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의 계급투쟁

계급사회



계급사회․계급투쟁


한미 FTA 협상의 ‘타결’을 계기로 그에 대한 계급적 태도가 더욱 극명하게 대비되어 나타나고 있다.

노동자․농민 등 민중의 쪽에서는 깊은 절망과 분노로 연일 반대시위, 반대투쟁을 벌이고 있다. 심지어는 한미 FTA 저지를 위해 분신하는 노동자가 있는가 하면, 그 협상이 타결되었다는 소식에 절망한 나머지 “이 더러운 세상 그만 살자”며 공기총을 난사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에 비해서 다른 한쪽, 즉 재벌을 위시한 독점자본의 쪽에서는 협상타결 소식에 환호작약하고 있다. 본래 이들은 지배계급 내의 분파적 이해대립도 반영하여, 그리고 민중주의적 행태를 보여온 노무현 정권이 혹시나 민중적 이익을 중시할지 모른다는 노파심에서 그것도 경계할 겸, 대통령 노무현과 그 정권을 짐짓 ‘좌파적’이라며 그토록 적대하던 자들인데, 이제 그가 노동자․농민의 거센 반대에도 전혀 좌고우면하지 않고 한미 FTA를 밀어붙였대서, “정말 대통령다운 대통령”이라고 한껏 치켜세우며 희희낙락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농민을 위시한 민중의 태도와 독점자본 측의 태도가 이렇게 확연히 다른 것은 물론 우연이 아니다. 양측이 이렇게 상반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은, 한미 FTA의 내용․목적이 다름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희생 위에서 수출 증대, 즉 독점자본의 시장 확대를 꾀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노동자․농민도 독점자본도 모두 이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노무현과 그 정권도 물론 이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어떻게든 노동자․농민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고 무너뜨리기 위해서 “피해 산업과 피해 계층에 대한 지원대책” 운운하며 구차한 생색을 내고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노동자․농민에게 절망과 빈곤, 분노의 원천인 것이 독점자본에게는 거대한 이윤과 환희의 원천인 것이다. 그리고 노무현 정권은 바로 그 원천, 즉 노동자․농민을 위시한 민중에게는 절망과 빈곤, 종속, 분노의 원천이요 재벌을 위시한 독점자본에게는 거대 이윤의 원천인 한미 FTA를 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번 한미 FTA 반대투쟁을 벌이면서 노동자․민중이 획득해야 하는 것은 우선 자본주의로서의 이 사회가 그만큼 적대적인 계급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일 것이며, 그리하여 한미 FTA를 둘러싼 찬․반의 투쟁은 다름 아니라 계급투쟁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국가, 그리고 그 구체적인 인적 담당자인 정권, 즉 노무현 정권이란 노동자․농민을 위시한 민중에 대한 독점자본의 지배기구이자 독점자본 상호간의 이해의 조정기구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도 물론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는 저들 지배계급이 어떻게든 가장 은폐하고 싶어 하는 사실이다. 노동자․농민이 그 내막을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그리고 그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면 명확할수록, 그들의 계급적 저항이 격렬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저들은 자신들의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늘 ‘국가’와 ‘국민’의 이름으로 그것을 포장한다. 자신들의 배타적․계급적 이익이 아니라 국가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저들의 계급적 지배도구이듯이 저들이 말하는 국민 또한 사실은 저들 자신일 뿐이다. 그리하여 한미 FTA에 반대투쟁,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는 ‘한미 FTA 저지 범국민 대책위원회’에 대해, 저들의 예컨대 [동아일보](2007. 4. 10.)는 ‘사설’을 통해 “국민을 사칭”했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말한다.


범국본이라는 단체가 무슨 명분과 권리로 이런 짓을 하는지 알기 어렵다. ‘범국민’이라고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한미 FTA에 반대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운동에 동의한 적도, 가입한 적도 없다. 대체 무슨 근거로 ‘범국민’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는가. 이는 명백히 국민을 사칭(詐稱)하는 행위다. 당장이라도 그 기만적인 이름부터 바꿔야 한다.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다. 저들 국민, 즉 독점자본 가운데 일부 소수는, 현실적 이해관계 때문이든, 이해관계에 대한 환상적인 판단 때문이든, 한미 FTA에 반대할지 모르지만, “대다수 국민은 한미 FTA에 반대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운동에 동의한 적도, 가입한 적도 없다.” 따라서, 그런데도 한미 FTA에 반대하는 노동자․농민 등의 민중이 한미 FTA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조직에 “범‘국민’ 대책위원회”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명백히 국민을 사칭(詐稱)하는 행위”로서, “당장이라도 그 기만적인 이름부터 바꿔야 한다.” ― ‘한미 FTA 저지 범노동자․범민중 투쟁위원회’로!!!

이것이 바로 저들의 인식이자 본심이요, 요구이다. 그리고 또한 파렴치한 진실이다.

파렴치한 진실? ― 그렇다. 노동자․민중이 자신의 이름을 쓰지 못하고 ‘범국본’이라는 “기만적인 이름”으로 “국민을 사칭”하는 것은 사실은 다름 아니라 바로 저들 자신들이 자신의 계급적 이해와 억압을 은폐하기 위해서 대중의 이데올로기를 조작을 해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국민 지식인들의 사악한 곡필아세


각급 학교의 교육을 통한 제도적인 이데올로기 조작이나 조․중․동의 ‘사설’ 등등과 같은 저질의 노골적인 이데올로기 조작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아무리 위력적일지라도, 여기에서 새삼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소위 전문지식인이라는 자들이 어떻게 사악하고 교활한 곡필아세로 대중의 이데올로기를 조작하고 있는지 그 한 예를 심심파적 삼아 소개해 보자.

최근 [조선일보]에는 ‘이덕일 사랑’(舍廊)이라는 고정 칼럼이 격일(?)로 실리고 있다. 이덕일이라는 ‘역사학자’가 역사적 사실(?)에 빗대 시사문제를 논하는 칼럼이고, 그런 만큼 자못 흥미 있고 또 강한 설득력을 가질 만한 칼럼이다. 그런데 지난 3월 28일자에서는 “역사의 선택”이라는 제목 하에 다름 아닌 한미 FTA야말로 ‘역사의 선택’임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그 글을 이렇게 시작한다.


일본은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의 무력 시위에 굴복, 문호를 개방했다. 조선은 중화(中華) 문명의 마지막 수호자를 자처하며 쇄국을 고집했다. 1876년 그런 조선의 문호를 연 것은 불과 20여년 전에 개국한 일본이었다. 대원군이 프랑스 함대를 격퇴한 고종 3년(1866)이나 미국 함대를 격퇴한 고종 8년(1871) 개국 협상에 나섰다면 대등한 조건에서 개국할 수 있었고, 이후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한미 FTA를 반대하고 거부하는 것은 ‘쇄국’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한미 FTA를 반대하는 노동자․농민 등은 맹목적인 ‘구(舊) 문명의 마지막 수호자’가 된다. 과연 타당한 비유, 타당한 주장인가?

아무튼 그는 이렇게 계속한다.


그보다 230여년 전인 인조 23년(1645) 소현 세자는 만 8년간의 인질생활 끝에 귀국했다. 한 해 전 그는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중화문명 이외의 서구문명을 접했다. 천문(天文)·역산(曆算) 등의 여러 서적을 갖고 귀국한 그는 서구 문물 수용을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귀국 두 달 만에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와…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인조실록’ 23년 6월 27일)’는 기록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도 이미 청나라와 서구 문물 수용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한 독살설이 끊이지 않았다. 그가 즉위해서 조선의 개국을 이끌었다면 역사 또한 달라졌을 것이다.

이가환·이승훈·정약용 등 서구 문물을 수용했던 남인들과 조선의 개방된 미래를 이끌던 정조 역시 재위 24년(1800) 만에 석연찮은 죽음을 맞고 조선은 다시 노론(老論)으로 대표되는 소중화주의자들의 세상이 되었다. 정조가10년만 더 살아 사왕(嗣王)들이 부왕의 정책을 계승해 나갔다면 식민지의 비극은 없지 않았을까.


이렇게 되면 한미 FTA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제 영락없이 ‘소중화주의자들’과 같은 수구적(守舊的) 집단이 되고, 그러한 수구적 목적을 위해서는 인명의 독살도 서슴지 않는 끔찍하고 사악한 인간들이 된다. 한미 FTA에 반대하는 노동자․농민을 이렇게 제멋대로 짓이겨 놓고는 그는 이렇게 점잖게 결론을 내린다.


모든 역사의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는데, 동서고금에 개방 대신 쇄국을 택한 나라의 후과(後果)는 모두 비참했다. 전 세계 교역량의50% 이상을 지역무역협정(RTA) 내 교역이 차지하는 현실에서 가장 낮은 단계의 지역무역협정인 자유무역협정(FTA)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미 FTA 체결 후 경쟁력 있는 분야의 이득을 어떻게 취약한 분야로 돌릴 것인지, 그래서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어떻게 승화시킬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아! “한·미 FTA 체결 후 경쟁력 있는 분야의 이득을 어떻게 취약한 분야로 돌릴 것인지, 그래서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어떻게 승화시킬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 그는 이 사회가 마치, 사적 소유와 탐욕에 기초한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 어느 한쪽의 이득을 다른 쪽으로 돌릴 수 있는 공동체, 공동선의 사회라도 되는 것처럼 사기치고 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노동자․농민의 희생, 그 빈곤화 위에 독점자본의 이득을 챙기겠다는 한미 FTA, 그리하여 노동자․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반대하고 있는 그것을 두고 말이다.

노동자․농민 등이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것을 ‘쇄국’으로 억지 빗대고, 또 그것을 수구적인 것인 양 전도된 비유를 하고 있는 것은 그만 두더라도, 나는 이덕일이라는 역사학 박사님께서 최소한의 학자적 자질이라도 가졌고, 그리하여 최소한의 형식논리라도 충족시킬 수 있는 자였더라면, 자신이 제기한 문제와 관련하여 최소한 다음과 같은 문제는 해명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는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의 무력 시위에 굴복, 문호를 개방”한 일본과 “중화(中華) 문명의 마지막 수호자를 자처하며 쇄국을 고집”한 조선을 대비시키면서 “모든 역사의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는데, 동서고금에 개방 대신 쇄국을 택한 나라의 후과(後果)는 모두 비참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그 수용의 실패를 아쉬워하는 서구문명, 서구 문물의 유입 통로는 청나라(북경)였고, 그 유입 시기도, 그의 글에만 의거하더라도, 그가 개국의 실패를 아쉬워하는 조선조 말보다 “230여년 전인 ... 16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 그 청나라는 서력 1645년 이전에 이미 서구문명, 서구 문물에 개방되어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바로 그 청나라가 19세기에 들어와 그리고 20세기 전반에도 서구 열강은 물론 1854년에야 “문호를 개방”한 일본의 반식민지 상태가 되는 “비참”한 처지에 빠졌다.

이덕일 박사는 최소한 이에 대해서 해명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는 그저 아전인수! ― 이것이 이덕일이라는 지식인, 아니 오늘날 한미 FTA를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행태이다.

그런데 방금 지적한 것과 같은 행태는 사실은 단지 형식논리적인 것에 불과하다. 명색이 역사학자 혹은 사회과학자로서 사회문제를 논한다는 저들의 최대의 교활함은,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이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적 분열과 그 이해의 적대성, 즉 자본가계급에 의한 노동자계급의 착취에 대해서 함구하면서, 이 사회가 마치 공동선, 공동체의 사회라도 되는 것처럼 요사스러운 혓바닥을 놀리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요설을 가능하게 하고 합리화․장식하는 것이 바로 ‘국가’․‘국민’이라는 몰계급적 언어, 특히 ‘국민’이라는 번역어이다.

국가란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라고 얘기했지만, 계급사회의 교육의 탓으로 국가라는 것을 신성시하면서 그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국가의 기원’, 즉 국가라는 것이 언제 어떤 조건과 배경, 이유와 누구의 어떤 필요에 의해서 등장했는가를 공부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장구한 인류의 역사 속에서 국가라는 것이 등장한 것은 불과 기천 년이요, 기천 년 전에 국가가 등장한 데에는 그럴 만한 조건과 배경, 이유, 그리고 필요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국민’이라는 문제로 돌아가면, 저들 지배계급은 어떤 국가의 영토 내, 비근하게 얘기하자면 이 극동 아시아 반도 내 휴전선 이남에 사는 사람들을 마치 공통의 이해와 공동의 운명을 가진 사람들처럼 담론을 전개한다. 이덕일 박사가 “사회의 전체 이익” 운운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저들이 편리할 때, 즉 자신들의 착취관계를 은폐하고자 할 때에 ‘국민’이라고 부르고, 그들이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에게 저항할 때에 “왜 국민을 사칭하느냐”라고 힐책당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저들의 착취의 대상에 불과하고, 포로에 불과하다.

사실 이 시대 친자본주의적 지식인 일반, 특히 인문․사회과학을 한다는 친체제 지식인 일반에 해당하는 말이지만, 이덕일 박사와 같은 자들은 지식인으로서는 경멸을 받아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이 사회의 교육이 아무리 계급적이고 이데올로기 조작적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지식인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그들에게는 이런 문제를 깊이 그리고 충분히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사고할 만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어진 문제를 비판적으로 이해할 수 없어서든, 개인적․계급적 이해관계에 좌우되어서든, 독점자본의 교활한 나팔수로 나섰기 때문이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저들은 한미 FTA에 반대하는 노동자․농민을 수구적인 것처럼, 그리하여 역사발전의 걸림돌인 것처럼  매도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모순에 가득 찬 이 계급사회체제를 변혁하려는 노동자․농민이야말로 역사의 창조자이며, 기존의 착취체제를 안존․강화시키려는 발버둥으로 한미 FTA를 밀어붙이면서 노동자․농민을 억압하는 저들이야말로 청산되어야 할 역사의 걸림돌인 것이다.

이덕일이 ‘쇄국’이라는 일면적인 사실로 역사의 비참을 강변하려 들면서 중국의 문제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구(舊) 조선의 식민지화를 쇄국의 문제로 돌리는 것은 올바른 설명일 수 없으며, 그것은 단지 진짜 원인을 은폐하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그 진짜 원인은 언제나, 예컨대 청군과 일군을 끌어들여서까지 갑오농민혁명을 진압했던 구 조선의 지배계급처럼, 바로 사회체제의 근본적 변화․변혁을 거부하는 지배계급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사회와 역사에 비극을 초래하고 있는 것은 극도의 모순에 찬 이 착취체제를 유지․강화하려는 지배계급이고, 그들의 이데올로그들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지배계급이 봉건적 지주계급에서 독점자본가계급으로 대체되었다는 점과 그 대외 동맹․의존 세력이 바뀌었다는 사실뿐일 것이다.



파시즘의 강화를 요구하는 독점자본

 

한편, 예의 [동아일보]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가 경찰의 집회 금지 결정을 무시하고 다른 단체 명의로 빌린 장소에서 사실상 불법 집회와 도로 점거 시위를 벌였”다며,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경찰은 편법 집회와 시위를 불법으로 간주해 책임자를 처벌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집회 허가를 받아 주기 위해 명의를 빌려 주는 단체에 대해서도 연대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명색이 헌법에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써넣고 있는 자들이 경찰이 임의로 “집회 금지 결정”을 할 수 있고, 그 결정을 무시한 집회는 “편법집회”요 “사실상 불법집회”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불법으로 간주”하는 것만으로 처벌할 수 있고,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저들의 민주주의요, 집회 및 시위의 자유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저들은 “국회는 자유주의연대 등 13개 시민단체가 2월 청원한 집시법 개정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이들 단체는 교통을 심각하게 마비시키는 도심 집회를 금지하고, 50만 ― 300만 원 수준이어서 실효성이 없는 집시법의 벌금형 한도를 올리도록 요구”한다. 물론 저들은 현행 집시법이 벌금형뿐 아니라 징역형도 규정하고 있으며, 실제로 집시법을 걸어 많은 노동자․민중을 감옥에 보내고 있을 뿐 아니라 집회 및 시위를 빌미로 그들에게 기타 파렴치하고 무서운 혐의들을 들씌워 중형에 처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은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파쇼악법을 “자유주의연대 등 13개 시민단체”라는 극우 파시스트 조직들이 요구하는 대로 더욱 강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파쇼적 지배기구를 구조적으로 강화해야 하며, 특히 그를 통해서 한미 FTA의 국회 비준 절차를 차질 없이 마무리해야 한다는 요구를 저들은, “한미 FTA 비준 절차를 앞두고 더욱 극렬해질 집회와 시위를 막기 위해서라도 누군가는 나서야 한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저들 극우 파시스트들에게는 주관적으로, 그리고 노동자․농민 등 민중에게는, 그들의 주관과 상관없이, 현실적으로 비극인 것은 부르주아 정권, 특히 ‘민주적인’ 부르주아 정권은 지배 독점자본의 이성(理性)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파쇼적 지배기구를 제도적으로 강화하고, 노동자․민중의 저항을 억압하되, 그 억압이 저들 독점자본, 파시스트들의 성급한 원망(願望)엔 미흡하고,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민중의 편에 선다는 ‘진보적 지식인들’에게는 ‘민주주의’라는 열망과 환상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 ‘진보적 지식인들’은 ‘진보’의 이름으로 자본의 이데올로기적 하수인, 나팔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예컨대, 신자유주의의 집행자 ‘노무현’을 탄핵하는 것은 ‘반동적 사회주의’ 운운하거나, “한미 FTA는 경제주권을 포기한 퍼주기” 운운하면서 말이다!



한미 FTA 반대 운동 속의 애국주의

  ― 혹은, 비국민의 정체성 혼란


보도(www.pressian.com, 2007. 4. 9.)에 의하면, 한미 FTA 협상 반대를 내걸고 단식농성을 벌이다 급성 위출혈로 쓰러진, 열린우리당 탈당파 임종인 의원이 “한미 FTA가 얼마나 국민 경제를 파탄시키고 경제주권을 넘겨주는 망국적 오류인지 규명하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병원에 후송되면서는 “한미 FTA에 반대하는 분들은 걱정하지 말고 망국적인 한미 FTA를 무효화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여주기 바란다”고 호소했다고도 한다(www.pressian.com, 2007. 4. 5.). 같은 보도에 의하면, 단식 중인 천정배 의원도 “투자자 국가소송과 서비스 개방, 스크린쿼터 문제에 있어서 현 정부가 스스로 국민과 후손의 주권을 반신불수로 만들고 있다”고 했다고 한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전의장도 협상 타결 소식에 “협상 내용은 안중에도 없고, 한미 FTA를 하면 나라가 살고, 안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외눈박이 식 공격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www.pressian.com, 2007. 4. 2.)고 한다.

모두 언뜻 듣기에는 후련한 말씀들이다.

그런데 언뜻 듣기에 후련한 이 말씀들과, “국익 차원에서 대통령의 결단을 높이 평가한다”는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말씀이나 “국가 미래를 생각할 때 개방은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말씀, “한미 FTA 체결로 우리나라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길이 크게 트이기를 바란다”는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말씀 등(이상, www.pressian.com, 2007. 4. 2.)과는 과연 얼마만한 거리가 있을까?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는 듯한 이 말씀들은 사실은 같은 얘기들이다. 바로 국가, 국익, 국민경제 걱정!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국가와 국익, 국민경제를 걱정하는 것은 물론 당연하다. 그들 모두가 그야말로 국민의 일원이요, 나아가 국민의 정치적 대표들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명색이 민주노동당이, 그리고 그 정치적 대표주자들이 그들과 똑같은 언동을 하고 나설 때, 듣고 보기에 정말 민망하다. 보도(www.pressian.com, 2007. 4. 2.)를 통해서 들어보자.


 민주노동당은 “한미 FTA가 타결된 4월 2일은 한일합방에 이은 제2의 국치일로 기록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단식 중인 문성현 대표는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가적 결정에 국민의 참여가 실종된 정부, 오직 오만과 독선으로 일관하는 참여정부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독재 정부에 다름없다”면서 “더 이상 노무현 대통령을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문 대표는 “민주노동당은 즉각적으로 타결 원천 무효를 선언하며 불복종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며 “한미 FTA 협상 체결 여부를 국민들에게 직접 묻는 국민투표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심상정 의원은 “한미 FTA 체결 여부는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이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 의원은 “철저하게 이 협상 결과가 국민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검증하고, 또 졸속협상부터 마무리까지 전 과정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도 분명히 해서 국민들에게 보고 드리고 국민투표를 실시해서 체결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노회찬 의원은 “한미 FTA 체결은 미국의 ‘비인간적 경제식민주의’가 우리 생활에 파고든 것으로 ‘심각한 역사적 오류’”라며 “오늘은 125년 전의 통상조약의무를 져버리고 을사늑약에 축배를 들었던 미국이 직접 한국경제를 자신의 속국으로 점령한 날로 기록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저들 국민 혹은 그 대표들과 마찬가지로 민주노동당이나 그 대표들도 온통 국가, 국민, 한국경제 타령이다. 언어상의 제약을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예컨대 앞에서 언급한 [동아일보]의 ‘사설’처럼 저들 독점자본은 노동자․농민 등을 가리켜서 국민이 아니며 국민을 사칭하고 있다고 힐책하고 있는데, 명색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대표라는 당과 그 핵심 간부들은 스스로가 국민인 듯한 정체성 혼란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모습이 정말 민망스럽다.

아니, 어쩌면 사실은 저들을 자신들의 대표라고 믿고 있는 노동자 대중이야말로 인식착오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계급 정체성의 혼란은 물론 민주노동당만이 아니다. 한미 FTA 반대투쟁 속에는 지금, 독점자본과 노동자․민중의 대립이라는 담론 대신에, ‘국익’이 어떻느니, ‘경제주권’이 어떻느니, ‘퍼주기’가 어떻느니 하는 등등의 국가주의적, 애국주의적, 민족주의적 언사가 난무하고 있거니와, 이러한 사태는 당연히 투쟁을 통해서 노동자 대중의 계급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을 국가주의․애국주의․민족주의의 포로로 내몰고 독점자본의 대리전으로 내모는 행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반FTA 전선 속에 노동자계급 고유의 요구와 투쟁이 해소되고 주변화될 것”이라며 한미 FTA 반대투쟁을 경원시할 일은 아닐 것이다. ‘노동자계급 고유의 요구와 투쟁’이라는 선명한 언어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주장과 태도에는 자칫 노동자계급의 요구와 투쟁을 직접적인 경제적 이해관계라는 극히 협소한 틀 속에 가둘 위험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정치적 무능을 드러내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필요한 것은 반FTA 전선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그 반FTA 전선이,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의 소시민적 국가주의․애국주의 선동을 극복하고, 반(독점)자본․반제국주의 계급전선으로 올바로 서도록 하는 것이다. <노사과연>



한미 FTA의 계급투쟁



채만수 |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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