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알튀세르가 소개되고 나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알튀세르가 논란이 되었던 것은 그가 현실사회주의와 사회주의운동의 위기를 말하는 문제 제기자였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의 위기에 대한 공공연한 문제제기는 당시로서는 충격이었지만 이후 소련의 붕괴로 인해 현실적으로 검증되었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사상이 대안적 노선으로 구체화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바로 이점이 알튀세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알튀세르는 교조주의에 반대하고 자신의 머리로 독자적으로 사고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알튀세르는 대안사회를 고민하고 운동의 위기에 대해 근원적으로 사고하려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짚어야 할 인물이다. 알튀세르의 문제제기는 날카롭고 예리하다. 소련 등 현실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했고 프랑스내 공산당의 관료주의를 예리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그러한 비판에 대안이 담겨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대안적 실천의 조직에 실패한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론의 독자성이라는 점에서는 성공적이었지만 이론과 실천의 통일, 실천에 봉사하는 이론이라는 점에서는 실패였다. 무엇이 알튀세르로 하여금 대안적 실천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을까? 이론적 실천이라는 그의 관점을 들 수도 있겠지만 보다 근원적으로 알튀세르의 시야를 제한하고 행동을 제약했던 것은 스탈린에 대한 부정이다. 스탈린을 부정하고 나서 소련 등 현실사회주의와 선을 긋고 나아가서는 프랑스내 공산당조직과도 선을 그은 그는 문제제기자의 역할이상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개인적 실천을 넘어서 조직적 대안을 담보하는 실천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알튀세르에게 스탈린은 비판의 대상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넘지 못한 하나의 장벽이었다.
알튀세르의 주장 중에 ‘맑스주의에는 국가론이 없다’는 명제가 있다(이진경 번역, 「당내에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될 것). 이 말이 실천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맑스에 의해 발견되어 레닌에 의해 발전하고 현실 사회체제로 성립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맑스주의의 국가론이 아니라는 말인가? 이것은 알튀세르가 소련 등 현실사회주의와 선을 그었기 때문에 가능한 주장이었던 것이다.
한편 알튀세르는 1970년대 말에 이르러 엥겔스의 자연변증법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부정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이 스탈린에 의해 체계화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왜곡되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변증법적 유물론을 부정하는 것은 인류가 쌓아올린 지적 성과, 노동자계급이 투쟁 속에서 발견한 과학적 성과를 부정하는 것이다. 스탈린에 의해 체계화(혹은 도식화)되었다는 것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고유한 성격은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기까지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무엇보다도 모순에 관한 학설이다. 우리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도움으로 대상을 변화의 흐름 속에서 역동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대립도 모순이라는 관점에 의하지 않고서는 과학적 이해가 불가능하다.
알튀세르의 추종자 중에는 맑스주의가 더 이상 세계관이 아니며 과학성도 부정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윤소영 번역, 「알튀세르와 맑스주의의 전화). 이는 현실사회주의와 사회주의운동의 위기 상황 앞에서 이론 측면에서의 동요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알튀세르에 대해 문제제기자로서는 높이 평가하되 그 한계와 오류도 짚어야 한다. 알튀세르가 그토록 규탄해마지 않았던 관료주의와 교조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은 타당한 면이 많다. 그러나 대안적 실천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한계, 그리고 부분적인 오류도 같이 짚어야 한다. 알튀세르는 스탈린에 대한 부정은 있으나 스탈린에 대한 과학적인 비판은 보여주지 못했다. 장벽을 부정한다고 장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알튀세르가 넘지 못했던 장벽인 스탈린이라는 장벽을 넘어서 보자. 사실 스탈린에 대한 비판은 넘쳐난다. 그러나 대부분이 제국주의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악선동이다. 우리에게 스탈린, 나아가 소련 등 현실사회주의의 역사는 단순한 부정의 대상인가, 아니면 지양의 대상인가?
스탈린 시대는 인류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트독재 시대라는 점에서 과학적 입장을 견지하려는 사회주의자라면 스탈린에 대한 긍정은 불가피하다. 사실 스탈린의 공적은 거대하다. 레닌 사후 트로츠키에 맞서 레닌주의를 수호했으며 자본가계급을 소멸시키고 착취를 폐지하였다. 또한 공업과 농업 등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하여 실업을 일소하고 완전고용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인류 최초로 무상교육, 무상의료, 노후연금 등의 사회주의적 제도를 도입하였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착취와 빈곤, 실업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꿈같은 일이다. 그리고 스탈린은 나찌 독일의 군사적 침략에 맞서 승리하여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형성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이 성공적인 것만 같던 시기에 재앙이 발생했다. 1936년부터 1939년에 이르는 대숙청이 바로 그것이다. 부르주아지의 통계에 의하면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 시기에 희생되었다. 스탈린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적대감과 통계의 과장을 고려하더라도 이는 명백히 대재앙이며 스탈린의 결정적 오류이다. 스탈린 스스로 1939년에 이르면 대숙청의 오류를 인정하고 많은 사람들을 복권시키기도 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대숙청은 사회주의적 법치주의가 붕괴했음을 말한다. 즉, 법적으로 제재할 대상과 사상적으로 비판할 대상의 구분이 무너졌던 것이다. 이러한 사태의 외부적 요건으로 나찌 독일로부터의 거대한 정치적, 군사적 압력을 들 수 있다. 히틀러는 공공연히 반공, 반소정책을 내세웠고 몇 년후 2차대전에서 소련 인민 2천만 명 이상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외부적 요인만으로는 대재앙이 해명될 수 없다. 소련은 국내적으로 1930년대 후반 신헌법을 제정하고 사회주의의 승리를 선언하였다. 자본가계급을 소멸시키고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했다는 안도감과 승리감, 그런데 외부로부터 가해져오는 적대감 등이 복합되어 대숙청의 요인이 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해답이 되지 못한다. 대숙청을 가능케 했던 사상에서의 오류를 짚어야 한다. 1930년대 후반에 스탈린은 인텔리겐챠(지식인들)들이 사회주의적으로 개조되어 더 이상 노동자계급과 인텔리겐챠의 대립은 없다고 선언하고 나아가 전인민국가를 선언한다. 즉, 소련사회는 모순이 없는 사회로 선언된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 모순이 없는 사회가 있을 수는 없다. 스탈린은 존재하는 모순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주하고 전인민국가의 틀에서 벗어나거나 동요하는 사람들을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여 숙청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규탄해마지 않는 반공주의라는 획일적 틀과 인민의 적이라는 틀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명백히 스탈린의 좌익적 오류이며 사상의 한계이다. 물론 아무런 나침반없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야만 했던 당시의 역사적 한계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그러면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어떤 모순이 존재하는 것일까? 자본주의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대립이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면 계급이 폐지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무엇이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가? 그것은 인민내부의 모순이다. 즉, 노동자계급 내부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스탈린은 바로 이 점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스탈린만이 아니라 20세기의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 건설의 원동력으로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문제를 보지 못했다.
중국의 모택동의 경우 사회주의자로서는 최초로 인민 내부의 모순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인민내부에도 모순이 있으며 이를 올바로 해결하지 못할 경우 1956년의 헝가리사태와 같이 적대적으로 발전할 수도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모택동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을 극복해야할 대상으로는 파악했지만 사회주의 건설의 원동력으로 파악하지는 못했다. 1960년대 후반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의식적으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었으나 좌익적 오류의 축적으로 실패하고 이후 권력은 등소평을 대표로 하는 자본주의파에게 넘어가 중국은 이후 자본주의화의 길을 걷는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은 일거에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꾸준히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은 그 자체로 보면 적대적 대립이 아니다. 왜냐하면 계급이 폐지되고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기초 위에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은 계급사회의 잔재라는 점에서 올바로 해결하지 못할 때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처럼 적대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을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으로 파악하는 것은 여러 가지 가능성과 전망을 열어주는 것이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 올바르게 해결돼 나가는 것은 관료주의의 극복, 국가의 소멸 전망, 도시와 농촌의 대립의 극복, 분업의 소멸 전망을 여는 것이다. 국가가 존재하는 동안 관료주의는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정신노동자의 핵심이 관료라는 점에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을 의식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은 곧바로 관료주의의 극복과 연결된다. 관료주의를 국가의 감사기능의 강화, 아래로부터의 비판 등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표피적인 발상이다. 물론 이러한 노력도 필요하지만 관료주의의 뿌리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열에 있음을 인식할 때 근본적 비판이 가능하다.
또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극복은 국가소멸의 전망을 여는 것이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서 시민사회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라는 내적 모순의 발전으로 인해 활성화될 때 시민사회가 국가보다 우위에 서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국가의 기능의 일부분이 점차 시민사회로 이양되는 과정이 지속될 때 국가는 서서히 소멸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또한 도시와 농촌의 대립도 극복이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도시와 농촌의 대립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공간적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도시는 정신노동을 특화하고 농촌은 육체노동을 특화한 것이 오랜 계급사회의 역사이다. 이러한 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더 고도화되었다. 따라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극복 노력은 도시와 농촌의 대립 극복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분업의 발생 자체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에 기초했다는 점에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극복은 분업을 소멸시키고 인간의 다면적인 발전을 가능케 한다. 사적 소유의 발생과 계급으로의 분열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열을 가져왔고 이후 분업은 고착되어 발전한 것이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극복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길을 밟을 것인가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모순의 극복, 해결은 모순의 발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모순론의 원칙을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모순의 발전을 꾀한 것이 아니라 모순의 억제를 택했고 그 결과 비극이 발생했던 것이다.
대숙청이라는 스탈린의 좌익적 오류는 이후의 후르시초프의 우편향, 브레즈네프 시대의 경제개혁의 우편향, 고르바초프의 우편향과 더불어 소련 붕괴의 하나의 원인이 된다. 후르시초프는 스탈린의 오류를 교정하고자 했으나 우편향의 오류에 빠졌다. 스탈린에 대해 개인숭배를 조장했다는 매우 비과학적인 비판에 그치고 전인민국가, 전인민당이라는 잘못된 노선을 추구한다. 전인민국가라는 노선은 프롤레타리아독재를 대체할 수 없다. 전인민국가에서는 국가기구가 소멸하기는커녕 팽창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전인민의 국가이기 때문에 국가기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실제로 후루시초프가 집권하던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소련의 국가기구는 엄청나게 팽창했다. 중앙정부에나 있을 법한 기구가 지방정부와 지방공화국에 설치된 것이다. 따라서 전인민국가라는 노선은 전형적으로 관료주의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전인민당이라는 노선은 노동자계급의 당이라는 당파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의 축적으로 인해 후르시초프는 실각한다.
후르시초프의 뒤를 이은 브레즈네프는 절충을 택한다. 그러나 절충의 결과는 심각한 침체로 귀결되었다. 후루시초프가 국가기구의 측면에서 오류를 저질렀다면 브레즈네프는 경제에서 오류를 저지른다. 1960년대 말 수상 코시킨의 주도로 이루어진 경제개혁은 이후 소련의 경제를 깊은 침체로 몰아넣는다. 수 십 년 동안 연평균 10%이상 성장하였던 소련 사회는 경제개혁 이후 서서히 침체하더니 1970년대 말에는 0%의 성장의 늪에 빠졌다. 코시킨이 행한 경제개혁의 핵심은 국유기업에 자본주의적인 이윤원리를 도입하고 기업마다 독립채산제를 실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토대위에서 이루어진 자본주의 원리의 도입은 심각한 불협화음을 내며 소련경제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경제의 발전이 인민의 창조성과 자발성에 기초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본주의 원리를 뒤섞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님을 말한다.
경제정책의 오류와 더불어 이론에서도 오류가 발견된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정치경제학을 대표하는 짜골로프의 정치경제학 교과서는 사회주의 사회의 경제에 대한 많은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결정적인 오류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법칙이 사회주의 사회의 계획법칙으로 대체된다는 명제가 그것이다. 이 명제는 두 가지 점에서 틀렸다. 첫째, 계획은 경제법칙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계획은 대상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 작용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객관적인 경제법칙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계획이 경제법칙이 된다면 경제관료의 지시나 명령이 경제법칙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가치법칙은 사라지지 않는다. 화폐와 시장을 매개로 하여 가치법칙은 의연히 관철되며 다만 등가교환을 보장하는 역할을 한다. 가치법칙이 소멸하는 것은 화폐와 시장이 소멸하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이다.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인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가치법칙이 존재하며 다만 계획이 가치법칙의 우위에 서서 의식적으로 조절되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사회주의 사회의 정치경제학이 재정립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스탈린의 좌익적 오류, 후르시초프 시대의 국가기구의 팽창, 브레즈네프시대의 경제의 균열이 축적되면서 소련사회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고르바초프는 이를 올바르게 개혁하지 못하고 이후 소련은 붕괴의 길을 걷는다.
소련의 붕괴로 인류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트독재는 실패로 귀결되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역사는 퇴행과 반동을 거듭해왔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자계급의 처지는 갈수록 열악해져 갔다. 그러나 역사는 살아 숨쉬는 것이며 퇴행과 반동에 대해 역사 스스로 반격을 준비한다. 역사의 진보를 위해 다시금 역사의 기관차의 재등장은 불가피한 것이다. 21세기의 사회변혁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극복을 현실적 과제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매우 높은 수준에서 진행될 것임을 예고한다. 이는 주체의 측면에서는 더욱더 높은 수준의 노력과 투쟁을 요구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변혁과 사회주의 변혁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확립, 나아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극복을 통한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의 도약 등등 많은 단계의 투쟁이 요구되지만 과학적 노선을 세우고 이를 실천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알튀세르의 제자 발리바르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발리바르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기라고 정당하게 규정하고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노동력은 상품이며 사회주의가 실제적으로는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한다( 최인락 번역, 「민주주의와 독재). 그러나 사회주의에서는 노동력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노동시장이 폐지된다. 따라서 노동력은 더 이상 상품이 아니게 된다. 또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첫 번째 과제가 착취의 폐지를 통한 노동자계급의 해방이라는 점에서 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로 파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국가자본주의에서는 착취가 폐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발리바르가 이러한 오류에 빠진 것은 1920년대 당시 신경제정책을 사고하던 레닌의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언급을 잘못 이해한 데서 기인한다.
유럽의 공산당들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원칙을 폐기하여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고 소련 붕괴를 전후하여 몰락의 길을 걸었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알튀세르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알튀세르는 바로 유로꼬뮤니즘의 거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노사과연>
특별기고
알튀세르를 위하여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
문영찬 | 구독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