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기타를 한 번이라도 쳐 본 사람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악기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자랑스런’ 국산 기타 제조업체 콜트․콜텍에 대해 알고 있거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조금 더 기타연주에 흥미가 있는 분이라면 지난 5월 9일에는 콜트에서 자신을 위해 제작한 기타를 연주하는 하이럼 블록(Hirum Bullock)의 무료공연이 콜트의 주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전문적인 매니아라면 래리 코리엘(Larry Coryell), 맷 “기타” 머피(Matt "Guitar" Murphy), 닐 자자(Neil Zaza)와 같은 기타 연주자와 티 엠 스티븐스(T. M. Stevens)1)같은 베이스 연주자가 시그네이쳐 모델이라 불리는 자신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콜트제작 악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콜트는 자신의 모델을 만들뿐만 아니라 펜더(Fender), 깁슨(Gibson), 아이바네즈(Ibanez) 등 유명 기타를 OEM방식2)으로 제조하고 있으며, 콜텍은 통기타라 부르는 어쿠스틱 기타의 전량을 해외에 수출하고 있을 정도이다.
현재 콜트와 콜텍의 세계 기타시장 점유율을 합치면 30%로 세계 1위를 차지 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런 세계적인 기타를 만들어 내는 콜트와 콜텍에서 악랄하고 살인적인 노동탄압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가?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자본의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서 싸우고 있다. 산업재해와 저임금 노동탄압에 시달리다가 인간답게 살기위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노동자를 희생양으로 한 자본가 박영호의 성공신화
자본가 박영호는 1973년 성수에서 200만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30년 동안의 흑자행진을 하는 등 승승장구하던 콜트악기 덕분에 박영호는 2006년 1191억원의 재산을 축적하며 한국 부자 순위 120위3)에 오르는 성공신화를 쓸 수 있었다. 저가 기타 브랜드의 대명사였던 콜트는 현재 중고가 기타도 제법 제조해내면서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박영호는 1991년 덕영악기를 인수하여 콜텍악기(주)를 설립하였고 자본가 박영호는 이를 별도 법인으로 운영하고 있다. 1995년 콜트․콜텍 악기는 국내 공장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에 공장을 설립하며 해외에 진출하며, 1999년에는 콜텍악기는 중국 따렌(大連)에까지 공장 가동을 하기에까지 이른다. 콜트 주식 지분 51%를 가지고 있던 1대 주주 박영호는 지난 2006년 미국인 사장이 소유하고 있던 49%의 지분을 90억여원4)에 구입 후 1인 주주가 되었다. 그 후 유상감자를 통해 100억을 챙겼다. 박영호의 성공신화가 가능했던 것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 한 방울조차 자기 것으로 착취했기 때문이었다. 명성과 부를 함께 거머쥔 박영호와 달리 콜트 노동자들은 20년 가까이 다녀도 한 달 월급 100만원이 겨우 넘는 저임금에 시달리면서 산업재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세밀한 공정을 요하는 악기인 기타를 제조하는 데에는 기계가공-사상중도-연마-음쇠-조립-광택-상도-조율과 같은 공정이 필요하다. 목재를 깎고 다듬는 과정에서부터 도색하고 조율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세분화된 공정으로 기타 한 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무직 노동자들도 있지만 총무과를 제외하고 사무직도 모두 생산라인에서 일을 해야 하고, 공정에서의 작업을 마치고 나서 사무업무를 담당해야 한다. 각 라인의 노동 강도는 살인적인 것이다. 나무를 가공하는 작업은 목재 분진과 미세먼지 속에서 하루 종일 사투를 벌여야 하는 것이다. 분진 마스크뿐만 아니라 방독면 착용이 필수적인 상황인데 콜트 노동자들은 마스크만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콜텍의 경우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에 마스크도 하루 한 개만 지급받고 일을 해야 했다. 노동자는 그러다가 천식이 생기면 퇴사해야 하는 소모품 같은 존재였다.5) 지난 5월 11일 방종운 콜트지회장 동지와 지회 사무실에서 인터뷰 하는 중에 내내 지회 사무실 밖에서 작동하는 목재 분쇄기의 소음을 들어야 했으며, 지회 사무실 안까지 목재 분진 및 미세먼지가 날아 들어올 정도였다. 그리고 180여명의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에는 휴게실은 고사하고 앉아 있을 휴게공간이 없어 현장에서 돗자리를 깔고 쉬는 형편이다. 또한 여성 노동자 비율이 40%가량 되는데 이분들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다. 오히려 콜텍의 경우 여성조합원의 연봉은 1800만원, 남성조합원의 연봉은 2300만원으로 차별대우를 하고 있어 노동조합은 노동부에 소장을 제출하며 양성평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상황이다.
회사는 세계일류를 달리고 있지만, 노동자는 저임금에 시달리며 골병만 들어가고 있다. 콜트악기는 산재다발 사업장이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갖가지 형태의 산업재해를 격고 있다. 기타 본체를 깍고 연마하면서 날리는 먼지로 폐가 병이 들어 산소호흡기가 없으면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는 조합원.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어 평생을 약을 먹어야 하는 조합원, 도장반에서 마신 유기용제 때문에 천식으로 모세혈관 기관지염에 걸린 조합원, 제품을 사포로 문지르는 연마반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은 손목이 성한 사람이 없고 어깨와 허리 등뼈가 골병이 들어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질환은 근골격계, 난청, 소음성 질환 등으로 가히 종합병동이라고 할만하다. 산업재해 소견 설문조사결과 근골격계 40%, 유기용제 노출로 인한 직업병 의심 59%, 기관지 천식은 36%, 만성 기관지염 40%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6) 더욱더 가관인 것은 2시간 안전교육 실시하라는 노동조합의 요구에 사측은 마지못해 30분씩 4번 산재예방교육을 하겠다는 식으로 응한다는 것이다.
노동자에게 돌아온 것은 무차별 정리해고, 구조조정
이렇듯 피와 땀을 쏟아가며, 온몸으로 골병들어가며 콜트․콜텍 악기를 세계 기타시장 점유율 1위로 키운 것은 바로 콜트․콜텍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비열한 자본에게 노동자는 노동하는 상품일 뿐이며 소모되면 버리는 폐기물일 뿐이다. 콜트 자본은 3월 13일 38명의 노동자들에게 정리해고 통지서를 전하는 폭거를 자행한다. 정리해고 대상자의 60%가 여성이며, 대부분 50대가 넘은 늙은 노동자들이다. 정리해고가 되면 생계 및 자녀교육에 있어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노동 조합간부 9인을 정리해고 대상에 포함시킨 것은 노동조합을 말살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더더군다나 정리해고 대상자 중에는 5명의 산재환자7)도 있고, 9명은 여성 노동자가 혼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 많은 이윤을 위한 자본의 구조조정에는 최소한의 양심과 도덕이 들어설 자리도 없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라는 박명호는 자신이 믿고 있는 성서 신명기에 11번이나 반복해서 ‘과부’를 보호하라는 조항이 나오고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도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자본가가 그것을 따를 리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은 바로 자본가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리해고 대상자 중에 1988년 1월 12일에 입사해서 올해 7월 30일 정년을 압둔 조규옥 조합원도 있었다. 조규옥 동지는 말년에 명예롭게 정년퇴직 할 줄 알았는데 정리해고를 당한 것이 서운하고 열불난다고 한다. 조규옥 동지는 천식과, 근골격계 질환으로 산재 승인을 받았는데, 콜트 지회가 없었더라면 그나마 산재승인도 받지 못하고 병원으로 치료받으러 다녀야 하는 것이니 산재승인을 받고 좋아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8)
38명의 정리해고 대상자 중 11명은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나야 했다. 사측이 정리해고의 근거로 제시한 것은 각각의 조합원들에 대한 평가점수였다. 즉 평점 78점 이하의 조합원이 정리해고 대상자였던 것이다. 사측의 평점은 장기 근속자에게 오히려 불리한 것이다. 사측이 제시한 평점은 비조합원의 평점을 올리고, 산재환자나 노조간부의 평점을 낮춘 것으로 사측 입맛에 맞게 노동자를 재단하고 노동조합을 완전히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노동자들을 평가하고 분할하는 자체가 자본의 노골적인 공격인 것이다.
자본의 공격은 거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사측은 4월 5일 일방적인 징계위원회를 열었다. 콜텍 노동조합 간부 4인의 동지들을 해고, 12인의 조합원에 대해서는 1개월 감봉, 나머지 집회 참가자 30인의 동지들에게는 시말서를 강요하며 일방적인 징계를 내렸다. 징계의 사유는 콜트집회에 함께 참여하며 연대투쟁을 했다는 이유였다. 자본은 무엇이 자신들에게 두려운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한미 FTA 반대 4시간 시한부 파업에 자본은 큰 반응이 없었다. 자본의 공격은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의 고리를 끊어내고자 거세게 몰아쳤다. 나흘 뒤에 4월 9일에는 한 마디 예고도 없이 일방적인 휴업을 자행했다. 7월 12일 폐업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말이다. 휴업급여(임금의 70%)를 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중 50%를 삭감하면서 노동자들을 압박하고 있다. 4, 5, 6월 평균임금을 기준으로 계산한다면 이는 10~20만원에 불과하다는 것이 콜텍 지회 동지들의 외침이다. 이정도면 사실상 임금을 지불을 하지 않는 직장폐쇄와 다를 바 없는 폭력이다. 그럼에도 콜텍 노동자들은 자신의 사업장에서 투쟁하며, 동지로써 콜트 투쟁에 지속적으로 연대하고 있다.
기습이 아니라 예고된 공격
정리해고는 급작스런 것이 아니라 사전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콜텍은 1991년부터 대전에 공장을 가동했다. 3년간의 적자시기를 거쳐, 94년부터 본격적으로 흑자를 내면서 회사는 승승장구했다. 특히 1997년 IMF이후 환율상승으로 인한 특별이윤까지 챙겼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자본은 대폭적인 인원감축을 단행하였다. 200명이 일하던 작업자가 어느새 150명, 100명 급기야 70명으로 줄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이윤은 하늘을 찌르듯 증가하였다. 2005년 콜텍에선 10명이 강제퇴사 당했다. 퇴직금 한달 분을 지급하지 않으려고 강제로 퇴직서를 작성하게 하는 만행을 벌인 것이다. 10명의 현장직 노동자는 1원 한 푼 받지 못하고 폐기처분당해야만 했다. 콜텍이 중국공장을 설립하고 대전공장을 신축할 수 있었던 것은 콜텍의 노동자들이 만든 기타에 ‘땀과 혼’이 배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측은 콜텍 노동자들의 가혹한 노동에 보답하기는커녕 7년간 매년 지급하던 특별성과급 150%도 지급하지 않았고, 매년 주던 여름휴가비까지 떼먹었다. 그리고 10명의 노동자를 길거리로 내모는 비정한 짓거리를 서슴없이 자행했다.
2006년 콜트 자본은 영양사 의무 규정이 없어지자 노동자들의 건강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영양사까지 해고한다. 그리고 순환휴직을 요구하면서 공세적으로 나왔다. 노동자들을 5개조로 나누어 1개조는 휴무를 하게 만들었다. 자본의 입장에서 노동력을 유연하게 사용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에 대해 지회는 애초에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내걸고 사측과 교섭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입장이 갈리자, ‘조합원들의 단결’을 위해 전술적으로 사측의 유구를 수용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사측의 공세는 노동자들이 한 걸음 양보할수록 더욱 더 강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2006년 단체교섭 과정에서 정년연장을 주장하는 콜트 지회의 요구에 사측은 2007년 정년퇴직자 11명이므로 정년연장을 주장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사측이 그러한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꿈에서도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올해 1월 3일 시무식에서 전체 노동자의 40%를 구조조정 하겠다고 발표한 후 정리해고를 위한 준비를 노골적으로 하였다. 사측은 한샘 노무법인 신화정을 비롯한 노무사 2인에게 구조조정과 관련한 업무를 위탁한다. 콜트 노동자들은 노무법인과 계약하면서 수십억을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전 작업이 끝나자 콜트악기 사측은 2월 1일부터 희망퇴직을 받고, 3월 31일까지 전체 노동자의 40%에 해당하는 70명을 정리해고 하겠다고 노조에게 통보했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의 투쟁수위와 사측의 노동자 포섭정도에 따라 희망퇴직을 유도하면서 수위를 조절해가며, 정리해고 대상자를 56명으로 한 차례 줄였다. 자본은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의 개개인에게 내용증명서를 보내면서 개별 접촉하면서 포섭해왔다. 자본이 노동자를 갈라치기하는 비열하고 치사한 회유와 협박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정리해고 대상이다. 괜히 노동조합에 가담해 손해 보지 말고 한 푼이라도 더 준다고 할 때 희망퇴직 신청해라.” “당신은 대상이 아니다. 회사한테 찍혀서 정리해고 대상이 되면 당신만 손해니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파업하면 민형사상 고소고발과 함께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이다. 퇴직금도 못 받고 쫓겨나기 전에 잘 판단해라.”9) 콜트 노조는 사측의 개별면담을 저지하며 사측의 정리해고 명단을 빼앗아내면서 싸웠다.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을 빼앗아내면서 산재환자도 정리해고 대상자에 들어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사측은 교활했다. 단체교섭을 하는 대신 노무법인에 교섭권을 위임해 놓고 노사협의회를 하자며 노동조합에 요구해왔다. 구조조정은 노사협의회 사항이라 우기며, 단 한차례의 단체교섭조차 거부하였다. 당시 사측이 노조에 보낸 적반하장 격의 공문 내용을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약 2개월에 걸쳐 5차례의 노사협의회 개최공문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불합리한 이유만을 주장하며 협의회에 불참하면서 그 동안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면 귀 조합의 성실협의의무 위반인 것이며, 아니면 이미 자료검토를 충분히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실시자체를 무산시킬 의도로 이런 저런 이유로 협의를 미루기위한 핑계를 대는 것이라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노조가 불참한 노사협의회에서 정리해고를 결정하고 3월 13일 38명의 노동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정리해고 통보를 해온 것이다.
노동조합 무력화 시도와 민형사상 고소고발 및 손해배상 청구과정이 뒤를 따랐음은 물론이다. 저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라는 정리해고의 사유도 제대로 제시하지 않았다. 사측은 2006년 12월 회계자료도 넘겨주지 않았던 것이다. ‘구조조정은 60일 이전에 통보하고 노사 협의 후에 진행한다’는 콜트악기 단체협약 내용도 지키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정리해고 이후 연근, 특근으로 노동강도가 강화되고, 출근길에 쓰러지는 노동자가 나타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2006년 9․11 야합, 비정규 개악법과 노사관계 로드맵 통과 이후에 더욱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자본의 칼날이 어떻게 노동자계급을 공격하고 있는 가를 보여준다.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과, 이른바 산업공동화 그리고 가혹한 노동탄압
중저가 악기 생산을 하던 콜트 자본은 점점 고가 악기 생산 비중을 높이며 자신들의 체제를 재편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국내보다는 저임금 노동력을 마음껏 쓸 수 있는 해외생산 비중을 높이는 것이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더욱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전경련이나 상공회의소 등 자본 측에서 ‘국내의 기업 환경이 악화되어’ 기업들의 해외 진출이 확대되고 있는 것, 저들이 ‘우려’를 한다고 시늉하고 있는 ‘제조업 공동화’이다.
자본가 박영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꿈의 콜텍을 만들기 위해 최상의 건물을 신축. 최신설비, 좋은 목자재를 비축. 미국의 마틴이나 깁슨 보다도 더 좋은 기타를 만들 수 있다는 각오와 자부심 근로자 여러분들이 다 같이 한 가족이 되어서 열심히 그리고 정성을 다해서 좋은 기타를 만들어 주어서 우리의 꿈이 실현되는 날이 머지않아 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평 콜트악기의 노사문제로 고통 받던 지난 20년 동안, 열심히 일 해주는 대전공장 근로자 여러분들에게서 고마움을 느끼며, 우리 회사 5개 공장 중에서도 대전공장에 최선을 다해서 모든 애정을 여러분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했습니다. 저는 정말 이렇게 좋은 대전공장이 이러한 사태로 노사가 갈등을 하며 망가지는 모습으로 발전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습니다.”10)
박영호는 대전 공장의 직장폐쇄와 7월 폐업예고가 마치 예정에도 없는 일이었다는 듯 감상적인 언사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것이다. 콜텍이 1999년 중국공장을 설립한 이후 이윤의 고공행진은 계속되었다. 자본의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고 또 저항할 수 있는 국내 노동자들이 눈에 가시임은 분명한 것이다. 대전공장의 인력은 가파르게 감축되었다. 또 콜트의 경우에도 주문이 없다는 이유로 정리해고를 단행하고 있으나, 실제 물량의 대부분을 인도네시아 공장으로 빼돌려 주문에 화답하며 생산을 하고 있다. 인도, 중국 공장은 잘 돌아가는데 주문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노동탄압을 위한 비수를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국내 공장의 규모를 축소하거나 폐쇄하고 해외이전을 확대해 가는 것은 현재 제조업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노무현 정부가 역설하는 ‘동북아경제시대 물류 비즈니스 허브 구축’, ‘국내기업과 해외투자기업 간 협력적 분업관계의 발전’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콜트․콜텍 경우에도 자본 측이 1995년 콜트 인도네시아 공장을 설립하고, 1999년엔 콜텍 중국 따렌 공장을 설립할 때부터 정리해고와 직장폐쇄 사태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그러한 과정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온몸으로 겪고 있는 것이다. 또 아직 분석된 자료가 거의 없지만 인도네시아, 중국 진출이 저임금 노동력을 찾기 위한 것임을 감안할 때, 자본 측이 현지 노동자들을 한층 더 가혹하게 착취하고 있음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경영악화"는 자본의 습관적인 거짓말이다
자본은 회사가 어렵다는 전형적인 선전선동을 하며 구조조정 정리해고를 자행하고 있다. 하지만 단적인 예로 2005년 콜트가 어렵다는 이유로 임금동결을 하자 노동조합이 2개월간의 파업으로 화답한 그 해에 관리자들은 대리급 200%, 과장급 300%의 차등 성과급을 지급 받았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진다. 콜트 노동자들 앞에서 노사상생을 외치던 윤석면 전무는 당연히 그보다 더 많은 성과급을 지급받았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콜트 노동자들은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2년 임금협상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측은 경영난을 이유로 직원들에게 무급휴가, 연차사용 제한 등 ‘고통분담’을 요구했다. 사측은 2000년도 25억 흑자를 기록했지만 2001년도는 8억 흑자로 흑자 폭이 줄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콜트노조는 사측이 제출한 회계장부를 정밀 분석해, 총 매출액 축소와 환율조작으로 숨긴 21억을 찾아낸 것이다. 콜트악기의 2001년 진짜 흑자액은 2000년도보다 4억이나 증가한 29억이었던 것이다. 결국 당시 사측은 노동위원회의 조정자리에서 ‘29억 흑자가 맞다’고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신용평가정보의 신용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콜트악기의 종합신용등급이 'AA0'로 매우 건전한 상태이다. 또한, 전자악기(콜트악기 2위, 2005년 전자악기 제조업 순위, 「기업총연감), 목재악기(콜텍 2위, 2005년 목재악기 제조업 순위, 「기업총연감) 제조업 순위에서 모두 상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표 1을 참고하라)11) 또한 2004년(매출액 232억, 당기순이익 7억), 2005년(매출액 214억, 당기순이익 8억) 모두 흑자를 기록하는 등 사측의 “경영악화”는 거짓인 것으로 드러났다.112) 또 지난 30년간 콜트 악기는 흑자행진을 지속했는데 작년 한해 6억의 적자가 났다는 이유로, 그것도 제대로 된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정리해고를 자행한 것이다.
2005년 전자악기 제조업 순위 ( 단위 : 억원) |
|||||||||
순위 |
업체명 |
속성 |
매출액 |
영업이익 |
경상이익 |
당기순이익 |
자산총계 |
자본금 |
자본총계 |
1 |
케이피비오상사(주) |
외 |
381 |
25 |
30 |
22 |
174 |
1<0.5> |
157 |
2 |
콜트악기 |
외 |
214 |
1 |
14 |
8 |
166 |
11 |
121 |
3 |
월드악기 |
외 |
158 |
1<0.8> |
1 |
1 |
89 |
2(1.5) |
39 |
4 |
커즈와일 |
외 |
137 |
5 |
-14 |
-14 |
96 |
30 |
39 |
5 |
우성코러스 |
외 |
80 |
12 |
11 |
9 |
82 |
7 |
30 |
콜트 지회는 회사의 거짓말에 여러 번 속아왔기에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등에 의뢰해 ‘콜트악기경영분석보고서’와 같은 자료를 받아 콜트의 경영상태를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콜트의 유동성 비율은 300%에 이른다는 것이다.13) 또 아래의 <표 2, 3>의 연결재무재표를 볼 때14) 콜트의 매출액은 2005년 723억원에 이른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723억(콜트연결재무재표)+1,352억(콜텍연결재무재표)=총 매출액 2,075억
총 매출액 723억(콜트연결재무재표)+1,352억(콜텍연속재무재표)=2,075억
총(자산)재산374억(콜트연결재무재표)+920억(콜텍연속재무재표)=1,294억
<표 2> 콜트 (당기 지역별 영업현황)
(콜트악기지회 선전부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너른 들 16호, 2006년 6월 26일자에서 재인용하였다.
구분 |
국내 |
인도네시아 |
연결조정 |
연결후금액 |
매출 |
21,372,778 |
56,555,485 |
(-)5,580,508 |
72,347,755 |
매출총이익 |
2,195,841 |
4,084,397 |
(-)76,274 |
6,203,964 |
영업이익 |
115,001 |
1,985,049 |
(-)76,274 |
2,023,776 |
총자산 |
16,560,998 |
23,479,691 |
(-)2,655,307 |
37,385,382 |
<표 3> 콜텍 (당기중 연결회사의 지역별 영업현황)
(출처는 상동.)
구분 |
국내 |
인도네시아 |
중국 |
연결조정 |
연결후 금액 |
매출 |
93,327,303 |
74,755,643 |
17,274,561 |
(-)50,167,004 |
135,190,503 |
영업이익 |
5,277,846 |
3,032,765 |
1,371,231 |
9,536,020 |
19,217,862 |
당기순이익 |
11,064,750 |
1,358,748 |
1,361,647 |
(-)2,890,828 |
10,894,317 |
총자산 |
103,442,9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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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간략한 자료만으로도 회사가 어렵다는 단골 레퍼토리는 쉽게 반박할 수 있는 것이다.
5월 23일 콜트․콜텍 문화제 참가기
5월 11일 인천 부평공장 콜트 출근 선전전에 연대하고 콜트 방종운 지회장 동지와 인터뷰한 것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5월 23일 콜트․콜텍 공동문화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여하기로 했다.
저녁 7시 박영호 사장이 출근한다는 등촌동 서울 콜텍 앞에서 문화제가 있었다. 88체육관 맞은편이라는 것 외에 정확한 문화제 장소를 알지 못했기에 헤메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88체육관 맞은편에 닭장차 세 대가 친절히 길 안내를 해주고 있었다. 인근에서 콜트․콜텍 동지들은 선전전을 하고 있었고, 차를 나눠주면서 문화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콜트․콜텍 대책위원회 주도로 진행한 문화제에는 70여명의 동지들과 연대참가자들이 함께 하였다.
콜트 노동안전보건부장 동지의 사회로 문화제가 시작했다. 콜트 정리해고 이후 파업투쟁, 집회, 항의방문․항의면담, 1인 시위, 정리해고 거부 출근투쟁, 출근 선전전 등 온갖 전술로서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문화제는 이제까지 투쟁을 통해 지친 노동자들에게 새롭게 활기를 불어 넣기 위한 것이었다. 모자가정 가장, 산재환자까지 일방적으로 정리해고하고 연대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콜텍 노동자들을 징계하고 해고한 자본에 대한 규탄발언으로 문화제의 포문을 열었다. 콜텍 염창훈 지부장 동지는 유명가수도, 유명연예인도 등장하지 않지만 이 자리는 소중하다는 내용으로 발언을 시작했다. 긴 투쟁에 약간은 지쳐있을 동지들과 함께 “우리 함께 힘내요”라고 힘차게 외치며 발언을 이어갔다. 지난 4월 9일 콜텍의 일방적 휴업, 4월 12일 콜트 정리해고 통보에도 굴하지 않을 것임을 용역깡패 폭력에 맞서며 끝까지 싸워갈 것을 결의하는 발언이었다.
다음에는 기타를 멘 문화 노동자 연영석 동지의 공연이 있었다. ‘구르는 돌’, ‘라면’, ‘간절히’, ‘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할 줄 아나’를 부르며 참여한 동지들의 호응을 얻었다. 특히 마지막 곡에서는 가사의 네음절 뒷마디를 함께 따라 불렀다. 연영석 동지는 몇 년 전부터 이곡 가사 중 여성동지들이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을 수정해서 부르고 있다. 그 다음에 기타와 하모니카를 들고 박준 동지가 등장했는데 조합원 동지들은 좀 더 열띤 호응을 보냈다. ‘희망의 노래’ 및 제목 미상의 조용하지만 투쟁의 의지를 드높이는 곡을 불렀고 마지막은 약간은 놀랍게도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를 불렀다. 박정희 체제로부터 도피하고 픈 욕망을 표현했던 히피의 노래였지만, 박준 동지의 또박또박한 발음과 끝부분의 노가바(노래 가사 바꾸기)로 다른 의미로 변용되었다. 한대수의 원곡에서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가 반복되지만 박준 동지가 부른 마지막 가사는 “현장으로 반드시 돌아갑시다. 정리해고 반드시 박살냅시다.”였다. 곡이 끝나자 앵콜 요청이 나왔고 ‘세상을 멈춰라’를 부르며 공연은 마무리 되었다. 참여한 콜트․콜텍 동지들은 투쟁이 승리하는 날 두 동지들에게 기타를 선물할 것을 결의하였다.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만든 슬라이드를 함께 보고 마지막으로 콜트 방종운 지회장 동지의 발언이 이어졌다. 대표이사라는 박영호가 자신의 직위를 일개 부장인 이희용에게 넘기고 도피하였음을 규탄하였고, 산재 노동자에게 사직서를 강요하며 또 지회장이 아니라 여성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법정 출두를 강요하는 악랄한 자본을 규탄하였다. 어디 누가 이기는지 끝까지 해보자는 결의로 발언을 마무리하였다.
한 시간 반 정도 진행된 문화재가 끝나고 돌아갈 때서야 인근 도로를 점유하며 주차하고 있던 1개 중대 병력의 닭장차는 검은 지프차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갔다. 용역깡패와 경찰폭력을 견디며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그와 같은 장면은 일상적인 것에 불과하겠지만, 그 짧은 장면은 공(公)권력이라 자임하는 경찰이 사실은 자본의 사(私)권력임을 다시 말해 박영호와 같은 자본가를 위해 복무하는 민병대임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20주년, 콜트․콜텍 투쟁 승리의 해로
콜트 노동조합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정에서 건설되었다. 사측의 회유와 탄압으로 노동조합은 와해되었으나, 1988년 파업투쟁을 통해 다시 건설되었다. 현장 노동자들과 만나 토의하고 협의하면서 써내는 집단창작 방식으로 완성한 김인숙의 소설 「하나되는 날」15)은 저자가 1988년 부평 콜트악기 투쟁에 참여하면서 써내려간 소설이다. 콜트 악기 노보 「회사 믿어선 쓰레기 신세 되고 지회 믿으면 산다!」에는 소설에 나오지 않은 뒷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박영호 사장은 조합을 깨려고 조합원, 비조합원으로 갈라놓았다. 사장은 자신이 노조를 인정하면 1년 치 평균임금을 비노조원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결국 사장은 비노조원에 의해 사무실에 갇혀있게 되었는데 사장 하는 말 “나는 30세에 평생 먹을 것 다 벌어 놨다. 내일이면 틀림없이 문 닫는다.” 99번의 거짓말!
그래도 콜트악기 사장인데 조합원들이 비노조원을 설득하러 갔다. 비노조원들은 그 와중에 경찰에게 맞았다고 진상규명을 요구, 민중당에서 농성을 했다. 민중당 사무처 직원이 노조와 함께 힘을 합쳐 하나가 되라고 했던 웃지 못할 사연을 가진 콜트악기!
그 뒤 한국 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전환하기도 하는 등 지난 20년간의 콜트 지회의 역사는 거듭되는 투쟁의 역사였다. 또 탄생한지 1년을 막 넘긴 콜텍 동지들도 인간답기 살기위한 몸부림으로 시련을 견디어 왔다. 현재 콜텍 동지들의 단결력은 공고하지만 일방적인 휴업과 폐업예고라는 장벽에 맞서야 하고, 콜트 같은 경우는 자본이 장악한 사조직 등에 밀려 조합원 설득에 어려움이 있음을 토로하고 있다. 사측 유혹에 못이겨 희망퇴직을 한 조합원들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콜트노조 투쟁소식의 문구처럼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지 않는다! 한 방울의 낙숫물처럼 돌멩이를 뚫을 것이다.’ 길더라도 끝까지 싸우며 우리가 연주하고, 듣는 악기가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생산되고 있다는 진실을 알릴 것이다. 최후의 승자는 노동자 계급이 될 것이다!
끝으로 노동자 시인이기도 한 콜트악기 방종운 지회장 동지의 제목 미상의 시를 인용하며 마친다.
고난은 같다.
긴 고난 속에
좌절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갖혀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태풍 앞에
이리 저리 흔들리는
억새풀 일지라도
좌절하지마라,
잃어 버리지 않는 희망은
마침내 이룰 수 있는 꿈
그것이
세월이 지나도
후회하지 않는
가슴에 남는 동지로
우리들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기록이다.
<노사과연>
당신이 치고 있는, 당신이 듣고 있는
기타에 스며있는 노동자들의 피와 땀
― 정리해고에 맞선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 ―
최상철 | 운영위원
1) 이상의 연주자 정보는 콜트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http://www.cort.co.kr/korean/artist/artist.asp
2) Original Equipment Manufacuring. 원청자의 지식, 기술 능력에 의한 생산. 흔히 주문자 상표 부착방식이라고 한다.
3) 이는 상장주식 평가액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해 박영호는 부동산 등 기타 건물 등을 제외하고도 1191억의 재산을 소유한 자본가라는 것이다.
4) 방종운 지회장 동지는 인터뷰 중에 38억이라 언급했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 액수인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90여억원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조영미, 「기타 판매 세계 1위사의 야멸찬 정리해고 -콜트악기, 13일 38명 해고통지서 전달 … 눈물바다로 변한 공장」, 레디앙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5573
5) 김문창, 「한 달째 문 닫은 세계 1위 통기타 공장과 노동자의 한숨」, 오마이뉴스 2007년 5월 8일. http://economy.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09034
6) 조영미, 「기타 판매 세계 1위사의 야멸찬 정리해고 -콜트악기, 13일 38명 해고통지서 전달 … 눈물바다로 변한 공장」, 레디앙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5573
7) 이에 대해 경인지방노동청인천북부지청이 박영호 콜트악기 대표이사에게 보내온 공문에서조차, ‘근로기준법 제30조 제2항의 『②사용자는 근로자가 업무상 부상 또는 질병의 요양을 위하여 휴업한 기간과 그 후 30일간은 해고하지 못한다』는 규정에 위배될 소지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가 이영호가 직접적인 노동자의 투쟁이 아니라 노동청 공문이 제기한 ‘위배될 소지’에 움직이지 않을 것이란 것은 분명하다.
7) 이에 대해 경인지방노동청인천북부지청이 박영호 콜트악기 대표이사에게 보내온 공문에서조차, ‘근로기준법 제30조 제2항의 『②사용자는 근로자가 업무상 부상 또는 질병의 요양을 위하여 휴업한 기간과 그 후 30일간은 해고하지 못한다』는 규정에 위배될 소지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가 이영호가 직접적인 노동자의 투쟁이 아니라 노동청 공문이 제기한 ‘위배될 소지’에 움직이지 않을 것이란 것은 분명하다.올해 5월 17일 근로기준법 내용 중 일부 변경이 있었고 이 조항은 변경 없이 제23조 제2항으로 옮겨졌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②사용자는 근로자가 업무상 부상 또는 질병의 요양을 위하여 휴업한 기간과 그 후 30일 동안 또는 산전(産前)·산후(産後)의 여성이 이 법에 따라 휴업한 기간과 그 후 30일 동안은 해고하지 못한다. 다만, 사용자가 제84조에 따라 일시보상을 하였을 경우 또는 사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8) 콜트악기 투쟁소식, 「정리해고 철회하라! 소박한 노동자의 꿈 짓밟지 마라...」
9) 조영미, 「기타 판매 세계 1위사의 야멸찬 정리해고 -콜트악기, 13일 38명 해고통지서 전달 … 눈물바다로 변한 공장」, 레디앙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5573
10) 콜트 노보 「콜트․콜텍은 하나!」에서 재인용.
11) 「기업총연감의 전자악기 제조업체 순위에 따르면 콜트악기는 2005년뿐만 아니라 2001년부터 2004년까지 2위를 차지하고 있다.
12) 이강우, 「20년에 걸친 투쟁, 노동자가 가야할 길을 묻는다 -인천 콜트악기 지회, 사측의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 사노넷, http://sanosin.jinbo.net/Publish/labor.php?ex=article&b_fn=RD&gotopage=1&pkno=802
13) 유동성비율은 유동부채에 대해 유동자산이 차지하는 비율을 가리킨다. 유동성비율(%) = 100×유동자산/유동부채. 일반적으로 유동성비율이 높을수록 기업의 단기 자금 지급능력은 높다고 할 수 있고 200%면 이상적인 것으로 판단한다. 삼성전자의 재무분석결과 2003~2005년까지의 3개년 동안 유동성비율이 200%이상인 적이 한 번도 없던 것을 감안한다면 콜트악기의 유동성비율 300%는 상당히 높고 안정적인 수치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유동자산에는 현금뿐만 아니라 제품 등의 재고와 매출채권(외상매출금과 받을어음)이 포함되기 때문에 이를 표면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유동자산에서 재고자산을 제외하고 계산하는 당좌비율을 대안적 지표로 사용하고 있다. 당좌비율 = 100×(유동자산-재고자산)/유동부채.
13) 유동성비율은 유동부채에 대해 유동자산이 차지하는 비율을 가리킨다. 유동성비율(%) = 100×유동자산/유동부채. 일반적으로 유동성비율이 높을수록 기업의 단기 자금 지급능력은 높다고 할 수 있고 200%면 이상적인 것으로 판단한다. 삼성전자의 재무분석결과 2003~2005년까지의 3개년 동안 유동성비율이 200%이상인 적이 한 번도 없던 것을 감안한다면 콜트악기의 유동성비율 300%는 상당히 높고 안정적인 수치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유동자산에는 현금뿐만 아니라 제품 등의 재고와 매출채권(외상매출금과 받을어음)이 포함되기 때문에 이를 표면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유동자산에서 재고자산을 제외하고 계산하는 당좌비율을 대안적 지표로 사용하고 있다. 당좌비율 = 100×(유동자산-재고자산)/유동부채.그런데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콜트의 경우 상당한 매출액을 자랑하고 있기에 회사가 어렵다는 것은 자본가들의 상투적인 공문구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에 하나 회사가 어렵다는 것이 객관적인 정황으로 드러나는 상황에서라도 그것은 자본가들의 경영의 잘못이고, 노동자들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
14) 일정한 관계에 있는 2개 이상의 회사를 단일한 조직체로 간주하여 개별 재무제표를 종합하여 작성하는 재무제표.
15) 이 작품으로 김인숙은 전태일 문학상을 받는다. 김인숙, 「함께 걷는 길」, 창작과 비평사, 1988.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