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권의 팔아치우기
참으로 거침없고 참으로 낭자하다. 이명박 정권의 신자유주의 행보, 그 반노동자적이고 반민중적인 행보가.
왕 회장을 섬기던 야도이(雇い)사장[고용사장]의 행태 바로 그대로, 내외 독점자본을 섬기고 있다. “대한민국 주식회사의 CEO”, 곧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야도이사장을 자임하면서 말이다.
그는, 이 정권은 사실상 모든 것을 팔아치울 심산이다. 아니, 그렇게 팔아치우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하고 있다. 지난 1997-98년의 그것을 포함하여 지난 시기에 수차례의 경제위기, 공황을 겪으면서 ‘공황구제’ 정책에 의해 국․공유화된, 예컨대 대우조선해양이나 외환은행 같은 수많은 이른바 ‘시장형 공기업’도, 철도나 전기, 수도, 지하철 등과 같은 사회기반시설적 공기업도, 중소기업은행이나 산업은행 같은 ‘국책은행’도, 교육도, 개보험(蓋保險)으로서의 국민건강보험 같은 노동자․민중의 건강, 그 생명도 ... 모두 다 모두 다 팔아치울 심산이고, 팔아치우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매물로 내놓고 있는 ‘시장형 공기업’의 존재 자체, 그 수많은 존재 그 자체가 경제위기․공황으로 쓰러져가던 독점자본, 죽어가던 거대 사기업을 구제한 결과인데도, 그리하여 사기업, 사적소유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를 웅변하고 있는데도, 뻔뻔하게도 ‘공기업의 비효율성’을, “경제 살리기”를 내세우면서 말이다. 팔아치우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개혁’, ‘구조개편’,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수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의 목을 잘라 길거리로 내치고, 비정규직으로 내몰면서도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정책이라고 강변하면서 말이다.
갈수록 거세지는 반대여론에 부딪혀 당장은 뒤로 한 발 물러서고 있는, 그러나 필시 잠깐의 숨고르기일 뿐 결코 포기할 마음은 없는 ‘한반도 대운하’ 역시 환경과 대중의 건강, 따라서 대중의 생명을 팔아치우기는 마찬가지이다. 미국에 광우병이 발생해도 수입을 제한할 수 없다는 쇠고기 시장의 전면 개방 역시 대중의 건강, 따라서 대중의 생명을 팔아치우기이고, 또 당장 축산농가의 생존권 팔아치우기이다. 한미FTA, 한유럽FTA, 한일FTA 등등으로 서두르고 있는 소위 ‘자유무역협정’도 말할 나위 없이 노동자․민중의 생존권, 건강, 목숨을 팔아치우는 것이다.
모두가 다 독점자본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이고, 독점자본의 먹잇감으로서다. 장기적으로야 물론 독점자본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것이고 그 매장인을 양성하는 것이지만, 아무튼 그들은 그렇게 노동자․민중의 생존권, 건강과 생명을 들어서 낭자한 먹자판을 벌이고 있다.
노동자에 대한 살인적 테러들, 그리고 법과 질서
우리는 그가 왕 회장 그룹의 야도이CEO였을 때, 바로 그 그룹, 바로 그 기업에서 저 악명 높은 식칼 테러를 위시한 수많은 테러․폭력이 노동자들, 노동(조합)운동의 지도자들․활동가들에게 가해졌던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노동자들은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무튼 그런데도 그는 그때, 그 그룹, 그 기업의 CEO였음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고,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경제 살리기’를 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이제 그는 구차하게 구사대를 동원할 필요도, 은밀하게 칼잡이를 고용할 필요도 없다. 사회적으로 조직된 합법적 폭력이 이제 그 손아귀에 있다. 그래서 그는 강조한다. 법과 질서를!
지난 3월, 터무니없이 비싼 등록금을 규탄․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서울시청 앞 집회를 시위대중을 훨씬 능가하는 수의 전투경찰․체포조가 ‘호위’하지 않던가?
법의 집행자․수호자인 경찰이나 검찰, 법원 등은 물론이고 법학자․법학교수들도, 그리고 변호사․‘인권변호사들’까지도 법은 형평이고 정의라고 주장한다.
물론 지배계급․자본가들에게는,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는 ‘대체로’ 그렇다. 물론 ‘대체로’만 그렇다. 큰 고기가 잔고기를 잡아먹고, 상어가 또 그 큰 고기들을 잡아먹듯이, 저들의 세계에도 먹고 먹히는 위계질서가, 다만 끊임없이 변하면서도 대체적인 틀이 유지되는 그러한 위계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사이에서는 법은 결코 어떤 형평, 어떤 정의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 억압과 피억압의 관계를, 즉 기존의 질서를 성명(聲明)하고 유지하는 장치, 때로는 그것을 분식(粉飾)하고 치장하기도 하는 장치일 뿐이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지키기 위한 온갖 조직, 조합, 단체를 마음껏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헌법을 포함한 법률 어디에도 자본가는 그러한 단결권, 그러한 단체행동권 등을 갖는다는 조항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자유롭다.
그런데 노동자의 경우, 헌법은 고맙게도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제33조 ①항)고 규정하고 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도 “근로자는 자유로이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할 수 있다”(제5조, 전단)고 규정하고 있다.
“근로자는 ...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근로자는 자유로이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할 수 있다”! ―바로 그래서 노동자들은 부자유스럽다.
“법률이 정하는 자에 한하여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는 “공무원인 근로자”(헙법 제33조 ②항)나, 그 “단체행동권”을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를 제한하거나 인정하지 아니할 수 있다”는 “법률이 정하는 주요방위산업체에 종사하는 근로자”(동 ③항)의 얘기가 아니다. 노동자들의, 혹은 ‘근로자’들의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이 결코 “자주적”일 수 없다는 것은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활동하는 모든 노동자들,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활동하려는 모든 노동자들이 경험을 통해서 생생하게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자본․자본가․회사나 관료․국가가 탈법적․불법적으로 그 ‘헌법상의 권리’를 유린하곤 하는 것도 물론이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법률 그 자체가, 예를 들면, “이 법에 의하여 설립된 노동조합이 아니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7조) 운운하고 있다. 심지어 “이 법에 의하여 설립된 노동조합이 아니면 노동조합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동 ③항)고 규정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설립 자체부터 결코 “자주적인 것”일 수 없고, “이 법에 의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설립을 신고하고, 신고증을 교부 받아야 한다(동 제10조 - 제13조). 사실, 말이 “신고”고, “신고증의 교부”지, 그 실질적인 내용을 보면 ‘인가’이고 ‘인가증의 교부’이다. ―이것이 바로 헌법이 정한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단결권”이다!
단결권이 이 지경이니, 소위 ‘단체교섭권’, 나아가서 ‘단체행동권’이 얼마나 ‘자주적’일 수 있는가는 논하는 것 자체가 구차할 뿐이다.
“필수유지업무에 대한 쟁의행위의 제한”
다만 한 가지! 2004년의 저 ‘탄핵 정국’에서 민주노총(물론 그 상층부)이나 민주노동당, 그 안의 ‘좌파’를 자임하는 ‘다함께’(트로츠키주의자들)를 포함하여 수많은 노동운동의 지도자들, 단체들, ‘진보적’ 지식인들․교수나리들이 극렬하게 옹호하고 나선 노무현 정권에서 2006년 12월 30일에 신설되고 금년 1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간 “필수공익사업”, 즉 “1. 철도사업, 도시철도사업 및 항공운수사업, 2. 수도사업, 전기사업, 가스사업, 석유정제사업 및 석유공급사업, 3. 병원사업 및 혈액공급사업, 4. 한국은행사업, 5. 통신사업”(동 제71조 ②항)에서의 “필수유지업무에 대한 쟁의행위의 제한” 등(동 제42조의 2 - 제42조의 6)에 대해서만은 특히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이른바 “필수유지업무에 대한 쟁의행위의 제한”, 혹은, 같은 말이지만, “필수유지업무 유지”는 분명히 노동자들의 ‘단체행동권’, 파업권을 제한하는 것이고,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의 법률체계, 그 형식적․실질적 논리에 비추어 보더라도, (“공익사업” 등등의 규정 하에 가해지는 파업권에 대한 중대한 제한․침해 등도 물론 마찬가지지만) “공무원인 근로자”나 “법률이 정하는 주요방위산업체에 종사하는 근로자”가 아닌 ‘필수공익사업’(장)의 노동자들, 혹은 ‘근로자들’의 단체행동권에 대한 제한은 도대체 어떤 헌법적 근거를 갖는 것인가?!
더구나 법 제42조의 2 ②항은 “필수유지업무의 정당한 유지·운영을 정지·폐지 또는 방해하는 행위는 쟁의행위로서 이를 행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조항이 시행(2008년 1월 1일)되기도 전인 2007년 7월 1일부터 이 “규정에 위반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제89조)고, 정말 단단히 단단히도 자물쇠를 채우고 있다.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하다! 그 끔찍했던 기억도 생생한 저 박정희 유신시대의 악명 높은 “긴급조치”! 그 파쇼악법! 긴급조치에 대한 반대를 금지했던 그 긴급조치의, 그 파쇼악법의 바로 그 수법이고, 그 강제행위 자체가 시행되기도 전에 그에 대한 반대행동을 처벌하는 것은, 더구나 그것이 어떤 헌법적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 긴급조치를, 그 파쇼악법을 뺨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이들 조항은, 다름 아니라, 앞에서 열거했던 자들의 극렬한 옹호를 받으며 ‘탄핵정국’을 통해 그 권력을 강고히 했던 노무현 정권 하에서 신설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극렬하게 노 정권을 옹호했던 자들은 지금도 여전히 노동(조합)운동의, 노동자 정치운동의 지도자들․활동가들이고, ‘진보적’ 지식인들․교수나리들이다. 어느 한 자 자기비판을 했다는 소리를 못 들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다. 그들 중에는 심지어 “변혁적 계급정당을 만들자!“고 주장하고 나서는 자들까지 있다.]
아무튼 이런 모든 것들은 한국의 노동운동, 한국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밖으로부터의 도전․시련이고, 신자유주의를 더 없이 노골화하고 있는 이명박 정권 하에서 더욱 가혹해지고 있는 도전이요 시련이다.
노동자계급 상층부의 현실안주․관료화․어용화
그러나 도전과 시련은 밖에서만 가해지고 있는 게 아니다. 사실 더욱 심각한 도전과 시련은 노동자계급, 노동자계급운동 내부에 도사리고 있고, 성장하고 있다.
우선 한편에 정규직 노동자와 다른 한편에 비정규직 노동자, 불완전 고용의 반실업 노동자, 실업 노동자들이, 특히 한편에 공기업을 포함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과 다른 편에 여타의 노동자 무리가 갈라져 있다. 물론 (독점)자본이 갈랐지만, 노동자들 역시 그렇게 갈라져 있고, 특히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그 분열에 사실상 무감각하고, 일부는 심지어 그 분열에서 자기 존재의 어떤 안정감조차 느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노동자계급 상층 대중의 현실안주다.
대중의 이러한 현실안주는 많은 조합간부 혹은 조합 상층부의 관료화․어용화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루어지고 자리잡은 것이다. 한편에서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로 과거에 비해 노동자계급 일반의, 특히 그 상층부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처지와 조건이 상대적으로 나아진 데다가 다른 한편에서는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가 ‘허망하게’ 해체되는 것을 본 이후로 노동자계급 상층부와 그 지도부․활동가 일부의 현실안주․개량화, 그리고 심지어 어용화는 꾸준히, 때로는 보다 빠르고 폭넓게, 때로는 보다 느리고 소규모로, 진행되어 왔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에는 “민주노조”들이 급격하게 어용노조로 반동화되어 갔다. 2004년에 현대중공업이 어용노조로 드러났을 때는 놀라움과 배신감이 대중적으로 표현되고 민주노총에서 제명을 당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현대자동차에서, 기아자동차에서, 대우자동차에서, 쌍용자동차에서 노골적 노사협조주의가 횡행하고 비정규직노동자투쟁을 파괴하는 행위까지 자행되고 있어도 과거와 같은 노동진영의 공분은 찾아볼 수 없다. 노동조합이 개량주의를 넘어 대대적으로 반동화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 민중진영의 반동화는 이명박 정권의 성립에서도 증명된다. (권정기, “반동의 시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진로”, 정세와 노동 제33호, 2008년 3월, p. 26.)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은, 민주노총은 더 이상 싸우려들지 않는다. 과거 민주노총 지도부가 그것을 실행할 진지한 의지․의사도 없이 총파업 공포탄을 난발한 것도 문제였지만, 이제 아예 (총)파업이라는 어휘를 입 밖에 내는 것조차 꺼리고 있다. 투쟁은 조직적으로 아직 크게 약체인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의 몫으로 사실상 방기되어 있다. 아니, 그뿐이 아니다. 상당수의 대기업 노조가 노골적으로 어용화되었을 뿐 아니라 민주노총의 지도부 경쟁에서는 어용화된 이들 노조의 대의원들의 표가 지도부의 행방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직 ‘민주노조’임을 자임하는 노조들의 지도부 중에도 “노골적 노사협조주의가 횡행하고”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 “비정규직노동자투쟁을 파괴하는 행위까지 자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앞에서 이른바 ‘필수유지업무’에 관해서 언급했지만, 그것을 신설한 노동법의 개악도, 정부와 자본이 ‘비정규직 보호법’이라고 강변하는 비정규직 확대법안도 (김대중 정권에 이은, 특히) 노무현 정권 하에서 노동자들의, 즉 민주노총의 커다란 투쟁, 격렬한 저항 없이 이루어졌다.
바로 노동자계급 상층부의 현실안주, 노동(조합)운동의 관료화․개량화․어용화의 표현이고 결과로서, 한국의 노동자계급운동이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기필코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내부의 도전이요 시련이다.
노동자 정치운동 내의 기회주의, 그리고 사민주의화
노동자계급 정치운동도 내외의 도전과 시련에 시달리고 있고, 그 시련과 도전이 갈수록 심각해져 온 것은 역시 마찬가지이다. 1987년의 투쟁을 통해서 합법적 공간이 상당 정도 열리면서부터 노동자계급 정치운동의 표층부(表層部)―적어도 당시는 ‘표층부는’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는 합법주의와 기회주의에 의해서, 그리고 특히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해체 후에는 갈수록 개량주의와 몰계급적 민족주의, 혹은 애국주의, 혹은 국민주의에 의해서, 그리고 또 갈수록 사민주의에 의해서 지배되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의 발전은 드디어 오늘날 진보신당이라는 노골적 사민주의, 사실상 국가보안법을 등에 업고 조선일보 등과 같은 극우 파쇼언론과 사실상 합작하여 바로 어제까지 같은 당을 하던 자신들의 경쟁 집단을 ‘종북주의’라고 비난하고 나서는 그러한 사민주의 집단을 공식적으로 출현시키기에까지 이르렀다.
이들은 한편에서는 ‘국민’ 타령을 하면서도, 또 한편에서는 “계급적”이니, “노동자계급적”이니, “연대”니 하는 수사 역시 즐겨 구사하는 집단이다. 그만큼 교활한 집단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컨대 지난 총선에서 주장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 간의 “사회연대전략”이란 ‘고임금(?)인’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의 일부를 떼어내 저임금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지원하자는 주장이 그 핵심 아닌가? 바로 연전에 서경석 목사 등의 극우인사들이 주동이 되어 자칭 타칭의 ‘사회원로들’, 즉 독점자본의 바람잡이들이 주장한 바로 그 민주노총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에 대한 매도․무력화 음모와 동일한 주장 아닌가? 그런데도 저들은 “사회연대전략을 비판하는 노조 활동가들은 비정규직을 위한 총파업을 하지도 못하고, 비정규직을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혁명 될 때까지 굶어죽으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냐”며, “관념적 과격성이다”느니, “무책임하다”느니 떠들고 있고, 기껏 비판이랍시고, “책의 옳고 그름을 떠나 현실성이 없다”고 떠들고 있다(이윤원 기자, “‘계급정당 추진 세력도 함께하자’ ―[인터뷰] ‘노동자정당 건설 추진위원회’ 한석호 전진 전 집행위원장”, <<참세상>> 2008. 4. 20.).
그리하여, 그들이 내놓고 지향하는 서유럽의 사민주의자들, 사민주의 정치집단이 그러한 것처럼, 그들의 정치적 계급성은 교활한 좌파 독점자본, 노동자계급을 정치적 포로로 장악하(고자 하)는 독점자본의 정치적 대표이다.
그러한 한 저들은 쉽게 사라지지도 않겠지만, 서유럽과 우리가 역사적․사회적, 특히 시대적 조건이 다른 만큼이나 저들은 서유럽 사민주의자들처럼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성공’할 수는 없다. 물론 결코 만만치 않은 도전이고 시련이어서 끊임없는 경계와 투쟁, 폭로를 전제로 하는 얘기지만 말이다.
한편, 잔여 민주노동당이 그 개량주의와 몰계급적 민족주의, 혹은 애국주의, 혹은 국민주의, 그리고 사민주의를 청산하고 노동자계급의, 혹은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으로 다시 날 가능성도 없다. 그리고 그러한 만큼 그 역시 커다란 도전이고 시련이다.
‘변혁 지향적’이라는 세력들 역시 대개는 심각한 도전 혹은 시련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들의 상당수는 이른바 ‘스탈린주의 비판’이라는 풍차와의 격투에 몰두하고 있는 나머지 주관적으로는 ‘코뮨주의’․객관적으로는 반공․반쏘주의라는 고질병을 앓고 있다. 대표적으로 여러 갈래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나 맑스주의를 자처하는 소위 자율주의자들, 혹은 ‘스피노자-맑스주의자들’이 그들이다.
또 다른 일부는 무원칙한 패거리주의적 기회주의에 병들어 있다. 예컨대 2004년의 이른바 탄핵 정국에서 소위 ‘민중탄핵’을 내걸던 자들의 다수가, 천박한 궤변과 지적 사기를 동원하여 신자유주의 노무현 정권을 옹호하는 남구현 교수 등의 반론에 부딪쳤을 때에 보여준 행태나 이후의 몇몇 행태가 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패거리주의를 조성하고 선도하는 이들 집단의 상층 지도부 인사들은 물론 정치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고, 따라서 신뢰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들 집단의 수많은 인자들은 사실 건강하고 변혁의 깃발을 놓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비판에 성실하지 않고 필시 가지고 있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층 인자들에 대한 의념(疑念)을 짐짓 묵살하면서 그들을 추종함으로써 스스로 대중적 신뢰를 무너뜨리면서 ‘조직 패권주의자들’이라는 비판을 사서 받고 있다.
길을 찾자
노동자계급운동, 노동(조합)운동 내부의 이러한 여러 조류의 도전과 시련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두 말이 필요 없는 당연한 명제이다. 그리고, 그것을 수행해낼 선도적 주체도, 논란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사실상은 누구인지 명백하다. 깃발을 놓고 있지 않은, 노동자계급운동 내의 선진 활동가들이 그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종교 지도자들이나 의지주의자들에 의해서 많이 닳고 또 그 만큼 오염된 표현이지만, 아무튼 그들 선진 활동가 분자들이 ‘씨앗이 되고 소금이 되어’ 도전과 시련과 선도적으로 싸우면서 그것들을 타개해나갈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이다.
참으로 무척 어려운 문제이다. 물론 극히 추상적으로야 방안을 얘기할 수 있겠지만,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라는 요구 앞에서는 참으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더구나 조직적․대중적 실천이라고 하는 데에서는, 그러한 실천의 현장에서는 한 발 물러나 있고, 또 물러나 있을 수밖에 없으며, 또 그렇게 물러나 있어야 하는 연구소의 처지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보다 구체적인 방안’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필시 유토피아적, 즉 공상적일 것이다. 그 도전과 시련을 극복하려는 투쟁 과정 자체가 사실은 그 방안을 발견하고 구체화해가는 과정 그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가장 추상적인 방안․원칙은 이런 것일 것이다. 즉, 현상(現狀)을 부정하며 투쟁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 대중, 그렇게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저들에 의해서, 자본주의에 의해서 강요받고 있는 노동자 대중과, 그들의 잠재력을 신뢰하고, 그에 의거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그 방안․원칙이다.
하나마나한 상투어, 공문구라고?
그러나 지금까지 운동이, 활동가들 자신이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 강단 지식인들, 사실은 운동에 소부르주아적 혹은 독점자본 좌파적 개량주의, 사민주의, 기회주의를 심고 전파하는 그러한 지식인들에 의해서 크게 휘둘려 왔고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상기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마나한 상투어, 공문구에만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휘둘려 왔고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부정한다면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말하자면, 어용지식인이나 한국노총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어용지식인의 문제는, 특히 신문․방송․강단의 교육 등을 통한 그들의 영향력과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그 영향력을 차단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 중요한 과제이지만, 어용지식인 집단 내부에서 우리가 할일은 전혀 없다. 그만큼 여기에서의 언급도 생략하자.
그러나 한국노총의 문제는 그렇지 않다.
그 간부들, 그 지도부가 절대로 구제불능의 어용 그 자체, 독점자본의 반동적 앞잡이라는 것은 그 태생에서부터의 성격이고 운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좀 심하고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한국노총은 해체되어야 한다!”, “한국노총은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해체의 대상일 뿐이다!”라고 거듭거듭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너무나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히 그 노총, 그 산하 노조들에 조직되어 있는 노동자 대중들을 방기하는 것이고, 그만큼 운동에 무책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노총이 해체 대상이면 해체 대상일수록 그만큼 더 그 조직 대중 속에서 그 해체와 대중의 획득을 위한 작업을 하고 강화해야 할 것이고, 그러한 작업을 조직적으로 수행할 적극적인 전략과 전술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동안 민주노총의 지도부가 몇 차례 취해왔던 것과 같은, 한국노총과의 무슨 명목이든지 간의 ‘연대’, 그것은 노동자 대중을 혼란시키고, 비록 부분적이지만, 한국노총에 근거 없는 존재의의만을 부여하는, 가장 타기해마지 않으면 안 될 실책이다. <노사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