 정규직노조인데 시스템이나 이런 건 잘 갖추어졌지만 노안활동은 좀 정체되어 있다는 생각.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처지들이 너무 열악해서 수시로 짤리고 임금조건, 작업환경도 워낙 열악하고 탄압도 만만치 않고... 이런 상황에서 건강권 문제들이 쟁점이 되지 않는 그런 상태고 비정규직 노조가 있는 곳에서도 노안 사업이 일상적으로 되는 곳이 없는 것 같아요. 그나마 중대재해나 사망자가 생겼을 때 대응활동이 이뤄지지만 예방을 위한 일상적 활동은 찾아보기 어렵죠.
이렇게 노안활동이 정체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무기력한 느낌이 든 것은 2008년 7월에 산재보법 개정되고 시행이 된 후에 그 부분에 대해 데이터화가 안 되고 2010년 근골격계 유해요인조사 기간에 자기 판단이나 고민을 쥐고 헤쳐나가는 사업장이 드물었던 점에서요. 노동자들의 자기 주도적으로 일상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는데도 사측이 제시하는 대로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노안활동가들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아요. 노동운동이 많이 침체되어 있고 자본가와의 대립에서 자신감뿐만 아니라 노동자로서 자기방향, 자기정체성이 많이 허물어진 것이 원인이 될 수 있겠죠. 80년대 노동자 대투쟁 때는 노동자의 방향이 뚜렷했는데 현재는 노동자들이 자기의 방향이 분명하지 않은 게, 한 번 있었던 것이 무너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이라 그런 것 같고 시간이 필요하다고 봐요. 다시 앞으로 크게 희망을 찾기 위한 모색과정에서 정체나 침체, 추락하는 것 같은 느낌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고 극복해 가야겠죠.
어떤 것이 이런 무기력한 상태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특정 선전, 교육 산재실무 역량 보다는 ‘우리 사업장에서 어떤 문제를 다룰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조합원과 어떻게 소통하고 해결점을 찾아서 쟁취를 해 나갈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한 부분들을 고민하면서 가는 활동모습들 이런 것들이 고민이 많이 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투쟁이나 기억에 남는 투쟁을 꼽아본다면?
2002년도에 sk정유에서 8년간 일하다가 림프암으로 서른다섯에 사망한 노동자가 있었죠. 유족들이 sk정문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했는데 132일만에 타결을 봤던 일이 기억에 남아요. sk가 석유 정제 정유업을 하니까 발암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았는데 돌아가신 분도 벤젠을 취급했던 거죠. 당시만 해도 림프암이 산재로 인정을 받은 것은 석탄노동자 딱 한 건뿐이었죠. 산업의학과를 찾아갔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라고. 부인은 “고인이 너무나 건강했고 이건 직업병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 믿음 하나로 싸움을 시작한 거죠. 그때 노동자 건강권 사수를 위한 공동대책위가 구성되고 지역 차원에서 함께 하게 되었는데 역학 조사를 요구해서 이뤄졌고, 노동자 제보사업을 통해 30 명의 직업병 피해자와 작업조건에 대한 제보를 받았고 이것을 모아 4개월 동안 투쟁을 했어요. 그렇게 역학조사를 하고나서 직업병 심의위에서 직업병 인정하고 sk정유는 유족에게 사과를 하고 보상을 한 거죠. 그 투쟁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고인의 부인이 나랑 동갑인데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이 인상적이었어요.
또 화학업종의 심각한 문제에 대한 고민들을 구체적으로 하는 계기가 되었고 투쟁을 통해sk노조의 산업안전부가 상당히 활성화 되었고 건강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어요. 그 전에는 백혈병에 걸린 28명 중 산재 신청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고인이 최초로 산재 신청을 한 사람이었죠.
끝으로 새해 소망이 있다면?
나무가 아닌 숲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좀 까칠한 사람이 아니었나 스스로 그런 생각이 드는데 좀 기댈 수도 있고 다양한 걸 품을 수도 있고...좀 넉넉해지고 싶어요.
“인터뷰 끝났으면 이제 타래 동지 얘기도 좀 들어보죠!” 바쁘다는 핑계로 황급히 나왔지만 언제가 밤새도록 맷돌을 돌리며 구수하게 풀어낼 이야기들이 한 가득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