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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 반(反)빈곤투쟁에 나서는 장애인

:: 반빈곤통문

2006. 5.11. 8호


1.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인 문제

자본주의 이전 시대까지 장애인들은 가족노동 안에 통합되어 노동을 하였다. 공동생산과 공동분배하는 상황에서 신체 손상이나 어느 한 부분의 기능장애가 지금처럼 큰 문제로 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장애인의 노동은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전 사회와 비교했을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의 장애인 노동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장애인 억압의 핵심이다.

자본주의 가치법칙에 따라 노동자의 노동력은 그 가치대로 노동시장에서 임금과 교환된다. 이때 장애인 노동력은 전혀 팔리지 않거나, 노동력의 평균가치 이하로 팔리게 된다. 왜냐하면 장애인은 자본이 요구하는 생산성 · 효율성이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비표준적 노동을 제공하는 비표준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비표준 노동자로서 장애인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더라도 평균치 이하로 판매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해서라도 손상된 육체의 상품화를 실현하려고 한다.

장애인은 노동시장에서 자본의 분절화와 배제전략에 의해 사회적으로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낙인찍힌다. 이것은 반대로 장애인으로 하여금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노동시장에 자신의 노동력을 평균가치 이하라도 판매하도록 강제한다. 이것은 장애인 스스로 차별을 감내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자본은 장애노동자를 노동시장에서 배제하면서 동시에 노동시장에서 평균가치 이하로 노동력을 판매하게끔 한다. 이를 통해 자본은 장애인 노동력을 착취한다.


노동시장에서의 장애인 노동력은 가치대로 교환되기 때문에 ‘평등’한 교환인 것처럼 보여 지며, 이것은 장애인 노동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합리화시킨다. 자본주의 가치법칙에 따른 노동력 교환은 장애인에게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등 열악한 노동조건을 제공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2. 장애인 빈곤의 원인과 결과 - 차별과 배제 측면에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는 장애인을 장애인 수당 등으로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직면하게 되는 빈곤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자본에 의한 장애인의 손상된 육체의 상품화와 손상된 육체에 대한 낙인은 자본과 국가 그리고 사회로부터 장애인을 차별하고 배제하게끔 한다. 이러한 차별과 배제는 장애인 ‘빈곤’의 원인이다.

자본은 자신의 축적전략에 따라 노동자를 노동시장에서 퇴출, 즉 배제시킨다. 이러한 배제의 결과는 실업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업자 양산은 필연적이다. 이것은 장애인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 장애인실업의 원인은 최대한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에게 장애인이 생산적인 노동과 최대의 잉여가치 생산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원인 때문에 장애인실업률은 일반 실업률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 따라서 비표준적 노동을 제공하는 장애인은 최후의 고용, 최초의 해고 대상자가 될 수밖에 없다.

장애인은 자본이 요구하는 표준적인 육체를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노동에서 배제당하며, 이로 인해 생활수단을 임금으로 구매 · 소비할 수 없다. 노동시장에서 퇴출당한 장애인에게 노동시장은 더 이상 개인과 생활수단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장애인에게는 노동기회의 박탈 만큼이나 굶어죽을 자유도 하나의 필연이 된다. 생계를 위해 근로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장애인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사회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국가의 잔여적이고 시혜적인 복지에 기댈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장애인은 국가의 잔여적이고 시혜적인 복지마저도 제한적으로 받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자신을 위해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장애인을 노동시장에서 배제시킨다. 이러한 배제는 사회적 배제로 확장되어 나타난다. 사회적 배제는 노동권, 이동권, 교육권, 접근권 등의 사회적 제반권리에 대한 제한과 박탈이다.

장애인 문제는 자본주의사회의 모순 속에서 존재하는 노동기회의 박탈과 사회 일반에서의 차별과 배제가 장애인 문제의 모순을 규정하고 있고 그 근간에 작용하는 인신론적 거부감이 그러한 모순을 강화, 확대시키는 기반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차별과 배제는 제반권리의 제한과 박탈로 나타나고 있다. 장애인들이 생활하기 위해 필요한 권리인 노동권, 이동권 · 접근권, 교육권, 문화권 등을 보장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권리의 미보장으로 인하여 장애인의 빈곤한 삶은 확대 · 재생산되고 있다. 자본과 국가에 의해서 ‘빈곤한 것이 당연한 사람’으로서 여겨지고 임노동 체계의 착취로부터 배제당하고 있다. 이것이 현대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장애인들이 억압받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이다.


3. 빈곤에 저항하는 장애인들의 투쟁

이와 같은 빈곤한 장애인의 삶은 2000년부터 시작된 이동권쟁취투쟁과 올해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투쟁과 활동보조인 제도화 투쟁 그리고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투쟁 등의 대중투쟁을 불러왔다. 이러한 대중투쟁은 장애인 생활권쟁취 투쟁이며 그 자체가 생존권쟁취 투쟁이다. 즉, 빈곤에 저항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고 최옥란 열사의 죽음은 장애를 가진 여성(뇌병변 1급)의 빈곤한 삶을 온몸으로 저항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철저히 관철되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서 복지는 김대중 정부 때는 ‘생산적 복지’로 노무현 정부에서는 ‘참여복지’라는 잔여적이고 시혜적인 복지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성장이냐 분배이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사이에 우리나라는 무역액이 무려 5천억 달러로서 세계에서 12번째 무역국이 되었다. 반대로 사회적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신빈곤’이라는 말이 생길정도로 ‘빈곤’은 이제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닌 전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빈곤은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모습이다. 때문에 민중운동진영은 신자유주의를 분쇄하기위해 반(反)빈곤투쟁에 나서야 할 것이다.

‘새끼줄’에서는 반빈곤투쟁의 다양한 사례들을 새끼줄처럼 엮어나가면서 빈곤에 맞설수 있는 굵고 단단한 동아줄과 같은 흐름들을 만들어가는데 기여할 수 있는 내용들을 담아가려고 합니다.


애인이 한강대교를 넘다. 기어서....

27일 오후 2시, 서울의 중심인 한강대교에서 장애인들이 기어서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장애인 50여명은 전동휠체어에서 내려와 검은 아스팔트 도로를 온몸으로 기고 있었다.

왜 이들을 이 험난한 도로에서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었을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이하 전장연) 회원들은 활동보조인서비스제도화의 요구를 내걸고 지난달(4월) 20일부터 서울시청 앞에서 39일째 노숙농성을 벌여왔다. 그런데 서울시에서 돌아오는 답변은 “시기상조”다며, “법개정이후에 다시 검토해보겠다”등의 공식적인 거부의사를 밝힐 뿐이었던 것이다.

서울시는 노들섬에 오페라하우스를 만들겠다며 7천억 원을 쏟아 붇고, 장애인의 날 하루 행사비용으로 2억원을 쓸 수는 있어도, 중증장애인들의 활동보조인서비스제도화는 “시기상조”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전장연 회원들은 이 사회가 장애인을 얼마나 방치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스스로 기어서 한강대교를 건너, 노들섬으로 향하였던 것이다.

이 날의 투쟁은 6시간동안 진행이 되었는데, 이 와중에 3명의 장애동지들이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후송되는 상황도 발생하여 동지들의 비장함을 보여주었으며, 활동보조인서비스가 얼마나 이들에게 절실한지를, 또 현실에서 장애인들이 얼마나 비참한 현실에 직면해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었다.

이들은 결국 6시간동안 장애인의 속도로 한강대교를 기어서 노들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가 중천에 있을 때 시작된 투쟁은 해가 져서야 정리할 수 있었다.

장애인 동지들이 기어서 투쟁하는 동안 심각한 교통체증으로 욕을 하면서 지나가는 시민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불편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의 목소리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역사는 투쟁하는 자의 산물임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결국 서울시는 28일 밤에 전장연 동지들의 요구안을 전격 수용하였다. 투쟁이 승리한 것이다.





중증 장애인의 활동보조인서비스 제도화 투쟁을 위해 3월 20일부터 5월 1일까지 43일 동안 시청 앞 광장에서 노숙농성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활동보조서비스를 중증장애인들의 당연한 생존의 권리로써 인정받을 수 있을까? 중증의 장애인들의 삶의 실상들을 얼마나 알려 나갈 수 있을까? 내 삶의 각박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들을 했었다.

5~60 여명의 중증장애인들이 시청 앞에서 노숙농성을 하면서 아직 매서운 꽃샘추위와 칼바람 속에서 성치 않은 몸으로 노숙을 하면서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은 중증장애인의 일상생활을 하기 위한 기본적 권리 보장인 것이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때문에 일상생활을 못하고, 교육을 받지 못하고, 사람들과 격리되어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결국 경쟁사회 속에서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장애인이다. 그러므로 장애인은 빈곤할 수밖에 없고, 많은 장애인들이 빈곤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들 즉, 옷 입기, 식사하기, 화장실 가기, 외출하기 등의 일상생활과 가사를 도와주는 활동보조인서비스가 제도화 되어 있다면, 가족들은 장애인에 대한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활동보조인서비스로 장애인 스스로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로 긍정적이고 자신감 있는 생활을 하면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교육에 대해서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는 건물, 시설, 교통, 정보접근, 부대이용시설 등 환경의 변화와 교육시스템의 변화, 교사와 학생들의 인식개선, 교육내용의 차별화로 장애인 배우고자 욕구를 충족시키고, 이동·편의시설 사회 참여도를 높이고 장애인의 노동의 권리들을 고용정책에 반영해야만 장애인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장애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장애가 심할수록 혼자 자립해서 산다는 것은 꿈 꿀 수조차 없다.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중증장애인은 혼자서는 하루도 버티기 힘들기 때문에 장애인들은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고 그저 목숨 부지 하는 것이 전부인 것이다. 많은 중증장애인들은 가족이나 주변의 봉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이조차 없으면 시설에서 사회와 격리된 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다양한 사회적 지원과 정책들은 중증장애인의 생존의 문제이며, 권리의 문제이다. 이러한 사회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활동보조인의 이동권 교육권 등 다양한 지원만 있다면, 중증장애인도 비장애인처럼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외출도 하고 친구도 만나 극장에도 갈 수 있다. 더 이상 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 하고자 하는 일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 정부는 참여복지라는 미명하에 여전히 구태의연한 정책들을 바탕으로 쥐꼬리만큼의 예산으로 수많은 중증장애인을 요구를 외면하면서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정책과 지원은 장애인의 생존과 삶의 문제이기 때문에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또한 중증장애인들이 편안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제공되어야 한다. 이처럼 인권과 권리가 수반되는 정책들은 장애인의 빈곤 문제 해결에 꼭 필요한 부분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로 활동보조인 서비스 제도화 투쟁이 그러한 권리를 보장 받는 투쟁이었다.

5월 1일 서울시는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중증장애인의 권리로써 인정하며 제도화를 약속하고 그에 따른 실태조사와 서비스 파견 기준 판정을 마련을 위한 협의기구를 약속하였다. 이것은 장애인의 삶의 질을 바꾸는 사회 변혁적 투쟁에 승리인 것이다. 그러나 승리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서울시 투쟁이 시작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중앙정부와 지역 투쟁이 모두 이루어졌을 때야 진정한 권리로써 인정받는 것이다. 또한 활동보조인 서비스 투쟁뿐만 아니라. 소득보장, 주거. 고용 등 다양한 요구들을 통해서 사회를 변화 시킬 수 있는 것이다.


(양영희/민중복지연대, #양영희 회원은 현재 중랑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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