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노동자계급운동의 총노선투쟁을!
채만수 | 소장
다시 이어지고 있는 비극적 투쟁들
다시 또 노동자들의 자결, 자결투쟁이, 그리고 노숙농성, 고공농성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 처절하고도 비극적인 투쟁들이 여기저기에서 필사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송경동 시인은 피를 토하듯 쓰고 있다. “모두 외로운 깃발처럼 느껴졌다. 싸워도 싸워도 해결되지 않는 싸움들”1)이라고.
정말 그렇게 느껴진다. 단순히 신자유주의에 대한, 독점자본에 대한 힘의 열세 때문이 아니라, 그 신자유주의, 그 독점자본의 힘 앞에서 무기력하고 갈수록 무기력해져 가고 있는,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자 주력부대의 진한 패배주의와 현실안주 때문에! 부르주아 국가주의․애국주의에 대한 그들의 굴종 때문에!
시인의 말처럼, “나도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인가 보다.”2)
비극의 제1차적, 근본적 원인은 물론 자본,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이다. 자본의 탐욕이 그러한 비극을 강요하고 있다. 특히 과학기술혁명의 비약적인 진전과 생산력의 눈부신 발전 등으로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실상은 바로 그 때문에 더욱 전면적인 위기에 처해 있고 그 위기를 심화시켜 가고 있는 자본주의체제가 그러한 비극을 강요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오늘날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심대한 만성적이고 항상적인 과잉생산, 만성적인 과잉축적에 시달리고 있는 지 오래고, 바로 그 때문에 자본 간의 그리고 국가 간의 경쟁전이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어느 때보다도 더 노동자들에게 실업뿐 아니라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불완전 취업 및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 극심한 빈곤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생산과 건설, 유통의 현장에서 여러 형태의 취업 노동자들과 직접 대면하고 있는 자본은 물론이요, 모든 국가 기구가, 그리고 여러 형태의 언론과 대학 등 온갖 지배 이데올로기 장치들이 모두 하나같이 그렇게 빈곤과 고통을 강요하고 있다. 의회는 독점자본에게는 무한한 착취의 자유와 이권을 주고 노동자들에게는 굴종과 빈곤을 강제하는 법률들을 양산하고 있으며, 정부는 그것들을 기획․집행하고 있다. 특히 경찰․노동부․검찰 등을 동원하여 폭력적으로 노동자들을 억압하며 착취체제를 보장하고 있다. 그리고 법원은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언론과 지식인들은 국가경쟁력과 효율성, 과학과 예술의 이름으로, 종교단체들은 신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정당화․신성화시켜 주고 있다.
이른바 대선정국을 맞아 지금 개나 소나 다투어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목청을 높이고 있지만, 모두가 하나같이 부르주아 국가경제, 부르주아 국민경제를 보다 튼실히 하겠다는, 즉, 따지고 보면, 노동자계급을 위시한 근로대중에 대한 착취를 보다 강화하겠다는 방략의 경연뿐이다. 개나 쇠나 서민을 위하겠다고,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수백만 개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겠다고 떠벌리지만, 대중기만일 뿐 아니라, 온통 하나 같이 부르주아적 경쟁력의 강화를 조건으로 하는 것, 즉 착취의 강화책일 뿐이다.
명색이 노동자정당, 진보정당을 자처하는 정당들도 경연에 참가하고 있지만, 빈말로라도 자본주의 그 자체, 계급적 착취 그 자체를 폐절시키겠다는 소리는 귀를 씻고 들을래야 들리지 않는다. 합법주의와 부르주아 국가주의․애국주의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자기 주제를 모르는, 그리하여 비웃음거리밖에는 되지 않는, 되지도 않을 ‘대안들’, 체제 내 어설픈 대안들을 떠벌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한 어설픈 부르주아적․소부르주아적 ‘대안들’을 노동자계급적 수사로 화려하게 포장하면 할수록, 그들의 언설은 노동자 대중들에게 그만큼 더욱 해악적이다. (물론, 이러한 행태는 그들 집단의 계급적 정체성, 그 당파성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만큼 독점자본의 힘이,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가 이 사회를 위력적으로, 위압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과 그 국가, 지배계급의, 싸워도 싸워도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거대한 힘, 그 거대한 폭력 앞에서, 그 거대한 힘, 그 거대한 폭력 때문에 노동자들은 저렇게 필사적으로 비극적인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변수는 노동자계급의 투쟁
그러나 돌이켜 보면,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아니 계급사회 일반 속에서 지배계급은, 그리고 그 국가는, 형태만 다를 뿐, 언제나 근로대중에게 극심한 빈곤과 굴종․고통을 강요하였다. 신분적 억압에 기초한 착취, 그리고 그에 따른 빈곤과 고통이 전(前)자본주의 시대의 그것이었다면, 오늘날 문제되고 있는 실업과 불완전 취업, 비정규직, 그에 따른 빈곤과 고통은 자본주의체제에 고유한 그것, 게다가 그 마지막 단계로서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특히 강화되고 있는 그것이다. 단지 그러한 형태상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다시 이어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저 비극적이고 필사적인 투쟁들은 단순히 독점자본의 착취가 강화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비극적 투쟁이 이어지는 것은 독점자본의 착취강화에 맞서 그것을 폐절하기 위해 응당 있어야 할 노동자계급의 조직적 저항, 조직적 투쟁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그러나 그 조직적 저항, 조직적 투쟁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저 비극들은 극단적이고 절망적인 투쟁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운동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자 하는 자기희생인 것이다.
송경동 시인이 쓰고 있듯이, 저들 노동열사들은,
나의 영전에
동지들이여, 지도자들의 향기로운 꽃이 아닌
투쟁의 돌무더기를 놓아다오
계급의, 연대의
들불을 놓아다오
해방의 등불을
저 전봇대보다도 더 높이 걸어다오3)
라고 절규!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들의 “영전에 꽃이 아닌 투쟁의 불꽃을 놓아” 달라고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경험이 보여주는 것처럼,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그들의 변혁적 투쟁이 들불처럼 위력적으로 일어나는 동안은 노동자들의 비극적 자결투쟁이나 외로운 고공농성 따위는 일어나지도 않고, 일어날 필요도 없다. 말하자면, 노동자계급의 위력적 투쟁이야말로, 아니 그러한 투쟁만이, 노동자들의 경제적․문화적 생활수준을 결정하는 변수일 뿐 아니라, 투쟁이 저토록 비극적 형태를 띠느냐 아니냐 하는 변수인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지금 투쟁은, 변혁적이거나 위력적이기는커녕, 주로 분산․고립되어 대규모로 조직되지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의 그것, 그들만의 경제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주력부대, 민주노총으로 조직된 대공장 노동자들,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은 많은 경우 현실에 안주하여 갈수록 무기력해지고 있고, 심지어는 어리석게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행을 자신의 고용과 상대적 안락함을 보장하는 안전판 정도로 여기는 경우도 사실상 적지 않다.
그리하여, 여기저기에서 투쟁이 많이 일어나고는 있지만, 그것들은 전혀 위력적이지 못하고, 장기적이고 필사적인 투쟁으로, 그리고 비극적인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대공장 조직노동자들,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은 상기해야 한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당연한 이치를!
운동의 기풍을 일신해야 한다
노동자 주력부대의 무기력을, 그 현실안주를 떨쳐내야 한다.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조직하기보다는 노동부장관이나 독점자본가단체와의 만남, ‘대화’를 예사로 삼는 지도부의 무신경, 사회적 타협주의, 관료주의를 청산해야 한다. 변혁의 전망을 포기하고 노동자 정치, 노동자 정치투쟁을 선거투쟁으로 협소화시키는 합법주의, 부르주아 국가주의․애국주의를 타기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을 볼모로 삼은 일부 야심가들의 금뺏지 출세주의, 때 늦은 사민주의를 거부하고 타파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 전통의 노동자대회가 합법주의, 부르주아 국가주의, 부르주아 애국주의에 허우적대는 사민주의 정치집단, 금뺏지를 두고 다투는 야심가들, 노동자 출세주의자들의 선거유세장, 정치선전장으로 전락해야 하는가?
노동자대회가 합법주의 정치세력의 선거유세장으로 되고, 사실상 한 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들을 외면하기 위한 명사들의 공허한 말의 성찬장이 되고, 노동자계급의 생활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이 없는 행사성 집회, 변혁의 전망을 상실한 연례행사성 집회로 된다면, 노동자들에게 그러한 집회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그것들과 싸워야 한다. 오늘날 우리 노동자계급운동 위에 짙게 드리워져 있는 저 암운, 어느덧 고질로 되어 있는 저 타성 ― 대공장 조직노동자들의 현실안주, 타협주의․관료주의․합법주의․국가주의․애국주의․사민주의, 그리고 노동자 출세주의와 싸워야 한다.
그것들과의 싸움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운동의 기풍을 일신함으로써만, 그것들과의 싸움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운동의 새로운 기풍, 새로운 정치적 기풍을 수립해야만, 아니 바로 그렇게 기풍을 일신하려는 싸움을 통해서만 운동은 활력을 되찾을 수 있고, 저 비극을 멈출 수 있다. 그러한 투쟁을 통해서 새로운 정치적 참모부를 획득해내야만 해방의 전망을 재획득할 수 있다.
싸움을 시작하자.
다시 노동자계급운동의 총노선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자.
오늘날 가혹하게 옥죄어 오는 신자유주의는 결코 노동자계급이 좌절하고 합법주의나 사민주의 등에 굴복해야 할 근거가 아니다. 그것은 그 해방의 가능성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저들 독점자본의 지배의 모순과 위기가 격화되어 있음을, 그리하여 그들의 시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그들의 파탄이 임박했음을 의미할 뿐이다. <노사과연>
1) 송경동, “나의 영전에 꽃이 아닌 투쟁의 불꽃을 놓아다오 ―[시] 故 정해진 열사의 뜻을 새기며”의 “[덧말] 분노를 조직하라” 중에서.
2) 같은 곳.
3) 같은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