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현대 FTA와 자유무역”에 대하여

김두한 회원의 ‘반비판’에 대한 간단한 답변


(1) “... 맑스가 자유무역에 대한 원칙적 찬성, 다시 말해 보호무역의 반동성에 대한 철저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채만수소장은 알고 있다. 그러나 채만수소장은 이로부터 자신이 지지하는 자유무역저지 투쟁을 혁명적인 것으로, 반면에 자유무역저지 투쟁을 비판하는 것을 맑스의 이름으로 반혁명적이라는 놀라운 결론을 전개한다.”(p. 56)


(2) “... 또한 채만수소장은 엥겔스의 ‘자유무역은 그 자원을 다 소진해버렸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자유무역이 진보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채만수소장의 논리전개의 허무맹랑함에 깊은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첫째 자유무역의 효과가 소진되었다고 해서 자유무역이 그 진보성이 감소했으면 모를까 그 성격이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고, ...”(p. 57)


이상은 김두한 회원이 가히 ‘작정하고’ 쓴 듯한 나에 대한 ‘반비판’(?)1)에서의 인용이다.

이 ‘반비판’은 여러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모두가 나의 글들2)과 현재 협상 중인 ‘한미 FTA' 자체의 성격과 목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다. 따라서 기존의 두 편의 나의 글로서 사실상 충분하고 더 이상의 논쟁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되지만, 김두한 회원의 목소리가 원체 높아서 혹시 독자들 중에 오해가 있을까 싶은 노파심에서 위의 두 주장에 대해서만 간단히 답하려고 한다.


I.

우선, 김두한 회원의 위 (1)의 주장은, 맑스나 엥겔스가 특수한 구체적 상황과 관련해서는 보호무역도 지지하고 있다3)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김두한 회원이 현재 그 협상이 진행 중인 ‘한미 FTA'가 말 그대로 “자유무역” 협상임을 입증할 수 있을 때에만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김두한 회원의 주장과는 달리, 그가 문제로 삼고 있는 글의 어디에서도 “자유무역저지 투쟁을 혁명적인 것”으로 규정하거나 “자유무역”이나 “자유무역저지 투쟁을 비판하는 것”을 “맑스의 이름으로 반혁명적이라는 놀라운 결론을 전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한미 FTA 저지 투쟁을 지지하는 주요 이유는, 우선 문제의 한미 FTA가 말 그대로의 ‘자유무역’ 협정이 아니라 “독점자본의 가장 반동적이고 기생적인 독점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고, ‘자유무역’이라는 기만적 이름의 ‘보호무역’ 장치이기 때문”이며, 다음엔 “그것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서 노동자․인민을 혁명적으로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인데, 여기에서 문제인 FTA의 성격과 관련하여 나는 이렇게 썼었다.


나는 우선, 맑스가 19세기 중엽에 “여러분은 자유라고 하는 추상적인 말에 감동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 말을 본떠서, “자유무역이라고 하는 기만적인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오늘날의” 자유무역협정, 즉 FTA는 말 그대로의 ‘자유무역’ 협정이 아니라 그 반대물, 즉 대표적으로 이른바 ‘지적재산권’에 대한 보호나 의약품 등의 특허권 강화․연장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독점자본의 가장 반동적이고 기생적인 독점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고, ‘자유무역’이라는 기만적 이름의 ‘보호무역’ 장치이기 때문이다.4)


특히 “FTA란 WTO 체제 내에서의 상품 및 자본시장의 독점과 배제 전략에 다름 아니고, 이는 당연히 전반적인 과잉생산․과잉축적에 의해서 자극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블록(bloc) 경제이다.”5)


여기에서는 “이른바 '지적재산권'에 대한 보호나 의약품 등의 특허권 강화․연장 등”만을 언급했지만, 물론 그뿐이 아니다. 형식상으로 보면 자유무역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고 자유경쟁을 촉진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실제로는 그 반대로 기존의 독점가격을 정당화하고 보다 강화하려는 것조차 있다. 예컨대, 삼성전자나 하이닉스 등등의 이해를 염두에 두고 한국 정부가 미국 측에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는 이른바 “반덤핑 규제의 철폐”도 그것이다. 삼성전자 등이 그 반도체 수출에 대해서 ‘덤핑’ 판정을 받아 제재조치를 받고 있는 것은 그들이 국내에서 극히 고가로 부당한 독점가격을 받고 있기 때문에 다름 아닌데, 그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용산의 전자시장에 가보면, ‘삼성’, ‘LG’ 등의 브랜드를 단 얼마나 많은 ‘역수입품’들─한국에서 수출되었다가 물론 관세를 물고 수입된 것들로서 다만 이들 물품에 대해서는 ‘A/S’가 배제되어 있다─이 ‘내수품’보다 저가에 매매되고 있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 협상 중인 FTA가 지향하는 것들을 ‘자유무역’이라고 하면, 내가 보는 한, 그것은 지난 번 글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기만적이고 ‘희극적’인 것”이 아닐 수 없는데, 김두한 회원은 그것이 기만적이거나 희극적인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대신에 “자유라고 하는 추상적인 말에 감동”하여 문제의 FTA를 말 그대로 자유무역협정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면서 내가 “자유무역저지 투쟁”을 혁명적이라며 지지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 그야말로, “과학적 사상은 살아 있는 강철이어야 한다”!



II.

김두한 회원의 위의 (2)의 주장은 그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에 대해서까지 의아함을 갖게 한다. 혹은 그의 표현을 빌면, “논리전개의 허무맹랑함에 깊은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서 그저 심심파적으로 하는 얘기지만, “자유무역의 효과가 소진되었다고 해서 자유무역이 그 진보성이 감소했으면 모를까 그 성격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는 사고(思考)․논리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자유무역의 효과가 소진되었다”고 하면, 그 효과(?)로서의 “그 진보성”도 “감소” 정도가 아니라 “소진되었다”고 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고요 정상적인 논리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실은 그거야 아무튼 여기에서는 상관없다. 나는 엥겔스를 인용하면서 “자유무역은 그 자원을 다 소진해버렸(다)”라고 얘기했던 것이지, 결코 “자유무역의 효과가 소진되었다”고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름 아니라 김두한 회원이 글을 어떻게 읽고 이해하는가가 문제로 되는데, 내가 지난번에 썼던 것은 이렇다.


사실 신자유주의의 '자유주의'가 그러한 것처럼, 자유무역협정의 '자유무역' 또한 기만적이고 "희극적"인 것인데, 그것은 이미 1880년대에 엥겔스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미 오래 전에 “자유무역은 그 자원을 다 소진해버렸기”6) 때문이다. '자유무역'이 '자유무역'으로서 진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 이미 사라져버린 지 오래인 것이다.7)


다름 아니라, 바로 “자유무역의 효과가 소진”된 것이 아니라 “자유무역은 그 자원을 다 소진해버렸기” 때문에 '자유무역'이 정말 '자유무역'으로서 진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 이미 사라져버린 지 오래며, 따라서 “자유무역협정”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는 FTA는 사실은 말 그대로의 “자유무역협정”이 아닐 뿐 아니라 자유무역일 수 없음을 말한 것이었다. ─ 그야말로, “과학적 사상은 살아 있는 강철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그는 엉뚱하게 읽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김두한 회원이 나를 ‘반비판’하기 위해서는 여기에서도 최소한 다시 문제의 FTA가 말 그대로의 자유무역임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그 전에 그는 자신이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부터 정확히 이해하고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 * *


[곁가지 하나] 김두한 회원은 또 하나의 ‘작정하고’ 쓴 듯한 글에서, 󰡔정세와 노동󰡕 제18호(2006년 11월)에 실렸고, 당시 전국노동자대회에 배포된 나의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부분을 인용한다.


하나는 분산성, 종파주의의 극복이다.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정파적 이론과 그 대중적 실천을 통한 노선의 대중적 검증과, 그것에 대한 대중의 동의․지지․참여에 기초한 그 정파의 성장이 전위정당 건설의 기본적 방법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견지해왔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주관적 사고였으며,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원칙'을 공유하는 여러 정파의 연합이 현실적인 노선일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원칙'! 참으로 애매하고 추상적인 얘기지만, 서로 연합하고 그리하여 건설하려는 노력․투쟁의 과정에서 구체화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반박은 불필요하다. 애매하고 추상적인 얘기라는 말로 자신의 무원칙을 가리고 있는데, 이것 또한 민족주의자들의 대동단결주의의 전형이며, 계급적 철저성이 부족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현 시대 더더욱 배제되어야 하는 자세이다. 그러나 노사과연 운영위에서 공식적으로 이런 글을 노동자대회에 배포한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8)


어떤 사고에서 “상세한 반박은 불필요하다”고 얘기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분산성․종파주의를 극복하자는 나의 얘기가 어떻게 해서 “무원칙”이며, “민족주의자들의 대동단결주의의 전형”이고, “계급적 철저성이 부족한 데에서 비롯된 것”인지 도무지 한 마디도 이해할 수가 없다. ─ “상세한 반박”, 가르침을 정중히 요청한다. <노사과연>



다시, “현대 FTA와 자유무역”에 대하여

─김두한 회원의 ‘반비판’에 대한 간단한 답변



채만수 | 소장



1) 김두한, “계급적 투쟁을 무력화시키는 FTA(자유무역협정) 저지투쟁에 대한 재비판 ─채만수소장에 대한 반비판을 중심으로”, 󰡔정세와 노동󰡕 제20호, 2007년 1월, pp. 47-62.


2) “한미 FTA,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정세와 노동󰡕 제12호, 2006년 4월) 및 “현대 FTA와 자유무역”(󰡔정세와 노동󰡕제15호, 2006년 7․8월 합본).


3) 그 한 예로서 F. 엥겔스의 “보호관세인가, 자유무역제도인가”(1847)를 이 책의 뒤편에 ‘자료’로서 번역․게재한다.


4) “현대 FTA와 자유무역”, p. 193.


5) “현대 FTA와 자유무역”, p. 193 및“한미 FTA,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p. 20.


6) F. 엥겔스, "󰡔자본론󰡕 제1권 영문 판 서문"(1886), CAPITAL, Vol. I, Progress Publishers, 1977, p. 17. (MEW, Bd. 23, S. 39.)


7) “현대 FTA와 자유무역”, p. 193.


8) 김두한, “과학적 사상은 살아 있는 강철이어야 한다 ─제국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며”, 󰡔정세와 노동󰡕 제20호, pp. 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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