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의 월간지 현장에서 미래를

[119호] 희망

세상만사/

희망

고암



인연 다시 잇다.

올 설을 앞두고 고등학교 때 단짝이었던 친구 전화가 왔다. 20여 년만이다. 어렵게 어렵게 물어 연락처를 알았단다. 설을 지나고 물건들 다섯 명이 만났다. 20여 년 만에 보는 얼굴들은 맨 그 얼굴들이었지만 머리칼과 얼굴엔 세월이 대롱대롱 달려있었다. 눈가 주름은 10년 고생, 흰 머리카락은 5년 고생. 팍팍해진 피부는 8년 고생짜리로 명함을 내밀고 있다.
결혼하기 전까지 매일같이 만났던 녀석들이지만 다들 결혼 즈음해서 연락 두절되었다.
나도 그렇지만 다 웃기는 녀석들이다. 옛날엔 대나무로 철도 건널목 차단기를 쓰기도 했는데 한 녀석은 기차가 지나가고 차단기가 올라가는 줄 모르고 바싹 붙어 서 있다가 목에 걸려 ‘큭큭’거려 배꼽 잡게 했던 놈이고, 한 녀석은 학교 다닐 때 화장실서 담배 피우다 교련선생에게 딱 걸렸다. 제 입에서 담배 연기가 나오는데도 안 피웠다고 우겨 쥑싸게 맞았다. 또 한 녀석은 이랬다. 우리는 어디 무슨 일 있어 불콰하게 취해 가지고 밤거리를 일렬로 서서 나란히 노래를 부르고 가고 있었다. 인도와 차도 사이 빗물 배수로 뚜껑 위를 가려면 두 줄로는 갈 수 없는 것이니까. 맨 앞에서 대열을 인솔하며 조용필 노래를 기차게 뽑던 이놈이 갑자기 땅속으로 꺼졌다. “기도하는 사랑의 손길로, 윽!” 배수로 뚜껑이 하나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 녀석은 아파 죽는데 우린 웃어죽었다. 또 한 녀석은 3년 동안 ‘짝지’였었다.
나? 나는 아침 조례 시간에 전교생 앞에서 교장선생님께 상장받고 우하하, 오후 내내 목봉 들고 운동장을 돈 사람이다. 방학 소집일 날 결석한 이유다. 이것 때문에 유명해졌다.
오랜만에 만나보니 나나 이 녀석들이 힘든 세월을 보냈다. 차단기에 걸린 놈은 졸업하고 ‘대우’에 들어갔었는데 수단이 좋아 직영으로 독립했다. 직원 200명 넘어 일했던 꽤 큰 대우 직영사업을 했었는데(이 녀석 덕분에 술 잘 먹고 다녔었다) 대우가 어지러울 때 그만 말아먹고, 그 과정에서 내게 조그만 빚을 지고 연락 두절했다. 이제 겨우 건축 시공업자로 먹고살기는 하는 모양이다.(이 녀석은 한번 지하철에서 날 보긴 했는데 피했다 한다.) 하수구에 빠진 녀석은 이혼을 겪었다. 몇 년 헤매다가 재혼하고 용달 사업으로 이젠 그쪽 지역에선 제법 이름이 난 모양이다. ‘짝지’였던 친구는 집안이 재래시장에서 가게를 크게 했었는데 형이 크게 한 탕하려고 하다가 녀석 것까지 말아먹고 몇 년 전부터서야 겨우 마누라랑 가게를 얻어 사업을 시작했단다. 바쁘기는 하단다. 또 한 녀석은 소고기 식당을 제법 잘하는 듯하더니 소고기 파동. IMF에 따따블로 충격받아 식당 막살했다. 이제서야 소매업을 하는데 이 불경기에 그런대로 할 만하단다. 이 녀석들도 겨우 연락이 되어 나까지 찾았던 것이다.
근황을 다 듣고 보니 연락 못한 20여 년 세월 동안 다들 어려운 세월을 헤치며 살았다. 연락은 그래서 서로들 안 했거나 못했던 것이고, 머리가 희끗해지고 이제 한숨 돌리자 서로들 마음 한 켠을 채우고 싶어 찾았던 것이다. 50줄의 우린 밤새도록 술을 먹어댔다. 그 날로 뚝딱 ‘계’를 만들고 최초 연락한 놈을 회장으로 정했다.
살기가 어려우면 연락하기 힘이 든다. 자존심 문제만이 아니다.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려고 용쓰다 보면 절로 그렇게 되는 거다. 그래서 더 어려운 상황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이 ‘아싸리’하난 사회에서 용케도 벗어난 것만 해도 ‘축복’아니겠는가. 그런 상황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인생이야 수두룩하겠지만 살아 보라. 녀석들은 사업하고 장사하는 놈들이지만 KTX 투쟁, 비정규직에 대한 나의 견해에 대해 나와 같이 거품을 물었다. 역시 ‘깊어지는’ 것이다.
나보고는 노동조합 활동 더 이상 하지 말라고 하지만.

토정비결에 웃다.

마누라가 ‘토정비결’을 빼왔다. 고객용으로 빼기도 하는 모양인데 재미삼아 식구대로 빼왔다.
내 건 이렇다. 올해의 총운 -수시유길지의(隨時有吉之意)괘라. 해석이 이렇다. “때에 따라 움직이니 가는 곳마다 영화다. 귀인을 만나 공명을 얻으니 이름을 세상에 알릴 수다. 남과 같이 원행을 가도 높은 자리에 오를 수고 영화가 찾아들 수다. 머리에 금관과 띠를 둘렀으니 반드시 관록이 있을 수다. 집안도 화평하고 화목하리라” 거참, 콧구멍이 벌렁거린다.
좋다니 좋다. 마누라는 “깊어 가는 밤의 꿈속에 여자를 품어 안아보는 운세”라 하고, “연약한 등나무가 서로 싸워가며 두 나무에 덩굴을 뻗을” 운(運)이고, 아들놈은 “조용히 세상을 살아가면서 ‘귀자’를 낳을 것”이라는 운세다. 이 나이에 관록을 얻고 마누라가 여자를 안고, 장가 안간 아들놈이 귀한 아들을 낳을 운세라 하니 허무맹랑하다 못해 황당무계하기까지 한 소리같지만, ‘늬 전도가 창창하다’고 얘기하는 것이니 알아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해석하는 자의 도리다.
더 보니 달마다 좋다. 찾아가는 곳마다 재록이 따르고, 명예를 얻어 귀히 되고, 손에다 고귀한 문서를 쥐고, 크윽, 집안에는 경사가 있을 수고, 아프지만 귀인이 도울 수고, 재물이 가득할 수고, 프흐, 연못에서 놀다가 강으로 갈 수고, 으흐흐, 신수가 대통할 수고, 태평한 수고, 흉한 중에도 좋은 일이 일어날 수다. 푸하하.
내게 경사가 있을 리 없고, 귀인이 도운 적도 없고, 재물이 있은 적도 없으며 대양으로 나간 것도 없고 여태 태평하지도 못했지만, 맞아. 20여 년 만에 동기들도 만났고 몸무게도 줄여가고 있는 것이다. 마누라도 다른 일을 하고 아직 가족들 아무도 아프지 않다. 주변에 일하는 친구들 이번 투쟁에서 다친 사람 없어서 좋고. 술 먹다가 내 흰머리도 보기 좋다는 말도 들었고 더불어 10년쯤 젊어 보인다는 말도 들었겠다. 전보다 더 ‘입 닫고’ 사니 신수도 훤해지는 것 같다. 이 참에 로또나 살까.
아이구, 다 잘되었으면 좋겠다.

노숙자를 보다

승무 갔다가 대구 합숙에서 아침을 먹으려다가 그 늙은 할아버지 노숙자가 들어왔다. 식당에서 더럽다고 쫓아내는 걸 식비를 준다고 하고 식기를 주었다. 그런데 손이 떨려서 바닥에 밥과 국을 흘린다. 대신 떠주면서 물어보니 “이틀을 꼬박 굶었다” 했다. 요즘 밥 주는 데가 없냐고 물으니 “흔치않다”고 한다. 몸을 보니 마른 장작이다. 늙어 힘없고 굶어서 떨고 더러우니 더더욱 일이건 밥이건 얻기 어려운 모양이다. 늙은 노숙자는 한번 얻은 밥으로 하루 혹은 이틀을 견딜 양으로 가득가득 담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먹는 걸 보고 나온다. 더 어찌할 수 없다.
몇 번 회의 때문에 서울 가면 예외 없이 서울역 그 노숙자를 만난다. 지금도 있을 것이다. 히피족같은 머리를 하고 안경을 썼다. 노숙자라 쉽게 나이를 짐작할 수 없지만 40대나 50대? 다른 사람보다는 비교적 깔끔하게 옷을 입고 담배를 얻거나 돈을 얻는다. 낮에는 술은 먹지 않는 듯하다. 이 사람은 아마도 그래야 무엇이든 쉽게 얻어진다는 것을 아는 것 같다. 재떨이 옆에서 담배피우고 있는데 내게 왔다. 뻔히 쳐다보니 중지와 검지를 편다. 웃는다. 말이 없다. ‘다 알면시롱’ 하는 것 같다. 담배 두 가치를 주고 나니 “1,000원만”한다. 줘야되나 말아야되나 갈등이 오고 가는 사이 그 사람 손에 내 돈이 어느새 날아가 있다.
그 다음 번에 갈 땐 역 광장에서 좀 지켜보았다. 담배 한 대 피우고 광장에서 노상 연주를 한 곡 듣는 시간동안 보았는데 시간상으로 계산하면, 하루 담배는 2갑너머 얻어 피울 것같고, 수익은 못 잡아도 2만원이 족히 넘을 듯하다. 조만간 ‘자립’해도 될 성싶다. 허나 그 사람을 몇 번 보진 않았지만 늘쌍 거기 있다.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노숙자들 몇은 아무렇게나 퍼드려져 잠을 잔다. 함부로 짐작할 수 없는 일이지만 대낮에 자려면 술기운이 아니면 힘들 것같은 잠을 자고 있다. 무슨 꿈을 꿀까? 쫓기는 꿈? 로또에 당첨되는 꿈? 가족을 만나는 꿈? M60을 가지고 두르륵 쏴버리는 꿈? 이 사람들이 꾸는 꿈이 무슨 꿈이든 간에 일어나면 몸이 견뎌야 하는 참혹한 현실에 부스스 눈을 떠야 한다. 술을 먹지 않으면 안되고 다시 잠을 잔다. 악순환의 반복.
이 사회에선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 나나 내 친구들이 한때 내동댕이쳐졌듯이. 아마도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악’하지 못해 좁디좁은 구렁으로 빠져든 것일 게다. 그들도 한때 잘 나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비빌 언덕과 언저리가 남보다 더 ‘빈한’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으로 인생이 갈린다.
얼마 전 늦은 저녁에 부산에 내려올 참인데 광장 한 귀퉁이에서 노숙자들이 열을 지어 잔뜩 모여 있다. 조립한 단상에는 목사가 올라 설교하고 있다. 노숙자들은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 같기도 하고 흘리는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한 쪽에선 뜨거운 김이 나는 국과 밥이 김을 모락모락 내며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밥 먹기 전에 ‘설교’다.
‘류시화’의 ‘지구별 여행자’를 보면 이런 일화가 나온다. 늙은 사두가 허기진 얼굴로 적선했다. 그는 “왜 사두가 되었나?” “고향은 어딘가?” “스승은 누구”이며 “이 생활한지 몇 해나 되었는지” 돈 줄 생각은 안하고 이것저것 물었다. 이런 말을 듣고 늙은 사두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누군가 길에서 화살에 맞아 죽어 가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화살이 어느 방향에서 날아왔는지, 누가 쏘았는지, 왜 화살에 맞았는지 묻지 않을 것이다. 그런 질문 대신 화살부터 서둘러 빼주려고 노력하는 게 정상일 것이다. 당신도 내게 질문만 해댈 것이 아니라 내 배고픔을 먼저 해결해주시오. 사흘 전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했소.”
그러니 어쨌단 말인가. 동정과 연민으로는 세상을 바꾸진 못한다. 이것은 [시스템]이다. 맞다. 그러나 시스템을 바꾸려는 사람도 개인에게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요한 일이 있는 법이다. 그것이 설혹 술이나 먹고 담배나 피우는 것일지라도.

‘사랑’이와 놀다

‘사랑’이. 우리 집 마르티스 요크셔 혼종인 암놈 개 이름이다. 마누라는 개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혹시 전생에 개였지 않나 생각될 정도다. 내가 어쩌다가 개하고 인연이 엮이게 되었는지는 안다. 그 처음, 처음을 확실히 했었어야 하는 것인데 그냥 넘겨 버린 게 오늘날 전세가 ‘역전된’ 이유였다. 그 전엔 “개는 안 된다”는 내 의견 때문에 집에서 개를 기르지 않았었다.
하루는 전화가 왔다. “지금 병원인데….” “뭐?” “아니, 그게 아니고 학원 갔다 오다 애가 개를 가져왔어요. 굶었는지 병에 걸렸는지 하여간” “그런데….” “치료를 해쥐야 할 것같애서….”
이렇게 되어 까만 개가 우리 집에 왔다. 아마 누가 애완용으로 기르다가 버렸거나 아니면 집을 나왔다가 길을 잃었던 것 같았다. 비 오는 날 추위에 떨고 있는 걸 아들놈이 보고 주워왔고, 애 엄마랑 가축병원에 갔던 것이다. 새까만 개는 얼마나 굶었는지 말라비틀어져 처음은 서지도 못했다. 녀석이 병원서 사람처럼 링겔을 맞고 나서도 아들놈과 마누라의 정성에 한 달 후에야 풀쩍 풀쩍 뛸 정도로 돌아왔다. 이름도 ‘까미’라 붙여주었다. 까미는 전에 기르던 집에서 훈련도 잘 받았는지 용변도 가리고 영리했지만 까만 털이 온 방에 흩날리는 게 탈이었다. 살려줬으니 키우는 것도 책임져야 하기에 키우기로 했지만 온 방에 흩날려있는 ‘털’을 비로 쓸 때마다 화가 났다. 볼 때마다 “이제 살려줬으니 그만 누구 주라”고 투덜거리는 건 나의 일이고, “키우기로 했으면 참아라”고 하는 건 마누라 일이다. 마누라 없을 때 구박도 준 것도 실토한다.
그런데 한번은 혼자 있을 때 이불에 묻은 털을 치우다 너무 화가 나 그 놈을 심하게 때린 적이 있었다. 그게 굉장히 미안했다. 나는 그런 기분을 보상할 기분으로 제삿날이 오자 까미를 데리고 큰집에 나들이시키자고 했고, 아들놈과 마누라는 의아해하면서도 좋아라했다.
그런데 이 녀석이 큰집에서 제사 준비하는 사이 열린 문틈으로 집을 나간 것이다. 언제 나갔는지도 몰랐다가 난리가 났다. 결국 잃어버렸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누라는 평소에 내가 ‘까미’에게 했던 태도. 오늘 안하던 짓을 한 이유를 바탕해서 내가 ‘일부러’ 큰집으로 데려와 까미를 “버렸다”는 것이다.
“긔도 생명이다. 그런데 길바닥에 버려? 이런 비인간적인 넘씨하고는 같이 몬 산다.” 이틀을 싸우고 이틀을 설명했으나 속을 뒤벼보일 수도 없고 문서도 없으니 어디를 봐도 나는 평소 구박만 일삼다가 ‘개를 버리려고’ 작정한 놈으로 치부되어 버렸다. 본래 하찮은 문제로 싸우다가 누구나 상승계단을 밟아 올라가듯이 이 일 때문에 오만가지 문제, 심지어 이 닦는 거 세수하는 꼬라지가 어떠니까지 나오다가 “째지자!” 소리까지 터진 것이다. 도장을 찍으러 가는 단계까지 갔다가 간담이 서늘해진 내가 “허구많은 사연 중에 ‘개 때문에’ 이혼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겠냐?”는 참으로 도리에 의거한 하소연에 마누라가 수긍했다. 그때부터 ‘개’에 관한한 주도권은 온전히 마누라와 아들놈에게 넘어가 버렸다.
개! 신혼 때다. 마누라가 친정에 가면 처녀 적부터 기르는 핥고 빠는 개가 있다. 미워서 나는 지금 이름도 기억하지 않는다. 한 번씩 안볼 때 발로 차곤 했는데, 이 녀석이 세상에, 마누라 사진 옆에 같은 크기로 나란히 놓여있었던 것이다. 왜 신혼 때면 보통 신랑. 신부 사진을 45도 각도로 한 장씩 넣는 그런 사진액자에 말이다.
나야 워낙 신경이 무딘 종자라 별생각 없이 그런가보다 지내다가 친구 놈들이 집에서 술 잘 먹고 가면서 “마누라 사진 옆에 니 사진이 아니고 개사진이 와 들어가 있노?”했다. 같이 웃었는데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생각할수록 맞는 지적이었다. 내가 개만도 못한 인간이가? 다음날 오지게 마음먹고 이야기했다. 마누라는 “어떻게 개하고 비교하냐?” 했지만 개하고 비교하는 나는 맘이 그런 게 아니라고 ‘숨을 고르며’ 차분하게 이해를 시켰다. 내 논리 정연함을 이해했는지 아니면 ‘아유 그만 지자’고 했는지 “그건 그러네” 했다. 해서 개 사진은 떼고 내 사진이 들어갔다. 요즘 나는 술 먹고 기분 좋으면 그 ‘무용담’을 심심찮게 얘기하는데 듣는 사람들은 같잖아 죽을라고 그런다.
하던 얘기마저 하자. 줄기로 돌아와서, 나의 억울한 누명을 빌미로 그때부터 개에 관한한 내 의견은 의결권이 없다. 있고자 해도 마누라랑 아들놈 지들 마음대로 하는 데야 의결권이고 나발이고 어쩔 수 없는 법이다. 손들고 “밥먹고 합시다” 하면 모를까.
개는 안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외출했다가 집에 나란히 들어오면 미친 듯이 핥고 빠는 것은 ‘밥주고 좋아해주는’ 마누라가 첫째다. 두 번째는 ‘좋아해주는’ 아들놈이다. 세 번째 ‘무덤덤한’ 나한테는? 실렁실렁 걸어온다. 마지못해 사랑해 준다는 하품 나는 표정으로. 근데 사람 마음이 갈수록 묘하더라. 몇 년을 우리 집에서 살더니 이 녀석은 내게도 정을 주어야 할 필요를 느꼈는지 술을 먹고 새벽에 오나 밤늦게 오나 아침에 오나 변함없이 꼬리가 떨어질 것같이 환영하고 핥고 빤다. 이러는 이놈을 계속해서 미워한다면 나는 나쁜 놈이다. 마누라는 오밤중에 가장이 들어와도 일어날 생각도 않고 쿨쿨 자는데 이 녀석은 한 번도 변함없는데 안 좋아질 수 있나. 슬금슬금 좋아졌다. ‘나 알아주는 니가 제일이다.’
요즘은 이 ‘사랑’이를 데리고 산보도 시키고, 근처 백양산에도 다녀온다. 몇 년 전까지 개 데리고 다니는 인간들을 보면 눈을 어디까지 흘기던 나였는데…. 지금은 내가 룰루랄라한다.
근데 일편단심 충성을 받는 대가로 개 지린내와 똥냄새는 감수해야한다.
“사랑아. 밖에 가자.” 이 놈, 제 똥구멍핱다가 후닥닥 뛰어온다.

산에 가다.

복직하고 나서 등산동호회에 들었다. 거기서 두어 번 산에 갔고, 그것 말고도 친구들이 하는 등산회에 묻어서 두어 번 산에 갔다 왔다. 또 집 근처 있는 백양산에 마누라랑, 사랑이랑 ‘실렁실렁’ 가곤 한다. 러닝머신도 이따금 한다. 이렇게 운동하는 걸 식탁에 반찬 나열하듯 나열해놓으면 꽤나 열심히 운동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렇지는 않다. 반찬을 어디 골고루 다 먹던가.
등산회나 동호회를 따라가면 거의 기진맥진한다. 네-다섯 시간을 거의 쉴 새 없이 오르고 내린다. 산을 거의 적의 진지로 보는 것 같았다. “목표는 저기다. 사정없이 쳐부순다.” 숨이 턱에 차도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 볼 새도 없이 줄창 걸어댄다. 나는 따라가기 위해 땅만 보고 헉헉댄다. 그렇게 따라가면 후두둑 떨어지는 내 땀과 함께 내 기(氣)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산에 와서 대지(大地)의 기(氣)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도로’ 빼앗기는 것 같다. 기를 채우는 것은 하산하고 나서다. 이제 등산했으니 술을 마신다. 산에서 빼앗긴 기를 ‘띵까띵까’ 하며 술로 채우는 것이다. 동호회나 등산회의 등산코스가 대개 그런 것 같다. 물론 안 그런 곳도 있겠지.
땀은 그렇게 흘렸는데도 집에 와서 몸무게를 재어보면 그대로거나 늘었다. 기억에 남는 거라곤 줄창 걸었던 흙바닥이다. 주변의 경치는 잠시 보았던 잔상으로 남았다. 꽃들이 어찌 지내는지, 나무는 안녕하고 있는지, 물밑엔 방개라도 살아있는지, 벌레는 공평무사하게 살고 있는지, 아무 것도 직접 물어보지 못했다. 난 이게 아무래도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은 등산 좋아하는 차량 친구와 산을 간 적 있다. 이 친구는 ‘잡학박사’다. 시시껄렁한 건 아는 건 다 알고 모르는 건 모른다. 이 나무는 이렇고, 저 나무는 이렇고, 이 산세는 어디서 왔으며…. 쉬었다가 가다가 이런저런 얘기나 설명을 듣고 사는 얘기도 하면서 늘쩡하게 다녀본 적이 있다. 그러면 그 풀들이랑 나무, 잎, 흙. 꽃, 형세. 나무들의 군락이 “니는 잘먹고 잘 사냐?”하며 말한다. 신선한 바람이 송글송글 맺힌 땀을 식히던 그 기분 좋고 서늘한 기억도 은근하다. 아파트 근처 백양산을 스틱 하나들고 실렁실렁 갈 때도 그렇다. 힘들면 앉아 쉬고 물마시고 다시 걷고 그러다 돌아온다.
이제 난 등산회는 더 이상 따라가지 않고, 동호회만 시간되면 따라가기로 했다. 두어 번째부터는 “시간 안에 천천히 갈 테니 걱정 말고 먼저 가라” 이른다. 등산길이야 정글을 헤치고 가는 것도 아니니 얼마든지 찾아간다.
봄이 왔으니 우리 ‘사랑’이 데리고 백양산에나 실렁실렁 가볼 참이다. 이 녀석은 풀들과 인사하고 나무와 코를 부빈다. 돌멩이한테도 안부를 묻는다. 그러면 나는 땀을 식히며 기다린다.

상상하다

30년 전에 나는 철도에서 밥 벌어먹을 줄 몰랐다. 11년 전엔 내가 해고될 줄 몰랐다. 10년 전 철도 조합원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오늘의 철도를 상상하지 못했다. 5년 전엔(공투본 투쟁 직후) 모두 전출가고 해고된 친구들을 보면서 낙담할 뻔했다. 2년 전에도 아들놈이 00대학이란 델 ‘꼭’ 갈 줄 몰랐고, 제 애비 앞에서 여자친구 입으로 먹을 걸 떠먹여주는 걸 상상하지 않았다. 30년 전의 세상과 현상들은 오늘의 세상과 오늘 현상들의 징조를 보였을까? 6월 항쟁. 노동자 대투쟁. 노개투도 그렇게 ‘겁나게’ 일어나리라 누가 짐작했겠는가.
그게 그런 것 같다. 적의 여론(與論)이 바뀔 때 변혁이 가능하다는 것을 느낀다.
한때는 학생들이 공부는 안하고 데모나 한다고 욕을 퍼부었던 사람들이 6월 항쟁의 주역이 되었고, 돌 같은 밥을 씹으면서도 죽어라 일하는 것을 천직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노동자 대투쟁의 주역이 되었다. 나라가 법을 정하면 고칠 수 없다고 믿던 사람들이 노개투 현장으로 나섰다.
해고되고 노민추 활동으로 끄떡거리고 다닐 때 대개의 사람들은 내게 그랬다. “‘공무원이 복직하는’ 법이 없고 그런 사례도 없었고 노조도 그런데(3중 간선제에 어용인…) 희망이 어디 있느냐?”고. 철옹성 같은 3중간선제. 조합원의 패배의식 속에서 출범한 ‘철도 노민추’는 7년 만에 “죽었다 깨어나도 바꿀 수 없다”던 53년 어용노조를 바꾸어냈다. 바꾸어내는 데는 그런 의혹을 표시하고 냉소하던 사람들이 그 주역이 되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여론으로 고립되고 깨어지고 패배하면서 절망한다. 곳곳에서 싸움은 일어나지만 어떤 것은 지리멸멸하거나 또 덜 싸운다. 절망하는 사람은 ‘돈’외에는 대안 없는 이 아랫질 풍조의 사회는 확고부동하며 깨어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어 한다. 대중이란 결국 자신의 적인 적의 여론이 되었다가, 방관자가 되었다가, 적의 논리로 말하며, 싸우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밀어댄다’며 투털댄다.
역사가 변해왔던 것은 활동가나 지도자 몇 사람 때문이 아니라 두드려도 두드려도 ‘미동도 않던’ 저변의 사람들이, 그 대중들이 변하기 때문에 깨어지는 것이다. 단지 그들이 쉽게 움직이지 않으므로, 그들이 점진적으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일시에 ‘도약’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오늘 싸움에서 실망과 낙담을 자양분으로 삼고 싸우는 사람들은 변한다는 것을 믿는다. 그 때문에 변한다. 균일한 체계에서 적은 힘을 가하면 그 체계의 완강성만 강화될 뿐 그 이상의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면 ‘돌’이 물방울 따위에 파일 리가 없다. 대중들의 수많은 ‘상충되는’ 평가들이 싸우는 사람들을 옥죄고 있지만, 돈질이 아닌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사람들은 오늘 적의 여론일 수밖에 없는 대중에 대한 사업을 냉소하거나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대중의 일상을 고스란히 빼앗긴 것을 부끄러워하고 변화를 꿈꾼다. 싸워야 할 주체들에게만 투쟁과 당위성과 철저해야 함 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어떻게 해야 세상의 배후를 알게 하고 어떻게 왜곡된 사건의 진실한 의미를 ‘쉽게’ 전달할까 고민한다. 그래야 오늘 고립된 채 싸우지만 내일은 폭넓은 저변을 갖고 싸우리라는 걸 안다.
그래서 호흡을 길게 한다. 10년쯤. 혹은 100년쯤.
세상은 이 만큼 쯤 왔다. 그렇다면 저 만큼쯤 갈 것도 뻔한 일 아닌가. 그래서 나는 상상한다. 10년쯤 뒤를. 아니면 100년쯤 뒤를. 그러면 기분이 좋아진다.
견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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