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의 월간지 현장에서 미래를

[123] 인구위기, 공동체, 재생산의 정치학

논단/ 저출산.고령화

인구위기, 공동체, 재생산의 정치학
논단/ 저출산.고령화

현장에서 미래를 제123호
백영경


1. 문제제기

2006년 6월 20일자 영국 Guardian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셰필드 대학교 생식의학연구소의 연구자들이 계산해본 결과, National Health Service가 인공생식술 경비를 전액 지원하는 경우, 한 해 1 만 명의 아이가 더 태어나게 될 것이며, 이들 어린이들이 평균 78세까지 산다고 가정할 때 일생에 걸쳐 영국 경제에 147,138 파운드를 기여하리라는 것이다. 인공생식술에 의하지 않고 출생한 어린이가 160,093 파운드 기여하는 것과 비교하면 다소 적은 액수이나, 한 명의 아이를 출생시키는데 인공생식술에 들어가는 평균 경비 12,931파운드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국가적으로 큰 이득이며, 고령화 시대에 국민연금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므로 불임치료에 대한 전폭적인 국가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국가적 이득을 산출하는 근거는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여기서 문제는 연금 자원의 고갈이라는 정치적 문제의 원인을 불임으로 인한 출생아 수의 부족이라는 생물학적 문제로 치환한다는데 있다. 따라서 연금 문제는 불임 치료라는 의학적 해결을 필요로 하게 되며, 그 경비를 지원하는 것은 국가의 역할로서 간주되어, 결국 조세를 통해 국민들이 그 부담을 지게 된다. 이러한 문제 설정과 해결 방식은 저출산 위기론 속의 남한에서도 결코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저출산, 고령화와 같은 인구 구성의 변화는 물론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또한 현재 남한의 경우와 같이 급속한 속도로 이루어지는 경우 많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정부 역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2006년 6월 제1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으로서 '새로마지 플랜 2010'을 발표하고 출산율 제고를 위하여 향후 5년간 32조를 투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인구 변화에 따른 부담은 환경이나 건강 등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기존에 존재하는 사회적 계층 선을 따라 그 부담이 다르게 나타나며, 기왕의 사회적 취약 계층에게 더 큰 부담을 지우게 된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에서 인구 위기는 거국적이고 초당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초월하여 “협력”하여 해결하여할 “공동체”의 위기이지, 정치적 입장에 따라 대응이 갈릴 수밖에 없는 정치적 사안으로는 간주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대부분 인구 문제의 해결을 더 많은 출산으로 국한해서 보게 되면서, 저출산의 해결은 개별 여성들의 애국심에 호소하거나 개별 가정에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향, 아니면 더 손쉽게는 여성의 출산에 대한 사회적 압력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쏠리게 된다.
한편 저출산 위기론은 기왕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사회 문제들을 다르게 해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한국에서 농촌의 인구 감소와 고령화 문제는 일반적으로 도시와 농촌 사이의 불균형 문제로서 논의되어 왔으며, 사실상 출산율 저하에 따른 것이라고 보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저출산 위기론 속에서 농촌 지역의 초고령화 문제는 이제 저출산 현상의 심각함을 드러내는 하나의 지표로서 매스컴에 오르내린다. 그런데, 한국 사회 전반의 출산율이 올라간다고 해서, 농촌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리라 믿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2005년 현재 전체 인구의 43.8%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으며 2015년에는 50.1%를 넘어갈 것이라고 한다. 지역간의 경제적 격차 혹은 계층간의 건강 격차 문제보다, 출산율 하락이 더 중요한 문제라는 근거는 과연 무엇이며, 그 선택적 판단은 누가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구 문제를 사람들이 삶을 이해하고 설계하며 또 정치적 개인으로서 활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치는 정치적 사안으로서 접근하는 일이다.

2. 통치 기술로서의 인구

인구 위기론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인구 문제가 정당이나 파벌, 정치적 입장을 초월한 문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출생률이 2.1이 되어야 하며, 1+1=1.08에 불과한 현 상황은 문제가 있어도 단단히 있는 거 아니냐는 주장에 누가 쉽게 이의를 달겠는가. 그러나 인구 통계를 내고 문제를 찾아내서 관리를 하는 것은 제대로 된 근대국가라면 당연히 하는 일상적 행위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인구 문제는 사실 진단부터 처방과 개입까지, 즉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치적인 사안이다. 인구수를 집계하는 문제가 뭐 그리 정치적일 수 있으랴 생각할 수도 있으나, 단순히 인구를 셈할 때조차 시민권의 소유자/비소유자, 합법/비합법 체류자로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가르게 된다. 시민이라고 하더라도 혼인 여부, 성적 지향, 흡연 여부 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정상/비정상을 가르게 되며, 출산율, 이혼율, 혼인율, 사망률, 수명, 인구 이동률 등등은 끝없이 정상/비정상의 기준에 의해 평가된다. 보험사가 보험료를 산출할 때나 사고 보상을 할 때 확실히 알려주듯이 개인의 가치는 삶의 방식, 연령, 병력, 직업 등등에 따라 달리 평가된다. 다양한 가족을 인정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라고 정부도 인정하지만, 출산율의 잣대로 보면 거의 모든 사회의 변화가 다 문제요 위기의 근원이 된다. 젊은 세대가 결혼을 안 하는 것도 문제, 결혼이 늦어지는 것도 문제, 동성애는 말할 것도 없이 문제, 가족의 해체도 출산율에 악영향을 주니 문제다. 혼인 연령이 늦어지는 것은 고령출산을 가져오기 때문에 불임을 늘리고 출산 자녀를 줄이는 문제도 있지만, 또 임신과 출산 과정의 위험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보험재정에 부담을 가져오기 때문에 문제라고 하면서, 바람직한 행동과 문제 행동을 끝없이 분류하는 것이 인구 논의다.
국가가 "적정 인구"의 재생산하기 위해 인구를 관리하는 방식이나, "인구"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며 매우 정치적인 성격을 띤다. 당면한 인구 문제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국가 통치 방식이 달라지기도 하며, 개입할 수 있는 방식과 부문도 달라지는 것이다. 서유럽에서 인구가 하나의 독립적이고 자연적인 실체로서 인간이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을 지칭하는 명사가 된 것은 18세기 경의 일이며, 통계학의 발달에 따라 19세기 중반 이후 사회 는 인구 집단과 동일시되어 하나의 큰 몸을 이루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뒤르켐이 자살에 대한 연구에서 집합체에서는 개별적인 사건들과는 다른 질서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 것과 같이, 집단적인 사회적 몸은 그 집단 현상에서 나타나는 빈도를 통하여 하나의 전체로서 연구될 수 있다는 “통계학적 사고”가 등장한 것이 이 시기인 것이다. 그 결과 인구 집단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이며 이 전체 집단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서는 일부의 권리를 제약할 수 있다는 사고가 자리를 잡았다. 전염병 예방을 위해 검역이나 강제 예방 접종을 실시한다던지, 상시적인 질병 감시 체계를 갖추고 개인들의 일상적인 행위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게 된 것이다. 통계를 위한 정보의 수집이 일회적인 것에서 국가의 항상적인 업무가 되는 전환은 인구 개념이 등장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 되며, 푸코가 주장하듯이 인간들은 이제 “공통선”을 위해 관리, 통제 가능한 독립적 실체, 즉 “인구”가 된다는 것이다. 국가는 국민들의 생을 관리하고 건강과 복리를 증진시켜야 할 의무를 가지며, 이를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로 삼게 된 것이다.

3. 인구와 재생산의 정치학

UN 발표에 따르면 1995-2000년 기간 동안 인구가 대체율을 밑돌고 있는 국가는 61개국이며,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인구는 세계인구의 44%에 해당하며, 이 중 많은 유럽 국가들의 경우, 출산율 저하는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해묵은 문제이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경우 19세기 이래 독일이나 영국 등 유럽 다른 나라들에 비해 낮은 출산율이 문제가 되면서 1세기 이상 출산장려 정책을 펼친 결과 유럽에서 가장 높은 1.93의 합계출산율을 보이면서, 한국이 따라 배워야 할 모범 사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임신과 출산에서 혼인여부에 따른 차별이 금지되어 있으며, 직장과 가정을 병행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지원 등, 프랑스의 출산장려책에는 물론 본받을 점이 많다.
그런데, 프랑스의 출산장려책의 정치학을 좀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왜 저출산 위기에 대해 단지 더 나은 출산장려책을 요구하는 것으로 맞설 수 없는지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프랑스와 같은 대표적인 친출산국가라고하더라도, 모든 사람의 출산을 장려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작년 11월 파리 근교 사태에서도 드러났듯이, 프랑스 사회가 이주자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시선은 곱지 않다. 프랑스 국가의 관심은 인구 증가세를 유지하면서도, 이주에 의한 증가나 이주민들로부터 태어나는 자녀수를 억제하는데 있다 (2004년 프랑스 인구는 38만 7천 명 정도가 증가했는데, 그 가운데 이주에 의한 증가가 10만 8천 명 정도로 집계). 다시 말해, 전체 인구가 증가하는 추세에 있으나 여전히 백인 중산층들의 출산율이 낮은데 대한 우려가 존재한다. 작년 9월 프랑스 정부가 세 번째 자녀를 출산하는 여성의 경우 매월 최대 1000유로까지 현금으로 보조금을 지급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었을 때, 이 시책이 중산층 전문직 여성의 출산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라는데 주목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러한 정책이 문제가 되는 것은 시행과정에서 진정한 프랑스 인이란 백인 중산층이라는 개념을 확대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출산장려책의 와중에서도 특히 출산율이 높다고 지목되는 서아프리카 계 출신의 이민을 제한하고, 이미 이주한 사람들의 출산율을 낮추기 위한 여러 가지 조처들을 취한다. 파리 근교 사태에 대한 국내외의 보도에서도 접할 수 있었듯이, 이주자들의 주거 부족 문제, 청소년 문제, 실업 문제, 가정 폭력 문제는 모두 아랍계와 아프리카계들의 높은 출산율 때문으로 돌려지곤 한다. 결국 아무리 좋은 출산장려책이 마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누구의 출산을 장려하고 누구의 출산은 환영받지 못하는가라는 "재생산의 정치학"(the politics of reproduction)의 문제는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저출산에 대한 우려는 단지 낮은 출산율의 문제가 아니라,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인구는 감소하는 반면 바람직하지 못한 인구는 증가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나온다. 다른 유럽 국가들의 경우에도 낮은 출산율에 대한 고민은, 지역 내에 거주하는 인구 자체가 감소한다거나 그로 인해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중동 계 이민이 증가하는데 비해서 진짜 유럽인 들이 감소한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이민 정책을 통해 안정된 인구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미국에서도 라티노나 흑인들의 비율이 증가하고 백인이 감소한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가 존재하며, 여전히 인구 감소보다는 인구 폭발이 국가의 의제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인도에서조차 무슬림 보다 낮은 힌두들의 출산율을 높이는 방안이 심각하게 논의된다. 저출산 담론의 민족 혹은 국가중심성이나 순혈주의에 대한 비판도 이미 이루어지고 있지만, 민족이나 국가 혹은 지방자치체와 같은 특정한 단위를 떠나서 출산율 숫자 그 자체로 만은 우리에게 아무런 불안을 일으킬 수 없는 것이고 보면, 저출산에 대응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저출산이라는 문제 설정 그 자체가 이미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사실 한국에서도 저출산에 대한 우려는 단지 출산율의 하락에 대한 우려만은 아니다. 이는 이주자들의 증가하는 현상에 대한 우려이기도 하며, 결혼과 노동을 목적으로 한 "한국만 못한 나라"로부터 인구가 유입되는 한편,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한국인"들은 원정출산, 조기유학, 중산층 이민 등으로 유출되는데 대한 우려이기도 하다. 또한 국가적으로 출산율이 다시 높아진다고 하더라도, 저절로 농촌에서 아기울음 소리가 들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농촌의 문제는 단지 출산율만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1> <<한겨레신문>> 2006.2.25일자 사회면 하단에 실린 광고.

따라서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면서도, 결혼 이주를 통해 한국에 온 베트남이나 필리핀 여성들의 다산 경향을 끝없이 경계한다. 한국의 경우도, “국제결혼”을 저출산의 대안으로 타진하면서도 혼인 이주를 통해 한국에 온 베트남이나 필리핀 여성들의 다산 경향에 대해서는 우려가 존재한다. 국제결혼중계업체들은 생김새가 한국인과 다르지 않아 자녀를 낳아도 혼혈임이 눈에 띄지 않을 것이라고 몽골 여성을 선전하고, 상대적으로 외모가 두드러지는 필리핀 여성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시부모로부터 인종적 편견과 혼혈아동에 대한 거부감에 따른 낙태를 요구받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노컷뉴스 2006. 5.9) 낮은 출산율이 아무리 큰 문제라고 해도 모두의 출산이 환영받지는 못하는 것이다. 현재 일어나는 국제결혼의 증가는 '한국가족'이 더 이상 한국 내에서 재생산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저출산 문제를 단지 ‘한국가족'의 재생산 문제, '한국가족'의 낮은 출산율의 문제로 읽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오히려 한국에서 인구를 둘러싼 논란은'한국가족'의 경계를 둘러싼 경합의 장이라고 보아야 한다. 베트남 여성은 유교권에 속하기 때문에 제사를 잘 지내고 자녀교육을 잘 시키며, 피부색이 비슷하여 2세를 낳아도 표시가 잘 나지 않고, 출산 후에도 체형이 변화하지 않는다. 몽골 여성은 같은 우랄알타이어 족에 속하기 때문에 한국어 습득이 쉽고, 자녀 교육에 유리하다. 이 과정에서 아시아 국가 내부의 위계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낡은 위계 역시 재생산되는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은 서구화되어 2세의 체질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며,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다리가 짧은 아시아인에 비해 러시아 여성들은 다리가 길며 체형에 균형미가 있다. 필리핀 여성들 역시 국제화 시대에 2세들에게 서구화된 생활방식과 영어를 가르쳐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선전된다.
1990년에서 2005년 사이 여성결혼이민자는 159,942명에 이른다. 이에 따라 2006년 4.26일 열린 빈부격차 및 차별시정위원회는 순혈주의를 대신하여 다문화관점을 확산시키고 여성결혼이민자에 대한 한국어교육 등 사회적 지원 방안을 마련할 것을 결의하고 있다. 차이에 대한 감수성과 배려가 매우 부족한 한국 사회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문화주의의 필요성을 주창하는 글이 오히려 신화에 불과한 단일민족을 사라져갈 뿐 실재했던 실체로 간주하거나, 인종주의를 설파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가족이 존재하고, 다문화가족이 한부모가족, 장애인가족 등 "다양한" 가족의 한 종류로서 존재한다거나, 아니면 결혼이민자들을 한국가족 내부로 흡수통합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한, 다양함은 평등한 공존이 아닌 위계의 또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인구문제는 단지 출산율의 문제나 결혼할 여성 수의 부족이 아니며, 인구의 흐름도 단지 한국 내로의 유입의 필요성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결혼이민자의 증가와 외국인 노동자의 증가 못지않게 조기유학, 원정출산, 해외취업, 기러기 가족의 증가, 이혼의 증가, 비혼만혼 경향의 증대, 돌봄 노동의 공백 등 역시 글로벌 시대, 한국에서 "가족"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이다. 이러한 사태의 복합성은 당면한 문과제가 단지 이주에 대한 허용적 태도만이 아니며, "한국인"은 누구이며 "한국의 문화"는 무엇인가, 또 "한국가족"이란 무엇인가가 함께 변화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모 시민단체에서는 얼마 전 단체의 첫 사업으로 시민의 아이디어에 기반을 두고 “초기 임산부를 위한 배지 캠페인”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초기 임신 기간이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표가 나지 않아 초기 임산부들이 사회적으로 배려를 받지 못한다면서, 초기 임산부 보호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확산시키기 위해 국민 공모를 통해 임산부 배지 디자인을 보급하고 시민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홍보하자는 것이 사업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정부와 산부인과학회 측에서는 작년 제정된 임산부의 날과 연계하고자 하는 요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 단체의 기본 입장은 캠페인이 정부의 출산장려책과 연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출산을 장려하진 않으면서 현존하는 임산부 문제에만 집중하면서, 모성친화적이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를 만들어나가자고 제안한다.

필자는 임산부에 대한 배려가 반드시 출산율을 높이겠다는 관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성건강권 등 다양한 이슈와 결합될 수 있는 사안이며, 우리 사회가 임산부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턱없이 부족한 사회라는 판단에는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캠페인이 몹시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말하자면 길겠으나, 우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임산부의 보호라고 하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아름다운 일 같이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앞서 이야기 했다시피 모든 사람의 출산이 환영받는 것이 아닌 재생산의 정치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초기 임산부 뱃지를 당당히 달고 다니며 사회적 배려를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생김새가 “정상의 한국인”과 눈에 띄게 다른 이주여성, 장애를 가진 여성, 10대 여성이 뱃지를 달고, 지하철에서 초기 임산부에게 자리를 내어 달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심지어는 행색만 몹시 남루해도 학력이 낮아보여도, 임산부 뱃지는 그들에게 보호와 배려의 상징이 아니라, 과연 저 사람이 애를 낳아 기를만한 사람인지에 관한 사회적 사찰과 감시, 개입의 상징이 되고 말 것이다 (보호의 취지로 시작해서 “의무”로만 존재하는 “초보운전” 표식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왜 어떤 사람들의 출산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지, 그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맥락을 떠난 임산부에 대해 보호와 배려를 이야기 하는 것은 단지 현실성이 없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차별과 배제의 기제로 전화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문제는, 주최 측에서 주관적으로 저출산과 연동시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임신, 출산, 양육에 대한 논의는 이미 저출산 위기론이라는 커다란 자기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임산부에 대한 순수한 배려조차, 이 사회에서는 저출산 위기론과의 관련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배려”를 필요로 하는 많은 집단들 가운데 초기 임산부가 선택된 것이 과연 비정치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캠페인이 과연 어떤 누군가에 대해서는 소외감과 박탈감을 불러일으키고, 출산에 대한 압박으로 작용하지 않겠는가? 임산부에 대한 배려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거꾸로, 저출산 위기론이 위세를 떨치는 이 땅의 현실에서는 임산부에 대한 당연한 배려마저도 출산장려책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저출산 위기론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근거이다.

4. 맺음말을 대신하여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구 문제를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은 사회 각계각층이 합의를 봐야 할" 가치중립적이고 공동체의 공동운명이 걸린 사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삶을 이해하고 설계하며 또 정치적 개인으로서 활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치는 정치적 사안으로서 접근하는 일이다. 특히나 현재 인구 담론이 강화시키는 불평등이나, 인구 담론이 과연 누구를 중심으로 위기를 논하며 또 어떤 부분에만 집중하는지, 또 그 안에서 누구의 재생산은 가치 있는 것으로 취급되며, 누구의 재생산은 무시되는지, 그리하여 어떤 사람을 정상적인 한국인, 그리고 정상적인 한국 가족으로 생산해내는지 등 즉 재생산의 정치학을 읽어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고 하겠다. 이를 위해서는 단지 저출산 고령화 위기가 아니라고 보아, 개입하지 않는 것은 곤란하다. 또한 무상의료 무상교육의 도입이라는 원론적이고 근본적인 처방에서 나아가, 정부 저출산 대책이 가져오는 의료 자원의 재분배 방식과 그 영향을 구체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혹시 출산율 제고라는 목표에 가려서 당장 필요한데도 정책적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부분은 없는지, 또는 불요불급한 일도 아닌데 출산율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과잉된 의료적 개입을 지원하는 것인 아닌지를 따져 보는 식의 조금 더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개입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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