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1년 5월- 노안활동가에게 듣는다] “산업재해는 정부에게 구걸할 일이 아니죠”

“산업재해는
정부에게 구걸할 일이 아니죠”

▶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 대표 박영일
▶ 인터뷰, 정리 _ 선전위원 푸우씨

인터뷰 일정을 잡을 때마다 노안활동가들이 무척이나 바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이하 산재노협) 대표 박영일 동지와 인터뷰 시간을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애초에 잡았던 약속이 일정중복으로 취소되기를 몇 번, 결국 약속을 잡고 방문한 사무실에서도 안정적인 인터뷰를 하기 어려웠다. 우여곡절 끝에 춘천에서 진행되고 있는 반올림 피해자 가족모임에 함께 내려가기로 결정한 후, 차안에서 어렵사리 이야기를 나눴다.

산재노협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해주세요. 저희 조직은 산재를 경험한 사람들, 산재 노동자들이 조직을 구성했어요. 87년부터 선배들이 산업재해 문제와 관련해서 투쟁을 시작했는데, 당시 선배들이 토마스 신부님을 통해서 노동법과 근기법을 공부하면서, 더 이상 산재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것을 계기로 산업재해 문제를 사회에 적극적으로 알리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산재에 대해서 더 많이 공부하게 되면서, 권리를 찾기 위해 당사자 조직을 결성하게 됐고요. 선배들이 산재노동자를 만나기 위해 병원방문을 시작하면서 당사자들을 모아낸 것이 조직결성에 큰 힘이 됐습니다. 89년에 2개의 산재노동자조직이 (산재노동자연맹, 산재노동자연합회) 뜻을 모아 단일조직으로 통합하면서 산재노협을 결성하게 됐어요. 그 이후에 꾸준히 해오는 병원방문을 통해서 산재노동자들의 고충을 상담하고, 치료받을 권리, 보상받을 권리를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고, 당시에 모였던 형님들이 지금까지 산재노협의 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전국에 산업재해 관련 당사자 조직들이 많이 있는데, 그 조직들과 산재노협의 차이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그 조직들도 산재노동자들, 당사자들이 모였다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는데요. 다만, 차이라고 한다면, 저희는 말 그대로 산재를 당한 노동자가 직접적으로 자신들이 누려야 할 권리를 찾기 위해서, 음…….그러니까 제대로 치료받고, 보상받을 권리를 위해서 정부에 책임을 요구하고, 근로복지공단의 횡포에 대해 맞서고…….뭐 이런 것들을 주요한 활동으로 하고 있는 것이죠. 산재노동자들의 당연한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서 상담도 하고, 공단 항의방문도 진행하구요. 그런데 저희와 뜻을 같이 하는 노안단체들 이외에는 산재노동자들이 상담을 하거나, 최초요양 신청서를 작성하는 과정부터 노동자들에게 비용을 요구한다고 하더라고요. 저희는 무료로 상담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돈을 지불하게 하는 것이 다른 차이 중에 하나일수 있죠.

산업재해 당사자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보탬이 되는 측면에서는 다르지 않지만, 그것에 대해서 일정한 대가를 받고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라고 보면 될까요?
실질적으로 우리 산재노동자들도 당연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회보험인 산재보험이 있기 때문에, 그에 따라 당연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기 위해서는 현행법에 따라 제대로 치료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것에서 멈추는 게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래서 산재법 개악시도에 맞서 싸워야 하고, 현행 산재법의 잘못된 부분에 맞서 투쟁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는 거죠.
그런데 사실 다른 산재노동자 단체들은 근로복지공단, 정부와의 대응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지 않아요. 오히려 산재노동자들의 피해에 대해서 공단과의 타협이나, 관계를 적절히 활용해 도움을 받으려는 태도들이 많다고 보여요. 재해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보장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제도 자체를 바로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그런 부분들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산재노협은 산재보험이 그 취지에 맞게 제대로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산재당사자들의 재활, 요양, 치료, 현장복귀까지 제대로 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으로 근로복지공단과 정부가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것을 중심에 두고 있다고 보시면 될 거에요. 특히 산업재해 보상에 대해서는 정부를 만나서 구걸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박영일 동지가 산재노협에서 일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당사자라고 해도 산재노협에서 일하기로 마음먹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산재노협을 알게 된 것은 산재를 당하고 난 이후인데요. 제가 98년도 4월17일 오전9시57분에 산재를 당했어요.(그는 손가락 절단사고를 당했다.) 당시에는 제 손의 상태도 제대로 몰랐고, 산업재해인지도 몰랐어요. 기계에 다쳤다는 생각만 했고……. 그렇게 병원에 갔는데. 병원에서 수술을 한때 산재보험이 적용되는지, 산재보상이 되는지 안 알려줬고, 저도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죠. 그런데 우연히 그때 산재노협 동지들이 병원방문을 왔을 때 만나서 상담을 하게 됐어요. 그렇게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래서 최초요양신청서도 수정하게 됐어요. 당시 저에게 알려줬던 부분이 알고 보면 굉장히 간단한 부분일수도 있지만, 산재를 당한 당사자 동료들이 병원방문을 하면서 저에게 알려주고 깨우쳐 준 부분들 때문에 친해지게 된 거죠.
그렇게 친해진 이후에 산재노협 사무실에 방문하게 됐는데, 전 사실 제가 제일 많이 다친 줄 알았거든요. 근데 산재노협에 와보니 저보다 심한 분들이 많더라고요. 저는 손가락 절단 후에 대인기피증이 심했는데. 이런 저의 상태를 완화시켜준게 당시 산재노협이었어요. 너무 편하기도 했고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기는 하지만, 그분들이 꽤 오래된 경험을 가지고 있고, 밖에 나가서 자신의 상처에 대해서 감추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두려움 없이 사람들과 만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자신감을 얻게 됐어요. 그러면서 나처럼 모르는 사람, 병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너무 감사해 하는 것을 보면서 나 또한 이게 나만 알 것이 아니라. 나 역시도 이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회원으로 가입하게 됐고요. 선배들을 따라서 함께 병원방문을 했을 때 정말로 최초요양신청서가 너무나 쉬운 것인데. 그들에게는 몰랐기 때문에 너무나 어렵게만 느끼고, 장벽이었을 것들에 대해서 너무나 고마워하는 모습들을 봤을 때. 너무나 감사하고 너무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새삼 느끼게 됐어요. 그렇게 같이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보람이 커서 산재노협에 있게 된 것 같아요.

박영일 동지가 산재를 당했을 때 산재노협이 굉장히 도움을 주었고, 산재노협의 활동이 재해 당사자들에게 필요한 활동이고, 그것 자체가 보람된 일이라고 느껴서 회원으로 가입하고, 병원상담을 다니게 되고. 산재노협의 성원이 됐다는 것이죠?
98년도에 산재를 당하고 병원에서 몇 개월 지내다가, 처음으로 7월에 산재노협에 방문했어요. 그때는 수술을 계속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과정이지만, 계속 병원생활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10월에 회원가입을 하게 됐죠.
병원에 있으면서 산재노협에서 하는 산재보상법 교육을 받았고, 병원에 있으면서 옆 사람에게 최초요양 신청서를 알려주고, 배운 것을 나누는 과정이 있었어요. 많은 분들이 저의 도움에 고마워하고, 전혀 몰랐던 것, 그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 그것을 함께 알아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 큰 기쁨, 보람으로 왔어요. 산재노협의 역할이, 나도 다쳐서 알게 됐지만, 너무 사회적으로 필요한 조직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돼서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고. 내가 도움을 받은 것처럼 도움을 주고, 받고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죠.

재해 노동자들의 현실적인 필요인 치료와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으니, 산재노협 같은 당사자조직이 근로복지공단이나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을 대신 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 같아요. 그래서 산재노협의 활동 중에 상담도 굉장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고요. 그런 부분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
사실 정부와 근로복지공단이 제대로 역할을 한다면, 산재노협 같은 조직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근본적으로는 산재가 발생하지 않아야 하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로 말이죠. 그래서 투쟁하고 있지만, 여전히 산재를 당하는 노동자들이 많고, 아직까지 재해노동자들에 대해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누군가 하지 않는다면, 끔찍한 상황이기 때문에 지속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상담 이외의 산재노협 활동에 대해서도 소개해 주세요.
병원방문과 상담 사업 이외에 우편물 발송(DM발송) 대행 사업을 자활공동체를 구성해서 하고 있어요. 자활공동체는 당장 현장에 복귀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생계와 자활이 필요하기 때문에 구성하게 됐고요. 이를 통해 장애를 얻게 된 노동자들의 자립생활에 대한 부분까지 정부가 책임질 수 있도록 요구해야 한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요즘은 일감도 많이 없기도 하고, 게다가 노조들이 주요 거래처인데, 노조들도 여러 가지로 탄압 때문에 재정적으로 힘든 상황이라서 자활공동체 운영에도 영향을 주는 상태에요. 참 어려워요.
또 어려운 점은 병원방문을 하면서 환자를 만나는 사업을 했던 분들이, 자활공동체 운영을 주요하게 하면서 일 때문에 병원방문 사업을 못하는 상황이라서 그것도 무거운 상황이죠. 산재노협의 주요 활동이 병원방문과 상담을 통해서 재해노동자를 조직하는 것이었는데 그것 자체가 쉽지 않은 구조가 되고 있으니까요.
산재노협에서 하는 것이 산재법, 산재라는 것에 대해서 알리고, 재해를 당한 당사자들을 돕고, 그런 산재노동자들이 재활의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게 원래 취지니까요. 어렵더라도 취지를 다시 잘 되새겨보도록 해야죠.

영일동지도 상담활동을 하셨나요? 초기에는 상담활동을 했어요.

상담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게 된 사례가 있다면, 어떤 걸까요? 대부분의 재해노동자들이 산재인지도 모르고, 공상처리를 하는 상황이 많았는데요. 제가 병원에서 만났던 한 분은 회사에서 300만원에 합의하자고 했던 분이었는데, 뻔히 장애가 남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치료비뿐만 아니라 이후의 생계까지 걱정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산재임을 알려드리고, 최초요양신청서 작성하는 부분부터 같이 하게 됐어요. 결국 장애연금도 받고, 적절한 보상을 받게 되셨는데요. 그 분이 한동안 고맙다고 꾸준히 산재노협에 연락을 취해오셨어요. 그런 분들이 기억에 많이 남네요.

산재노협이 서울과 인천에 구성되어 있잖아요. 확장하실 계획이나, 고민도 가지고 계실 것 같아요. 재해노동자들이 전국적으로 발생하는 조건에서, 산재노협 같은 조직이 사실 더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저도 지금은 장애등급 7급을 판정받은 장애인인데, 저도 아마도 공상으로 처리됐으면. 지금은 장애에 대한 보상을 떠나서, 마음 편하게 치료라도 받을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끔찍하죠. 처음에는 손을 절단하자고 했던 상황이고, 공상으로 합의해서 한 번에 끝냈으면 지금은 내 인생이 어떻게 변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죠.
산재노협 확장이나 조직적 전망에 대해서는 고민이 분명히 있어요. 대부분 산재노동자들이 상담을 하고 산재신청을 하고, 문제가 해결되면 관계도 자연히 멀어지거든요. 그런데 가장 안타깝고 아쉬운 것은 그분들과 함께 나눌 공간이 없다는 것이에요. 같이 교육도 받고, 울기도 하고, 쉴 수도 있는 공간을 만들면 좋겠다는 것에 대해서 산재노협 구성원 모두 공감하거든요. 아직 현실적으로, 물질적으로 너무나 힘든 부분이라서 시도도 못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더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건데요.
사실 저는 사고성 재해를 당하는 경우에 장애도 장애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우울증이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분들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니까. 그런 부분들을 완화해줄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비장애인들과 교류하고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는 계기가 되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고민만 있지, 만들지 못하니까. 아쉬움이 더 큰 것 같네요.

연대투쟁도 열심히 하고 계신데요. 반올림 활동도 열심히 하고 계시구요. 그런 것을 열심히 하게 되는 동력은 무엇일까요?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야 갰다는 생각이 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손에 장애가 있지만, 그래도 다리는 멀쩡하잖아요. 두 다리는 멀쩡하니까 얼마든지 도우러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반올림 같은 경우에는 그분들이 죽음에 내몰리고 있는 현실을 같이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죠. 내가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것 같아요. 어떤 목적의식이나, 그 투쟁에 대한 기대가 있다기 보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니까요. 가야겠다는 마음이 계속 생기니까 가는 거겠죠.

산재노협을 이끄는 박영일 동지와의 인터뷰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재해노동자들의 절박한 현실을 어느 누구보다 피부로 절감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박영일 동지의 다부진 체격만큼이나 그의 고민은 진지하고 무게가 있었다. 그것이 산재노협을 5년이나 이끌어오는 힘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산재노협 동지들이 가지고 있는 포부와 계획이 노안활동가들과 진지하게 다뤄지고, 나눠지면서 더욱 단단해 지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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