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의 이해, 그 세번째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는 세 번째 글로, 이번 호에서는 그 해결방안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가 볼까 한다. 해결 가능성이나 그 방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과거청산운동이나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운동을 해온 사람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한 내용을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겠다. 국가를 상대로 해온 진상규명운동이었던만큼 많은 부분이 국가라는 틀 내에 한정지어져 있다는 것을 미리 고백해둔다. 비판적 검토를 요청한다. 다다음 호부터는, 지면이 허락한다면,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현안이나 쟁점을 다루었으면 한다.)



7. 민간인학살 진실찾기, 그 의미


요즘 ‘과거청산’ ‘과거사 정리’ ‘과거사 규명’ ‘진실규명’ 등의 말이 혼용되고 있다. 어느 경우나 은폐되고 왜곡된 진실, 그것도 대체로 과거 국가기관에 의해 저질러진 불법행위의 진실 규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는 하나, 그 추구하는 목표와 담고 있는 의미는 조금씩 다르다. 가장 많이 쓰이는 ‘과거청산’이라는 말은 ‘범죄자가 손 씻고 새 삶을 산다’는 의미를 짙게 풍기니, 그 주체를 국가, 그중에서도 대한민국으로 좁혀보면 ‘국가, 즉 대한민국이 자신이 저지른 이전의 범죄행위를 청산하고 거듭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과거청산’의 포괄적인 의의를 돌아보고 나서, 그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민간인학살 진실찾기의 의미를 새겨보기로 하자.


과거청산의 의의

오늘의 한국사회에서의 과거청산은 우선 국가범죄 행위를 가능케 하고 그 진실을 은폐 왜곡해왔던 옛 질서를 해체하고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청산은 과거와 현재의 올바른 의사소통을 통해 잘못된 ‘과거’의 재발을 방지하고 인권사회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이다. 따라서 과거청산은 옛 질서의 제도적 유산을 청산하는 작업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과거청산은 사회 전환기의 정의를 세우는 초석이기도 하다.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국가와 사회, 사회성원들간의 신뢰 구축에 근본적인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과거청산은 과거의 진실을 규명하여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이를 통해 사회의 도덕적 가치, 국가와 사회의 신뢰를 재정립하는 의의를 지닌다. 그럼으로써 과거의 기억과 고통에 대한 사회 심리적 치유도 가능해지고 사회 전체적으로 민주적 가치를 내면화하는 중요한 계기도 마련될 것이다.

과거청산은 또한 국가범죄의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적 틀을 마련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과거청산은 국가폭력이나 인권유린이 국가간, 국가와 사회간, 국가와 개인간에 더 이상 용인되지 않을 중대한 범죄임을 명확히 하고, 그럼으로써 동일한 범죄행위의 재발을 방지하는 합리적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의 목적과 의미

한국전쟁전후의 민간인학살 문제는 ‘과거청산’의 여러 과제 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수께끼를 담고 있는 한국 현대사 최대의 블랙박스다. 그 속에 대한민국 탄생의 비사가 숨겨져 있고, 오늘 우리 사회에 깊숙이 박혀 있는 각종 문제와 폐해의 뿌리가 거기에 닿아 있다. 민간인학살 진실규명은 그동안 묻혀져 있던 그 비사와 뿌리를 들추어내며 대학살의 배경과 진실을 밝혀 우리 사회와 국가를 다시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작업이다. 그 목적과 의미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해원이다. 학살의 직접 피해자는 피학살자들과 그 유족들이다. 학살 규명은 피학살자들과 유족들의 맺힌 한을 풀어주는 것, 즉 해원 과정을 통해서 피학살자와 그 유족들이 국가와 사회의 당당한 성원으로 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한, 남쪽만 해도 백만 원혼, 수백만 유족들의 한을 풀어주지 않고서 제대로 선 사회를 꿈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백만 원혼의 해원은 사회와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일이다.

둘째는 인권이다. 학살, 특히 전쟁중의 국가권력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은 인간사회 최대의 인권유린이며, 인간성(인륜)에 반하는 최고의 전쟁범죄이다. 따라서 학살규명은 우리가 인간이고 우리가 사는 곳이 인간사회임을 확인하는 가장 근본적인 일이다. 국가권력에 의해서 가장 근본적인 인권인 생명권을 박탈당한 학살 문제를 밝히는 일은 만연한 생명경시 풍조에 경종을 울리고, 인권에 대한 방호벽을 굳게 치는 일이며, 나아가 학살을 가능케 한 사회구조를 바로잡아 다시는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주춧돌을 놓는 일이다.

셋째는 평화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학살을 동반하며, 더욱이 최근에 올수록 전쟁은 전투원보다도 더 많은 비전투원 민간인의 피를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학살규명을 통해 전쟁의 참상, 그것도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쟁에 휩쓸려 들어간 수많은 민간인들의 피해를 추적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이고 우리는 왜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넷째는 민주주의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집단학살의 대부분은 국가가 주권자인 다수 국민을 적으로 몰아 불법 학살한 논리 모순의 국가 범죄다. 학살규명은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재확인하는 일이며, 집단학살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거듭남을 통해 나라의 기초를 다시 세우는 운동이다.

다섯째는 공동체의 형성, 복원이다. 우리 사회는 내 손에 난 생채기 하나, 내가 당한 작은 불이익에 대해서는 핏대를 올리면서도 타인들의 아픔과 피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 짝이 없다. 보신주의와 가족주의, 패거리주의도 수위를 넘어섰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차별도 심하다. 이런 현상들의 뿌리를 추적해 들어가 보면 전쟁중의 대학살과 깊숙이 맞닿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도하면서도 방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공동체 의식이 해체, 마비돼버린 것이다. 학살규명은 더불어 사는 인간세상 만들기의 한 과정이다.

여섯째는 자주와 평등, 통일이다. 한국전쟁과 대학살은 일제지배 후의 해방공간에서 어떤 나라를 세우느냐는 내부 진통을 겪고 있던 중에 외세가 개입하면서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미국의 개입과 전시 작전권 장악이 우리 민족의 진로에 미친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결과로 분단이 완전 고착되어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은 이후 반세기 동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고, 남쪽에 고착된 극우반공체제는 한동안 자주, 평등, 통일에 대한 지향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다시피 했다. 한국전쟁전후의 민간인학살 문제의 해결은 자주와 평등, 통일로 가는 길목이다.

일곱째는 역사 재정립이다. 학살규명을 통해서 숨겨지고 뒤집힌 역사를 밝히고 바로잡아 후대의 교훈으로 남겨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는 치를 떨면서도, 또 일제의 만행, 코소보, 동티모르의 학살에는 분노하면서도, 우리 역사의 짙은 그늘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왜곡된 역사, 사회 의식이 만연해 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는 거품 물고 항의하면서 우리 역사의 왜곡에는 침묵하는 것도 큰 문제다. 한국전쟁기의 대학살과 관련해서도 ‘머리에 뿔난’ 인민군과 공비, 간첩들의 만행만 이야기했지, 그 10배 가까이에 이르는 우리 국군과 경찰, 우익단체, ‘우방국’ 군대인 미군의 만행에 대해서는 침묵, 왜곡해왔다. 가끔은 학살자를 뒤바꾸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다시는 이런 뼈아픈 역사와 역사왜곡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의 아픈 부분인 전쟁전후 민간인학살의 진실을 소상히 밝히고 그 교훈을 세세토록 깊이 새겨야 한다. 민간인학살 진실찾기는 왜곡된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이고, 그것은 또한 나라와 사회를 다시 세우는 일로 직결된다.





8. 민간인학살 문제, 어떻게 풀어야 하나?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민간인학살은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기본권(생명권, 신체 불훼손권)으로 보나, 국제법상의 여러 원칙으로 보나 명백한 불법행위이자 추악한 전쟁범죄였고, 반인도적인 인권유린 행위의 극치였다. 그럼에도 지난 반세기 이상 국가는 그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와 유족을 구제하고 사회정의를 바로세우기는커녕 오히려 국민들의 정당한 권리인 진실규명 요구를 번번이 압살 또는 묵살함으로써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이중, 삼중의 피해를 입혀왔다. 따라서 진실을 밝히고 피해 구제를 할 국가의 의무는 그만큼 더 무거워졌다.

국가가 정의의 실현을 그토록 지연시켜 피해를 가중시켜온 책임을 조금이라도 더는 유일한 길은 이제라도 문제를 확실하게 푸는 것뿐이다. 다행히도 해외의 많은 사례들이, 그리고 국내의 그간의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어떻게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민간인학살 문제 해결의 원칙과 경로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문제 해결의 원칙과 경로

사건과 배경의 특수성에 따라,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문제 해결의 원칙과 경로는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지만, 인류의 지혜는 과거청산의 원칙과 경로에 관한 몇 가지 합의를 이끌어냈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진상규명이다.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진상조사를 통한 진실규명이다. 진상이 밝혀져야만 후속 조치도 취할 수 있고, 길을 잃지 않고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와 더불어 학살의 배경과 함의를 연구, 정리하는 작업도 병행돼야 한다.

둘째, 피해회복이다. 불법 학살당한 이들을 이제 와서 되살려낼 수는 없지만, 이제라도 그에 상응하는, 아니 최소한이나마 책임을 다하는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잘못 규정된 피해자들의 정치적, 법적 지위를 회복하고 사회적 오명을 바로잡아 명예를 회복해야 하며, 공권력이 위법하게 행사됐음을 시인하는 법적 절차이기도 한 피해배상도 적정 수준에서 고려돼야 한다. 또한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위로와 보호 조치, 피해자들에 대한 추념,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돌보는 기관의 설립과 지원 등의 조치도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책임자의 처벌과 사죄다. 국가의 책임 인정, 국가와 가해자의 사죄와 처벌은 공권력의 불법적 행사를 시인하는 것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또한 사회정의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가해자 처벌은 시간적 격차와 사회통합 등을 감안하여 책임자에 대한 상징적 조치로 국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불법 행위로 취득한 부당한 부와 명예는 박탈하는 것이 사회정의에 부합할 것이다.

넷째, 재발방지책 마련이다. 사태의 재발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방책을 마련하고 위령공간과 사료관 건립, 위령제 등의 각종 위령사업, 역사 기록과 교육 등을 통해서 끔찍한 학살의 진상을 널리 알리고 기억하여 인권과 평화의 중요성, 더불어 가는 인간사회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학살규명의 궁극적 목적이자 최고의 가치다.

이중에서도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진상규명이다. 철저한 진상규명 없이는 제반 후속조치도 불가능하고, 우리 사회의 성찰과 거듭남도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상규명을 중심으로, 유념할 부분과 쟁점들을 살펴보자.


(1) 진상규명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 문제는 그 규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조차 없을 만큼 방대하고, 한 지역에도 다양한 유형의 사건들이 병존하며, 또 개개의 사건들이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개개의 사건별로 문제에 접근해서는 진상을 밝히기가 쉽지 않고 조사 효율도 떨어진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접근해야만 개별 사건 하나하나의 전모도 밝힐 수 있고, 민간인학살 전체의 진상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진상조사기구의 발족과 함께 이미 드러났거나 새로 신청이 들어온 제반 사건들과 피해 규모에 대한 기초조사가 필요하다. 사건들이 어느 정도 알려진 한 지역을 골라 모든 유형의 사건들에 대해 표본조사를 해보는 것도 좋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조사의 윤곽을 그리고 조사방법을 정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제반 사건들의 구조와 배경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제반 사건들이 일어난 당시의 상황을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와 증언, 많은 사건들에 공통된 자료를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하고, 개별 사건들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 뒤에도 사건 유형별 자료 추적을 계속해야만 조사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자료를 입수하는 대로 체계적으로 데이터베이스화하여 모든 사건의 조사에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어서 개별 사건의 조사에 들어가, 사건 개요, 일시, 장소, 사건 배경, 사건 전개, 가해자와 피해자, 피해 정도 등을 조사한다. 이 경우, 병합 조사가 가능한 같은 지역, 같은 유형의 사건들을 최대한 한데 모아 동시에 조사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만일 사건의 전모를 낱낱이 밝히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피해자라도 최대한 확인해야 한다. 여의치 않을 경우 피해 구제라도 가능케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씨줄과 날줄을 잘 엮어가야만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의 전모를 밝힐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하나의 사건이 횡으로 종으로 다른 사건들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사건유형에 상관없이 바닥을 훑는 지역별 조사와 그 배경이자 종합인 유형별 사건조사를 두 축으로 하고, 거기에 특수사건 조사를 별도로 진행해야만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의 전모를 밝힐 수 있다.


(2) 피해회복

명예회복과 배상을 중심으로 피해회복 문제의 쟁점 몇 가지를 검토해보자. 먼저, 형사처벌의 부당성을 바로잡는 의미를 지닌 재심 문제의 경우, 민간인학살은 대체로 재판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나 군사재판에 부쳐진 경우에는 최대한 재심 요건을 완화하여 다루어야 한다. 자료의 부재로 재심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전쟁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특별법’으로 무효화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부역자가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하나는 국민에게는 안심하고 서울을 사수하라고 하면서 정작 정부는 한강다리를 폭파하며 철수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부역행위 처벌에 대해서는 재심의 길을 열어놓아야 한다. 연좌제에 의한 인권침해의 경우에는 불법적으로 연좌제를 적용한 주체가 국가이므로 마땅히 피해자의 명예회복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배상 문제의 경우, 한국전쟁기의 민간인학살은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명백한 반인륜 범죄로서 보상이 아닌 배상의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민간인 집단학살의 경우, 피해자를 규명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피해자 신고는 가급적 모두 받아야 한다. 군경과 같은 국가권력기구가 아니라 우익 청년단 같은 준 국가기구에 의해 벌어진 학살도 국가가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

배상 방법으로는 ‘배상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 경우 국가가 배상해야 할 총 규모를 감안하여 ‘상당한 액수’의 상징적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피해자 규명, 당장의 국가예산 등의 측면에서 배상금 지급에 어려움이 따를 경우에는 개인 배상액을 낮추는 대신 집단 배상하는 방법도 감안할 수 있고, 이후 적절한 시기의 ‘추가 배상’의 길을 열어놓을 수도 있다. 배상과는 별도로, 의료 구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즉각적인 구제조치를 시행해야 한다. 전쟁기간 동안에 부역행위와 같은 죄를 물어 국가가 부당하게 재산을 빼앗았거나 개인이 다른 개인의 재산을 강탈한 경우에는 민사상 소멸시효를 배제하여 원상회복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3) 책임자의 처벌과 사죄

한국은 2002년에 반인도적 중대범죄에 대해 공소시효 배제를 인정하는 로마규정에 가입했고, 현재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의 이행입법을 추진중이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과거청산을 위해서는 범행시기와 상관없이 공소시효를 인정하지 않는 ‘전쟁 및 반인도적 범죄에 관한 시효부적용 UN협약’(1968년 체결)에도 가입해야 한다.

공소시효는 배제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우리의 법문화나 현실에서 그 가능성이 의문시되므로 이를 위한 ‘특별연구위원회’를 설치하여 충분히 검토한 후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것이 좋다. 소급적용 문제 또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야 한다. 그리고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국가가 책임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과거청산이 이루어져야 한다.

처벌의 가능성을 열어놓더라도 현실적으로 책임자 처벌이 불가능할 수 있다. 특히 한국전쟁의 경우 가해 책임자 대부분이 사망한 상태에서 일부 살아남은 하수인들만 처벌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형사처벌을 중심에 두기보다는 사회적 처벌에 준하는 진실고백을 최우선의 원칙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진실을 고백할 경우 최대한 관용을 베풀고 처벌을 면제해주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가해자가 이미 사망한 경우에는 진실규명과 사회적, 역사적 평가를 통한 처벌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국가는 민간인학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책임자 모두를 대표하여 사죄해야 한다. 국가의 사죄는 국가권력이 과거에 저지른 범죄에 대해 스스로를 처벌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4) 재발방치책 마련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피해자 유해발굴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여 위령하되, 각 현장은 상징적 규모로 보존하며 이를 포괄하는 국가 희생자 묘역을 몇 군데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지역별 사건 현장의 경우 추모비를 세우고, 위령제나 추모제는 국가 보훈처와 지자체가 공동으로 관할하며, 전쟁기념관과 선정된 몇 곳에 민간인 학살문제를 다루는 추모공간과 전시공간을 마련한다. 국가 유공자 중심의 보훈체계를 재정비하여,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의 범주를 명확히 한 후 민간인학살 피해자도 국가 보훈체계에 적극 편입시켜야 한다.

그와 함께, 국가폭력의 피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명시하여 적극 교육해야 한다. 중등교육 이상의 과정에 반드시 민간인학살과 국가폭력에 관한 내용을 포함시켜야 한다.





9. 해외에서 배우기


2차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에서는 집단학살을 비롯한 전쟁범죄를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그 처벌 및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48년 12월 UN 총회에서도 ‘집단살해의 예방과 처벌에 관한 협약(제노사이드 협약)’을 채택한 바 있고, 2002년 7월에 발효, 설립된 국제형사재판소에서는 집단살해죄, 반인도적 범죄, 전쟁범죄, 침략범죄를 재판에 회부하여 처벌까지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국가 체계하에서 국제법은 여러 가지 한계가 있어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학살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국제사회에서도 진지한 협의를 통해 집단학살과 같은 끔찍한 범죄행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국민국가 내에서 국내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편이 훨씬 구속력이 강하다. 2차대전 이후 각 나라는 저마다의 현실에 맞게 집단학살과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해왔다. 각 나라의 정치상황과 민주주의 성숙도에 따라 전개되는 양상은 각기 다르다. 해외의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나라의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과거청산의 청사진을 그려보자.


해외의 과거청산 모델

해외 각국의 과거청산 사례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네 가지 모델과 대표적인 사례들을 살펴본 후, 널리 알려진 몇몇 나라의 경우를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1) 사면 모델 - 망각의 합의 (프랑코 이후 스페인 모델)

과거사를 공론화는 하되 사법처리는 피하는 방식이다. 타협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구체제가 연속되는 측면이 강했고, 과거청산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았으며, 민주화 초기에 경기침체가 계속되었고, 과거청산에 착수하려던 때 마침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테러가 급증했고, 중대한 인권침해가 발생한 시기가 너무 먼 등의 여러 요인이 어우러지면서 이른바 ‘망각의 합의’ 모델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이전의 ‘합의’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면서 새로운 불씨가 일고 있다.

(2) 역사 규명 모델 - 기억의 합의 (과테말라 모델)

진상은 최대한 밝히되 정부의 은밀한 사면조치를 통해 사법처리는 피하는 방식이다. 극심한 빈부격차와 장기간에 걸친 폭력적 좌우 내전, 유엔 중재하의 협상과 그에 따른 평화협정의 구속력, 정치사회적 주도세력의 교체 실패에 따른 정치적 의제 부재 등의 요인이 겹친데다, 역사규명위원회의 진상규명 및 사법처리 권고를 정부가 무시하고 진상규명 세력에 대한 민간테러까지 일어나면서 이런 모델이 만들어졌다.

(3) 기억 및 처벌 모델 - 약간의 처벌을 통한 기억 (남아프리카공화국 모델)

진상을 최대한 밝히는 대신, 사면 신청을 접수받아 심의한 뒤 상당 부분은 사면 처리하고 사법처리는 일부에 국한하는 방식이다. 타협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타협의 한 부분으로서 진실화해위원회가 설치되어 조사에 착수했고, 진실을 고백한 자 등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졌다.

(4) 처벌 모델 - 단절의 합의 (전후 독일, 에티오피아, 그리스 모델)

인권침해의 주요 책임자를 사법처리하는 방식이다. 구체제의 정당성이 크게 붕괴한 뒤 의회 다수당을 기반으로 하는 새 정부가 들어서고, 구세력의 지속적 위협에 대한 사회적 반발이 이는 가운데, 반나치 저항 경험 등을 가진 정치지도자의 의지가 크게 작용하면서 처벌 중심의 과거청산이 이루어졌다.


해외의 주요 사례

위의 네 가지 모델은 나라마다 그 정치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구현되는데, 몇몇 나라의 실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나치 시대를 반성하고 그 과오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2차대전 직후 뉘른베르크 재판을 비롯한 여러 가지 법적, 인적 청산작업이 진행되었으나 이후 전세계가 냉전체제로 급속히 재편되면서 청산이 완료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1979년 공소시효를 없애고 지금까지도 나치 전범을 색출하여 법정에 세우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홀로코스트(유태인 집단학살)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진행하고 있다.

대만의 2.28사건은 국민당 정부군이 중국 공산당에 쫓겨 대만으로 밀려나기 직전 사전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1947년 2월 28일부터 타이베이를 비롯한 대만 전역에서 수십만의 무고한 원주민을 학살한 사건이다. 반세기 가까운 철권통치 기간 동안 이 사건은 입밖에 내는 것조차 금기가 되었는데, 1987년 계엄 해제 후 국민들의 사건 진상규명 요구가 빗발치자 정부가 행정원 산하에 조사위원회를 두어 진상을 조사한 뒤 1992년 말 최종보고서를 발표했다. 1995년 사건발생 48년 만에 리덩후이 총통이 국가수반으로서 유족들에게 사죄했고 대만 의회에서는 보상법안을 통과시켰다. 또한 2월 28일을 '평화의 날'로 제정하고 타이베이 공원에 위령비를 세우는 등 홍보, 고증, 기념관 건립 등의 후속사업을 벌이고 있다. 제주 4.3사건 해결의 모델이 되었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의 칠레 군부세력은 미국의 지원하에 아옌데 합법 정부를 무력으로 전복하고 일주일간 3만 명의 시민과 인민연합 지지자들을 학살하며 집권한 뒤, 이른바 ‘콘도르 작전’을 통해 진보 인사들을 납치, 구금, 살해, 암매장하여 수천 명을 사망, 실종시키고 10만 명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게 했으며 100만 명을 해외로 내몰고 망명인사를 추적해 암살까지 했다. 1990년 민정이양 후 엘윈 대통령 정부가 들어섬과 동시에 칠레에서는 ‘국가진실화해위원회’를 설치하고 1년간 조사를 진행한 뒤 1991년 4월 보고서를 내고 보상 및 화해 작업을 벌였다. 한편 독재자 피노체트는 17년간의 군사통치 기간에 일어난 80여 건의 스페인인 피살ㆍ실종사건으로 1998년 스페인의 가르손 판사에 의해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기소된 후, 범죄인 인도 요청에 따라 요양차 가 있던 영국에서 체포되었다. 피노체트는 영국에서의 법정 공방 후 2000년 칠레로 돌아온 뒤, 집단학살 혐의로 칠레 국내법에 따라 재판을 받다가 2002년 7월 결국 종신상원의원 직을 내놓으면서 재판이 사실상 종료되었다. 2003년 8월 라고스 대통령의 제안으로 구성된 ‘정치구금과 고문에 관한 국가조사위원회’에서 2004년 피노체트 시절의 고문 사례에 관한 보고서를 냈다.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피노체트가 2006년 말 입을 다문 채 죽으면서 새로운 불씨가 일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추악한 전쟁’은 1976년 3월 24일 쿠데타로 집권한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이 좌익 게릴라 소탕 명분하에 1983년까지 8년 동안 무제한의 국가폭력을 동원하여 무고한 시민들을 체포, 납치, 구금, 고문, 사살, 처형한 사건이다.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이 기간에 희생된 사람은 실종 3만 명, 강제 입양 500명, 정치범 1만 명이며, 정치적 망명자도 30만에 달한다. 무장 게릴라 단체의 산발적 저항은 이내 진압되었고 그 누구도 ‘추악한 전쟁’에 대해 언급도 못하는 공포 상태가 지속되면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실종되었다. 1977년 4월 13일 실종된 자식의 행방을 찾으려는 어머니 14명이 대통령궁 앞 ‘5월광장’에 모였고 이후 매주 목요일마다 침묵시위를 펼치면서 ‘5월광장의 어머니’는 계속 늘어갔다. 1983년 선거에서 당선된 알폰신 대통령은 ‘실종자 조사 국가위원회’를 설치하여 군사독재 기간의 범죄행위를 조사했으나 정치적 타협으로 전모를 밝혀내지는 못했다. 정치적 타협에 분노하는 ‘5월광장 어머니’들의 시위는 이제 ‘5월광장 할머니’들의 시위로 바뀌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스페인 내전 이후 집권한 프랑코 정권은 파시스트 정당, 군대, 카톨릭 교회 등의 지원하에 철권통치로 국민들을 억압하면서 군림했다. 1975년 프랑코 사망 이후의 민주주의 이행은 구체제 세력의 한 기둥이었던 온건 개혁파가 좌파의 협력을 받아가며 변화를 만들어가는 양상이어서 정치적 타협으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 국민은 1982년 군부 쿠테타를 하루 만에 일축하며 민주적 의회와 정부를 되찾았으나 과거는 ‘망각’ 속에 모두 묻어버리자는 타협적인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다시 ‘타협’과 ‘망각’에 대한 강력한 문제 제기가 일고 있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는 1948년부터 1994년까지 소수의 백인이 인종차별 정책을 펴며 다수의 흑인과 혼혈인, 인도인, 아시아인 등을 분할 지배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식 통치이념이었다. 1995년에 구성된 남아공 진실화해위원회는 ‘보복없는 과거청산’을 기치로 1960년부터 1993년 12월 전인종 선거를 규정한 잠정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자행된 각종 국가범죄와 인권침해 행위를 조사했다. 재발방지와 국민통합, 완전한 진실규명이 추구하는 목표였다. 남아공의 사례는 지나치게 화해에 치우친 면이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백인 지배세력의 잘못은 물론 아프리카민족주의자나 해방세력의 과오까지 조사하는 등 독립적이고 강력한 국가기구에서 철저한 진실규명 작업을 추진하여 비교적 공정한 과거청산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진실화해위조차 인정하지 않고 출두하지 않은 자, 사면신청도 하지 않은 자를 처벌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 상당한 숙제를 남겼다.

정부 수립 후 무려 59년, 한국전쟁기의 대학살이 한반도를 휩쓸고 간 지 반백년도 더 지난 이 시점에 와서야 포괄적 과거청산의 대장정에 오른 우리는 이들 해외사례에서 무엇을 배워 어떤 전범을 세워갈 수 있을까? 세계의 시선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다.



10. 과거청산은 시대의 명령


한국전쟁전후 100만 민간인학살 문제의 본질은 국가권력이 수많은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죽이고도 그에 대해 반성도 않고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오랜 기간의 진실규명 요구에도 묵살로 일관해왔다는 것이다. 즉, 국가권력의 도덕성의 문제이고, 직무 유기의 문제이며, 국가권력의 존재 의의의 문제이고, 나아가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물을 수밖에 없는 문제다. 국가가 수많은 민간인을 죽이고 또 문제를 묵살함으로써 그들을 다시 버린다면, 수백만 유족들에게, 그리고 현장을 지켜보고 이야기를 들어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국가란 무엇이겠는가? 국가에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보다 더 막중한 임무는 없을진대, 하물며 국민, 그것도 전투와 무관한 민간인들을 불법적으로 죽이고 또 이를 묵살하는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냐는 물음이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성하지 못한 과거는 되풀이된다”

불행히도 우리의 최근 역사는 50여 년 전의 그 과오를 씻지 못하고 똑같은 잘못을 계속 되풀이해왔다. “반성하지 못한 과거는 되풀이된다”는 금언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그 잔해와 여파가 곳곳에 널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을 불법적으로 죽인 사람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 피의 살육 명령을 내린 사람들이 당당하게 어깨 펴고 사는 세상에서 정의니 인권이니 하는 것들이 어떻게 비치겠으며, 바로 옆에서 가족들이, 이웃들이 무더기로 끌려가 죽는 걸 지켜본 사람들에게 웬만한 인권유린이나 폭력이 무슨 대수겠는가? 그런 속에서 어떻게 인권과 민주주의와 평화의 꽃이 피기를 바라겠는가? 나아가 그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국가와 사회 차원의 일대 반성을 하고 넘어가지 못하는 한, 우리는 머지 않아 다시 우리 주변에서 50여 년 전의 피바람이 다시 불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특히 한반도 안팎에서 여전히 전쟁의 기운이 가시지 않고 있는 지금, 이것은 결코 과거사가 아니고 오늘의 문제이고 또 미래의 문제다.

한국전쟁전후 집단학살의 진상을 밝히는 일은 우리 국가와 사회의 기초를 다시 세워 피로 얼룩진 이 죽음의 땅을 삶의 땅으로 거듭나게 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인간다운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작업이다.

이제라도 가해자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사죄, 반성하면서 진실을 털어놓고, 가해책임자이자 해결책임자인 국가는 그 책임을 통감하고서 진실을 밝히고 합당한 후속조치를 취하며, 피해자는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며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그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학살의 최종 책임자이자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국가는 학살의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그 후속 조치를 취하고, 지난날의 과오를 사죄하고, 그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고, 그 뼈아픈 교훈을 길이길이 후세에 물려주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만 그 책임을 다하게 되고, 그를 통해 학살의 국가가 인권과 평화의 국가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과거청산의 주요 과제들

지난 세기, 우리 민족은 참으로 많은 질곡을 헤쳐왔다. 그런만큼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 그럼에도 정부 수립 이후 반백년이 훨씬 지나도록 우리는 한 번도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돌아보면서 성찰해본 적이 없다. 그러는 사이에 문제들이 계속 덧쌓이면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꼬이게 만들어왔다. 해방 후 60년이 지난 이 시점에 와서야 우리는 비로소 과거를 제대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붙잡았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과거청산의 주요 과제는 크게 일제강점기의 친일과 강제동원, 한국전쟁기의 민간인학살, 독재정권 시절의 인권탄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아직까지도 청산되지 않은 친일잔재를 청소하고 일제강점기의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것, 그리고 해방과 전쟁, 국민국가형성기에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학살의 진실찾기, 또 군사독재정권의 통치하에서 발생한 무수한 인권탄압 및 조작의혹 사건, 군의문사 사건의 해결과 재발방지책 마련 등이 과거청산의 주요 과제들이다.

이제라도 이들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가며 새로운 미래의 주춧돌을 놓아야 하는 임무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과거청산은 오늘의 한국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내린 시대의 명령이다. 이 기회를 다시 놓친다면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기회를 다시 맞기는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씻고 거듭나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느냐, 과거의 잘못을 계속 되풀이하며 좌충우돌하느냐가 오늘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상처는 숨기면 곪아터진다

민간인학살 문제를 비롯한 각종 과거사 진상규명 과정에서 소란이 있을 수도 있다. 숨겨진 진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충격도 있을 테고, 이의 해결방안과 재발방지책을 마련하기 위한 논의도 분분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다양한 국민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서 생성되는 긍정적인 에너지이지 결코 퇴행이나 답보가 아니다. 상처는 드러내야 치료할 수 있다. 숨기기에만 급급하다면 곪아터질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민간연구를 통한 문제해결방식은 사실상 ‘과거청산’을 하지 말자는 말과 같다. 민간연구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실질적인 조사권한과 정부 각 기관의 협조 없이는 진실을 밝힐 수도 없고, 오랜 세월 동안 고통받아온 피해 국민의 구제 장치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국가가 나서서 국가의 책임하에 조사를 진행해야만 바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경우, 과거청산의 또 다른 목적인 잘못된 공권력의 자기반성의 기회, 즉 국가가 자기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공권력을 불법 행사하여 국민에게 피해를 입힌 과거를 반성하며 자기 정화할 기회도 갖지 못하게 된다. 공권력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뿌리깊은 불신은 국가가 공권력을 국민 다수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권력자의 편의대로 사용한 과거의 잘못에 기인한다. 그리고 친일 인사들이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기념관이 세워지는 등 친일잔재가 곳곳에 드리워져 있는 오늘의 상황은 조사 연구가 미흡해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국가의 공식 조사와 공식 입장이 없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의 뒷받침을 받는 국가기구에서 공식적으로 과거사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역사적 평가는 그 다음의 일이다.


온전한 진실규명만이 더불어 사는 길

다른 나라의 사례에서 보나, 지난 4.3위원회나 의문사위원회의 조사활동을 통해서 보나, 국가조사기구의 미약한 조사는 자칫 가해자와 국가에 면죄부만 줄 가능성이 크므로 제대로 된 조사를 통해 완전한 진실규명을 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어야 하고 그 권한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진실을 온전히 밝히지 못하는 조사는 또 다른 왜곡과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2005년 12월 1일 발족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현재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먼저,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만들어짐으로써 그 일차적 임무인 온전한 진실규명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민원해결성 접근방식과 타협의 기류가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정치적 타협의 결과인 위원 구성시부터 이미 예견됐던 문제긴 하지만, 위원회 구성준비시 민간 의견의 배제, 위원회의 특수한 역할과 임무를 감안한 조정 운영 능력 부재 등이 문제를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그 결과, 진실규명에 최소한으로 필요한 인력과 예산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애초부터 법에 미비했던 조사권한의 강화에는 신경도 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 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거사들의 경중을 헤아려 조사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편제를 갖추고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그 존재의의를 부각시켜가기는커녕 기계적인 조직 편제와 운용으로 오히려 조사효율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도 큰 문제다.

그렇다고 현재 진실화해위가 떠맡고 있는 역할과 임무가 줄어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가장 큰 임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전쟁전후의 민간인학살 문제만 보아도, 위원회는 어쨌든 신청이 들어오는 모든 사건들을 두루 조사하여 피해, 가해, 책임, 배경, 전개 등의 사건 전모를 밝히고, 피해자와 유족도 선정해야 하며, 조사보고서를 발간하여 국가의 공식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의 유골 수습 안치, 피해자에 대한 위령사업과 명예회복 등의 후속조치, 또 이런 피해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한 각종 기념사업, 교육 프로그램 등의 제도적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위원회의 과제이고, 그 임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의 일차적 책임도 위원회에 있다. 어떻게든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내고 권한을 확보하여 그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그때 그 자리에서 나는 최선을 다했는가?”

아무리 어려워도, 어떤 난관이 닥쳐도 과거의 묻혀진 진실을 밝혀 미래를 비추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의 과제다. 진실화해위는 위원회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국회는 국회대로, 시민사회는 시민사회대로, 자신에게 부여된 역사적 임무를 똑바로 자각하고서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전쟁기의 민간인 피학살자 유족 등 과거사 관련 피해자들이 이제 고령이 되어 하루가 다르게 유명을 달리하는 분들이 부쩍 늘고 있는 이때, 피해자나 유족 1세, 직접 경험자들이 한 명이라도 더 살아 있는 동안에 진상조사를 서둘러야 할 이때, 그 책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훼방을 놓거나 시간만 축내는 자는 역사의 돌팔매를 맞는다.



11. 전쟁과 학살을 넘어 인권과 평화의 나라로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할 것은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진상조사의 궁극적 목적이 결코 가해자ㆍ피해자 개인간의 화해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사 진상조사의 중심은 과거의 국가폭력에 대한 국가의 책임 인정과 그 사죄이고, 과거청산의 핵심은 국가와 피해자인 국민간의 화해다.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국가의 정당성을 확립하는 일이다.

만일 오늘 우리가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밝히고 그를 통해 국가와 국민들간의 진정한 화해를 끌어내는 일에 실패한다면, 매우 부정적인 상황이 초래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국민들 사이에 팽배해 있는 법치주의에 대한 회의, 국가권력에 대한 냉소와 미래에 대한 불신이 더욱 확산될 것이다. “법이 종료되는 곳에서 폭정이 시작된다”는 말처럼, 폭정의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다. 사회적 피해자의 편에 서서 그 눈물을 닦아주고 그 권리를 찾아주는 정의의 구현에 실패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기득권을 가진 세력의 은근한 비토권이나 그 정치적 영향력을 재확인시켜주는 셈이 된다.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태에 절망감을 느끼게 되고, 정부의 정치 능력이 여러 각도에서 의심을 받게 된다. 전환기의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치유와 화해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은 학살의 대지 위에 살아남은 우리의 몫이다. 피해자들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고 있고 유족들은 통한을 가슴에 품은 채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다시는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이 없도록, 풀지 못한 한을 가슴에 품은 채 세상을 등지는 사람이 없도록, 차마 토로하지 못할 반인도적인 범죄를 합리화하고자 한평생 몸부림치는 사람이 없도록,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며 인간성을 잃어가는 사람이 없도록, 지금 우리가 나서서 잃어버린 역사와 사회정의를 복원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는 반백년 전에 일어난 불법적인 민간인학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서 그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들을 구제하며 국민 개개인으로 하여금 그 진실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성찰하여 다시는 그런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경주해야 한다. 그래야만 전쟁과 학살의 나라가 인권과 평화의 나라로 거듭날 수 있다.

책장을 덮기 전에 모두 함께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 국군과 경찰이 동족에게 저지른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제쳐둔 채 외국 군대의 만행만을 문제삼는 우리의 모습을 외국인들은 어떻게 볼까? 한국전쟁 전후의 100만 민간인학살 문제는 외면한 채 유태인 홀로코스트와 남경 대학살과 코소보 학살과 이라크 민간인학살에는 큰 관심을 보이는 자세는 올바른 태도일까? AP통신이 노근리 사건에 대해 한번 떠들면 온 나라가 시끌벅적해졌다가 물결이 한 차례 지나간 뒤에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자세는 또 어떠한가? 6.25 당시 인민군의 죄상만 부각시키고 우리 군경이나 미군에 의한 학살은 배제하고 있는 우리의 교과서 왜곡은 외면한 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는 벌떼처럼 달려들어 성토하는 태도는 올바른 자세일까? 눈앞의 작은 피해들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역사적, 사회적으로 큰 죄악에는 둔감한 것은 옳은 태도일까? 6.25를 전후한 시기의 대규모 민간인학살은 좌시하면서 인권을 논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길은 이런 곳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노사과연>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의 이해, 그 세번째


이무열 |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