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소를 병들게 하는가
소는 초식동물이다. 그런데 동물성 사료를 먹여서, 병에 걸렸다. 그리고 광우병에 걸린 소를 사람이 먹고 인간 광우병에 걸렸다. 또 그 소를 다른 가축, 돼지, 닭 등에게 먹여 광우병이 전염된다. 이들 가축을 사람이 먹고, 또 소에게도 먹인다. 먹이사슬을 따라 광우병이 돌고 돈다.
그렇다면 광우병을 막는 방법은 간단하다. 소에게 풀만 먹이면 된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소에게 돼지, 닭의 내장과 뼈, 고기로 만든 사료를 먹이고, 또 돼지와 닭에게 소의 부산물로 만든 사료를 먹이고 있다. 왜 그럴까?
미국에서 쇠고기 생산(송아지를 낳고, 소를 기르고, 도축, 유통)은 거대한 자본이 담당하고 있다. 소를 비좁은 공간에 가두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토지비용을 절약하고, 살을 찌우기 위해서이다. 사육장을 깨끗하게 하는데 들이는 비용보다는, 분뇨 위에서 뒹굴게 하고 항생제를 주사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이윤을 빨리 회수하여 재투자하기 위해서는, 소의 성장을 촉진하여 출하시기를 앞당겨야 한다. 그래서 성장호르몬을 주사하고 동물성 사료를 먹인다. 송아지에게 소의 피를 먹인다. 시장에서 경쟁자를 몰아내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더 값싼 쇠고기’를 생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더욱 많은 쇠고기를 더욱 빨리 생산하 는 것. 최대한의 이윤의 생산! 자본의 유일한 목표이며, 결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이기 때문이다.
미국대사 버시바우는 촛불집회를 비웃으며 “한국민은 과학을 더욱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소에게 고기를 먹이는 것이 그들의 ‘과학’이다. 소를 병들게 하고는, 뇌는 위험하다는 둥, 고기는 안전하다는 둥, 20개월까지는 안전하다는 둥, 30개월 이상은 위험하다는 둥 횡설수설한다. 이미 병이 든 소의 특정 부위를 두고 어떻게 안전을 장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그렇게 말한다. 소에게 풀을 먹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과학’은 이미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축산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과학은 자본의 시녀가 된 것이다.
누가 우리를 병들게 하는가
광우병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지난 4월 17일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이명박은 6월 6일 불교계 인사들과의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이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을 건의하자 “재협상을 요구하면 통상마찰 등으로 엄청난 문제가 생기며, 자동차나 반도체 등 주요수출품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매우 솔직하다.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해야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대의 자동차, 삼성의 반도체를 수출하기 위해서다. 바로 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해서다. 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광우병 위험이 있는 쇠고기도 먹어야 한다고 한다. 그는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다. 독점자본의 이익은 시민의 건강보다 우선한다고.
우리는 분노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고. 그러나 국가는 말한다. “국가는 독점자본의 이익을 보장해야 한다”고. 무엇이 진실일까?
지금 우리는 건강을 지키기 위해 국가와 투쟁하고 있다. 경찰의 물대포에 기절하고 곤봉에 머리가 깨지고 군홧발에 짓밟히고 걷어차인다. 연행되어 죄인처럼 재판정에 선다. 관료들에게 기만당하고 정치가들에게 무시당하고 배신당한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한다. 입법ㆍ사법ㆍ행정, 즉 국가권력은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주체이기는커녕 적대하고 있다. 그래서 국가를 무력화시키는 바로 그 만큼만 건강이 확보됨을, 국가란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극복해야 되는 대상임을 투쟁은 가르쳐주고 있다.
생산을 장악한 자, 그리하여 부를 소유한 자가 사회를 지배한다. 삼성이 ‘검은 돈’으로 정치가ㆍ경찰ㆍ판검사ㆍ관료ㆍ언론을 매수하고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러나 단지 ‘검은 돈’만이 문제가 아니다. 자본이 착취하고 소유한 부는 국가기구를 부양한다. 사회의 경제 전체가 몇몇 독점자본의 성장에 좌우되면서 이들 소수 자본의 흥망성쇠는 자본주의 사회 전체의 흥망성쇠를 좌우하고, 따라서 집권세력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한다. 집권세력이 자유주의적(노무현 정부)이든 극우반동(이명박 정권)이든, 혹은 유럽과 같이 사회민주주의 세력이든 단지 정치적 수사만이 다를 뿐, 성격은 같다. 때문에 정치권력, 즉 국가는 자본의 시녀, 즉 “비지니스 프렌들리”가 되는 것이다.
더 이상 빼앗기지 않겠다
이명박 정부와 그 ‘배후세력’인 독점자본은 광우병만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으라고 한다. 자본의 돈벌이를 위해서 강을 파헤쳐 대운하를 만들겠다고 한다. 수돗물도 보건의료도 전기도 철도ㆍ지하철ㆍ고속도로도 모두 모두 자신들이 소유하겠다고 탐욕에 광분하고 있다.
국가와 자본은 10대들에게서 놀이와 휴식과 친구를 빼앗고 학업을 고통으로 만들었다. 20대에게는 노동을 박탈하여 나태를 강요하고, 30ㆍ40대는 전쟁 같은 강제노동과 실업의 공포로 옥죄고 있으며, 50ㆍ60대는 처리비용을 절감해야 하는 산업폐기물처럼 취급한다.
이것이 바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실체이다. 어떤 이는 주장할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 국가가 덜 돼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를 위해서 더 투쟁해야 한다고.
그러나 축산기업의 이익을 위해 광우병의 실체에 대해 국민을 속이고, 결국 인간 광우병을 만연시켰던 영국도 민주국가요, 동물사료를 소에게 먹이는 것을 금지하지 않아 국민을 광우병의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는 미국도 어엿한 민주국가이다. 의회민주주의 모국인 영국, 대통령 중심제의 전형인 민주공화국 미국이 그러하다. 그런가 하면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의 모국인 프랑스 또한 한 해가 멀다하고 인민들의 시위와 소요, 총파업이 터져 나오고, 역시 어김없이 바로 그 민주공화국의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그래서 독일의 시인 브레히트는 물었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 그런데 나와서 어디로 가지?
“국민으로부터 나온 모든 권력”은 모두 다 자본의 품에 안긴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같은 역대 파쇼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자유주의 정부인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권 또한 그랬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이미 확인했다. 이명박 정부가 우리의 건강과 독점자본의 이윤을 교환하고, 우리의 요구에 몽둥이로 답하는 것은 바로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자유란 오직 자본의 자유, 사업의 자유, 착취의 자유일 뿐이요, 민주국가란 자본가계급의 독재의 다른 이름일 뿐임을 다시 확인하자.
‘축제’가 아니라 ‘전투’를 지휘하는 지도부가 필요하다
지난 5월 2일 중고생들의 청계광장 촛불집회로 시작된 저항은, 24/25일 거리시위로 발전했고, 5월 31일/6월1일 폭발하였으며, 6월 6/7일 다시 거대한 투쟁을 보여주며 거침없이 전진하고 있다. 참여자들도 전계급적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투쟁의 구호는 “광우병쇠고기 협상무효”에서 “대운하 반대”, “0교시 수업반대”, “건강보험민영화반대”, “물사유화 반대”, “공공기업 민영화 반대”, “대학등록금 인상반대” 등 다양화되었다. 그리고 “이명박 퇴진”으로 하나로 모아졌다.
대중들의 투쟁은 사실상 지도부가 없이 진행되었다. 광우병국민대책회의는 5월 24/25일 투쟁이 거리시위로, 이명박 퇴진투쟁으로 상승하자 이미 투쟁의 지도력을 잃어버렸다. 누구에게 통제받지도 지도받지도 않는 대중들은 운동을 급격히 고양시켰다. 지도부의 부재는 운동의 질곡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의 자발성과 추진력을 마음껏 폭발시키는 조건이 되었다. 적어도 5월까지는 그랬다. 소부르주아들은 이러한 현상을 대중이니 다중이니, 혹은 탈근대니 어쩌니 하면서 아첨을 떤다. 단지 운동 초창기의 미성숙의 표현일 뿐인 현상을 숭배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나타났으며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시위대는 조직된 힘으로 무장된 힘으로 보호되지 못한다. 맨손으로 맨몸으로 부딪치고 깨진다. 수천의 대오도 순식간에 침탈당하고 흩어져 버린다. 언제 전진하고 후퇴할지, 어디를 어떻게 타격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며 에너지를 소진한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된다면 지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더 중요한 데에 있다. 바로 투쟁 속에서 구축되는 지도부, 헌신적인 선진적 투사들의 조직은 현재의 투쟁을 내용적으로 조직적으로 발전시킬 뿐 아니라 투쟁이 일단락되면 정치적 성과를 대중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주체가 된다.
축제가 아니라 투쟁을 지도할 지도부가 필요하다.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청와대로 진격을 지도할 전투 지휘부가 필요하다. 우리는 광범한 대중의 참여를 끌어내어 우리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투쟁을 결의하는 ‘축제’로 얻을 것은 이미 다 얻었다. 이미 대중은 축제가 아니라 성과를, 승리를 원하고 있다.
이명박은 비록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재협상불가”를 고수하며 버티고 있다. 그는 시간을 끌고 있다. 언론을 동원하여 “비폭력” 운운하며 폭력투쟁을 금기시하고 “축제”를 긍정적으로 부각시키는 여론을 유포하고 있다. 축제 수준에서 대중들의 투쟁을 통제하면서, 선도적 투쟁부대는 경찰력으로 타격을 주며, 대중들이 서서히 제풀에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직 공세의 주도권은 우리가 쥐고 있고 저들은 수세에 몰려있다. 그러나 방심은 곧 죽음이다. 과감하게! 과감하게! 더욱 과감하게! 이것만이 목전에 와 있는 승리를 움켜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노동자계급의 (총)파업투쟁이 승부를 결정할 것이다
1개월이 넘게 치열한 공세가 전개되고 있고, 정권은 이미 불구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쓰러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움츠린 상태에서 역습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저들의 권력은 유지되고 있다. 왜 그런가?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라는 말이 있다. 그럴까?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말보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자. 그러면 총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총을 든 사람도 먹고 입어야 힘을 쓰는데 그것은 또 어디에서 나오는가? 바로 생산을 장악한 (독점)자본이다. 우리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경찰도, 검찰도 이명박 정권도 바로 생산을 장악한 독점자본이 먹여 살리고 있고, 그들에게 의지하고 있다. 권력은 독점자본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들의 지지와 지원이 있는 한 이명박의 권력은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명확하다. 바로 이명박의 “배후세력” (독점)자본을 공격하는 것이다. 자본의 생명줄인 이윤을 공격하는 것이다. 바로 파업투쟁을 통해 공장을 멈추는 것이다.
공공부문 사유화반대투쟁, 구조조정반대 투쟁, 비정규직 정규직화투쟁, 임금인상투쟁, 화물노동자의 경유값 인하투쟁 등 모든 가능한 영역으로, 노동과 자본과의 전선을 전국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지금의 문제는 ‘민주주의냐 독재냐’의 문제가 아니다. 건강문제를 쟁점으로 독점자본의 대변자인 이명박 정권과 거의 전계급의 충돌이다. 그리고 이미 대중들의 삶 전체를 옥죄고 있는 자본가국가ㆍ자본을 한편으로 하고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과의 투쟁으로 발전했다. 즉 독점자본과 민중들의 투쟁이 그 본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공장에서의 파업투쟁은 거리에서 투쟁하는 대중들과의 공동의 전선이 되며, 저들의 대응역량을 분산시키며 정권과 자본을 압박ㆍ포위하여 항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공공부문의 사유화반대투쟁은 정권과 자본을 동시에 타격하면서, 정권퇴진투쟁으로 이미 상승해 있는 대중투쟁과 직접 결합할 수 있는 핵심고리가 되고 있다.
정치권력의 심장부인 서울의 광화문ㆍ청와대로 진격하는 것, 한국사회의 실질적인 권력이며 경제권력의 심장부인 독점자본을 파업투쟁으로 무력화시키는 것. 이것이 승리에 이르는 가장 곧고 빠른 길이다.
우리의 투쟁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자본과 국가의 탐욕은 전계급을 공격하고 그들의 분노와 투쟁을 강요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다. 시위대가 청와대를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물사유화를 추진하겠다 하고 대운하건설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이러한 광적인 탐욕은 저들의 자신감의 표현도 아니고 강력함의 표현도 아니다. 바로 위기의 표현이며 절망의 몸부림이다.
지금 폭발하고 있는 대중들의 분노는 단지 “광우병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10년 넘게 가혹하게 지속된 신자유주의 공세 하에서 축적된 고통과 분노가 광우병이라는 분화구를 통해 분출되고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독점자본은 사회의 모든 부를 게걸스레 빨아들이고 모든 시민들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무한 생존경쟁에 몰아넣었다. 이제 반격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발 공황이 이미 세계적으로 번져가고 있다. 원자재 값, 식량 값이 폭등하며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나고 있다. 아이티에서는 식량난으로 진흙을 구워먹는다고 보도된다. 시위와 폭동도 세계전역으로 번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세계공황이 시작에 불과한 만큼 투쟁도 시작에 불과하다.
지금 한국에서 무모할 정도로 몰아치는 자본과 정권의 공세의 배경에는 세계공황이 있다. 그 영향으로 독점자본이 압박을 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앞으로 공황이 심화되면 될수록 저들은 더욱 광분할 것이고 노동자계급과의 대격돌은 불가피할 것이다.
우리는 알았다. 투쟁 속에서 하나라는 것을. 적대와 경쟁은 거짓이고, 자본과 권력의 이간질이라는 것을. 굽혔던 허리, 꿇었던 무릎을 펴고, 자신의 키높이에 감동하고 있다. 우리의 목소리는 세계를 흔들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위대한가!
이미 우리의 투쟁은 세계가 놀라고 주목하고 응원하고 있다. 사람은 진흙을 먹고 소는 고기를 먹는 세상, 자본의 탐욕이 낳은 이 기막힌 세상의 변혁을 향해 더 나아가야만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파열구를 내려는 세계민중들의 투쟁에 우리는 선봉에 설 수 있다. <노사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