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련 붕괴의 원인과 교훈

특별기획

머리말


쏘련이 붕괴한지 17년이 지났다. 쏘련은 러시아와 작은 나라들로 분열되었고 사회주의 생산관계는 소멸하였다. 20세기를 시작하였던 러시아 혁명, 그리고 20세기를 마감한 쏘련의 붕괴, 이는 역설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20세기의 규정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현재 세계는 신자유주의의 물결로 휩쌓여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모순은 계급대립을 격화시키고 있다. 자본주의가 평화롭게 진보하던 시기는 이미 아닌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새로운 전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쏘련의 붕괴원인도 아직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쏘련이 사회주의사회가 아니었고 국가자본주의사회였다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은 전망의 부재와 이론적 혼돈으로 귀착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유일한 무기는 과학이다. 과학의 관점에서 이론적 혼돈을 치유하고 비판하고 쏘련의 붕괴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존의 사회주의 이론을 재검토하고 사회주의 역사를 올바로 규명하여 새로운 전망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소위 대안이라는 새로운 체계를 성립시키고 이를 실현하는 과정은 아니다. 운동은 현실의 모순에 기초하는 것이고 이를 비판적으로 지양할 때 운동의 승리는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쏘련 붕괴의 원인을 규명하는 작업은 사회주의자로서 자기비판의 과정이기도 하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관점에서 쏘련의 역사를 검토하고 무엇이 잘못이었는지를 검토하여 운동의 토대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현재 사회주의는 대중의 신뢰를 획득하고 있지 못하다. 심지어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쓰는 것조차 꺼리는 부분도 있다. 따라서 쏘련붕괴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 즉, 자기비판의 과정을 철저히 하여 사회주의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과정은 제국주의자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소위 스탈린주의라는 절대 악을 설정하고 그것으로 원인을 돌리는 비과학적, 비역사적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쏘련이 하나의 사회주의적 사회구성체였음을 밝히고 그것이 어떠한 진보를 이루었고 어떠한 오류가 축적되어서 결국에는 붕괴에까지 이르렀는가를 규명하여야 한다.

자본의 압제에 시달리는 노동자계급에게 있어 희망은 사회주의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금 노동해방이라는 기치를 움켜잡고 과학의 도움으로 투쟁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



1. 쏘련 붕괴의 원인


1) 과도기 경제

1917년의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은 인류에게 사회주의가 현실로 가능하다는 전망을 안겨다 주었다. 그러나 타도된 자본가계급은 즉각적으로 혁명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러한 반란에 대해 영국, 프랑스, 일본, 독일 등 제국주의 국가들은 혁명을 압살하기 위해 개입하여 러시아는 약 3년간의 내전을 거쳐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전하기 위한 악조건을 만들었고, 1920년 볼셰비키가 내전에서 승리하기까지 러시아는 혁명의 왜곡을 겪어야 했다. 이 시기에 실시된 정책이 이후에 전시공산주의라 불리는 것이었다. 전시공산주의는 반란군과의 전쟁에 모든 물자를 집중하는 체제였고 또 반란군의 점령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물자의 절대적인 부족이 심화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농민의 잉여농산물에 대한 강제적 징발, 화폐의 부분적 폐지, 대부분의 공업기업의 국유화, 상업제도의 배급제로의 대체, 시장의 폐지 등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를 총괄하는 최고경제회의가 조직되기도 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경제에 대한 국가의 계획을 총괄하는 성격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정상적인 계획경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전시공산주의에 대해 레닌은 ‘그것은 전쟁과 폐허에 의해 우리들에게 강요된 것이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 임무에 일치하는 정책이 아니었으며 그럴 수도 없었다. 그것은 잠정적 수단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혁명의 기반이 되었던 크론슈타트 해군기지의 반란은 혁명에 대해 농민의 이반이 심각화되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었고 이를 계기로, 또 내전이 승리함에 따라 볼셰비키는 경제정책의 전환을 가져온다. 농민에 대한 식량세를 제외한 강제적 징발의 폐지, 상업의 활성화, 국유화된 공업기업의 이윤 원리 도입, 사적 자본주의적 기업의 허용 등이 그러한 전환의 예인데 이는 노농동맹의 회복을 중심으로 하여 전시공산주의에 의해 경직화되었던 경제를 활성화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신경제정책(NEP)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쏘련경제의 활성화에 큰 기여를 한다. 신경제정책이 실시되고 난후 5,6년 만에 쏘련의 경제는 1차대전 전의 수준을 회복한다. 공업과 농업 모두에서 생산량이 증가하고 특히 농업의 경우 곡물의 수출도 가능하게 되어 쏘련 경제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신경제정책은 나름의 모순이 있는 체제였다. 먼저 소유의 측면에서 보면 공업에 대한 국유화로 인한 사회주의적 소유와 농민의 소부르주아적 소유, 그리고 네프맨이라 불렸던 자본가들의 자본주의적 소유 등 여러 가지 생산관계가 존재하는 다우클라우드 경제였다. 일종의 혼합경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다우클라우드적 성격은 경제의 활성화에는 기여했지만 사회주의적 공업과 소생산적 농업의 모순과 불균형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농업과 공업의 모순관계는 협상가격차의 위기, 도시에서 식량문제의 심각화라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협상가격차라는 것은 공업제품의 높은 가격과 농업생산물의 낮은 가격으로 인한 가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는 현상을 말하는데 1923년에 최초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협상가격차가 나타나는 원인은 사회주의적 공업기업에 이윤추구를 허용한 결과 공업제품의 가격이 급속하게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농민은 잉여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기를 거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농민이 대다수인 당시 러시아 현실에서 이는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을 낳는 요인이 되었다. 즉, 소비에트 권력의 기본축인 노농동맹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또한 NEP 말기 즉, 1926-1929년에 이르면 농산물은 풍작을 이루었지만 도시는 식량부족에 시달려 노동자와 병사들이 굶주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상품적 농산물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부농들이 보다 높은 농산물의 가격 실현을 위해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팔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사회주의적 공업과 소소유적 농업의 불균형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서 이에 대해 공산당은 농업의 집단화를 결의하게 된다. 또한 NEP는 대외무역의 적자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쏘련의 주요수출품은 농산물인데 이의 확대는 한계가 있고 반대로 수입은 기계류 등의 공업화를 위한 것으로서 갈수록 확대되었다. 따라서 무역에 대한 국가독점을 통해 무역적자를 바로잡고 균형을 취하는 것이 시급하게 되었다. 이러한 NEP 자체의 전반적인 모순의 결과 쏘련사회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에 기초한 계획경제로 이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레닌이 NEP로의 이행을 이끌었던 것은 전시공산주의의 한계와 오류를 극복하는 적절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NEP 자체는 혼합경제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서 독자적인 사회구성체가 될 수 없고 자본주의로 후퇴냐, 사회주의로 전진이냐는 기로에 처할 수밖에 없다. 중국 등 소위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논자들이 NEP를 근거로 드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독자적 사회구성체가 될 수 없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중의 하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현재 중국이 자본주의화된 것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에서의 변화는 정치에서의 노선투쟁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NEP 시기에 사회주의적 본원적 축적을 통한 사회주의 경제로 이행을 주장했다. ‘국가경제체계 밖에 놓여 있는 원천으로부터 획득되는 물질적 수단의 국가 손에의 축적’이라고 규정된 사회주의적 본원적 축적은 사실상 농민으로부터 수탈을 하여 산업화를 위한 본원적 축적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그 발상이 반민중적일뿐만 아니라 농민과의 동맹이라는 소비에트 체제의 근본을 위협하는 것으로서 기각되었다. 한편 이와 반대로 부하린은 NEP를 옹호하면서 심지어 부농을 옹호하기도 했다. 부농은 토지, 농기구, 가축 등 나름의 생산수단을 갖고 고용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는 농민이었고 농촌에서 고리대금업을 하여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이러한 부농에 대한 옹호는 부하린이 NEP가 장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면서 공업에서 사회주의적 관계와 농업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병행을 생각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부하린이 보지 못했던 점은 NEP 자체가 모순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즉, NEP 자체의 모순에 의해 쏘련 경제 전체의 상황이 계획적 경제로 이행을 압박받고 있다는 사실을 부하린이 간과한 것이다.

이러한 노선투쟁은 스탈린의 노선을 공고화시킨다. 스탈린은 레닌 사후, 그리고 독일혁명이 좌절된 후 일국사회주의 노선을 주장한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을 주장하는데 이는 당시의 국제정세에 맞지 않는 비과학적 주장이었다. 독일혁명이 좌절된 상황에서 영구혁명론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좌편향적 주장이다. 이러한 트로츠키의 주장에 따르면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패배주의일 뿐만 아니라 레닌주의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다. 레닌은 ‘제국주의론’에서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을 규명하고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에서 혁명이 발생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러한 제국주의론의 분석에 입각할 때 일국의 혁명은 승리할 수 있고 사회주의 건설도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진전은 트로츠키 노선의 패배의 과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2)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확립을 향하여

NEP의 모순의 결과 즉, 농업과 공업의 불균형, 대외무역적자의 급증, 사회주의적 우클라우드와 자본주의적 우클라우드의 공존, 협상가격차, 식량위기의 발생 등은 경제에서 계획의 필요성을 절실히 부각시켰고 1929년부터 1차 5개년 계획이 실시된다. 5개년 계획은 투자율을 높이고 중공업분야에 집중투자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5년간에 걸쳐 투하된 총투자액은 국민소득의 1/4에서 1/3에 이르는 경이적인 액수였다. 그리고 총투자액의 1/3에 이르는 공업에 대한 투자액 중 2/3가 중공업분야에 투자되었다. 근대의 산업화의 과정에서 외국에서 차관 등의 도움없이 자체적 노력만으로 이러한 투자를 성공시킨 사례는 없다. 이는 사회주의적 기업의 이윤을 주로 투자재원으로 하였고 상업과 무역을 국가가 장악한 데서 오는 집중력과 효율성 때문이었다. 또한 노동생산성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는데 5개년 계획기간 41%가 증가하였다. 이는 투자로 인한 노동수단의 개선과 노동자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이 고양된 결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기간에 노동자의 소득은 2배로 증가되었다. 개인별 소득만 증가된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수가 급팽창하면서 사회총소득 중  임금소득총액은 4배로 증가하였다. 1차 5개년 계획의 이러한 투자와 건설의 성공적 실시로 쏘련은 중공업에서 확실한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그리고 소비재 부분이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성장했는데 이 기간에 87%의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공업에서 성장이 순조로웠던 반면 농업에서는 격동을 겪게 된다. 이는 공업에서는 이미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성립했음에 반하여 농업은 아직 소농생산체제였고 따라서 농업에서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확립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농업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확립은 계획상으로는 점진적으로 실시될 예정이었다. 1차 5개년 계획기간에 총 경작면적의 15%를 집단농장으로 묶는 계획이 세워졌었다. 처음에는 농업의 집단화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예상했던 목표치를 초과달성하게 된다. 그러자 목표를 상향조정하는데 이를 기화로 1929년말에서 1930년 초에 걸쳐 급속한 집단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에 따라 집단화된 농민의 비율이 55%에까지 도달한다. 그러나 이는 행정적 강제를 수반하는 것이었고 부농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스탈린은 ‘성공에 현혹되어’라는 글을 발표하여 집단화운동의 강제성을 비판하고 집단농장에서 농민의 자유로운 탈퇴를 보장한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따라 3개월만에 집단화율은 23%로 떨어졌다. 이 숫자가 보여주는 것은 집단화에 강제가 수반되었다는 것, 그럼에도 거의 절반에 이르는 농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는 5개년 계획 전체의 목표치를 상회하는 것이었다. 이는 집단화가 빈농들의 이해를 절실히 대변한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중농들의 대거 탈퇴에도 불구하고 집단화운동은 확고한 기초에 서게된 것이다. 이를 기초로 집단화운동은 점차로 농민 전체의 지지를 받게 되고 1932년 말에 전체농가의 60%가 집단화에 참여한다. 그리고 1930년대 후반에 이르면 90%이상의 농민이 집단화에 참여하게 된다.

집단화는 농업에서 생산관계의 변화를 의미한다. 즉, 집단화는 경제의 문제일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집단화 과정에서 부농들은 공산당원을 비롯한 집단화 운동가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고 약 5만명이 이 테러에 희생되었다. 그리고 부농들은 가축을 대거 살해했는데 약 절반의 가축들이 이 과정에서 사라졌다. 이 손실은 30년대 내내 회복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집단화가 격렬한 투쟁을 수반한 것은 근본적으로 집단화의 자발성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맑스와 엥겔스, 레닌이 누차 강조한 자발성의 원칙이 훼손되었기에 농업집단화가 막대한 희생을 불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비판적 글을 발표했지만 이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스탈린은 개인이 아니라 노선의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농업의 강제적 집단화는 스탈린의 오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 오류가 쏘련 붕괴의 원인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농업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확립은 역사적 필연이었다는 점에서 쏘련붕괴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반대로 농업에서의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확립에 격렬하게 저항한 부농들의 경우 집단농장에서의 배제로 과정이 종결되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이는 쏘련을 제외한 다른 사회주의 나라의 경우 이러한 농민들의 저항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고 집단화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던 것과 비교할 때 분명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공업과 농업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하기까지 ‘누가 누구를’이라는 원칙이 지배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타도된 자본가들의 반혁명을 진압하고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할 것인가, 아니면 소부르주아지와 동맹한 자본가에 의해 혁명이 압살당할 것인가의 문제가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농업에서 집단화가 일단락되는 가운데 1차 5개년 계획은 초과달성된다. 그리고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쏘련은 2차 5개년 계획을 실시한다. 이 기간에 쏘련은 국민소득이 2배, 총공업생산이 2배로 각각 증가된다. 2차 5개년 계획은 중공업 중심의 투자확대의 지속이라는 점에서 1차 5개년 계획과 유사하지만 ‘기술 숙련, 획득된 성과의 결합’이라는 구호를 내세운다. 이는 거대한 설비를 제대로 움직이는 숙련된 노동이 부족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2차계획은 1차 때의 난관과 계산 착오를 극복하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 기간에 노동자의 임금도 약 2배로 상승하였고 농업도 안정적인 성장을 보인다. 그리하여 농업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도시에 공급할 수 있는 안정적인 잉여생산물이 발생하였고 농민들의 소득도 2-3배 증가한다.

이러한 1차, 2차에 걸친 10여년의 계획경제로 인해 쏘련은 후진 농업국에서 독일과 버금가는 공업강국으로 변모한다. 이 덕분으로 쏘련은 나찌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는 중공업을 보유하게 되고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주역으로 떠오른다.

한편, 이 기간에 노동생산성이 급속하게 향상되는데 이는 노동자 대중의 자발성과 창의성이 고양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 시기에 유명했던 것이 스타하노프 운동인데 이는 노동생산성의 향상이 노동조직의 개선, 장비의 개선, 기술의 숙련을 통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자본주의와 달리 노동생산성의 향상이 노동강도의 강화를 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 우크라이나의 채탄부였던 스타하노프는 노동조직을 개선하여 몇배의 산출량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모범사례는 쏘련 전역으로 퍼져 노동자의 창발성이 급격하게 고양되게 하고 사회주의적 경쟁이 정착되게 한다. 스탈린 시대가 창조성을 억눌렀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러한 사례는 그와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노동을 해방하여 창조성을 고양시킨다는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3) 2차대전과 전후 복구

그런데 이러한 쏘련 내부의 사회주의 건설의 전진과 더불어 국제정세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1933년에 히틀러가 집권하여 전쟁의 기운이 급속도로 높아진 것이다. 히틀러는 대공황에 대해 전쟁경제로의 전환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공공연히 반공, 반쏘련정책을 폈으며 쏘련에 대한 침략을 공언하기도 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는 쏘련의 사회주의 건설에 암운을 드리우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왜곡되어 나타난 것이 스탈린의 대숙청이다.

부르주아지의 통계에 의하면 수십만에서 수백만명이 이 시기에 희생되었다. 스탈린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적대감과 통계의 과장을 고려하더라도 이는 대재앙이며 스탈린의 결정적 오류이다. 스탈린 스스로 1939년에 이르면 대숙청의 오류를 인정하고 많은 사람들을 복권시키기도 했다. 대숙청은 사회주의적 법치주의가 붕괴했음을 말한다. 즉, 법적으로 제재할 대상과 사상적으로 비판할 대상의 구분이 무너진 것이었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 원인은 전쟁이 임박한 가운데 벌어지는 내부단속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한 해명이 되지 못한다. 스탈린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하고는 사회주의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리고 인텔리겐챠가 사회주의적으로 개조되어 더 이상 노동자계급과 인텔리겐챠의 대립은 없다고 선헌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확립된 후에는 ‘누가 누구를’이라는 모순은 사라지지만 새로운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었다. 대숙청이 인민의 적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데에는 이러한 새로운 모순관계를 파악하지 못한 스탈린의 사상적 한계가 큰 역할을 했다. 스탈린이 사회주의가 승리했다고 선언한 것은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틀린 말이다. 사회주의의 승리는 단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하고 난 후에도 사회주의 사회에는 여러 가지 모순이 존재하며 계급사회의 잔재가 뿌리깊게 남아 있다.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는 사회주의 자체가 사라지는 것, 그리하여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도약할 때 사회주의는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사회의 수많은 문제점과 모순들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대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승리한 사회주의’를 기준으로 그로부터 동요하는 사람들을 대규모로 숙청했던 것이다. 2차대전이 발발했다는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이것은 스탈린의 뼈아픈 오류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숙청은 농업집단화와 달리 역사의 필연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쏘련 붕괴의 하나의 원인이 된다. 이는 대숙청에 대한 비판을 기초로 후르시쵸프가 수정주의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명백하다. 즉, 스탈린의 대숙청이라는 좌편향이 후르시쵸프의 우익적 수정주의를 낳는 토양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쏘련의 인민은 2차대전을 맞이하여 영웅적으로 투쟁한다. 쏘련인민의 영웅적 투쟁은 수많은 일화로 전해진다. 그러나 특기할 것은 노동자계급의 영웅적 투쟁이다. 나찌 독일이 침공을 개시하고 물밀듯 쳐들어 오는 순간에 쏘련은 대대적인 소개작전을 전개한다. 독일군의 진군속도가 피란을 불가능하게 하는 상황에서도 1941년 7월에서 11월까지 1523개나 되는 공업체가 서부의 위험지역으로부터 소개되어 동부로 이전했으며 그중 1360개는 대공장이었다. 거대한 기계와 설비를 분해하고 뜯어내어 기차에 실어 우랄과 시베리아로 이동시키고 불과 한 두달 만에 다시 공장을 설치하여 생산을 해내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는 노동자들이 그 공장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전 인민의 재산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일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고 노동자의 국가가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노동자계급의 영웅정신이라는 말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위기의 시기에 본질이 드러나는 법이다. 스탈린 시대는 노동자의 창발성이 억압된 관료주의 사회라는 악선동은 이 사례로 충분히 반박될 수 있다.

2차대전의 핵심은 쏘련과 독일의 전쟁이었다. 1944년에 쏘련의 승리가 확실해질 때까지 미국과 영국은 독일에 대해 변변한 싸움을 하지 못했다. 쏘련이 독일에 우세를 보임에 따라 2차세계대전은 명실상부하게 파시즘 대 반파시즘 전선으로 귀결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쏘련 인민은 2000만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인류역사상 최고의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이 바로 쏘련과 독일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쏘련이 승리함에 따라 그리고 쏘련군의 진격으로 동유럽이 나찌 치하에서 해방됨에 따라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성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혁명의 승리는 민족해방투쟁의 승리라는 점에서 전 세계 식민지 체제의 붕괴에 기폭제가 되었다.

2차대전 결말은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성립, 미국주도의 자본주의 재편, 식민지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 영국 등은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에 위협을 느껴 반공, 반쏘적인 냉전을 개시한다. 그런데 이 시기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쏘련이 국가자본주의사회라고 주장하여 쏘련을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한다. 이것은 역사가 진보를 거듭하던 당시의 상황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으로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살아남기 위한 극단적인 주장이었던 것이다. 이는 매우 비과학적인 주장일뿐만 아니라 냉전을 개시하고 있던 제국주의자들의 이해에 충실히 복무하는 것이었다. 즉, 과거 사회주의 진영 내부의 비판자였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변질된 것이다.

한편 쏘련은 전후 복구를 신속하게 마친다. 미국의 도움을 받았던 서유럽과 달리 외부의 도움이 없는 상황에서 4차 5개년계획을 수행하는데 1950년까지 산업생산이 전전 수준을 넘어 50% 정도 늘어났다. 쏘련의 사회주의 경제는 이후에 성숙된 모습을 보이는데 소비재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중공업과 소비재 생산이 균형을 이루고 농업생산도 안정적인 증가를 보인다. 그리고 동유럽, 중국 등에 대한 막대한 원조를 하는데 이는 사회주의 경제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스탈린은 1952년에 중요한 논문을 발표하는데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제문제’(이하 ‘제문제’)라는 논문이 그것이다. 이 논문에서 스탈린은 최초로 사회주의경제의 기본법칙을 제기하고 가치법칙이 사회주의 사회에도 존재한다는 것, 사회주의 경제에서 상품 화폐관계가 존재하지만 생산수단은 상품이 아니라는 것 등을 제기한다. 이 논문은 쏘련에서 정치경제학 교과서의 저술의 지침이 되었는데 사회주의 사회의 정치경제학의 원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계획경제도 지도부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경제법칙에 종속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러한 경제법칙은 사회주의 사회에 가치법칙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완연히 다른 사회구성체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스탈린 시대에 대해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제국주의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독재자의 시대였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스탈린 시대를 직접 살았던 쏘련의 인민들 사이에서는 ‘인민의 정열이 폭발했던 시기였다’는 주장도 나온다. 스탈린 시대의 공과를 간략히 따지면 먼저 공적으로는 인류 최초로 착취를 폐지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인류역사에서 지워질 수 없는 공적이다. 그리고 각종의 사회주의적 제도를 도입하여 인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무상교육, 무상의료, 노후연금 등이 스탈린시대에 도입된 것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은 2차대전에서 승리로 사회주의 세계체제를 성립시킨 것이다. 그러나 오류도 있다. 강제적 농업집단화를 통해 농민들의 자발성을 억압했다는 것, 그리하여 쏘련 농업을 오랜 기간 어려움에 처하게 했다는 것, 그리고 대숙청으로 인해 사회주의적 법치주의를 붕괴시킨 것 등이 그의 뼈아픈 오류이다. 이렇게 공적과 과오가 엇갈리고 평가가 갈리는 것은 스탈린 시대가 인류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시대였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스탈린 시대는 지양의 대상이 된다. 단순한 부정도, 단순한 긍정도 아닌 변증법적 지양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4) 수정주의의 등장과 자본주의적 경제개혁

스탈린이 사망하고 말렌코프가 주도적 역할을 하지만 곧 흐루시쵸프가 전면에 등장한다. 후르시쵸프는 쏘련에서 낙후된 것으로 꼽히던 농업의 발전에 관심을 기울인다. 농산물 조달가격의 인상, 집단농장이 국가에 진 빚의 탕감, 농민에 대한 세금의 감축, 집단농장의 정책결정권의 강화, 집단농장들의 통합을 통한 규모의 경제의 추진 등으로 농민의 소득은 크게 늘어났다. 1952-1957년 사이에 집단농장 농민의 소득은 거의 2배로 늘어났다. 그리고 후르시쵸프는 농업생산을 증대하기 위해 처녀지 개간운동을 벌여 많은 성과를 거둔다. 그리고 이 시기에 소비재가격이 인하되었는데 특히 1953년의 가격인하로 소비자의 구매력이 1/6정도 상승하였다. 1930년대 후반의 가격인하 그리고 1940년대 후반, 1950년대 초반의 가격인하는 사회주의 사회의 경제에서 가격인하가 일정한 합법칙성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노동생산성의 향상이 가격인하를 통해 전인민의 복지로 연결되는 체제라는 것이다.

1956년 20차 당대회에서 정식으로 6차 5개년 계획이 승인된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후르시쵸프는 스탈린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된다. 이에 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흐루시쵸프는 이를 제압하고 이후 자신의 색깔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후르시쵸프는 중공업중시라는 기본정책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농업의 중시, 소비재생산의 중시, 지방분권의 옹호라는 노선을 밀고 나간다. 후르시쵸프는 지방분권화를 밀고나가면서 1957년에 연방차원의 중앙기구인 30여개의 성(省)을 폐지하고 100여개가 넘는 지역경제회의(소브나르호스)를 신설한다. 그러나 곧 문제가 발생하는데 6차 5개년계획이 쏘련에서 계획경제가 도입되고 난 후 처음으로 계획대로 실시되지 못하고 1959년 7개년 계획으로 대체된다. 이는 중앙이 전체경제의 지도에서 허점을 드러낸 것으로서 계획의 요소에 중대한 균열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후르시쵸프의 지방분권의 강화가 모순을 드러낸 것이다. 즉, 올바른 중앙의 지도가 결여된 지방분권화는 지방주의의 강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지방분권을 강화하는 것은 지방의 활력을 높이고 사회가 성숙된다는 지표가 되지만 지방분권은 동시에 중앙의 강화와 같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후르시쵸프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1950년대 초반까지의 가격인하 경향과 달리 물가가 인상되기 시작했다. 1962년 식료품 가격이 강압적으로 인상되었고 그 결과 몇몇 도시에서 폭동이 발생했고 이는 전국적인 사태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1963년에는 쏘련 성립이후 최초로 대량의 곡물을 수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러한 국내경제정책에서 실정은 후르시쵸프의 위신을 크게 실추시켰다.

또 하나 주목할 점으로 후르시쵸프가 집단농장과 국유부문의 연결고리를 이루는 기계 트랙터 센터(MTS)를 폐지하고 그 자재들을 집단농장의 소유로 전환한 것이다. MTS는 30년대의 집단화운동의 산물인데 국가가 대량의 기계와 트랙터를 농촌에 공급하는 매개로서 농촌 곳곳에 MTS를 설치하고 그것 자체는 국유기업으로 한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의미를 넘어 당과 국가가 농촌과 연결되는 주요한 정치적 고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경제적 측면에서는 협동조합인 집단농장의 생산관계와 공업부분의 국가소유관계를 연결하는 것으로서 향후 협동조합인 집단농장이 국유, 즉, 전인민소유로 발전하기 위한 디딤돌의 역할을 하는 것인데 이 고리를 끊은 것이었다. 그 결과 집단농장은 기계류와 트랙터들에 대한 소유는 획득했지만 그 대금을 장기에 걸쳐 국가에 지불해야 했고 실제 운영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는 집단농장의 자발성 강화라는 면에 치우쳐 실제적 조건을 무시한 것이었다. 즉, 사회주의 사회에서 집단농장과 MTS는 협력의 관계였고 이를 국가가 보증하는 체제였는데 이를 끊어 버린 것이다.

한편 후르시쵸프는 대외관계에서 스탈린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평화공존을 주창하고 전쟁의 불가피성을 부정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을 방문하기도 하는 등 활발한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외화내빈이라고 오히려 군비경쟁은 1960년대 들어 가속화되었다. 우주 및 미사일프로그램에 대한 지출이 폭등하여 군사지출이 1961년에 30%나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1970년까지 공업과 농업생산에서 미국을 따라 잡는다는 목표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후르시쵸프가 말과 의욕은 앞서지만 그의 실현을 위한 현실적 방안에는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탈스탈린 정책의 전개로 1956년 헝가리 폭동이 일어나고 1962년 쿠바위기에서 미국에 일방적으로 양보하여 쿠바의 반발, 중국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후르시쵸프의 오류가 전반적으로 쌓여감에 따라 국내외적 반발에 직면하게 되고 그는 1964년 실각된다.

그러나 후르시쵸프에게 있어 이론적 의미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전인민국가론과 전인민당이라는 노선이다. 이로 인해 후르시쵸프는 중국에 의해 수정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 전인민국가를 제기한 것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확립되었음에도 국가가 여전히 강화된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즉, 제국주의와의 대결이 국가의 소멸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인민국가는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대체할 수 없다.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확립된 후에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불가피한데 왜냐하면 계급사회의 잔재,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급사회의 잔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후르시쵸프는 인민에 대한 억압이 더 이상 없다는 의미로 전인민국가를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전인민의 국가는 전인민에 대한 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인민국가에서는 국가기구가 소멸하기는커녕 증대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전인민의 국가이기 때문에 국가기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인민당이라는 노선도 잘못된 것이다. 사회주의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노동자계급의 관점은 과학적 노선을 보증하는 지표가 된다. 그러나 전인민당은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폐기하고 무당파적인 전인민의 관점으로 과학적 노선을 대체하는 것이다. 실제로 전인민국가, 전인민당이라는 노선하에서 경제에서 중앙차원의 계획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후르시쵸프의 노선은 스탈린의 오류를 극복한다는 취지는 좋았지만 사회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에 대한 수정주의라는 비판은 타당한 것이다.


후르시쵸프의 뒤를 이은 브레즈네프는 전인민국가 또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하나라고 일종의 절충을 시도한다. 이러한 절충은 브레즈네프의 모든 정책에서 나타나는데 그로 인해 쏘련은 깊은 정체의 늪으로 빠져든다. 과학적 노선에 대한 치열한 탐구의 자세를 버리고 쉽게 절충하는 순간 더 이상의 진보는 멈추는 것이다. 브레즈네프는 후르시쵸프를 비판했지만 실제로는 후르시쵸프의 수정주의를 심화시킨 것이었다. 후르시쵸프가 사상적 차원의 수정주의였다면 브레즈네프는 경제에서 수정주의를 심화시켜 쏘련의 경제를 붕괴로 몰아넣는다.

1965년 경제에서 중대한 개혁이 실시된다. 개별 국유기업에 자본주의적 이윤원리를 도입하고 독립채산제를 실시하는 것이 이 개혁의 핵심이다. 이 개혁은 수상인 코시킨이 주도한 것이어서 코시킨 개혁이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경제에서 자본주의적 원리를 도입하는 것은 이미 후르시쵸프 당시에 논의가 진행 중이었다. 1962년 쏘련 경제학자 리베르만은 당기관지인 <프라우다>에 ‘계획, 이윤 및 상여금’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는데 경제의 지방분권화와 이윤제도의 도입을 주장한 것이었다. 중앙의 계획은 산출목표에만 한정하고 투입요소는 개별 기업이 결정하고 또 가격개혁을 시도하는 것을 중심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리베르만의 주장이 채택된 것이 1965년의 경제개혁이었고 따라서 리베르만 개혁이라고도 불리운다. 이에 따라 1967년 대대적인 도매가격의 인상이 실시된다. 이는 기존에 생산비용에 산입되지 않았던 고정기금의 사용료를 국가가 개별기업의 이윤에서 징수하는 것을 기초로 이루어진 것이다. 즉, 기존에는 상품으로 여겨지지 않던 생산수단의 생산에서 이윤원리가 도입됨으로써 생산수단의 가격이 상승하고 이것이 도매가격의 인상으로 반영된 것이다. 이는 상품적 성격이 없는 생산수단에 상품적 성격을 의식적으로 부여하는 것이었고 또 고정기금의 사용료를 징수한 것은 사회주의 원리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다.

1965년 이전에는 고정기금의 사용료를 개별기업에서 징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산수단의 가격은 최소한의 비용만 산정하여 제 2부문(「자본론」의 분류에 따른다면)에 공급되었고 제 2부문, 즉, 소비재 생산에서 제 가치를 모두 산정하여 제 가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소비재에 대해 매상고세를 붙여 이를 국가의 세금으로 징수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원칙을 정면에서 부인한 것이다. 고정기금에서 사용료를 징수한다는 것은 고정기금(「자본론」의 분류에 따르면 불변자본)이 스스로 자기증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고정기금에 대상화되어 있는 죽은 노동, 과거의 노동이 스스로 가치증식한다는 것으로서 죽은 노동, 과거의 노동이 산노동의 우위에 서게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회주의의 생산수단이 자기증식하는 자본주의적 자본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이는 죽은 노동, 과거 노동에 대한 산 노동의 우위를 통해 노동해방을 실현한다는 원리를 정면에서 거스르는 것이다. 자본주의사회는 죽은 노동이 산노동의 우위에 있기 때문에 죽은 노동은 자본이 되는 것이고 산노동은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착취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바로 이 점을 뒤집은 것 즉, 산노동이 죽은 노동의 우위에 서게 되어 노동해방이 쟁취된다는 것이고 따라서 죽은 노동은 더 이상 자본이 아니게 되고 산노동을 위한 단순한 물적 조건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1965년의 경제개혁, 1967년의 도매가격인상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에 위배되는 자본주의적 원리의 도입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브레즈네프 시대에 이윤원리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는 심각한 불협화음을 내며 충돌하고 쏘련경제는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한다. 브레즈네프 말기인 1970년대 후반 쏘련경제의 성장률은 0-2%에 머물고 경제는 완전히 균열하게 된다. 바로 이 점이 쏘련이 붕괴하게 되는 직접적 원인이 된다.

코시킨 개혁 혹은 리베르만 방식은 개별국유기업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운영하라는 지시에 다름아니었다. 그리하여 국가가 총산출량과 가격을 통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개별기업의 자율권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는 계획의 요소의 균열과 마비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사회주의적 계획과 개별기업의 자본주의적 운동은 끊임없이 충돌하게 된다. 계획이 이완됨에 따라 생산의 불균형과 물품의 부족이 일반화되었고 그에 따라 부패, 뇌물수수, 밀매, 축장이 성행하였다. 또한 고객요구의 무시, 재고의 증대, 건설의 장기화 등으로 모순이 표면화된다. 1979년까지 미완성된 건설사업에 들어간 총액은 1064억 루블에 달하였다. 이는 건설계획을 입안하여 물자를 획득하고는 실제 공사에는 손을 놓기 때문이었다. 생산의 불균형과 공급의 부족은 기업, 개인으로 하여금 사재기를 기본원칙으로 하게 만들었다. 각 기업체는 사재기 덕분으로 공급에 이상이 생겨 필요자원을 제때 조달받지 못하더라도 ‘숨겨놓은 자재’덕분에 계획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대규모의 지하경제를 발생시켰다. 그리고 사영경제도 불법적이지만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통계의 조작도 성행했는데 1985년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수천 톤의 면화를 더 생산한 것으로 보고하여 더 많은 대가를 국가로부터 받고 심지어는 초과달성 수당까지 받았다.

이러한 경제에서 균열은 노동해방이라는 사회주의의 대원칙, 죽은 노동에 대한 산 노동의 우위라는 원칙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이윤 자체를 몰랐던 사람들이 이윤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문제점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는 사상적으로는 절충주의의 해악을 보여주는 것이다. 절충주의는 문제를 더 어렵게 꼬이게 만들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고통스럽고 어려운 길이지만 절충주의를 거부하고 과학적 노선을 수립하는 길을 갈 때 역사는 진보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브레즈네프가 사망하고 이후 고르바쵸프가 등장하여 개혁을 실시하지만 그는 계획의 마비를 해결하려 함에도 불구하고 원인을 과학적으로 밝히지 못하고 소위 인간적 사회주의라는 구실 하에 자본주의적 인간형을 대안으로 제시하여 쏘련을 붕괴시키고 사적 소유의 부활을 초래한다.



2. 쏘련 붕괴의 교훈


1)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은 무엇인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확립되기까지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주요 모순은 ‘누가 누구를’이라는 것이다. 즉, 타도된 자본가계급의 저항을 분쇄하고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할 것인지, 아니면 자본가의 반혁명에 의해 혁명이 압살당할 것인지가 핵심적인 모순이 된다. 이 때의 모순은 적대적인 모순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확립되고 난 후에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적대적 모순은 사라지지만 새로운 모순이 발생한다. 즉,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 그것이다. 이는 적대적 모순이 아니라 비적대적 모순이다. 왜냐하면 계급이 폐지되고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순들은 계급사회의 잔재라는 점에서 올바로 해결되지 못한다면 적대적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모순의 성격을 규명하고 주요모순을 추출하기 위해 모택동의 도움을 빌릴 수 있다. 후르시쵸프 수정주의 등장으로 촉발된 1956년의 헝가리 사태는 사회주의 건설을 막 시작하던 모택동에게는 충격이었는데 모택동을 그 사태를 분석하고 교훈을 끌어내기 위해 ‘인민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모순에는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이 있음을 밝히고 인민내부에도 모순이 있으며 그 모순은 비적대적 모순이지만 올바로 해결되어야 함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모택동의 관점을 빌어 우리는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을 포착할 수 있다. 즉,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대립이라는 모순과 달리 인민내부의 비적대적 모순이 주요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모순을 주로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노동자계급 내부의 모순, 즉,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을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으로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스탈린은 1930년 말에 인텔리겐챠들이 사회주의적으로 개조되어 노동자계급과 인텔리겐챠의 대립은 더 이상 없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틀린 말이다. 즉, 부르주아적 인텔리겐챠들이 더 이상 없다는 점에서는 맞지만, 새로운 노동자계급 내부의 모순으로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모순이 주요모순으로 대두한다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은 틀린 점이다. 물론 스탈린도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문제를 주요하게 사고했었다. 특히 ‘쏘련에서 사회주의경제의 제문제’에서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독자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모순이 비적대적이며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을 뿐이다. 그는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대립의 공간적 표현에 불과하다는 엥겔스의 언급(「반듀링론」)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 사회주의 사회의 모순으로서 단지 극복의 대상일 뿐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포착하지 못했다. 주요모순은 그 극복의 과정이 한 사회의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모순론의 근본원리인 것이다. 이렇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을 주요모순으로 파악하는 것은 여러 가지 가능성과 전망을 확보하는 것이다.

먼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극복은 관료주의의 극복전망을 열어준다. 관료주의는 국가가 존재하는 동안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정신노동자의 핵심이 관료라는 점에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을 의식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은 곧바로 관료주의의 극복과 연결된다. 관료주의를 국가의 감사기능의 강화, 아래로부터의 비판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노력도 필요하지만 관료주의의 뿌리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에 있음을 인식할 때 근본적 비판이 가능하다.

둘째,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극복은 국가소멸의 전망을 열어주는 것이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서 시민사회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라는 내적 모순의 발전으로 인해 활성화될 때 시민사회가 국가보다 우위에 서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한편으로 국가가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성격을 가질 때만 가능한 원리이다. 후르시쵸프처럼 전인민국가가 되면 시민사회가 국가보다 우위에 서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계급사회의 잔재와 정확히 투쟁할 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은 급속히 소멸할 수 있다. 그리하여 국가의 기능이 점차 시민사회로 이전되고 국가의 계급적 억압이라는 본질이 서서히 소멸할 때, 국가적 관리가 시민적 자치로 대체되고 국가는 소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셋째, 도시와 농촌의 대립도 극복이 가능해진다. 엥겔스의 분석대로 도시와 농촌의 대립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공간적 표현에 불과하다. 도시는 정신노동을 특화하고 농촌은 육체노동을 특화한 것이 오랜 계급사회의 역사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분열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따라서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라는 모순과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라는 모순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파악하고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점과 관련지어 스탈린은 대도시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는 잘못이다. 대도시는 자본주의의 고유한 산물이다. 쏘련의 경우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대도시가 많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후진농업사회를 기초로 사회주의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 사라진다면 대도시는 존재할 이유가 없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소비하는 대도시는 엥겔스의 분석대로 소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는 발전된 사회주의 혹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의 사회의 기본적인 경제적 토대가 농공복합체가 될 것임을 예측하게 한다. 실제로 쏘련에서는 1950년대와 60년대에 농공복합체가 많이 출현하기도 했다.

넷째,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극복은 분업의 소멸을 가져온다. 분업의 발생자체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에 기초했다는 점에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극복은 분업을 소멸시키고 인간의 다면적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아침에는 농사짓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토론하는 공산주의적 인간형이 실제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업의 소멸은 한편으로는 생산력의 고양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반대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의식적 극복과정이 생산력의 고양을 가져올 수 있다. 즉, 상호의존적인 관계인 것이다. 분업은 사적 소유가 발생하고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되면서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분업의 극복은 자본주의의 극복만이 아니라 오랜 계급사회의 잔재를 극복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극복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길을 밟을 것인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모순의 극복, 해결은 모순의 발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모순론의 원칙을 언급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극복은 사회주의를 마감하고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도약하는 디딤돌이 된다는 것이다.


2) 사회주의 경제를 지도하는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 짜골로프의 정치경제학 교과서 비판을 중심으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쏘련을 국가자본주의로 파악한다. 그러나 이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만 있더라도 불가능한 주장이다. 여기서 일일이 국가자본주의론을 비판할 여력은 없다. 사회주의 경제를 지도하는 정치경제학을 규명함으로써 사회주의 경제, 쏘련의 경제가 자본주의와는 완연히 다른 사회구성체임을 증명하는 것으로써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비판을 대신하고자 한다.

기존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주의 경제를 계획경제로 파악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일면적인 파악이다. 즉, 자본주의의 생산의 무정부성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사회주의 경제는 계획경제, 의식적으로 조직되는 경제였다. 이러한 계획에는 계산과 통제, 전략적 설정 등의 개념이 포함된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사회주의 경제를 계획경제로 그리고 그 좁은 의미에서 통제경제로밖에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계획경제는 사회주의 경제의 일면이다. 계획경제는 자본주의적 무정부성과 대비해서는 진보적이나 ‘운동성’이 빠지면 계산을 내용을 하는 관리경제가 될 따름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운동의 동력과 방향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공산주의로 전진이고 그 동력은 자본 혹은 과거의 노동 혹은 생산수단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노동력의 잠재력이다. 그리고 이러한 잠재력을 현실적 힘으로 전화시키는 것은 의식적인 조직, 중앙집중적 계획과 노동계급의 혁명적, 창조적인 노력의 결합이다. 따라서 계획은 공산주의로 전진이라는 요소와 결합될 때만 살아 숨쉬게 된다. 즉, 계획경제라는 규정은 사회주의경제를 한 단면으로서 정태로서 고찰하는 규정이라는 한계를 갖는다. 계획은 사회주의의 경제법칙을 위배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소극적 의미를 갖고 나아가 법칙에 의거하여 법칙을 활용하여 거대한 잠재력을 현실적 힘으로 변화시켜 나간다는 점에서 적극적 의미를 갖는다. 이 후자 부분의 계획은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부분적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즉, 계획경제는 통제 혹은 계산경제와 자유의 영역의 상호 모순과 운동의 관계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고 공산주의로 접근할수록 자유의 영역은 넓어진다. 그러면 문제는 통제경제의 범위에 해당하는 영역, 사회주의에서 반드시 관철되고 따라야만 하는 법칙이 무엇인가가 중요해진다. 그것은 크게 2가지로 나뉘는데 사회주의 경제가 확립되고 공산주의로 전진하며 공산주의 요소가 부분적으로 실현되는 조건에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고유하게 발생하는 법칙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로부터 물려받은 법칙 중 여전히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관철되는 법칙이 또 하나이다.

첫째의 법칙, 사회주의에 고유한 법칙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사회주의경제의 기본법칙이다. 이는 스탈린이 최초로 논문 ‘제문제’에서 제기한 바 있다. ‘더 높은 기술에 기초한 사회주의적 생산의 지속적인 확대 및 완벽화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사회 전체의 물질적, 문화적 요구들의 극대 만족을 확보하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경제법칙이라고 규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짜골로프의 교과서에서는 약간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공산주의(사회주의) 사회는 사회 전성원의 완전한 복지와 각자의 인격의 자유로운 전면적 발전의 달성에 사회적 생산을 계획적으로 종속시키며 이것이 또한 사회적 생산 그 자체의 부단한 발전을 조건짓는다’. 표현은 다르지만 내용은 본질적으로 같다. 이러한 법칙은 생산의 목적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자본주의의 이윤원리와 대립되는 사회주의의 고유한 생산의 원리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적 경제법칙과 더불어 중요한 또 한 가지 법칙이 있다. 스탈린에 의해 ‘국민경제의 균형잡힌 발전의 법칙’이라고 규정된 것이다.


우리의 다년간의 그리고 5년간의 계획이 국민경제의 균형잡힌, 비례를 이루는 발전의 객관적 경제법칙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경제의 균형잡힌 발전의 법칙은 자본주의 아래서의 생산의 경쟁 및 무정부성의 법칙에 반대하여 제기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정당성을 상실한 생산의 경쟁 및 무정부성의 법칙 이후로 생산수단의 사회화로부터 제기되었다. 그것은 사회주의 경제가 오직 국민경제의 균형잡힌 발전이라는 경제적 법칙의 기초 위에서만 집행될 수 있기 때문에 작용하게 되었다. 그것은 국민경제의 균형잡힌 발전의 법칙은 우리의 계획기관이 사회적 생산을 올바르게 계획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스탈린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균형잡힌 발전의 법칙(혹은 비례성의 법칙)은 자본주의 생산의 무정부성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국민경제의 계획이 균형과 비례성에 입각할 때만 올바른 계획이 가능하며 계획은 그러한 법칙에 종속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균형잡힌 발전의 법칙은 짜골로프의 교과서에서는 ‘계획성의 법칙’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계획성의 법칙이라는 짜골로프의 주장은 오류이다. 왜냐하면 계획은 대상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 작용인데 계획이 객관적인 경제법칙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만약 계획이 경제법칙이 된다면 경제관료의 지시나 명령이 경제법칙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짜골로프의 이러한 오류는 브레즈네프 시대의 관료주의를 반영한 것으로서 비과학적인 것이다.

이러한 2가지의 주요한 경제법칙이 사회주의에 고유하게 발생하는 경제법칙이다. 이 법칙을어길 경우 사회주의 경제는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 실례가 1965년의 코시킨 개혁이라 불리는 잘못된 개혁으로 쏘련경제가 침몰했다는 것이다.

한편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전복한, 뒤집은 사회인데 그 결과 자본주의의 유물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즉, 사회주의 하에서도 상품화폐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역은 상당히 축소되어 있다. 스탈린 논문에 따르면 생산수단은 더 이상 상품이 아니다. 이는 타당한데 왜냐하면 상품생산은 사적 생산자의 생산물이 교환을 통해 거래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생산수단의 생산은 사적 생산도 아니고 교환을 통해 거래되는 것도 아니며 국가소유인 국유기업에서 국유기업으로 이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상품관계로 집단농장의 사적 부속지에서 발생하는 사적 생산물을 예로 들고 있다. 그리고 상품화폐관계가 발생하는 근본원인으로 공업에서의 국유와 농업에서의 협동조합적 형태라는 생산관계의 차이를 들고 있다. 이는 타당한 분석이다. 이를 조금 더 분석해보면 소비재의 경우 사적 생산이 아니라 사회적 생산이라는 점에서 상품이 아니지만 교환을 통해(즉, 화폐를 매개로) 개별 소비자에게 이전된다는 점에서는 상품이다. 즉, 소비재(맑스에 따르면 2부문)의 경우 상품이 아니면서 동시에 상품인 모순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유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것이다.

이렇게 부분적으로 상품 화폐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가치법칙이 존재한다. 그러나 가치법칙은 자본주의와 비교할 때 작용의 영역이 축소될 뿐만 아니라 그 성격도 많이 변화한다. 즉, 자본주의 상품생산에서 사용가치는 단지 교환가치의 담지자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전복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관계가 변하는데 교환가치보다 사용가치의 중요성이 커진다. 즉, 돈, 가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민에게 얼마나 쓸모있는가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민은 기본적인 구매력을 확보하고 있고 따라서 상품의 질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민의 수중에 있는 화폐로 표현되는 교환가치는 인민(노동자) 스스로 얼마나 높은 질과 많은 양의 사용가치를 만들어 내는가에 따라 충실해진다. 여기서 인민의 복지는 창출된 이윤의 분배적 측면이 아니라 소매가격의 인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회주의 경제의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자본주의에서 관철되는 평균이윤율의 법칙은 사회주의에서는 폐기되고 작동하지 않는다. 이는 자본가계급이 타도되고 생산수단과 자원의 이동에 대한 국가적 통제가 확립되기 때문이다. 모든 상품이 평균이윤이 아니라 가치대로 판매된다면 유기적 구성도가 높아 자본주의하에서 가치에 비해 높은 가격을 실현했던 중공업 혹은 생산수단 생산기업 혹은 1부문( 더욱이 독점자본주의 하에서는 평균이윤율 보다 높은 독점이윤을 실현했던)은 생산수단의 가격을 매우 낮출 수 있다. 따라서 2부문, 소비재산업에서는 생산비용 중 생산수단의 비용이 낮아짐에 따라 생산물의 가격을 낮출 수 있게 되고 이는 노동자의 수중에 있는 화폐의 구매력(교환가치)을 높이게 된다. 이와 같이 가격이 경향적으로 저하되면 노동생산성을 높이고자 하는 노동자와 기업의 노력이 불가피해지며 이는 역으로 1부문의 발전을 촉진한다. 여기에서 반드시 국가가 가치 이상으로 가격을 실현하려는 기업에 대해 가격 규제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1부문 혹은 생산수단의 생산의 발전은 위와 같이 2부문의 반작용에 의해 촉진될 뿐만 아니라 국가, 그리고 1부문의 집합적 단위, 개별기업의 노력 등 전략적 포석에 의해서도 발전한다. 실제로 쏘련은 1950년대까지 이러한 경제체제를 달성하였고 이는 후르시쵸프의 가격인상, 1965년의 코시킨 개혁이전까지 쏘련경제를 발전시킨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코시킨 개혁은 가격인하를 계획의 요소로한 기존의 정책을 변경하여 개별기업으로 하여금 가격인하 목표설정을 폐지하였다.

사용가치의 중요성이 교환가치에 비해 커지는 모습은 노동에 있어서 자본(과거의 노동)의 위에 산 노동이 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노동해방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것이다. 그리고  가격으로 표현되는 산 노동과 과거의 노동의 가치에서 과거의 노동은 가치의 하락에서 산 노동보다 빠를 수밖에 없고 따라서 1부문과 2부문의 가격에서 1부문의 가격하락이 2부문보다 빠른 경향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최종생산물에서 실현되는 생산수단의 가격은 매우 낮아져서 산 노동의 결정적 우위가 확립되고 가격의 경향적 저하가 하나의 법칙으로 성립할 조건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는 교환가치의 영역이 질적, 양적으로 축소되어서 최종적으로 화폐의 소멸과 가치법칙의 소멸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 적어도 경제영역에서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도약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현실적인 사회주의 사회의 경제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시대를 대표하는 짜골로프의 정치경제학 교과서는 1965년의 경제개혁을 반영하고 특히 브레즈네프의 절충주의가 깊이 배어있다. 그에 따라 한편으로 계획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적 정치경제학이라는 한 면과 다른 한 면으로는 상품 화폐관계를 생산수단에까지 확장시킨 내용을 절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적인 원리를 조절하는 것이 국가라는 것이다. 이는 국가가 만능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주장은 국가 또한 경제법칙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스탈린의 주장과 비교된다.

이러한 절충주의적 오류가 깊이 배어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짜골로프의 교과서는 사회주의 구성체가 자본주의와는 다른 원리에 의해 작동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노동력이 아닌 노동에 따른 보수가 사회주의에서는 관철된다는 것인데 노동자들이 개별기업에서 받는 임금 말고도 사회적 소비기금에 의해 막대한 물질적 혜택을 누리고 있음을 강조한다. 사회적 소비기금은 국가가 의료, 교육, 문화시설, 휴양시설을 무료로 제공하는 것인데 사회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이러한 사회적 소비기금이 늘어나고 개별기업에서 받는 임금의 비중이 축소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적 소비기금은 노동에 따른 보수라기 보다 필요에 따른 소비를 말하는데 이는 필요에 따른 분배가 실시되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원리가 부분적으로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관철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상품 화폐관계의 축소, 가치법칙의 소멸, 한편에서는 필요에 따른 분배의 증대가 점차로 이루어짐으로써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다가서는 모습을 짜골로프의 교과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짜골로프 교과서가 갖고 있는 오류는 기존에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이 제대로 성립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혹은 왜곡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을 올바로 세우는 것은 사회주의 경제의 건설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작업이다.




3)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붕괴의 교훈

이렇게 사회주의 경제, 쏘련의 경제가 무너진 것이 쏘련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쏘련붕괴의 또 하나의 원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붕괴이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노동자계급의 강력한 무기이다. 이 원칙을 지킬 때 세계혁명운동은 발전했고 사회주의 건설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이는 후르시쵸프에 의해 붕괴의 길을 걷는다. 후르시쵸프가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중국이 이에 반발하고 이후 중소논쟁으로 번지면서 사회주의 진영은 분열의 길을 걸은 것이다. 중소논쟁은 스탈린에 대한 평가, 프롤레타리아 독재, 전인민국가, 전인민당 등을 쟁점으로 하여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사상적 차이가 중국과 쏘련의 국경에서의 충돌로 비화되면서 사회주의 진영은 결정적으로 분열한다. 이에 따라 1970년대 공황에 의해 위기에 처한 제국주의 진영은 신자유주의로서 노동자계급을 공격하는 정책을 펼 수 있었다. 또한 미국 등은 사회주의 진영의 각개격파에 나서는데 중국과 수교하고 쏘련에 대해서는 경제협력, 군축협상을 매개로 유인책을 펴고 이러한 제국주의의 구도에 대해 사회주의 진영은 올바로 대응하지 못하고 쏘련의 붕괴, 중국의 자본주의화로 귀결되게 된다. 따라서 21세기 지금 사회주의 운동이 재정립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복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붕괴의 시초가 되었던 스탈린에 대한 과학적 평가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붕괴의 원인을 규명하고 21세기에 걸맞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창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전 세계 노동자계급이 다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움켜쥔다면 신자유주의 모순으로 격화되고 있는 계급대립에 기초하여 다시 사회주의운동의 전망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맑스의 공산당 선언의 결론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이다. 이는 사회주의 운동의 대원칙으로서 노동자계급의 해방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20세기 사회주의의 경험은 21세기 사회주의에 풍부한 경험을 제공한다. 그 역사를 연구하고 비판하고 지양할 때 새로운 전망이 가능할 것이다.

 

쏘련 붕괴의 원인과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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