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씨의 석궁사건

법관들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2007년 들어서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전직 성균관대 수학교수인 김명호씨가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고 해서 그 사건 담당 부장판사를 향해서 석궁을 쏘아 판사의 복부에 깊이 1.5cm의 상처를 낸 사건이다. 일반 시민이 아니라 바로 대학 교수를 지냈던 사람이 판사에게 화살을 쏘았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즉각 언론에서 반응이 나왔다. 언론은 이 사건을 ‘석궁테러’라고 크게 보도하면서, 테러는 나쁘다는 도덕적 올가미로 묶어, 이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이 사법부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으려고 하고 있다. 언론은 우리 사회에는 승복하는 문화가 없어서 판사에 대한 소위 ‘테러’가 일어났다고 하며, 테러의 진정한 원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사법부에서는 이 소위 ‘석궁테러’ 사건을 사법부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라고 발표하였다. 2007년 1월15일 MBC뉴스데스크에서 엄기영 앵커는 법원의 반응에 대해서 “ 현직 판사에 대한 테러라는 초유의 사태에 법원은 경악하고 있습니다. 대법원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며 강력 대처방침을 밝혔습니다.”라고 전하였다. 법원은 사건의 의미를 되새겨보려고 하지 않고 “사법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인식하고 판사들의 개인 신변을 보호하는 조치 등을 강구하겠다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갔다.

전직 교수였던 김명호씨는 자기 사건 재판의 부장판사였던 박흥우에게 석궁을 당겼던 것은 ‘국민저항권’이라고 말하고 있다. 국민저항권은 무엇인가? 국민저항권은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언론과 사법부는 김명호씨의 이런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김명호씨의 발언을 알리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사법부와 한 패가 되어 김명호씨를 성격이상자로 몰아세우려고 했다. 그렇지만 네티즌들과 일반시민들은 김명호씨의 이런 주장을 듣기 시작했고 사법부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던 자신들의 사고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반성하기 시작했고, 박 흥우 판사 등이 강자의 편에 서서 사건을 다루었고 판결을 내렸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기 시작했다. 아울러 많은 질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정의로운가? 교수였던 김명호씨는 왜 판사에게 나아가 사법부에게 석궁을 당겼을까? 판사는 양심에 따라 법을 적용하여 판결하는가? 이런 질문은 다시 말해서 이 사회의 최후의 보루라고 하는 법원을 통해서 국가와 그 기관들의 실체를 반성해보는 그런 질문과도 연결된다. 국가의 한 기관인 사법부는 누구의 편에 서서 재판을 진행하고 판결을 내리는가? 국가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러자 사법부는 이례적으로 김명호씨 사건에 대한 판결문을 공개하였고,그 사건 담당 주심판사였던 이 정렬씨가 ‘재판은 공정했다’는 식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법대로 판결했다“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역으로 이정렬 판사는 바로 자기 자신의 글과 언론과의 인터뷰 속에서 김명호씨가 박홍우 부장판사에게 석궁을 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김명호씨가 자신의 행위를 국민저항권이라고 외친 이유를 드러내주고 있다. 나는 바로 이정렬 판사의 글과 말을 통해서 김명호씨의 사건 재판에서 법관들이 무엇을 했고 누구를 대변하고 있는지를 보려고 한다.



1.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


이정렬 판사는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라는 말을 배웠습니다”라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문제는 누구의 편에 서서 쟁점을 정리하고 그것에 대한 판결을 내리느냐이다. 이런 문제를 접하면, 법관은 대부분 자기는 누구의 편에 서지 않았고 재판은 공정했다고 항변한다. 이정렬 판사는 “저는 과거에 양심적인 병역거부자에 대해서 무죄판결을 선고한 바도 있고” 소위 진보적인 판사로 통한다고 자기에 대해서 소개함으로써 자기는 소위 공정한 법관이라고 주장한다.

이정렬 판사는 판결문의 작성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완성된 판결초고를 놓고 부장님과 함께, 원고가 지적하는 문제출제상의 오류가 있었던 점, 학교측으로부터 보복을 당하였다는 점, 원고의 실력에 비추어 학자로서는 아주 아까운 사람이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 하여 이 점을 판결문에 반영하기로 하되, 원고의 말과 행동, 업무처리방식, 다른 사람들, 특히 제자들로부터의 평판 등이 교육자답지 못하다는 점 때문에 원고의 능력과 학문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교육자로서는 적합하지 않아서 원고에 대한 이 사건 재임용거부결정이 무효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취지를 판결서에 추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 원고가 저희 재판부의 판결문이라도 읽어보고 저희 재판부의 뜻을 이해는 하지 못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알려고 하였으면 이런 불행한 일(석궁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장 큰 아쉬움이 들었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원고가 소송을 제기하면서 제기한 쟁점은 무엇이었는가?

언론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사건의 전개과정을 보면, 일반인들도 재판의 쟁점이 무엇인가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김명호씨는 입시문제의 오류를 지적했고 그것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피력하여, 입시오류를 은폐하려는 교수들과의 불화로 인해서 교수재임용신청에서 보복을 당해 탈락되었다는 점을 쟁점으로 삼으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재판의 주된 쟁점은, 입시오류를 지적하고 비판한 김교수와 입시오류를 은폐하려는 교수들과의 불화가 교수재임용 탈락에 어느 정도의 인과관계를 가지는가를 밝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정렬 판사의 글과 인터뷰 내용을 보면, 박흥우 판사 등은 김명호씨가 제기한 쟁점은 제쳐두고 오히려 재판의 쟁점을 성균관대의 입장에 유리한 그런 쟁점으로 뒤바꾸어 재판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이정렬판사는 재판 과정에서 쟁점은 김명호씨의 “교육자적 자질”에 관한 문제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쟁점의 뒤바꿈이 김명호씨 사건과 관련된 법원의 기본적 태도였던 것 같다.

재판의 쟁점이 피고측인 성균관대학에 유리하도록 바꾸었을 때에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정진경 부장판사(44ㆍ연수원 17기)은 다음과 말하고 있다.


“이 사건에 있어 재임용거부 결정이 대학 입시문제의 오류지적과 관련한 보복이라는 원고 주장은 주된 쟁점이 아니었다".

“법원이 판단할 쟁점은 원고가 교수로서의 기본적인 자질 등과 관련해 낮게 평가된 것이 학교 측의 재량권을 일탈, 남용한 것인지 여부를 가리는 것으로 재량권 남용에 대한 원고의 입증이 없는 한 패소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고 원고는 그 입증에 실패했다.”


여기서 하나의 의구심이 생긴다. 그것은 김명호씨가 제기한 쟁점과는 전혀 다르게 박흥우 등의 판사들이 왜 성균관대학에 유리한 그런 쟁점으로 바꾸었는가라는 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박흥우 판사 등은 처음부터 재판에 대한 결론을 정해놓고서 ‘교수재임용신청에서 보복을 당해 탈락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판결의 요지도 이 쟁점과 관련해서 박흥우 판사 등은 내놓고 있다. 즉 “학생의 교수ㆍ연구 및 생활지도에 대한 능력과 실적, 교육 관계 법령의 준수 및 기타 교원으로서의 품위 유지라는 기준에는 현저하게 미달된다. 재임용 기준에 적합하지 아니하다고 판단된다”라는 것이다.

이정렬 판사의 인터뷰 내용을 보자.


사실 그 부분(보복)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지막 결심 때 피고(성균관대학교) 소송대리인도 ‘입시 문제 오류 지적이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증언과 제출된 자료로 볼 때 이분이 교수로서 자질이 있느냐다. 즉, 보복 개연성에 대해서는 다툼이 없었다.


좋다. 쟁점이 교육자적 자질에 관한 문제로 바뀌었다고 하고, 그것이 법리상으로 부당하지 않다고 하자.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교육자적 자질이란 무엇인가라는 점이고 판사라는 사람들이,, 사법부 사람들이 이를 무엇을 근거로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 한겨레신문 김보협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들려주는 이정렬판사의 말은 가히 통탄할 정도이다.


이번 판결의 기본적 구도는 ‘학자적 양심은 있으나 교육자적 자질이 없는 사람의 재임용 탈락의 적법성 여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교수의 재임용과 관련해 법이 명확하지 않다. 대법원의 판례는, 2004년 김민수 서울대 교수 사건 이후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공정한 심사를 받을 권리가 있다’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판결했다. 김명호 전 교수 사건에서 합리적 기준은 뭔가. 학교가 교수를 임용하는 거니까 학교의 기준이 있을 것 아닌가.

그 기준은 정관에 있었다. 추상적이긴 하지만, 비합리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연구실적, 교육자적 자질, 교원으로서 품위다. 셋 가운데 하나만 충족하면 되는 게 아니라 모두 충족해야 한다.

연구실적은 되지만, 나머지 2개는 어떻게 되느냐를 따졌다. 김 전 교수에게 보복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기준에는 맞았어야 한다. 그 기준에 맞지 않는데 ‘보복을 당했으니 그걸로 끝 아니냐’ 하는 식은 비법률가적 사고이다.


그리고 “결국 재판부가 김 전 교수는 교육자적 자질이 없다고 본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 정렬 판사는 ”그건 아니다. 그건 교원인사위가 할 일이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당연히 박 흥우 판사 등은 입시문제 오류 지적에 대한 성균관대학측의 보복이 김명호씨에 대한 교원인사위의 평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가를 따져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서 이정렬 판사가 말하고 있듯이 그들은 “교육자적 자질, 교원으로서 품위 충족 못해 법대로 판결했을 뿐 ”이라는 바로 자기 자신들의 판단을 내놓음으로써 성균관대학교 교원인사위가 한 일을 정당화시켜주고 있다.

쟁점을 교육자적 자질이라는 것으로 바꾸어간 것도 문제이지만 박흥우나 이정렬 판사 등이 결정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부분이 있다. 이는 아주 근본적인 문제인데, 교수들의 교육자적 자질에서 으뜸으로 치는 것은 학문연구에 있어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를 옹호하면서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를 바탕으로 사회에 봉사한다는 대학의 이념과도 합치되는 것이다. 대학의 이념에서 보았을 때, 김명호씨의 교육자적 자질이 어떠한가? 그렇다면 입시문제에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오류를 숨기려고 하는 그런 교수들에게는 교육자적 자질이 있다는 말인가? 교수에게 교육자적 자질이나 교원으로서의 품위를 말한다면 성균관대학의 수학과에서는 김명호씨가 모범이라 해야 하지 않는가? 학자들에게 그리고 연구자들에게 진리라는 것은 바로 자기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화형에까지 쳐해지면서도 진리에 대한 자기의 신념을 지켰던 부르노를 기억할 것까지 없다. 우리의 역사에서 진리라고 믿는 그런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탄압받아왔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는가?

학문하는 사람들 중에는 괴팎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많이 있다. 아집이 세고 진리와 이론에 있어서는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자기 연구에 방해가 되는 그런 행위가 있으면 설령 그런 행위가 정의로운 행위일지라도 맹비난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교(社交)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일반인이 보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라고 해서 대학사회에서 교육자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볼 것인가? 오히려 실력도 없고 교육자적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 자기를 과대포장하고 사교적이며, 힘 있는 자에게는 개처럼 구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에게는 교육자적 자질이 있는가?

박흥우 판사 등이 교육사회에 대한 어떤 식견을 갖고 있기에 교육자로서의 자질과 교원으로서의 품성을 판단할 수 있는가. 증언에 의해서? 김명호씨는 “그 위조ㆍ위증을 눈감고 무시한 수많은 판사들과 그들의 판결을 목격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책임있는 판결을 내리려면, 교육사회에 대한 탐구에 의한 올바른 식견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다음을 보면 박흥우 판사 등은 전혀 그런 식견을 지니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재판 속기록엔 이런 대목이 있다.


박홍우 판사 : "원고는 5명 F를 준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까?"

김명호 : "없습니다. 단지 공부를 하지 않으면, '4학년이라고 무조건 졸업하는 것은 아니다'라고만 했습니다."

박홍우 판사 : "원고는 학생들을 잘못 교육시킨 것이라는 생각이 없나요?”

김명호 : "대학은 전문지식을 가르치는 곳이지, 가정교육을 시키는 곳이 아닙니다. 저의 죄라면 원칙을 지킨 죄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던지는 질문을 보면,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질문이라는 것은 일정한 문제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인식, 그리고 지적 수준 속에서 발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박흥우 판사가 던진 질문을 보면, 그는 교수를 인성교육하는 사람쯤으로 생각한다. 대학에서 교육자는 자기 연구분야와 관련해서 진리를 추구하여 연구하는 것과 학생들에게 전문교육하는 것을 기본임무로 한다. 이런 것 이외에는 모두 진정 연구자에게는 사치이자 부속물일뿐이다.!

이정렬 판사는 “원고의 입시문제 오류지적행위가 양심적이고 용기있으며, 정당한 행위라는 것은 저희 재판부도 판결문을 통하여 인정하고 있는 바입니다”라고 쓰고 있는데, 여기서 그의 바보스러움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오류가 있으면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학자로서, 교육자로서의 기본적 자질이고 태도이자 도리이지, 결코 그것이 용기있고 정당한 행위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정렬 판사는 아마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있는 패거리문화의 군상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물론 그들에게는 용기가 필요한 그런 행위인지 모른다.



2. 법관은 그 양심에 따라


그렇지만 이정렬 판사 또한 박흥우 판사 등과 같이 패거리 문화를 잣대로 해서 판결문을 내고 있음을 그들이 낸 판결문을 분석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교육자적 자질의 문제와 관련해서 판결문은 “김 전 교수는 수업 중 밖의 시위 소리가 거슬리자 학생들 앞에서 시위하는 학생들을 극단적으로 비하하는 욕설을 하고, 학과장이 되면 과내 모든 서클과 학생회를 없애겠다는 말”을 한 것까지도 들고 있다.

이정렬 판사라는 사람은 여기저기서 교육자적 자질과 학자적 양심을 구분해서 생각한다. 그는 입시문제 오류를 지적하고 그 시정을 하려고 했다는 점은 학자적 양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 학생들에게 평균이하의 점수를 주었다거나, 교수들과의 불화, 학생들에 대한 생활지도를 하지 않았다는 등을 교육자적 자질의 문제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는 그는 김명호씨에게 학자적 양심은 인정하지만 교육자적 자질에는 못 미친다고 말한다. 그것도 “현저하게”라는 부사를 붙여 강조점을 찍으면서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 현직판사라는 사람까지도 우려할 만큼 더 심한 말을 판결문에 담고 있다.


이 판결문을 읽고 제일 먼저 가슴이 뜨끔했던 것은 판결문 중의 '현저하게' 라는 표현과 '마지막에 더 이상 살펴 볼 필요 없이 이유 없다'는 표현이었다.


이정렬 판사나 박 흥우 판사 등은 김명호씨에게 교육자적 자질이 없음을 얼마나 확신했는가?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확신했는가?

학자라는 사람들은 원래 자기 주장이 강한 법이다. 이로 인해서 학자들 간에 피나는 이론 싸움이 수없이 일어나고 , 더 나아가 그들은 인신공격적 싸움도 서슴치 않는다. 물론 “형님 먼저 아우 다음”, “선배 먼저 후배 다음”이라는 그런 패거리 문화에서는 구성원 간의 표면적인 갈등은 없다. 거기에는 암투가 있다. 그래서 그들 구성원이 윗사람에게 힘있는 사람에게 앞에서만 공손하더라도 그는 구성원적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모두에게 간주된다.

법원이 그렇지 않나? 거기에는 법리 문제를 가지고 피나는 싸움이 있었는가? 유신시대의 재판의 모습을 보면 아무리 불합리한 판결이라도 이에 대해서 법관들이 반대하고 나섰던가? 그리고 그들은 책임을 졌는가? 최근에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긴급조치 위반사건 재판에 관여한 판사 실명이 포함된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결 분석 보고서'를 공개한다고 하니까, 그 관련자들은 어떤 추태를 보이고 있는가? 그들은 모두가 시대 탓이라고 하고 있지 않는가? 바로 이런 것이 법관으로서의 자질인가?

자, 김 명호씨의 교육자적 자질을 문제 삼는다고 하자. 다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논란이 불거지기 직전인 1995년 1월4일 김 전 교수는 학과장으로 추천될 정도로 학교 구성원으로부터 연구 능력을 인정받았고, 교육자적 자질도 의심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심판사로 참석했던 소위 이정렬 판사는 이 점을 보지 않았는가, 아니면 무시했는가? 게다가 김 전 교수에게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내린 게 입시출제 오류 지적에 대한 보복성이라는 증거가 재판 과정에서 밝혀졌다고 한다. 수학과 교수들이 “입시출제 오류 지적이 해교 행위라 학교 당국에서 단호한 조처를 내렸다”는 내용의 증언 서류를 제출한 것이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박흥우 판사나 이정렬 판사 등은 원래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주된 쟁점으로 삼고 증거가 되지 않는 것을 증거로 둔갑시키는 그런 요술을 부리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런 것들을 말하고자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박 흥우 판사나 이정렬 판사가 재판을 하면서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법관의 의무조항을 이행했는가를 보자. 헌법 제103조에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라고 쓰여 있다. 이는 법관의 의무이자 권리이고 법관의 지위에 관한 규정일 것이다. 여기서 오해를 가장 많이 불러 일으키는 부분은 “그 양심에 따라”라는 부분이다. 법관들은 법대로 했고 양심에 따라 판결했다라고 자주 말한다. 이정렬 판사도 그가 쓴 글이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직접적 표현은 하지 않으나 “양심에 따라”라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면 그 양심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정렬 판사도 여기저기서 학자적 양심이라는 말을 자주 쓰고 있다. 한글학회지음『우리말사전』에 따르면, 양심이란“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관해서 선을 취하고 악을 물리치는 도덕적 의식”으로 규정되고 있다. 양심에는 당연히 탐구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탐구를 통해서 사람들은 어떤 것에 대한 가치판단을 얻게 되고 그 가치 판단을 근거로 한 신념에 따라 행위 또는 사고하게 된다. 탐구는 노력이다. 서류를 탐독해서 탐구가 될 수 있는 것이 있고 현장 조사를 통해서 또 현장탐문을 통해서 탐구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탐구적 노력에 의해서 신념이 생기는 것이고 이 신념에 바탕을 둔 양심에 따라 행위할 때에 ‘양심에 따라 행위했다’ 라고 할 수 있다. “양심에 따라”라는 말은 단순히 “도덕적 비난을 받을 일없이”라는 그런 식으로 이해해서는 아니 된다.

이정렬 판사 및 박흥우 판사는 김명호씨의 사건과 관련해서 어떤 탐구활동을 했는가? 서울서부지검 강영권 공판전문 부장검사는 자신의 개인 블로그에 지난 23일 '타산지석'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법대로 하는 것보다 사건 원인 찾아내는 노력 중요"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사건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 어떤 탐구도 한 흔적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물론 원래 쟁점을 다른 식으로 바꾸어 버렸을 때에 이미 이런 탐구활동에 기초한 “양심에 따라”를 기대하기 어렸다. 쟁점은 원래 그 결과를 예상하고 정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정렬 판사 및 박 흥우 판사가 김명호씨에게 교육자적 자질이 없고 교원으로서의 품위가 현저하게 부족하다고 하는 것에 대한 근거를 보면 참으로 억지스러운 것들이다.


“원고가 학업 성취도에 대한 평가를 자의적으로 행한다는 이유로 수학과 학생들 사이에 원고의 강의에 대한 수강기피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원고는 대학교원으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판단하는 요소로서 학문 연구의 실적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어야 할 학생교육, 학생지도의 점에서 피고의 학칙을 위반하였거나, 자의적으로 학생들에 대한 학업성취도를 평가하였다.”


박흥우 판사 등은 성균관대학교 측에서 데려다 내세운 증인들의 입을 통해서 나타나는 김 명호씨의 발언과 행동, 평판 등을 근거로 해서 김명호씨에게는 교육자적 자질이 부족하고 교원으로서의 품위가 손상되었다고 판결하고 있다 .김 명호씨의 말에 따르면 ‘위증을 방조하면서“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판사들은 흔히 그것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남의 말에 근거해서 판단한다. 고문에 의한 조작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들이 증거로 삼고자하는 그런 진술의 진위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그런 진술의 진위를 따지려고 탐구할 시간을 갖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판사들이 상식에도 어긋나는 자의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판결하는 것을 보기도 한다. 공안 사건에서는 그들은 어떤 태도를 보여주는가? 검사들이 제시하는 것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근거로 삼아 판결한다.

박흥우 판사 등은 우리들에게 지식인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 다시 묻게 하고 우리 사회의 패거리 문화 속에 갇혀있는 지식인상을 보게 한다.

재판부가 입시문제오류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해줄 것을 대한수학학회에 요청했다고 언론은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수학학회는 시종일관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패거리 문화를 말하고 그것이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이자 한국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명호씨 사건은 성균관대학사회의 패거리 문화, 학회들의 패거리 문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패거리 문화에서 그 구성원들은 강자에게 약하고 개같이 굽신거린다. 뒤에서 사악한 음모를 꾸밀지는 몰라도. 거기에는 비판이 없고 비판하는 사람을 사교성이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그를 왕따시키기도 한다.

건전한 문화에서 지식인들의 사회적 역할은 진리라는 이름으로 현재 있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비판이라는 것은 현재 있는 것에서 인간에게 긍정적이고 도움이 되는 것은 계승하고 인간에게 부정적이고 해로운 것은 제거해가면서 더 나은 것으로 나아가는 과정적 활동이다.

박흥우 판사 등은 교원으로의 품성과 관련해서 “김명호씨가 공개석상에서 동료교수를 비난했다”라는 점을 문제 삼고 이를 증거로 삼는다. 여기서 비판이 비난으로 둔갑했는지 모르고 또 비판하면서 욕이 나왔을지 모른다. 욕이란 비판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이고 그 방식 상으로는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일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원래 건전한 문화 속에서는 하등에 문제가 되지 않다. 그런 문화는 개방적이고 비판이 있으므로 발전적이기 때문이다. 박흥우 판사 등도 비판 또는 비난을 달가와 하지 않는 그런 패거리 문화 속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가 정상적인 판사였다면 이런 것을 증거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지식인 및 연구자의 사회적 역할과 존재 형태 등을 전혀 모르면서 그들을 판결한다. 게다가 그는 정상적인 문화에서는 전혀 증거가 될 수 없는 그런 것을 증거로 삼아 교원으로의 품성의 부족을 판결한다.

그래서인지 박흥우 판사 등은 진리를 추구해야 할 대학사회에서 입시문제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자, 교수라는 사람들이 오류를 바로잡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을 은폐하고 그런 오류가 있음을 다른 학교의 사람에게 알리자, 그것을 해교행위로 치부하는 그런 패거리 문화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이럼으로써 학술단체협의회가 2007년 1월22일 성명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박흥우 판사 등 사법부는 “ 김 전교수의 재임용 탈락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대학 교원으로서의 자질을 문제 삼음으로써 주관적 사유로 한 대학 교원 신분 박탈을 합리화시켜” 주고 오히려 패거리문화를 변호한다.



3. 근본적으로 생각하자


우리나라의 사법부 사람들은 모두가 유능하다. 왜 유능한가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앞에서 지적했던 것이 갖는 의혹, 즉 재판의 쟁점이 ‘대학 입시문제의 오류지적과 관련한 보복에 따른 재임용거부 결정 문제’에서 ‘교육자적 자질에 따른 재임용거부 결정문제’로 바뀌어, 피고로 등장하는 성균관 대학에 유리하도록 해버린 것이 지닌 문제, 사법부가 개인적인 주관적 견해를 근거로 교수의 교육자적 자질이나 품성을 따지는 데에 문제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다. 아마 이정렬 판사는 “쟁잼은 교육자적 자질”이었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재판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은밀하게―이것은 글쓴이의 판단이지만―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사법부의 사람들은 성실하다! 그들은 헌법 제103조에서 규정되는 법관의 의무이자 권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흥우 판사 등은 충분한 탐구ㆍ조사 활동을 통해서 김명호씨가 대학입학시험 문제의 오류를 지적한 행동에 대한 성균관대학의 보복이 주된 원인이 되어 교수직이 박탈당했을 인과관계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정렬 판사의 글과 인터뷰 내용은 판사로서의 박흥우 판사의 재능과 성실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재능 및 성실함과는 전혀 반대로 된 판결을 그들은 내놓고 있다. 판결문은 그들의 무능함과 성실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진짜 그들이 무능한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우리나라 법관들은 모두 유능하고 성실하나 오히려 사법부라는 그 구조와 판사라는 그 자리가 그들을 무능하게 하고 불성실하게 할지 모른다.’라는 의혹을 보내고 있다. 왜냐하면 사법부라는 것은 국가기관의 하나로서 계급사회에서는 지배계급을 대변하고 그들의 이익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며 한마디로 말하면 지배계급의 통치를 위한 그런 기구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안사건의 재판에서는 재판부의 당파성 및 계급성을 쉽게 발견하나, 민사사건이나 형사사건의 재판에서는 법원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하면 그 말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민사사건의 재판에는 힘 있는 자와 힘 있는 자 사이의 다툼, 힘있는 자와 개인 사이의 다툼, 개인과 개인의 다툼 등이 있다. 힘 있는 자와 힘 있는 자 사이의 다툼에서나 개인과 개인의 다툼에서는 법관들은 손실의 최소화에 따른 나누어 부담하기식의 판결을 선호하지만 힘 있는 자와 개인 사이의 다툼에서는 힘 있는 자에 의한 개인의 수탈을 정당화하는 그런 판결을 지향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언제나 재판의 공정성이 문제로 되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힘 있는 자란 국가권력과 재벌 등을 말한다.

요즘은 법관들은 국가와 재벌 사이의 다툼에서 오히려 재벌을 위한 그런 일을 하고 있는듯하다. 삼성재벌을 대하는 법관들의 태도를 보면 그리한 것같다. 재벌들이 형사사건에 연루되어도 그 형량은 극히 형식적이다. 재벌이 이 나라 경제발전에 공헌했다는 이유로.... 그렇지만 김명호씨의 사건의 경우는 바로 힘 있는 재벌사학재단과 개인(피고용자)사이의 다툼이었다. 진짜 힘 없는 개인이 재벌사학재단을 상대로 법정다툼을 벌였던 것이다.

이정렬 판사는 정의로워야 하는 법원을 부정의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전관예우가 김명호씨 사건 재판에서는 없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판결문을 보면 그들은 성균관대학의 요구를 반영해서 재판을 진행했고 판결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다음은 재판에 대한 김 명호씨의 생각을 보여주는 글이다.


김 전 교수는 “박 부장판사가 ‘성균관대 대리인’”이라는 심증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김 전 교수는 박 부장판사의 ‘구실’에 대해 “제출된 증거 서류를 훑어본 듯하나 준비서면은 읽어보지 않고, 원고의 이의제기에 대한 답변을 거부하고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진술을 방해하거나 위법적인 증인 신문을 강행해 허위 증언을 방조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자신이 신청한 변론 녹음ㆍ각하ㆍ항고ㆍ구문권 등은 단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피고인 성균관대가 제기한 신청 사항은 대부분 받아들였다고 믿은 탓이었다.


김 명호씨는 “판사가 허위 증언 방조한다” 라고 말한다. 이런 것들이 사실이라면 박흥우 판사 등은 왜 그러했는가? 사람들은 무엇인가 있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라 말하고 싶으나 증거가 없어 말을 못하는 것 같다. 판사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직접적 커넥션은 없으나, 소송이 잦은 미래의 고객을 위해서! 이런 접근법은 지극히 개연성이 많을 것이고 그 판단 또한 지극히 주관적이 될 것이다. 우리는 국가 기관의 하나로서 사법부, 법원을 보자. 그것들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게 꾸며졌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는 법률가들이 구체적으로 연구해서 폭로해야 할 사항이다.

김명호씨는 이 사건을 일으키면서 “국민저항권”이라고 말하고 있다. 국민저항권을 발휘하는 데에 있어 폭력은 나쁜가? 김 명호씨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니기에 깊이 숙고해보아야 한다. <노사과연>




김명호씨의 석궁사건

-법관들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김성칠 |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