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의 월간지 현장에서 미래를

[114호]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지양

특집II: 노동운동 출구를 찾자(6)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지양

현장에서 미래를 제114호
만프레드 스트로벨


특집II/노동운동 출구를 찾자(6)


이 글은 독일의 고참 현장 활동가가 노동자 계급운동의 새로운 지평으로서 기존의 박제화된 투쟁, 구호만 요란하게 난무하는 관념적 투쟁들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 속에서부터 정면 돌파할 계급 내, 계급 간 연대,‘직접적 생산자들의 연대’를 제안하고 있는 글입니다. 노동운동의 역사와 노동자계급의 현재 상태가 우리와 많이 다르기 때문에 논의 내용이 다소 생소할 수 있고, 또한 정치경제학적 사유 속에서 구사되는 개념들 때문에 어려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출구를 찾아나가는 데에 유력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아 게재합니다. 노동자 계급운동의 미래를 고민하는 동지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 편집자 주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지양


만프레드 스트로벨 / 독일 비판적 노조활동가 모임. 번역: 송기철 연구원



* 이 글은 2005년 7월 15일 베를린 메링호프에서 개최되었던 강연문을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약간의 개인적 이력을 소개하면서 강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내 개인적인 발전과 관계된 것이고, 발전이야말로 오늘 주제의 중심적인 범주이기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지양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발전 가능한 것으로 사고하고 논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발전이 혁명적 행위로 전환되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발전을 고려하지 않고, 인지하지 않고, 추적할 수 없는 그러한 사고는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이 개관적인 관계의 발전이건, 개인적 집단적 주체성의 발전이건, 개념의 발전이건 간에 그렇습니다.

저는 3년 전에 정년퇴직한 63세의 연금생활자입니다. 1960년대 말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지만 중퇴를 하고 도로건설장, 가구공장, 달걀부화장, 인쇄공장, 그리고 배관 공장에서 임금노동자로 생계를 이어온 사람입니다. 제가 1975년부터 일했던 배관공장은 구 만네스만 재벌의 계열사로 사회민주당의 아성이었으며, 저는 이곳에서 노동조합의 대표, 그리고 마지막 3년간은 비 집권파의 대표로 직장평의회 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여러 가지 점에서 다양한 공장들에서 한 일들은 저의 개인적인 발전을 각인시켰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두 가지 핵심적인 측면만을 부각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첫 번째 것은 공장의 생산과정들에 대한 지식과 외부세계와의 이것들과의 관계, 즉 사회적 총노동과 개인적이지만 생산적인 소비의 영역들과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공장과 사회 사이의 관계들과 분리에 대해 제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다면, 총노동의 직접적인 사회적 조직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거나 거의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차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번째로 언급하고자 하는 측면은 정당마르크스주의와 국가마르크스주의와 저와의 관계입니다. 저는 초기에 레닌(과 그리고 트로츠키)의 전통 속에서 노동계급에 사회주의적 의식을 전파하고, 그들의 혁명적 이식을 “부여” 하고자 (이것은 전혀 역설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는 사명감에 충만해 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자체적인 판단에 따른) 마오주의자였습니다. 임금노동과 자본, 즉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화합할 수 없는 계급적 적대성에 대한 필연성과 착취자들을 없애고 무계급 사회의 실현을 위해 중앙에서 관리되는 경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이를 위해서는 폭력이 혁명에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본인이 경쟁관계에 있던 마오주의, 트로츠키주의 그리고 전통적인 공산주의 조직들과 그 선전대들의 활동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껴안고자 했던 혁명적 주체가 실제로는 자칭 대리주체의 대상에 불과했으며, 이들이 비록 자발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노동자들임을 인정하더라도, 자신들의 영향력을 위해 이들의 자발적인 행동을 통해 전통적인 대리자의 지배권을 무너뜨릴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라는 점은 쉽게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현장 동료들도 대부분 이점을 곧바로 감지했습니다. 외관상 낙후되어 있고, 개량주의에 물들어버린 노동자들이야말로 이들 분파들 모두 보다도 100배나 많은 현실감각과 역사의식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이야말로, 마오주의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스스로를 제아무리 사회제국주의와 관료주의와 구분 짓고 진정한 사회주의를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경험상 기껏해야 아무짝에 쓸모없고, 경찰에 의해서 통제되는 국가경제체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모험을 따르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현장 노동자들은 그와 같은 이유에서 계급투쟁에 대해도 상당히 실용적인 관계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본 측과, 때에 따라서는 총파업이란 형태를 통해 정부와도 진정으로 힘겨루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제 스스로 깨달아야 했던 것처럼, 개별 자본이든 총자본이든 자본이 파멸에 이르거나 탈주하거나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가 위험에 빠질 만큼 투쟁을 고조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반대했습니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더더구나 기존의 질서가 새롭고 더 나은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계급은 없을 것입니다. 임금노동자로서의 역할에 집착하는 것이 일상의 경험이나 극좌파가 아니었다면 노동자들이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돌이켜보건대, “공산주의 세계운동”의 몰락을 막고자 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 운동”은 하나의 에피소드이자 이와 같은 몰락의 징후 자체였으며, 정당사회주의와 국가사회주의 시대에 대한 짧은 송가였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이에 대해 미소 짓거나 웃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만심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앞으로 그 이유가 규명되어야 하겠지만, 정당과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100여 년간 노동운동을 이끌어온 지배적인 인식이었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잔존하고 있는 정당마르크주의의 핵심적인 요소들이 오늘날에도,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 사이에서도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임금노동과 자본의 적대성에서 혁명적이며, 해방을 갈구하는 의식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은 신화입니다. 또한 관념적인 것이 되어버린 전위주의도 정치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자신의 손을 더럽힐 수 있는 그러한 위험이 없는 전위주의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전위주의는 한편으로는 순수하게 부정적인 자본비판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예찬으로 표현되었을 뿐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예를 들어 설명하기 위해, 2003년 11월 “무계급사회를 추구하는 여성친구들”이 배포한 유인물의 한 구절을 인용할까 합니다.

“사회적 부는 국가에 의해 분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혁명적으로만 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생산하는 여성과 남성의 자유스러운 협동체가 자본주의적 강제관계를 대체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인간의 필요에 대해서 단지 구매력을 갖춘 수요로만 관심을 갖는 시장만을 위한 맹목적 생산이 아니라, 기업의 경제성과는 전혀 다른 합리성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생산이 이루어 질 것이다. 오늘날의 경쟁은 전 세계적 협력으로 대체될 것이다. 임금노동은 폐지될 것이며, 화폐는 박물관에나 전시될 것이다. 필수적인 노동은 최소화되어 의식적으로 분배되고 부차적인 것이 될 것이다. 마침내 능력과 기호에 따라 자유롭게 활동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향유의 세계를 살게 될 것이며, 마침내 후회나 상시적인 결핍감에 떨지 않고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 인간이 상호 협력하는 관계는 더 이상 강제적인 것이 아니며, 기아나 배제에 대해서도 전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혁명의 의미는 오늘날 인간을 국가의 품으로 내몰 수밖에 없는, 인간이 사실은 가장 두려워해야만 하는 그러한 불안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가족, 국가, 민족과 같은 모든 비합리적인 집단 등을 비롯하여, 구 사회에 의해 강제된 모든 인간관계의 형태들은 해체될 것이다. 미래의 혁명은 또다시 국가를 정복하고자 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혁명의 과정에서 전혀 불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미래의 세대들은 언젠가 인간이 과거 국가와 같이 어리석은 것을 가져야만 한 것에 대해 웃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미래 사회가 어떤 모습을 하게 될 것을 혹은 어때야만 하는가를 사전에 결정하거나 규정하는 월권행위만이 아닙니다. 생산자들의 협동체를 전제하는 그러한 발전을 간과하고, 실천을 중재하며, 이 모든 그럴듯한 예언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 실천의 주체가 불명확성, 그리고 예언주의로 나타나고, 불확실성과 공허함을 “투쟁에 나서서, 그들에게 전쟁을 선포하자! 임금노예제를 폐지하자!, 국가를 전복시키자! 세계혁명 만세”라는 호전적인 문구 뒤에 감추어버리는 실천의 주체에 대한 불명확성이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말로만의 급진주의 따위가 개량주의적 사회국가론에 대한 자기 과시 외에 어떤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와 정반대인 혁명주의적 외침도 제게는 공허한 메아리처럼만 들릴 뿐입니다.


I. 가능한 미래는 지금의 현실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소망일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미래의 사회의 모습에 대해 미리 결정하려고 들거나 규정해 버리려고 하는 그러한 미래의 모습들에 대해서는 저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미래를 위한 실천과 그에 상응하는 주체성의 발전이 모호하고 혁명이라는 비법을 통해 가려버리는 그러한 것이라면 더욱 더 그렇습니다. 그 대신 제게 중요한 것은 현재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임금노동자인 생산자들의 가능한 실천과 실현 조건들을 현재의 관계들에서 출발하여 타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능한 미래는 지금의 현실 속에 내포되어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발전시키는 것이며, 아니면 소망에 머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현실, 즉 자본주의를 단지 악마의 소행이나 “개 같은 세상”이라고 치부하기만 할 때, 현실의 가능한 부정은 현실 그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없어도 무관하다고 여기는 혁명적 비판자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현실을 사악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과 공산주의적 미래를 예찬하는 것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실제 그렇게 가능한 미래는 오지도 않을뿐더러 현실을 증오하게만 할 뿐입니다. 가능한 현실부정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기존의 것에 대한 이해는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정을 실질적이며,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현실 자체를 실질적인 개념, 사회적 실천의 특정한 형태나 사회성의 특정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회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질적인 것입니다. “이론을 신비화해버리는 모든 신화들은 인간의 실천과 이러한 실천에 대한 이해에서 합리적인 해결을 찾을 수 있다.” 맑스의 포이에르 바흐 테제의 8번째 항목인 바로 이것을 그의 모든 자본 비판의 동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실천을 파악하는 것은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실천에 의해 의식이 결정되는 것이고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배적인 실천, 여기서 의미하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우리의 의식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실질적인 관계들을 물적인 형태, 노동 생산물의 사회적 관계들, 혹은 그 특성으로 표현하는 치명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의식 형성에 미치는 일상적인 실천의 효과에 대해 비판적 사고는, 익숙하고 따라서 지배적이 되어버린 사고방식과 범주를 무너뜨려 버리고 이러한 것들이 특정한 형태의 사회적 실천에 대한 관념적 반영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는 앞서 이미 인용했던 유인물을 통해서 확연해집니다. 국가좌파에 대한 투쟁에 대해 유인물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세계를 상품과 화폐, 임노동과 자본, 국가와 법률로 구성하는 것은 불가피 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들의 실질적인 토대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유인물을 작성한 여성들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본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은 실질적으로 무었을 의미하고, 어떻게 정당화되고, 무엇이 어떠한 목적으로 관련되어 있는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스스로 증대하는 화폐로서 자본을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을 현실적으로 해체할 수 없습니다. 자본을 스스로 증대하는 화폐로 규정하는 것 역시 이것의 진정한 해소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본은 스스로 증대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형태로 나타나는 가치 그 이상을 생산하는 노동력의 사용을 통해 이룩되는 것이다.” 하지만 가치란 것이 무엇입니까? 부르주아지 경제의 근본적인 범주는 규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인물의 작성자들은 자본을 자본이라고 지칭하고 화폐와 국가에 대해 각각 진부하고 불합리한 것이라는 수식어를 부여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마치 이를 통해 모든 것을 말하고, 개념에 대한 고집이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라는 듯 말입니다. 이는 사적인 생산수단 소유자와 노동력의 소지자로 구성된 사회에 있어서 화폐와 국가의 필요성에 대한 자신들의 몰이해를 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II. 자본의 개념과 그 부정의 일반적 형태

그렇다면, 사회적 참상의 진정한 원인인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토대는 무엇입니까? 여성친구들은 “여전히 자본으로부터, 그것이 주식회사든 개인 소유든 간에, 생산수단을 박탈해야 한다고 답합니다. 모든 죄악의 뿌리는 생산수단이 자본의 손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홀러웨이가 표현한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점, 즉 자본과 자본가를 등치시키는 것이 가장 큰 불명확성과 혼란의 뿌리입니다.

생산수단은 자본이 소유하거나 그 손아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자본이라는 점입니다. 즉 생산수단은 - 이점이 바로 개인의 손에 있는 것에 대한 진짜 설명입니다만 - 주식회사든, 개인기업이든, 종업원이든 간에 사회적 노동의 특정한 형태를 지배하고, 즉 생산을 통해 교환과 화폐의 형태로 구현되는 노동시간의 등가물의 교환에 대해 지배하기 때문에 자본으로 기능하는 것입니다. 교환을 위한 모든 종류의 사용가치의 사적 생산, 사회적 노동의 이와 같은 특정한 형태, 혹은 사회성의 특수한 형태야말로 생산물에 생산물의 가치 특성으로 사회적 노동이 표현되는 가치의 형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오직 이와 같은 특정한 사회적 형태의 노동에 의해서만, 즉 사적인 노동이 일반적으로 집단적으로 구매한, 자신의 재생산에 필요한 것 이상의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력에 의거할 때, 생산물로 실현된 노동이 재차 임금노동자들에 자신의 노동력과 그들의 살아 있는 노동에 대한 이질적인 권력으로 등장할 때, 생산수단이 자본, 잉여가치를 추구하는 가치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교환을 위한 기업의 사적인 생산이라고 하는 사회적 형태는, 그것이 임금노동자들 자신과 좌파 자본주의 비판자들 모두로부터 특정한, 즉 역사적으로 형성된, 따라서 유한한 형태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을 만큼 간단하고, 기초적이며, 친숙하고, 외형상 당연한 것입니다. 자유, 자유시간, 혹은 자유로운 활동의 미명 하에 노동을 비판하는 것은 이와 같은 형태에 대한 무지의 표현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회적 불행으로부터의 탈출구는 따라서 그와 분리되고 분리하는 형태로부터의 사회적 노동의 해방에서가 아니라 노동에서의 해방에서, 그리고 가능한 모든 개인적 자유를 특기하는 대안적 활동에 대한 개념적 맹세에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소외되지 않은 사회적 생산의 유일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로부터의 해방을 “노동강제”로부터의 해방과, 노동이 “부수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공산주의적 자유의 제국과 등치시키는 무계급 사회의 여성친구들에게도 바로 그렇습니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사회적 형태에 대한 지배적인 맹목성은 통상적으로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에 대한 축소된 개념과 그리고 그로 인한 생산수단에 대한 축소된 개념과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한 예가 앞서 인용한 유인물에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있었던 공장점거들은 “혁명적 쟁취, 즉 재산제도의 부정과 생산의 장악의 전조”라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재산제가 부정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소유자가 부정되었고, 공장의 집단적 소유자로서 직원들에 의해 대체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생산 자체는 교환을 위한 사적인 생산으로 남아 있고, 따라서 기업의 생산수단과 직원들의 노동력도 생산물과 화폐와의 교환을 통해 재생산되어야 하고 확대되어야하는 사유재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소유자와 비소유자를 분리시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적 소유자 상호간의 분리와, 따라서 자체적인 지휘 하에 작업하는 직원들을 분리시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분리는 직원들이 기업 내의 지금까지의 사적인 지휘를 자체적인 지휘로 대체했을 때도 여전히 그대로 존재합니다. 이와 같은 것이 경미한 것이 아닐지라도, 모든 사회적 생산수단에 대한 공동의 전유와 교환에 대한 강제의 해체를 전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쯤 머물러 계속 교환을 위해 생산하는 한, 그것은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건물, 기계, 사유재산과 같은 기업의 생산수단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생산에 필요한 원료, 반제품들, 에너지, 부품, 소모용품 등, 지속적으로 소비되는 생산수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와 같은 것들도 사유재산, 즉 화폐와의 교환을 취득해야만 하는 타인의 사유재산입니다. 그리고 또한 남아있는 기업의 생산수단도 기술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소임을 다하고 다른 사유재산 소유자의 손에 있는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교환을 위한 생산에 기초하여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사회적 소유를 수립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교환이란 투여된 사적 노동 가치의 대치를 통해 생산물의 소유자가 바뀌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기업들이 직원 소유일 때도, 그들의 노동은 임금노동의 형태를 유지하고,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동시에 재생산되는 가치의 크기일 뿐만 아니라 판매되어야 하는 가치의 크기를 나타냅니다. 즉 자본으로서 기능합니다.

생산수단의 사적인 소유는 바로 사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아니라, 동시에 그 반대, 즉 사물, 생산물과 생산수단에 의한 인간의 지배입니다. 생산수단의 소유는 전반적으로 독립적인, 실제 상호 독립적인 부분 노동자와 사적 노동자들로 사회적 노동이 분리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상품생산의 이와 같은 기본모순은 인간이 자신들의 공동의 총노동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신이 만들어낸 생산물들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자신들의 사회적 관계가 숙명적으로 생산물의 가치적 성격과 자본의 성격으로 비쳐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무계급 사회를 추구하는 여성친구들의 글에는, 아르헨티나 공장 점거자들의 행동이 단순히 생존하기 위해서 계속 시장을 위해 생산하고, 그로 인해 시장의 변동과 강제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제한된 해방시도의 온갖 모순들에 사로 잡혀 있다고 되어있는데, 이는 엄청나게 사실을 축소한 것입니다. 시장의 변동 상황들과 강제와 더불어 그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온갖 강제와 모순에 노출되어 있으며, 특히 자신들의 재생산을 위해, 생산수단의 개선된 재생산을 위해, 그리고 이윤을 유통부분과 국가와 분배하고 유상 노동과 무임노동을 확대하고 전자를 위해 후자의 확장을 강제 당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자신들이 시장에서 퇴출되기 때문 입니다.

자본주의에 의한 상품생산의 보편화로 인해 자본관계, 그리고 그와 더불어 무임노동에 대한 강제가 더 이상 계급관계에만 매어 있지는 안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습니다. 비록 이것이 역사적으로 관철된 형태이고 오늘날에도 전 지구적으로 계속 관철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과거 공장주들이 잉여노동을 사회적 규범으로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고 한다면, 오늘날에는 시장에서의 경쟁과 기술적 진보의 강제적 자동주의, 그리고 임금노동자인 생산자들의 노동과 생산적인 임금노동자들이 실질자본의 축적 이외에도 모든 사적인 그리고 국가적인 소비의 90% 이상을 충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고심하고 있습니다. 자본관계가 이미 독자적인 강제관계가 벌써 되어 버린 것을 깨닫기 위해 특별히 아르헨티나의 상황에 눈을 돌릴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임금노동자들이 동시에 기업의 생산수단의 소유자이며, 자본관계가 외부의 자본가들이 없이도 재생산되고 있는, 전 세계에 퍼져있는 수천 개의 종업원회사들과 협동기업들이 입증하고 때문입니다.

자본의 사악함을 자본가의 사악함으로 몰아버리는 것이 간편하고도 인기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자본관계는 오직 가치관계, 즉 교환을 위한 생산과 함께만 폐지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문제는 자본주의적으로 생산하는 종업원들을 포함하여 자본가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임금노동자들에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임금노동자들이 - 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실천입니다. - 노동력의 판매자로서 교환과 생산이 당연한 생존조건이고, 자신의 노동력을 개인적인 생존의 수단으로 (일반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축재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유재산가로 스스로 이해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본가의 강제가 없이도 상응하는 등가물과의 교환을 통해서만 작동될 수 있는 사유재산처럼 자신의 노동력을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부정적인 자본비판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단순한 형태뿐만 아니라 통상적으로 그것의 내용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즉 타인을 위한 사용가치의 생산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 형태가 분절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무관한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쌓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본이 점차 모든 사회적 노동과 심지어, 과학, 예술, 오락에까지 이와 같은 형태를 강제함으로서, 즉 상품생산을 보편화함으로서 인간적 사회와 사회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인류의 물질적 관계가 발전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자체가 사회적 분업과 더불어 노동을 이 생산양식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사회적 노동으로 발전시킵니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단순한 형태와 단순한 내용이 일상적으로 감지되지 못하듯이 그 상호 관계도 파악되지 않습니다. 노동의 형태와 내용은 이미 단순 상품생산에서도 수시로 충돌하고 있고, 실현해야 하는 생산물의 교환가치는 타인을 위한 교환가치와 경쟁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쟁성은 자본주의 생산에 있어서 상시적인 갈등이 됩니다. 왜냐하면 노동의 형태가 이미 그 내용과 목적을 걸맞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용상의 걸림돌이 되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며, 내용이 형태를 옥죄는 족쇄가 됩니다.

전통적인 자본비판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내제된 이와 같은 갈등을 두개의 서로 다른 생산양식의 외적인 적대성으로 해석함으로써 완화시켰습니다. 이윤 대신 필요를 충족시키는 생산이 바로 그 구호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전도되고, 왜곡되고 비사회적이든 간에 모든 이윤 생산도 항상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킵니다. 이윤생산과 필요의 충족 사이의 갈등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외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생산과정에서 구체적으로 표출되는 위험스러운 모순, 즉 가치실현과 노동과정, 노동의 질과 양, 노동력, 생산수단, 생산물의 교환가치와 사용가치 사이의 모순입니다.

이와 같은 갈등에는 사회적 파괴력이 내포되어 있지만 동시에 이를 억제하는 수단도 담겨 있습니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특수한 형태는, 오직 그 사회적 내용이 다른 합당한 형태를 관철시키려고 할 때만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인간에 의해 설정된 목적입니다. 그것을 실제화 하는 인간에 의해 설정되는 것이지 스스로 수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자본의 생산대리인이 생산을 목적을 설정하거나 또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발적 운동을 집행합니다. 그리고 생산에 굴레는 씌우는 것은 생산 외적인 사회적 기구들, 즉 보편적인 법령을 제정하고 통제기구를 구비한 국가, 환경운동, 소비자 운동, 기술검사소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생산자인 임금노동자들은 이제까지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교환가치를 설정하는 고루한 사적 형태에 맞서, 사회적인 즉 모든 인간에게 유용한 생산 목적을 관철시키고, 그러한 사적인 생산형태를 지양하는 것, 교환을 위한 사적 생산을 개인적 소비와 생산적 소비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공동생산으로 대체하는 것은, 오직 임금노동 생산자들의 힘에 달려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사회적 노동의 지배적 형태를 불만스럽고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경험하며, 때문에 이를 지양하고자 하는 사회성 혹은 사회적 주체성을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회적 주체성이란 사회적 생산자의 자신감과 책임감이며, 자본주의적 생산을 그리고 자신의 객관적 지위를 천한 임금노동자 혹은 “종속적인 고용인”이기를 거부하고, 그런 것을 자신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기는 그러한 주체성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발전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문제는 이 강연의 마지막 부문에서 다루겠습니다.


III. 개관적으로 가능한 실천으로서의 공동생산

그렇지만 이에 앞서 공동 혹은 공산주의적 생산의 객관적 조건들을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실천적인 가능성은 상품생산 노동의 일반적인 사회적 형태의 논리적 부정이라는 사실 자체로만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적 생산 경험을 통해서 자본주의 생산 속에 이것의 지양을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하고 구체화 시킬 수 있는 물질적 조건들이 내재되어 있음(내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발전시키는 것)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자본주의적인 사적 노동 조직의 기본형태인 기업이 사회적 생산의 자연스러운 형태이며, 교환, 생산물의 화폐화가 기업과 소비자, 그리고 기업들을 연결시켜주는 필수적인 형태라는 것이 사회적 인식입니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사회적 생산의 일반적인 필요성으로가 아니라 사유재산제를 타부시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교환은 일찌감치 생산과 소비의 매개 형태에서 그것의 외적 조건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적 노동의 가치상의 대체와 타자의 생산물의 소비와의 매개는 생산물들의 교환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일치됩니다. 생산물과 화폐를 교환할 때, 더구나 기간 내 지불약속인 신용을 통해 교환이 이루어지게 되면, 이것들은 분리된 과정들이 됩니다. 생산을 개인과 생산적 소비와 매개하는 대신, 교환은 이와 같은 매개를 오히려 끊임없이 교란시키며 위기에 빠뜨릴 만큼 방해합니다.

동시에 화폐의 무소불위성에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드러납니다. 모든 개인과 개별 기업은 자체적인 생산물로 직접 지급할 수 없으면서도 타자 노동의 생산물에 종속되어 있고, 반대로 개별 생산업체는 다른 업체, 즉 사회적 요구에 따라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상업적인 신용, 즉 상품의 인도와 서비스의 제공과 이에 대한 즉각적인 지불의 분리는 역설적으로 이와 같은 사회적 관계, 생산의 사적인 형태를 부정하는 관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교환이 생산과 소비를 매개하는 필수적인 형태나 조건이라면, 모든 사회생활은 벌써 붕괴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영리사회가 항상 무상의 가사노동과 양육, 그리고 수많은 자원봉사 활동에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교육이나 재해구호처럼 교환을 통해 간접적으로 운용되는 (즉 세금을 통해서) 무상의 공공 서비스와 기관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만도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가 생산과 소비의 비교환적 매개를 - 모든 분업관계에 있는 사기업 내에서 -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분야에서는 분리된 강제교환 없이도 직접적인 협력, 다양한 생산절차들과 단계들 사이의 기술적 조율을 통해 매개가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것이 항상 통제권을 행사하고 독촉하는 위계적 압력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 자체가 사적 노동의 직접적인 사회적 조직을 통해 원초적으로 자본의 지양의 기본 형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적 노동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비교환적 협력이 부르주아지적 사고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사회적 생산 전체가 하나의 유일한 공장에서처럼 이루어 질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벌벌 떨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자본 자체가 사적 노동의 경계를 뛰어 넘을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미지의 시장을 위해 임의의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단순한 생각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입니다. 대부분의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것, 그리고 개인과 특히 공적인 소비를 위한 수단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것은 질적으로 양적으로 명확히 특정화된 수요에 맞추어진 생산으로, 발주자와 시행자 사이의 사전 조율과 협약이 전제되고 지속적인 품질검사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즉 생산과정의 사적인 형태를 부분적으로 지양하는 그러한 협력 형태인 것입니다. 그밖에도 수많은 산업부분에서 기업간의 수평적 수직적 협력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공동의 생산품 개발과 계획에까지 확대되기도 합니다. 자동차산업에 있어서 완성차업체들과 부품공급업체들 간의 관계, 금융계열사들 간의 관계, 대규모 건설 분야의 원청과 하청기업들 간의 관계들이 그 예입니다.

자본은 사적 노동을 직접적으로 사회화된 노동과 개별적이 사적 노동들 간의 협력적 관계로서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국가적, 초국가적, 전 지구적 수준에서 사적 노동들 간의 사회적 매개, 혹은 총노동의 간접적인 사회화를 조직하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적당한 비율로 다양한 사적 노동으로 사회적 총노동이 배분되어 있지 않는다면, 모든 순환적 교란과 위기, 그리고 파열로 인해 끊임없이 재생산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사회적 분업과 그에 수반되는 모든 기술적 토대가 생산관계 자체에 의해 구조화되고, 제한되며, 왜곡된 소비에 맞춰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공동생산으로의 이행이 그 목적과 수단을 건드리지 않는 단순한 생산 형태의 전환이 아닌 것처럼, 총노동을 사회의 진정한 수요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 완전히 새롭게 발명해내야 하는 것이고 중앙의 계획에 따라 실행에 옮겨야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타당한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분업의 복합성 때문에 총노동을 사회적 통제 하에 두는 단 한가지의 길만이 있습니다. 즉 상호 협력하는 생산자들이 주어진 관계를 스스로 장악하고 단계적으로 변화시키는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 이것이 사회적 분업에 대한 이해 없이는 쉽게 이해되지 않으며, 시장경제든 계획경제든 간에 혼란에 빠뜨리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 생산자들이 부분노동들의 직접적인 관계들을 지배하게 될 때, 비로소 사회적 총노동을 동시에 공동으로 지배하게 됩니다. 대대적인 규모의 공동 생산이나 혹은 직접적인 사회적 생산에 있어서 총노동은 항상 필수적인 구체적 부분노동의 총합일 뿐 직접적인 계획의 대상 자체는 결코 아닙니다.

모든 기업은 생산에 필요한 수단들(기계, 에너지, 연료 등)과 물자들 (원자재, 반제품, 부품 등)을 공급해 주는 사회적 총노동과 다양하게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사회적 분업과 그 발전에 기업이 종속되어 있다는 것은 오늘날 상품가치에서 선수금과 감가삼각비가 차치하는 비중이 꾸준히 증가하는 데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기업들, 즉 제 I부문의 생산품들은 다른 기업의 생산적 소비에 투입되고, 제 II부문 기업들의 상업적 유통 채널들을 통해 개인과 공공 소비와 직간접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와 같은 관계들은 내용적으로 직간접적 추정에 의해 질적으로 그리고 양적으로 결정되는 외부적 수요와 그와 함께 결정되는 생산수단에 대한 자체 수요에 따라 구성됩니다. 오늘날 사유재산의 형태로 지불 능력이 있는 수요로 제시되는 그러한 수요만이 사회적으로 인정된다고 해서 사회적 수요가 이렇게 왜곡된 형태로만 제시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 무시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생산과 (개인적이건 생산적이건) 소비의 직접적인 매개는 따라서 특별히 정보와 소통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 전제는 단지 생산자가 모든 생산수단들에 대한 공동의 전유와 통제의 토대위에서 통합되고 무수한 개별 노동력이 자체적으로 책임감 있게 그리고 계획적이며 유연하게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발휘되는 것입니다.


IV. 사회적 주체성의 발전 가능성

교환의 토대 위에서 사유재산, 상품생산, 임금노동의 종속성, 가치법칙의 지양을 프로그램으로 설정하고자 했던 프랑스의 지구화 비판자들과 한 논쟁에서 저는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스케치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유토피아처럼 보일지 몰라도, 임금노동자들이 작업장을 점거하고 자신들의 주도로 생산을 조직하게 되는 초국적인 대중운동에 대해 생각해보자. 작업장들 간의 관계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노동자들을 서로 고립시키고, 부분적으로 현장을 서로 분리시키는, 자본으로부터 넘겨받은 그러한 조직과 교류형태를 고수할 필요는 전혀 없으며, 사회적 분업은 실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여러분들은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작업장 수준에서 생산물을 화폐와 교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사회적 수준에서 생각해 보자. 노동에 대한 사적인 권력을 영구화하고 증대시킬 뿐인 사유재산제의 편협한 계산과 기업이기주의, 그리고 화폐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하자. 공급과 구매 관계에 있는, 그리고 지금까지 경쟁관계에 있는 작업장들의 노동자들과 직접적인 협력 관계를 조직해보고, 개인 소비자들과 연대하고, 일반적인 사안들을 (에너지, 교통, 교육, 건강 등) 조정하기 위해 공동의 자치기구들을 구성한다고 하자. 이 모든 것들은 총 생산을 사회적 효용성과 필요에 맞추고, 인도주의적이고 친환경적인 기준들에 따라 재편하기 위한 것들이다. … 모든 생산수단의 공동 점유에 기초하여 소비자들과 연대한 협동적인 생산자들에 의해 꾸려지는 사회적 노동의 자치조직은 사적인 노동과 교환의 지양, 그리고 생산물의 상품형태, 임금노동, 가치법칙을 지양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생산물들의 독자적인 국가적 특수형태와 기능인 세금, 사회 부담금, 보조금, 사회보장 혜택들, 그리고 이러한 것들에 연명하는 관료기구들의 종말을 가져 올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나리오는 한 가지 논리적 맹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대적인 국제적 점유운동이란 아마도 생산자들이 어떻게 공동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공동의 생산을 하기 위해 통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 최소한 이러한 운동을 주도한 임금노동자들의 주요한 부문에서라도 사전에 존재할 때 비로소 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실천이 의식을 결정하듯이 다른 가능한 실천, 사회적 생산의 다른 형태에 대한 의식이 어떻게 발전한 수 있는가가 문제로 남습니다.

이러한 의식이 임금노동과 자본 사이의 적대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임금노동자들과 자본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비타협적 이해 대립을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위협이 전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이를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적대성의 딜레마는 한 쪽이 다른 한쪽을 배제하면서도 다른 한 쪽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적대성은 양측의 지양을 통해서 제거되는 것이지, 한 쪽 만의 지양을 통해서는 제거되지 않습니다. 이 경우 나머지 한 쪽이, 계속되는 교환관계에 기초한 공장 점거에서처럼 동시에 다른 쪽을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버립니다. 임금노동자 계급이 단지 자본과의 적대성에 의해 정의되는 한, 전자는 자신들이 수행한 과거의 노동에 대한 적대성으로 정의되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 사회의 나머지와의 긍정적인 관계로 정의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의식적으로 임금노동자 계급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임금노동자로서의 이들의 공동의 지위에 의해 공동의 계급이해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임금노동자들이 자신을 오직 임금노동자로만 이해하는 한, 그들은 임금노동의 포로, 그리고 그 전제인 자본의 포로, 또한 임금노동자들에게 산업노동자, 상업과 은행자본, 공공부문, 개별 가정의 임금노동자로서 사회적 노동의 지배적 구조를 자본의 이해로 부과하는 그러한 기능들과 소득원의 포로로 남아있습니다. 임금노동과 자본의 적대성이 시스템 파괴적인 힘을 갖는다는 신화는 임금노동자들의 모든 다른 이해들을 상대화시켜버리는 지배적인 이해가 작동하는, 즉 성공적으로 가치를 창출하는 자본에 종속된 것이고, 이러한 종속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의해 확연하게 깨집니다. 이는 수백만 번 입증된 사실입니다. 임금노동과 자본의 이해들 간의 비타협적 적대성이라는 것은 점점 더 이들 간의 강요된 이해 공동체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본가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묶는 것은 이들을 서로, 그리고 임금노동자들과 분리시키는 사유재산의 유지입니다. 계급으로서 스스로를 지양하기 위해서 임금노동자들은 자본에 대해 “자체적으로” 밖에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즉 스스로를 더 이상 임금노동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정부에 대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회적 필요성을 제기하고 자신들의 노동을 이를 위해 제공하는 사회적 생산자, 그리고 사회적 관계와 자신의 노동의 목적을 사회적으로 조직하고자 하는 그러한 생산자로 이해할 때 계급으로서 하나가 됩니다. 노동 운동사를 살펴보면, 예외적인 경우라 할지라도,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이 이와 같은 전망을 직접적으로 깨닫고 이에 열광했던 사례들이 이었습니다. 1920년대 토리노의 공산주의 운동이 그 한 예입니다. 당시 토리노에서 발간되었던 신문인 신질서(Ordine nuovo)의 편집자였던 그람시가 쓴 이 운동에 대한 한 보고서가 1921년 이탈리아 공산당의 잡지인 인터내셔널에 게재되었고, KW 48/1999 자료집에 재인쇄되어 있습니다. 그람시에 따르면, 토리노의 노동자들은 노동력의 판매자, 혹은 직종에 따라 정의된 “금속 노동자”로 스스로를 이해했던 것이 아니라, 자본관계와 이와 더불어 계급 적대성을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인생의 중심점이 아니라 떨쳐버리고 싶은 짐으로 이해하고, 자신들을 사회적 총 노동자의 일부로 이해했습니다.

오늘날의 노동운동은 이와 견줄만한 의식과는 동떨어져 있는 듯 보입니다. 저는 수년전까지만 해도 마르크스의 이론으로 무장된, 부르주아지 경제에 대한 비판이 부흥하지 않고는 실천적인 운동에서도 이렇다 할 발전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사적 노동과 교환의 강제에 대한 비판을 노동생산물의 형태 분석을 통해서만, 보다 익숙한 방식으로, 사회적 생산을 분리하고 실천의 확실하고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모순을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생산물의 형태 분석을 통해서만 발전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이상하고도 심각한 것입니다.

임금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수행하는 구체적인 노동의 사회적 의미와 무의미함에 대해 생각하고,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다른 활용자, 혹은 직접 연관된 사람의 이해를 돌볼 때 이미 이를 위한 첫 번째 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세계를 움직일 만하거나 전복적인 것으로 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생산의 영역 밖에서 사회적 참여를 모색하고 조직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손쉬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경영이 이미 자본의 이윤창출을 최적화하기 위한 컨셉으로 고객지향을 발전시키지 않았습니까? 임금노동자들이 생산자로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노동을 사회적 효용성에 맞추고 개인적으로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실천으로 전환하고자 할 때, 그것은 임금 노동에 억매여 있는 생산자들의 지배적인 역할 분담과 동시에, 노동조합과 정당을 통해 이를 대변해 왔던, 때로는 갈등하게 만든 그러한 전통적 방식을 깨쳐버리는 질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와 같은 질적인 새로움이 프랑스의 남부 노동조합들에 의해 조직된 형태로 나타난 것은, 단지 국가적인 특수성의 결과만이 아니라 모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전통적인 노동조합 운동의 잠식과 같은 공통된 역사적 조건들의 표현입니다. 자본관계의 지구화가 집중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시기에 있어서 임금노동의 종속성은 연대적 관계들의 허위적인 토대 그 이상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토리노의 노동자들은 소비와의 매개를 특수한 문제로 주제화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생산에 대한 공동의 지배를 확립하기 위한 생산자들의 조직적인 통일을 통해 생디칼리즘의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이와 같은 매개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들과 달리 남부 노동조합들은, 생산자의 통합, 혹은 협동이 상상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러한 시대에 자신들이 수행한 노동의 수혜자들과의 연대 속에서 사회적 생산자로서의 자신감을 획득했습니다. 향후 그들의 발전이 이러한 전망에 얼마나 근접하게 될 지는 저로서도 감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마지막으로 제가 2년 전에 쓴, 남부 노동조합들에 대한 지난날의 열광적인 평가를 약간은 상대화하고 프랑스 사회운동의 모순성을 밝히고자 했던 논문("Un syndicalisme diffént": trend online 인쇄판 1호에 재수록)을 인용하겠습니다.

“다른 형태의 사회성에 대한 요구, 실질적인 공동의 삶에 대한 연대적이며, 동시에 자치적인 형태에 대한 요구는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빌리가 그렇게 생생하게 묘사한, 그리고 투 앙상블이라는 겉으로는 그렇게 단순해 보이는 구호로 표현된 1995년 12월의 분위기를 각인시켰다. 그것은 모든 형태의 사회적 배제와 차별에 대한 반대를 불러일으키고, 동시에 이른바 대표성의 위기와 항상 강조했던 사회운동의 자율성과 파업투쟁의 자발적 조직으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남부노동조합들과 농민 연합회가 순수한 화폐관계와 순수한 경영상의 계산에 대항하여 사회적으로 유용하고 친환경적인 생산을 위한 생산자들의 책임과 생산자들과 소비자들 사이의 연대에 대해 책임을 관철하자고 했다. 이는 지배적인 생산양식의 논리를 (그것을 만들어낸 실천이 아니라 논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도 부르주아적 관계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들, 교환과 교환을 위한 생산, 그와 더불어 사회적 노동이 사적인 영리기업으로의 “분산”과 상품으로의 사회적 생산물의 상품형태의 이중화는 역시 전혀 비판과 성찰의 대상이 아니다. 쉽게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단순하지만 쉽게 이룩할 수 없는 것”(브레히트), 즉 공동의 생산수단에 의한 공동 생산의 가능성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농민연합의 경우, 소농적 사경제의 유지가 조직의 프로그람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남부노동조합들의 경우에도,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나 가치형태, 그리고 그 실질적인 토대인 교환에 대한 문제제기나 비판은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대안적 해방론자들을 포함하여 “극단적 좌파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요즈음 인기를 끌고 있는 상품비판(호세 보베Jose Bove: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이 프랑스에서 시작된 것은 이러한 현상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 이와 같은 비판은 상당히 모순적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지금까지 이 비판은 단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논리를 대상으로 할 뿐, 이러한 논리가 등장하는 실질적인 기반인 교환을 위한 사적 생산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 즉 자본주의적, 다시 말하자면 이윤지향적 교환가치가 사용가치에 대해 독자화한 것, 그리고 사회적 노동의 특정한 일부, 즉 농업과 식품산업, 그리고 공공서비스에 대해서만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그 영역에 한해 화해시키거나 혹은 완화시키는데 있다. 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오직 공동의 생산을 위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통일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망이 닫혀있기 때문에 유일한 탈출구는 어떠한 형태로든 정치, 즉 국가, 보베가 표현했듯이,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위성에 대해 기대는 것뿐이 없다. 실제 농업에 있어서 프랑스 내의 상품 비판은 국가에 의해 보호받는 소농적 상품생산 계획을 지향하고 있으며, 공공부문의 경우 온건한 국가자본주의와 국가재정에 의한 무상교육의 유지에 대한 전망이 전부이다.

사회운동의 모순성은 모순적인 상품비판에 총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사회운동은 한편으로 생산자들의 사회화 혹은 협동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발전시켰으며 (사회적 책임감, 자치조직에 대한 요구, 의회주의적이며 관료주의적인 대의-와 지배구조로부터의 이반), 다른 한편으로는 불가피하게 보이는 교환에 대한 강제의식에 사로 잡혀있고, 그리고 그와 더불어 판매자와 구매자로 갈기갈기 찢겨있는 사회에 대한 환상적인 대안공동체로 국가에 얽매여 있다. 따라서 줄기차게 자유화와 탈규제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과는 다른 것에 대해서도 사회운동은 단지 보수적이며 국가주의적 형태로만 사고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모순성이 이제 적어도 감지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가장 자주 등장하는 구호는 다른 정치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이를 뛰어 넘어 “다른 사회는 (세계) 가능하다.”라는 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것도 단지 간절한 바람이나, 실질적 모습을 갖추지 못한 반항적이고 불분명한 부정에 불과하고, 사회적 이행을 사경제와 공공부분에서의 공동의 총파업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정치적 대의제가 위기에 봉착했다고 해서 국가에 대한 집착과 맹신에 위기가 닥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사용가치와 유용성에 대한 교환가치의 비판이 교환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그러한 위기는 찾아올 수도 없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상품생산에 대한 이론적 비판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제 비로소 시작된 실천적인 발전이 지속되고 보편화되는 것이 아마도 추가적인 조건일 것이다. 남부노동조합들과 농민연합을 통해 구현된 것과 같은 사회적 생산자의 결성이 바로 그러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유형의 사회적 생산자가 그 수적인 힘을 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하지만, 이들은 임금노동자와 자영업 생산자들 내에서는 보잘 것 없고 상대적으로 고립된 소수일 뿐이다. 남부노동조합들은 노동조합에 가입한 노동자들의 3%만을 대변하고 있으며, 사경제 부문에도 일부 조직화의 움직임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공공부문에 국한되어 있다. 농민연합에는 겨우 프랑스 농민의 2%만이 조직되어 있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남부노조원들이 자신들을 통일된 힘으로 자본주의적 세계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사회적 생산자들의 일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농민들도 자신들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식품산업, 사료산업, 화학산업 종사자들이 적어도 유용하고 지속적인 생산을 위한 공동 투쟁을 과감히 시도하지 않는 한 임금노동자들을 잠재적인 연대 세력으로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소비자들과 환경보호주의자들과의 연대 외에 농민들에게는 국가만이 요구조건을 내걸 수 있는 대상이 남게 된다. 이는 “새로운 정치적 대의 구조”(보베)에 희망을 거는 것이 될 것이다. 다른 중요한 생산부문들에서도 점차 임금노동자들이 의식적인 생산자로 조직될 때에 비로소 사회적 부분 노동의 사적인 형태와 교환에 대한 강제가 사회적으로 비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게 되고, 공동으로 조직된 직접적인 사회적 생산에 대한 생각이 무르익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것은 단지 하나의 가능한 발전이지 당연하거나 혹은 필연적인 발전은 전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