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향수, 누가 부추기나
‘명문고’
향수가 부활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명문고가 다시금
부활하고 있다. 최근 <조선일보>가 전국 고등학교의
서울대 입학생 배출현황을 ‘친절하게’ 일람해준 데 이어,
<중앙일보>는 “한국사회 파워엘리트 대해부”라는
기획보도를 통해 ‘파워엘리트’를 많이 배출한 고교와
대학의 순위를 매겨줬다. 이들의 주장은 역시 평준화가
문제 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평준화로 인해 전통 명문고의
서울대 합격생이 대폭 줄고, 서울대 합격생을 배출하는
고교가 다양해졌다는 것. <중앙일보>는 더 나아가
이런 현상을 두고 전통적인 학연(學緣)사회가 지고, 학력사회가
도래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즉
이들 언론이 명문고의 서울대 독점이 완화되고 있고, 이것이
학연사회의 퇴보라고 ‘아쉬워’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보도는 학교 서열화를 부추기면서 ‘어느 경로(학교)를
밟아야 지배 엘리트로 진입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일러주고 있는 셈이다. 또한 ‘평준화 제도가 명문고의
전통과 명예를 더럽혔으니 평준화 폐지 전선에 나서’도록
지배계층에게 촉구하는 한 통의 격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명문고는
진짜 저물었나
누군가
아쉬워하고 있는 대로 전통적인 명문고의 힘은 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서울대 합격생의 배출에서도, 지배계층간의 연줄에서도
그 비중이 예전만 못하다. 하지만 이는 학교교육의 대중화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다. 자본의 축적과정에서 급속히 팽창한
학교교육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교육기회를 모든 대중에게
부여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중고교 입시 폐지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평준화 정책은 실질적인 학교 평준화로
이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평준화 제도 하에서 틈새를 확보하려는
전략이 계속해서 확대되어 왔다. 즉 전통 명문고의 독점은
깨졌지만, 엘리트 코스는 오히려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
외고, 과학고 등의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 자율학교 등
다양한 학교제도를 만들어 지배계층의 탐욕을 실현시켜
주고 있다. <중앙일보>의 분석에 의하면 전통 명문고를
대체한 신흥 명문고는 특목고, 서울 강남의 학교, 지방의
비평준화 학교로 나타났다고 한다.
명문고는
정말 ‘명문’인가
일반적으로
명문고는 명문대학 입학생의 비율이 높은 고등학교를 가리킨다.
그리고 명문대학은 사회 지배계층으로 진입하는 졸업생의
비율이 높은 대학을 이른다. 결국 명문고는 명문대→지배계층
코스에 진입하는 첫 관문인 셈이다. 그렇다면 명문고 학생들은
왜 명문대 진학률이 높은 걸까? 명문대에 진학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수능, 내신, 논술 따위로 측정되는 학력(學力)이
높아야 한다. 그러면 명문고 학생들은 이 학력이 높다는
얘긴데, 명문고가 학생들의 학력을 높여주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인가? 결론을 얘기하자면 결코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학교가 학생들의 학력을 높여주는 데
있어서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오히려 학력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수준,
부모-자녀간 상호작용, 부모의 자녀에 대한 교육적 지원
등 학생의 개인배경과 이것이 학생의 포부수준과 수업태도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이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심지어 정부기관에서
나오고 있을 만큼 정부도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지만 일부
언론은 이 엄연한 현실을 애써 외면한다.
즉
명문고가 처음 입학한 학생들의 학력을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학력이 높을 수밖에 없는 ‘좋은 집안’ 아이들을
입학시켜 ‘명문’을 유지하는 것일 뿐이다. 학교의 노력이
아닌 오로지 학생개인의 ‘타고난 능력’에 따라 명문학교와
똥통학교로 갈라지는 것이다. 명문학교와 똥통학교의 양분화는
결국 명문학교에 보낼 수 있는 집안과 똥통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는 집안으로 양분될 것이고, 나아가 극단적인
불평등의 세습체제가 될 것이다. 지배계층이 호도하고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교육격차’는 소외지역에 명문학교가 없어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전국의 모든 학교를 명문학교로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명문학교를 세워주면서
‘너희 지역에도 서울대를 많이 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은 불평등의 모순을 은폐하고 대중들로 하여금 헛된 기대를
갖도록 기만하는 것이다.
보다
많은 평등을 누려야
누차
강조하지만, 지배계층에게 현행 고교평준화 제도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부를 자식들에게 대물림하는데 있어 걸림돌로
작용할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끊임없이 평준화 흠집내기에
집착하고 있고, 국가는 이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평준화
보완정책이랍시고 다양한 학교체제(특목고, 자립형사립고,
자율학교)를 통해 폐쇄적인 엘리트 코스를 마련해놓고 이를
더욱 확장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듯 명문고에 대한 향수는
현재 진행형이며, 일부 언론은 이를 더욱 자극하며 평준화체제를
위협하고 있다.
교육격차는
재정 일부를 확충한다고 해서, 명문학교를 설립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교육격차의 해소는 지배계층의 이기적인 탐욕을
막고, 보다 평등한 학교체제를 만들어가는 것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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