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재 가치 논쟁과 경제학의 혁명

정보재 가치 논쟁과 경제학의 혁명


최근 수 년 간 벌어진 이른바 ‘정보재 가치 논쟁’은 지난해 7월에 한신대 출판부에서 그 주요 논문들을 한 권의 책1)으로 묶어냄으로써, 그리고 특히 금년 초 우리 연구소 강성윤 회원의 학위논문2)이 발표됨으로써, 부분적으 로 미진함은 있지만, 대략 마무리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에 발표된 2편의 글은 그러한 생각이 다만 아직도 물정을 모르는 나의 주관적 소망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간의 ‘논쟁’은 사실은 20세기 후반 이후 장기간의 반동의 시대에 전개된 경제과학 상의 위대한 혁명의 표현이자 성과였음을 새삼 다시 깨닫게 해주었다.

국민대 조원희 교수는 한신대 출판부가 간행한 ��정보재 가치논쟁��에 대한 ‘서평’에서 “이 책의 의의와 특징”을, 따라서 그 논쟁의 의의와 특징을 이렇게 정리한 다.


첫째, 정보재와 관련하여 주요 이론적 문제에 대한 진전이 발견되며 이 업적은 외국에는 없는 것으로 상 당히 가치 있는 성과이다. 둘째, 논쟁과정에서 ��자본론�� 3편의 주 요 가치 및 분배범주의 성격과 그 활용 가능성이 많이 밝혀지는 성과가 있었다. 자본론 3권은 초고 에 불과하며 상당정도 미완성 상태이다. 그럼에도 보다 구체적인 현실분석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이론적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데 정보재가 제기하는 가치론적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상당정도로 이론적 진전이 이루어지는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셋째, ...3)


그런데 우선 여기서 조 교수가 “주요 이론적 문제에 대한 진전”, 혹은 “업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 은 필시 아래에서 내가 “논쟁의 혁명적 내용과 성과”라고 부르는 것들일 것인데, 그러한 “업적 은 외국에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은 부주의한 판단의 소치일 것이다. ‘정보재의 가 치․가격은 지대론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한다’는 자신들의 혁명적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강남훈 교수가 미국의 하비(D. Harvey)를 인용한다든가4) 박 성수 교수가 그들의 독일의 기라성 같은 ‘맑스주의 경제학자들’을 인용하고 있는 것5)만을 보더라도, 그러한 혁명 혹은 “업적”은, 한국에서의 이 번 논쟁에서처럼 명확하고 집중적인 형태로는 아니지만, 외국에서도, 물론 장기간의 반동기라는 조 건을 반영하여, 꽤나 전개․축적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우 리는, 저들이 이룩한 경제과학의 혁명을 통해서 어떻게 “초고에 불과하며 상당정도 미완성 상태” 인 ��자본론�� 3권의 “주요 가치와 분배범주의 성격과 그 활용 가능 성이 많이 밝혀지는 성과가 있었”고, “상당정도로 이론적 진전이 이루어지는 성과를 얻었”는지 볼 것이다. 그런데 사실 고매하기 그지없는 인품으로 겸손하게도6) “업적”이니, “이론적 진전”, 혹은 “성과”니 하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혁명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론적 “업적” 혹은 “진전” 혹은 “성과”란 다름 아니라 그들이 언급하고 인용하고 있는 ��자본론�� 3권의 관련 이론, 관련 범주, 관 련 정의, 관련 개념을, 즉 고전파 경제학으로부터 맑스경제학으로 이어져온 그것들을 정면에서 철 저하게 (요즘 ‘지식인들’이 좋아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전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 글을 쓰는 것은 경제과학의 이 위대한 혁명의 내용과 성과를, 그 대강을 강호제현과 간략히 공 유하기 위함이며, 저 놀랍고도 위대한 혁명가들과 그 업적을 길이 찬미하기 위함이다.



혁 명의 제1의 내용과 성과


이번의 논쟁 과정에서 저들이 명확히 한 혁명의 첫 번째 내용과 성과는 지대 개념, 지대 범주를 “토지소 유의 실현”이라는 맑스적, 시대착오적 규정으로부터 해방시켜 ‘확장’한 것이다.

여기에 서 혁명의 대상이 된 맑스의 지대에 관한 수많은 언명 가운데 두어 개만 인용하자면, 이렇 다.


자본― 이윤(기업자 이득 + 이자), 토지―지대, 노동―노임, 이것은 사회적 생산과정의 모든 비밀을 포함 하고 있는 삼위일체적 형태이다.7)


자본― 이자; 토지소유, 지구의 사적소유, 그것도 근대적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상응하는 그것―지대; 임금노동―노임. 그리하여 제 수입의 원천들과의 관련은 이 형태 속에 있어야 할 것이다.8)


추호의 애매함도 없이 맑스는 ‘지대의 원천은 토지소유’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맑스나 엥겔스 , 혹은 레닌 등등의 맑스주의의 창시자나 그 계승자의 저술 어디에서도 이에 반하는 서술은 결단코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 모두 이번의 경제과학의 혁명의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리하 여 논쟁 과정에서 카멜레온이 몸의 색깔을 바꾸듯이 그 주장을 바꾸어 가는 놀라운 기예를 보여준 충남대의 류동민 교수는, 이전에도 누차 지적한 것처럼, 이렇게 말한다. ― “토지소유와 무관한 정보재에 지대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채만수)은 맑스의 ‘자본론’만을 통해 경제 학을 공부한 이들이 경제학적 개념에 낯선 나머지 흔히 범하는 실수 중의 하나로서 일종의 해프닝 같은 것”9)이라고!

헛소리 를 하는 재주, 사기를 치는 재주도 이 정도 재주면, 오늘날 이 사회에서 경제학 교수를 해먹기에 충분한 재주, 그것도 정색을 하고 정보재의 가치․가격의 문제를 “정치경제학” 혹은 “맑스 의 가치론”에 기초해서 설명하겠다고 나서며10) 진보적 교 수로 그 명성을 날리기에 충분한 재주이다. 마치 ��자본론�� 이외의 다른 저술에서는 맑스가 토지소유와 무관하게 지대를 규정하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그러나 책임 질 일은 만들지 않기 위해서 명시적이지는 않게 사기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를 향해서 이렇게 썼다. “그가 맑스 경제학에서의 지대 개념은 ��자본론 ��에서의 그것보다 넓다거나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양이 아닌 한”11) 그 따위 소리는 해서는 안 된다고!

류 교수 본인이나 수많은 점잖은 교수나리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독자들까지도 그를 ‘지적 사기꾼’으로 몰 고 있는 나의 ‘막말’, 그러한 서술에 대해서 분노하고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문제는 간단하다.

가장 바 람직한 길은, 류 교수가 자신의, 그리고 류 교수가 아니라도 그 누구든 그의 그 사악하기 그지없는 주장이 결코 사악한 것이 아님을 “맑스의 가치론”에 기초하여 입증하면 된다. 그러면 ‘지적 사 기꾼’은 그가 아니라 바로 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류 교수님에게 나의 용서 받지 못할 죄악을 백배 천배 사죄함은 물론, ‘보너스’로 이 세계를 아예 영원히 떠날 것이 다.

남은 길 은 그가 진실을 밝히며 자기비판을 하는 것이다. 그것 역시 그에게는 영광스러운 길이겠지만, 지금 까지의 그의 행장(行狀)에 비추어 그다지 기대할 바는 못 될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맑스는, 그리고 내가 아는 한의 맑스 경제학은 지대를 토지소유의 실현으로서만 규정하고 있는데, 저들은 토지소유와는 무관한12) 정보재의 가치 ․가격을 지대론으로서 설명하는, 경제과학의 위대한 혁명을 이룩하였다.13) 강남훈 교수, 박성수 교수, 류동민 교수, 이채언 교수 등 이 그 빛나는 혁명가들이다.

게다가 조원희 교수는, 그 자신이 직접적으로 정보재의 가격을 지대론으로 설명하진 않지만, 그 혁명의 전 통을 이어받아 다음과 같이 극한으로까지 그 혁명을 발전시켜 “소수의 개인이 가진 특별한 능력” , “노동자간 임금의 차액”도 “차액지대”, 즉 지대로서 규정하고 있다. 그는 말한 다.


차액지 대 개념은 반드시 농업 부문에 국한될 이유는 없으며 다만 자본(및 자본이 통제하는 노동)이 창출 하지 않은 것에 확대 적용될 수 있다는 강남훈 교수의 주장은 타당하다고 본다. 나는 대표적인 것 이 소수의 개인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Marx를 따라 가치는 사회적인 평균적 노동시 간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은 같은 강도로 1시간 일하여 그 몇 배(예를 들어 2배) 가치 를 생산한다. 자본간 경쟁 뿐 아니라 노동자간 경쟁도 고려하는 자본론 3권의 수준에서 이 가치의 차액은 노동자간 임금 차이로 나타난다. 이 경우 그가 받는 임금의 차액은 다른 어떤 논리로도 잘 설명되지 않으며 그냥 차액지대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14)


“... 임금의 차액은 ... 그냥 차액지대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브라보! 브라보!

경제과 학의 혁명이 여기에 이르면 나는 그저 저 위대한 혁명가들과 함께 하늘을 이고 사는 영광을 송구스 러워 할 뿐이다.

그리고 조 교수의 위 서술에서는 그가 ‘노동자의 임금이란 그 노동의 대가’로서 ‘임금은 그 노동의 성 과에 따라서 지불되는 것이고 그렇게 지불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도, 그러한 그의 임금 론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게다가 그 노동의 성과는 그들 노동자들이 가진 ‘능력’의 차이에 따른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저임금에 신음하고 있는 것 은, 그에 의하면, 다름 아니라 그들 자신의 무능력 탓이다!

다만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차액지대 개념은 반드시 농업 부문에 국한될 이유는 없으며 다만 자본(및 자 본이 통제하는 노동)이 창출하지 않은 것에 확대 적용될 수 있다는 강남훈 교수의 주장은 타당하다 고 본다” 운운함으로써 마치 자신들의 상대 논객이 “차액지대의 개념은 반드시 농업 부문에만 국 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처럼 제시하지만, 그것은 그들 기사들이 돌진하는 풍차일 뿐, 현실의 적이 아니다.



조 원희 교수의 “정보재 가치의 일반공식은 생산가격+독점이윤이며 일반 독점가격 공식과 차이가 없 다”


무애(无 碍)의 기개, 즉 거침없이 나아가는 기개(氣槪)야말로 어쩌면 혁명가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자질의 하나일지 모른다. 조원희 교수도 역시 바로 그러한 무애의 기개를 타고난 사람인 것 같다. 그는 나 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자신(과 조복현 교수)의 과거의 논의에 ‘아무튼’ “오류가 포함되어” 15)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도 사실은 “특별잉여가치 ”의 개념과 같은 경제학의 극히 기본적인 개념, 기본적인 범주와 관련된 오류인데도, 그러한 오류 를 범했음을 부끄러워하고 자중하는 대신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당시에 잘못 표기한 것”이며 “ 불필요한 혼란을 야기한 점 사과한다”는 식으로 눙치면서, 한편에서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나의 문필에 고매한 훈계를 늘어놓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경제학이라는 과학의 영역”에서도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담이 지만, 그리고 독자들에게는 조금 성급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레닌 이후 자주 사용된, 사람을 검열하고 사상적 딱지를 붙이는 태도도 일부 발견되는데 이는 정치경제학이라는 과학의 영역에서는 불필요하며” 운운하는 참으로 고마운 훈계에 대해서는, 한 “비상히 저명한” 부르주아 “저술가 ”를 가리켜 맑스가 ―레닌이나 그 후대의 사람이 아니라 맑스가― 했던 말을 원용함으로써 간접적 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다. 다름 아니라, ‘정치경제학이라는 과학의 영역’에서의 그대들의 모든 혁명,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행복감을 느끼는 부르주아적 백치증이다!”16)라고.

아무튼, “정치경제학이라는 과학의 영역”으로 돌아가면, 그는 무애의 기개로 이렇게 말한다.


정치경 제학에서는 재생산비용은 어디까지나 평균생산비용을 의미한다.17)


여기까 지야 크게 틀리지 않은 ‘풍월’이기 때문에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이 없다. 그런데 그에 이어서 무 애의 기개는 이렇게 발휘된다.


문제는 독점, 심지어 과점의 경우 이 비용이 가격결정에는 작용하지 않는 것이고 적어도 순수 시장가격에 관한 한 신고전파 경제학의 독점이론이 더 설명력이 있는 이론을 제공하고 있다. 정치경제학이 시 장가격의 동학에 관한 연구에 있어 채소장이 매도해 마지않는 부르주아 경제학에 비해 턱없이 이론 적으로 빈곤한 것이 사실이다. 독점가격 결정에는 분명히 한계비용이 작용하며 신고전파에서 이점 을 배울 것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를 참조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18)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예컨대 특별잉여가치라는 기본 개념, 기본 범주와 관련해서조차 ‘오류’를 범할 만큼 그는, (그가 “정치경제학”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맑스 경제학, 즉 경제과학에 대해서 무지 하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오류’ 운운하면서도 자신의 무지를 인식조차 하고 있지 못하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무지를 반성하고 자중하는 대신에, 대가(大家)의 눈으로 ‘정치경제학’을 조 망(鳥望)하면서, 즉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점잖게 가르치려든다. “순수 시장가격에 관한 한 신고전 파 경제학의 독점이론이 더 설명력이 있는 이론을 제공하고” 있고, “정치경제학이 시장가격의 동 학에 관한 연구에 있어 ... 부르주아 경제학에 비해 턱없이 이론적으로 빈곤한 것이 사실”이며 “ 독점가격 결정에는 분명히 한계비용이 작용하며 신고전파에서 이점을 배울 것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를 참조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완전한 행복감을 느끼는 부르주아적 백치증!)

조 교수 께서 위 인용문에 달고 있는 각주는 더욱 흥미롭다. 길지만 그대로 인용하자.


이론[ “부르주아 경제학” 혹은 “신고전파”를 가리킬 것이다: 인용자]은 현실을 해석하고 인과관계에 근거한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부르주아 경제학은 효용이론으로 현 실을 해석(파레토 효율 기준)하고 가격 결정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수요-공급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 다. 부르주아 경제학이 현실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이 때문에 메커니즘 설 명도 현실 옹호론적인 경향이 지배적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과 학의 한 가지 요건, 즉 메커니즘 규명의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정치경제학은 메커니즘을 설 명하는 문제에 있어 이론발전이 취약하다. 특히 자유경쟁 이외에는 설명 도구가 거의 개발되어 있 지 않다.19)


결국 ‘ 효용이론’이야말로 “가격 결정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과학”적인 “체계”이며, 맑스 경제학 은 경제학사상의 이 가장 반동적인 주관적 가치․가격론인 ‘효용이론’이 없어 “이론발전이 취약”하므로, 이를 “이를 참조하려는,” 사실은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유구무언!!!

각설하 고, 이제 정보재의 가치․가격에 관한 조원희 교수님의 논의 자체를 간단히 보자.

앞에서 말한 것처럼, 조 교수는 자신과 조복현 교수의 과거의 논의에는 “오류가 포함되어” 있었다며, 이 를 수정한다. 그의 논의는 우선 이렇게 전개된다.


자본이 창출하는 생산성에서 토지처럼 모방과 혁신이 절대로 불가능한 기술은 없으므로 우리는 독점, 과점 의 경우에도 생산가격을 정의하고 그 차액을 독점이윤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만 정의상 단일 독점 의 경우에는 특별이윤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달리 표현하면 특별이윤은 정의상 제로이다). 필자는 조원희․조복현(2002)에서 정보재 가격=생산가격+특별이윤+독점이윤이라고 규정했는데, 여기 에는 오류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 우선 생산가격은 <개별생산가격> 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당시에 잘못 표기한 것이다. 불필요한 혼란을 야기한 점 사과한다. 한편 특 별이윤을 포함시킨 이유는 당시 우리 두 사람은 정보재를 정보 산업 전체가 생산하는 제품으로 광 의로 정의하여 H/W, S/W, 정보서비스 등을 포괄하였고, 이 경우 일반적으로는 경쟁이 지배하기 때 문이다.20)


훌륭하 다, 참으로 훌륭해!

우선, 그가 여기에서 “오류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학자적 양심으로 고백’하며 문제 삼고 있는 “특 별이윤”은 원래의 글에서는 “일시적 초과이윤(즉, 특별잉여가치)”였다. 당시 그의 논의를 그대 로 옮기면 이렇다.


정보재 의 가격(P)는 다음과 같이 일반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P=MV+Pm=PoP+TSV+PM

  단,      MV=시장가치(또는 사회적 가치)

    PoP=평균이윤을 포함하 는 생산가격

    TSV=일시적 초과이윤(즉 , 특별잉여가치)

    * 정의상 MV=PoP+TSV임

    Pm=독점이윤21)


즉, 여 기에서 그가 ‘오류’를 “수정”하고 있는 “특별이윤”의 문제는 ‘특별잉여가치’의 문제인 것 이다. (그것이야 아무래도 좋다.) 그리고 그가 ‘학자적 양심’으로 ‘오류’를 고백하고 “수정” 할 때 독자들은 그가 이제는 그 오류를 바로잡았구나 하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서도 보는 것처럼, 그 기초적인 오류를 바로잡기에는 그는 너무나도 교수스러웠다. “정의상 단일 독점의 경우에는 특별이윤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달리 표현하면 특별이윤은 정의상 제로이다)”라거나 “일반적으로는 경쟁이 지배하기 때문”에 어떤 상품 일반에는 특별이윤, 즉 특 별잉여가치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아직도 전혀 특별잉여가치를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 이다.22)

그리하 여 그는, “시장가치 혹은 사회적 시장가치(MV)가 평균이윤을 포함한 생산가격(PoP)과 일시적 초과 이윤 즉 특별잉여가치(TSV)의 합이라는 것도 ‘정의상’ 합당치 않다”23)는 나의 비판은 우이독경이라는 듯, 그의 ‘오류 수정’을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그런데 경쟁이 지배적이라면 독점이윤이 들어가면 안 되므로 이 정식은 ①경쟁적인 경우 생산가격(=개별생 산가격+특별이윤)으로 수정하고, ②과점적일 경우에만 오류가 수정된 일반 정식, 즉 <정보재 가 격=개별생산가격+특별이윤+독점이윤=생산가격+독점이윤>이 유지된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③독 점이 지배하는 경우 <협의의 정보재 가격=생산가격+독점이윤>이라는 정식을 도출하고 그 근 거를 제시했다.24)


그리고 이렇게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고고하게 문제를 해결하신 후, 조 교수께서는, 필시 무언가 켕기 는 게 있었던지, 다시 다음과 같은 점잖은 훈시로 글을 맺으며 도망친다. 정말 가소롭고도 가소롭 게도!


필자는 정보재 가격문제는 오히려 사소한 것이며, 좀 더 중요한 것은 정보화 혁명이 전 경제와 사회에 미 치는 영향, 즉 정보산업 이외의 분야에 미치는 영향과 전반적인 사회적 영향이 진정으로 중요한 문 제라고 생각한다. 향후 연구와 논쟁이 이 분야에서 활발히 전개되기를 기대해본다.25)


좋다. 다 좋다.

조 교수 의 결론은 결국, “정보재 가치의 일반공식은 생산가격+독점이윤이며 일반 독점가격 공식과 차이가 없다”26)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애초에 두 분 조 교수님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었다.


‘정보 재의 가격(P)'이 독점이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정보재’의 가격을 독점가격으로 규정하 는 것...[이며]... 이는 진실이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독점가격이란 “일반적 생산가격에 의한 가격에도, 생산물의 가치에 의한 가격에도 의존하지 않고, 단지 구매자의 구매욕과 지불능력에 의 해서만 규정되는 가격”27)이다. 그리하여 ‘정보재’의 가 격이 ‘독점가격’이라면, 그 구성과 관련하여 시장가치나 ‘평균이윤을 포함하는 생산가격’, ‘ 일시적 초과이윤’ 등은 ... 범주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두 분 교수는 그것 들이 독점이윤과 나란히 ‘정보재’ 가격의 범주적 구성요소를 이루는 것처럼 정식화하고 있다.28)


다시 말 하지만, 맑스는 독점가격이란 “일반적 생산가격에 의한 가격에도 ... 의존하지 않고, 단지 구매자 의 구매욕과 지불능력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가격”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독점가격이 독점가격인 것은 그것이 모름지기 일반적 이윤율의 형성, 이윤율의 평균화에 참여하지 않는 가격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도 경제과학의 혁명가로서의 그의 무애의 기개로 그는, 그와 관련하여 자신에 가해진 비판을 조금 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보재 가치의 일반공식은 생산가격+독점이윤이며 일반 독점가격 공식과 차 이가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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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더미를 여기저기 뒤적여봤을 따름인데도 악취가 진동해 더 이상은 못 견딜 지경이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올망정 서둘러 떠나자.



혁 명의 제2의 내용과 성과


이전에 도 말했던 것처럼, ‘정보재’ 혹은 ‘정보상품’의 가격이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가 그 전형적인 예로 상정하고 있는 MS사의 윈도우즈엑스피(Windows-XP)와 같은 소프트웨어의 경우 , 그 첫 번째 한 단위를 생산하는 데에는 비록 막대한 노동시간을 요하지만, 이후 동일한 제품을 생산하는 데에는 ‘사실상’ 어떤 노동시간도 요하지 않는데도, 즉 그 가치가 사실상 0으로 수렴하 고 있는데도, 그것들이 그것을 생산하는 데에 요한 시간보다 수백 배, 수천 배, 혹은 수만․ 수십만 배 많은 시간을 요하는 상품과 같은 가격, 즉 그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 그 가치 크기에 비해서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판매되고 있기 때문”이고, “이때 그 가치와 가격의 불 일치 혹은 괴리는 물론 자본주의적 경쟁에 의해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화됨으로써, 즉 일반적 이 윤율과 평균이윤이 성립됨으로써 발생한 그것이 아니(기)”29) 때문이다.

주지하 는 것처럼, 나는 그 정보재의 가치는 사실상 0이며, 그 가치보다 엄청나게 높은 가격은 이른바 ‘ 지적재산권’, 즉 국가의 폭력에 의해서만 보증되는 극히 작위적인 독점가격이라고 규정하였다.30) 그리고 지금까지 이 논쟁에 참여한 학자들 중에서 명시적 으로 이러한 규정을 승인하고 동의하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우리 연구소의 회원인 강성윤 박사 31)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는 논쟁에 참여한 강남훈 교수, 이경천 씨, 류동민 교수, 박성수 교수, 이채언 교수 등 모두는, “ 정보재 상품의 단위는 버전”이라는 둥, “알고리즘”이라는 둥, 혹은 “평균원리”가 어떻고, “ 강화된 노동”이 어떻고, 앞에서 본 것처럼 ‘지대’가 어떻고 하면서 마이크로쏘프트 사의 윈도우 나 오피스 등등 범용의 상업 쏘프트웨어의 엄청나게 높은 가격이 무언가 그에 상응하는 가치 실체 를 가진 듯이 주장해왔다. 그 터무니없는 “극히 작위적인 독점가격”을 그렇게 변호해 왔다. 그리 고 앞에서 논한 조원희 교수님께서도 물론, 그들의 행렬에서 행여 뒤떨어질세라, “정보재 가치의 결정단위는 카피(copy)가 아니라 버전(version)이다”32)고 초들고 나섰다.

뒤에서 그 이유를 밝히겠지만, 이 모두 역시 이 시대 경제과학의 위대한 혁명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러한 혁명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 연구소의 회원으로서 내심 향후 이 사회의 경제과학을 책임져 줄 중심인물의 한 사람으로 기대해온 김창근 박사마저 “평균 원리” 운운하고 나서지 않았다면, 더구나 그가 나의 논의를 내가 “연구개발노동이 비생산적이라고 주장”하고, “연구개발노동자들 은 상업노동[원문대로!]과 유사하게 ...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비생산적’ 노동자들”이라고 주장 했다는 듯이 곡해하고 나서지 않았다면, 나는 이 글에서 혁명의 이 측면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범용 쏘프트웨어의 가격이 마치 그에 상응하는 가치 실체를 가졌다는 듯이 논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글들은 다 그만 두더라도, 예의 ��정보재 가치논쟁��에 실린 나 의 2편의 글만으로도 그런대로 충분한 비판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조원희 교수의 글이 새롭 게 제출되었지만, 그 동안 논쟁의 전개에 비추어 보면, 그리고 앞에서 잠깐 지적한 그의 학문의 ‘ 혁명적’ 수준을 보아서도, 그에 대해서는 사실상 새삼스럽게 논급할 가치조차 없기 때문이 다.

물론 그 들이 나의 논의를 수용하고 안 하고는 그들의 문제, 그들의 자질의 문제이다.

아무튼 나는 여기에서, 논의의 진행을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주장을 재론할 생각이 없다. 김창근 박사가 제기하고 있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만, 그것도 가능한 한 간략히 논급할 것 이다.


1) 우선 김 박사가 그의 글 pp. 264 이하에서 내가 “‘상품의 가격은 한계비용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주 류경제학[즉,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 인용자]의 원리를 사실상 수용한다”고 주장하고, 나의 논의 가 “재생산 개념과 결합된 한계비용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에 대해서.

내가 상 품의 가격은 그 재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할 때, 그것을, ‘그 재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평균적 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말했다고 이해하는 대신에, ‘한계비용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말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주장이다. 김 박사가 나의 논의와 주장을 그렇게 이해하는 데에는 나의 논의와 주장을 오해하기에 앞서 필시 부 르주아 경제학의 ‘한계비용설’의 개념에 대한 오해도 개재되어 있을 듯한데, 나의 이 간단한 비 판에 맞서 김 박사가 필히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 말겠다고 나서면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러한 논쟁은 문제의 성격상 필시 불필요한 정력의 낭비로 끝날 공산이 큰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 에 여기에서는 일단은 나의 놀라움과 의문만 표시하는 것으로 하자.


2) 김 박사가 나의 논의를 “무가치-독점가격”으로 규정하면서 그 논의를 “마르크스가 언급한 ‘독점가 격’은 그 자체는 ‘가치’를 가진 고품질의 ‘포도주’의 가격으로 채만수의 ‘무가치물’의 가격 이 아니다”33) 운운하며 진행시키고 있는 데에 대해서.

이 역시 , “이것이 과연 김창근 박사의 글인가” 다시 눈을 씻고 보고 싶을 만큼 놀랍고 어이없 다.

논쟁 상 대 혹은 비판의 대상자가 의미하는 바를 적시하는 방식의 고약함 때문이다. 그는, 그의 글에서 ‘ 사실상’ 수도 없이 내가 그들 정보재의 가치를 “사실상 무가치” “사실상 0” 등등으로 서술하 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그것들을 ‘무가치물’ 그 자체로 간주하거나 주장하고 있 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우리 사회의 소위 학계와 또 ‘운동권’의 이데올로 그들, 논객들의 상당수가 나를 얼마나 살기등등한 눈으로 꼬나보고 있는가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 에 나는 김 박사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바로 그 글에 다음과 같은 각주까지도 달아둔 바 있다.


여기에 서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라고 할 때, 나는 거기에 어떤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생산적으로 소모되는 컴퓨터 등 불변자본에 응결되어 있어서 이번의 생산물에 그 가치를 이전하는 과거의 노동시간도 포함시킨다. 그리고 그 “생산에 ‘사실상’ 어떤 노동시간도 요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생산에 엄밀하게는 일정한 노동시간을 요하지만, 해당 상품 등이 판매되는 가격에 비하면 그것이 너무나도 미미하고 0 으로 수렴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일종의 수사(修辭)이다.34)


그런데 도 “마르크스가 언급한 ‘독점가격’은 ... 채만수의 ‘무가치물’의 가격이 아니다” 운운하다니 , 정말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이 같은 어이없는 규정이 진주의 모 교수님에게서 전염 된 병증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 병은 참으로 불치의 병, 죽음의 병이기에!

아무래 도 찜찜했던지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러한 놀라운 논의의 연장선에서 김 박사는 이번 에는 “마르크스는 ‘가치가 0에 가까운’ ‘무가치물’의 독점가격을 다룬 적이 없(다)”35) 운운하고 있다.

너무도 어이가 없기 때문에 우선 농담부터 하자면, “마르크스는 정보재의 가치나 가격도, 신자유주의도, 아니 예컨대 자동차의 가치나 가격도 논한 적이 없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하건대, 오늘날 퇴폐할 대로 퇴폐한 부르주아 세계에서 수백 밀리리터(ml) 한 병에 수 천만 원, 심지어 수억 원씩이나 한다는 “‘가치’가 있는 고품질의 ‘포도주’” 가격이야말로 상 대적으로 ‘가치가 0에 가까운’ ‘무가치물’의 독점가격이 아니겠는가? 혹은, 전지(全紙) 반 장 의 크기 정도밖에 안 되는 어떤 ‘명화’들은 그 가격이 수백 억에 이르기도 하는데, 이야말로 ‘ 가치가 0에 가까운’ ‘무가치물’의 독점가격이 아니겠는가? 김 박사의 대답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도 그는 과연 “마르크스는 ‘가치가 0에 가까운’ ‘무가치물’의 독점가 격을 다룬 적이 없다” 운운할 수 있을까?


3) 내가 “연구개발노동자들은 상업노동[원문대로!]과 유사하게 ‘가치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고,’ [그들은]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비생산적’ 노동자들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김 박사의 주장36)에 대하여.

이 복통 터질 주장에 다른 더 좋은 대응 방법이 있겠는가? 아무리 길더라도 그가 문제 삼고 있는 부분을 그 대로 인용하는 수 외에 말이다.

김 박사 가 문제 삼고 있는 부분은 일본공산당 계열의 마츠이시 가츠히코(松石勝彦, 1934년 생) 교수의 다 음과 같은 주장에 대한 나의 비판의 일부이다. 마츠이시 교수는 말한다.


쏘프트 웨어 생산회사가 판매하고 컴퓨터에 사용되는 쏘프트웨어는 그 자체 ‘쏘프트웨어라고 하는 정보’ 라고 불리지만, 이 쏘프트웨어는 어엿한 상품(れっきとした商品)이다. 그것은 자본 아래에서 상 품으로서 생산되고, 일정한 가격으로 판매된다. 그것은 사용가치와 가치를 가지고 있고, 양자의 통 일이다. 쏘프트웨어에는 그것을 생산하는 노동자(씨스템 엔지니어, 프로그래머 등)의 노동이 대상 화되어 있고, 이 노동자는 가치를 생산한다. 이 노동자는 자본주의적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이기 때 문에 단지 가치만이 아니라 사용가치도 생산한다.

현실적 으로, 예컨대 피씨(PC)나 워드프로쎄써로서 사용하는 쏘프트웨어가 10만 엔이라는 가격으로 판매되 고 있고, 또 오락기의 각종 게임 쏘프트웨어가 시장에서 5000엔이라는 식의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 다. 이들 쏘프트웨어가 상품이 아니라 무엇일까? 쏘프트웨어를 공짜로 복사하는 것은 명백히 저작 권법 위반이고, 도둑질과 같다 (최근 IBM과 히타치, 후지츠의 쏘프트웨어 분쟁을 보라). 설령 쏘프 트웨어를 공짜로 복제하기 쉽다고 하더라도 오리지날한 쏘프트웨어는 상품이고, 가치를 가지고 있 는 것이다.37)


우리 사 회의 경제과학의 혁명가들처럼 ‘지대’ 운운하고 있진 않지만, 이는 명백히 또 다른 (물론 나의 규정이지만) “극히 작위적인 독점가격”으로서의 범용 쏘프트웨어 가격의 변호론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쏘프트 웨어가 가치와 사용가치의 통일이라는 마츠이시 교수의 논의 중에서 우선 주목할 부분은 그가 [노 동가치론 전문가로서의] 그 관록에 어울리게 쏘프트웨어가 “자본 아래에서 ... 생산되고” 그것을 생산하는 “노동자는 자본주의적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이기 때문에 단지 가치만이 아니라 잉여가치 도 생산한다”고, 즉 그 노동자들이 잉여노동을 착취당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부분이 다.

그가 그 노동자들이 자본 아래에서 잉여노동을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중요하 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을 하면서 그는 이론적으로 극히 중요한 두 가지 사항을 간과했다.

첫째는 , 자본주의적 기업에 고용되어 잉여노동을 착취당한다고 해서 그들 노동자들이 모두 다 가치나 잉 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예컨대 상업자본에 의해서 고용되어 있는 상품 의 판매노동자나 부기노동자(簿記勞動者)들은 자본주의적 기업에 고용되어 자본 아래에서 노동하고 그 잉여노동을 착취당하지만, 그들이 가치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씨스템 엔 지니어나 프로그래머 등 쏘프트웨어를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기업에 고용되어 잉여노동을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쏘프트웨어가 ‘가치와 사용가치의 통일’이고, 따라서 이를 공짜 로 복제하는 것은 도둑질과 같다고 말할 충분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

물론 자본에 의해서 고용된 씨스템 엔지니어나 프로그래머 등의 노동자는 가치를 창출하고 그리하여 잉여가치를 착취당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쏘프트웨어의 가치․가격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문자 그대로 절대적으로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든가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다. 10만 엔이나 5000엔이라는 식의 가격에 비하면 그 가치가 너무나 작아서 사실상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고 하는 것이 범용 쏘프트웨어와 같은 “정보재는 사실상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진의(眞意)이다. ‘사실상’이라고 하는 부사를 구태여 동원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을 마츠이시 교수는, [그리고] “정보재 역시 가치를 가지고 있 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쏘프트웨어를 공짜로 복제하는 것은 명백히 저작권법 위반이고, 도둑질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 그 러면 그토록 관록 있는 맑스경제학자조차 그렇게 말하도록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요괴는 무엇일 까?

그것은 정말 역설적이게도 쏘프트웨어 혹은 정보재의 가치․가격을 문제삼도록 만든 애초의 문제의식 그 자체이다. 혹은 그 정보재가 “어엿한 상품(れっきとした商品)”, 그것도 고가의 상품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하면, 그 재생산에는 사실상 어떤 비용이나 노동도 들지 않는데, 그리고 그것이 누구나에 의해서 그것도 완벽하게 재생산(복제)될 수 있는데, 바로 그러한 재화가 “어엿한 상품”이며, “자본 아래에서 상품으로서 생산되고, 일정한 가격으로 판매된다” 고 하는 사실 그 자체이다. 해명 대상이 너무나도 강력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독점자본의 그러한 위 력 앞에서 해명하려던 문제의식 자체가 압도되어버린 것이다.38)


이렇게 참으로 긴 해명(=인용)을 보고서도 내가 “연구개발노동자들은 상업노동과 유사하게 ‘가치나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비생산적’ 노동자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다만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가 만일 “... 두 번째 단위를 생산하는 데에는 첫 번째 단위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단위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연구개발노동’은 필요하지 않다는 채만수의 논리적 모순”39) 등과 같은 풍차에 계속 돌진하려든다면, 그 기사적(騎士的 ) 기개를 내가 어찌 감당하겠는가?!

이와 관 련하여 참고로 언급하자면, 강성윤 박사는 “연구개발노동은 결코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40)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한다.


새로운 기계, 새로운 발명은 최초의 생산에는 매우 큰 비용을 요구하지만, 그것을 재생산하는 데에는 훨씬 적은 비용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첫째, 보편적 노동이 더 이상 필요하 지 않기 때문―또는 맑스의 표현대로라면, ‘하나(보편적 노동)가 다른 하나(공동노동)로 이행’하 였기 때문―이다. 즉 연구개발노동은 두 번째부터 생산되는 상품에 결코 가치를 부가하지 않으며, 자연력 등과 같이 자본가에게 아무런 비용도 들이지 않는다.41) 둘째, 공동노동의 결과 이미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상품의 재생산, 즉 복제에 필요한 노 동량과 생산수단의 양이 감소하기 때문이다.42)


그러나 나는 그러한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의 주장대로 “소프트웨어의 새로운 버전을 생산하는 데 투입되는 연구개발노동(은) ... 그 노동량을 두 번째부터 생산되는 카피에 이전하여 실현하지 않” 으며, 따라서 “소프트웨어의 가치는 정확히 그 재생산, 곧 복제에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서만 결정 되는 것”43)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그리고 “최초 의 생산에는 매우 큰 비용을 요구하지만, 그것을 재생산하는 데에는 훨씬 적은 비용을 필요로 한다 ”거나, “상품의 재생산, 즉 복제에 필요한 노동량과 생산수단의 양이 감소”한다는 사실이 최초 의 생산을 위한 연구개발노동이 결코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논리적 근거가 될 수는 없기 때문 이다. 그러한 사실들은 다만 그러한 연구개발노동의 기술적 성격, 그 생산력이 성격상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조응하지 못함으로써 소위 ‘지적재산권’이라는 폭력에 의하지 않고는 ‘이윤’은커녕 거기에 투여된 비용조차 회수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설명하는 것이다.


4) 그런 데 사실 김창근 박사가 이들 문제를 논하면서 ‘연구개발노동’이 ‘생산적’인 것이냐 ‘비생산적 ’인 것이냐 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 문제제기 방식 자체가 크게 혼란되고 잘못된 것이다. 어떤 노동이 생산적이냐 비생산적이냐는, 그것을 ‘생산적 노동’의 본래적 의미, 즉 사용가치를 생산하고 그것을 유지․보존하는 노동이냐 아니냐의 관점에서 제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본 가적 의미, 즉 자본가가 이윤을 획득하는 노동이냐 아니냐의 관점에서 제기하는 것인가에 따라서 그 의미하는 바가 크게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박사는 그러한 구분 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자 본에 고용되어 쏘트트웨어를 개발하는 ‘연구개발노동’은 그것이 컴퓨터 등의 OS가 되었든, 사무 용 프로그램이 되었든, 게임 프로그램이 되었든, 혹은 기타 어떤 프로그램이 되었든, 그것이 누군 가의 욕망․필요를 충족시키는 사용가치를 창출하는 것인 한, 그것은 분명 생산적 노동이다. 그러나 자본가적 의미에서는 그것은 대부분 ‘지적재산권’이라는 시장외적 폭력에 의해서만 생산 적 노동이 되고 있는 것이 말기 자본주의의 현실이다. 물론 레드헷(RedHat) 등 리눅스(Linux) 배포 판에서 마이에스큐엘(MySQL) 등과 같은 데이터베이스(DataBase)에 이르기까지 ‘오픈소스’의 원칙 에 입각하여 제품을 연구․개발하고, 보급․판매하는 몇몇 회사들의 ‘연구개발노동’은 배타적인 ‘지적재산권’이라는 시장외적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본가적 의미에서도 ‘생산적’ 일 수 있음을 훌륭하게 입증해주고 있지만,44) 이는 사실은 ‘연구개발노동’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 제품의 사용방법에서부터 그것을 사용하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발생하고 발생할 수 있는 기술적 문제들을 ‘지원’하는 노동과 결합해서이다.


5) 정보 재의 가격에서는 버전의 개발비가 카피에 균분된다든가, ‘연구개발노동’이 이른바 ‘평균 원리’ 에 따라 각 카피에 균분된다는 논의의 말기 부르주아적 혁명성에 대하여.

자본주 의적 생산의 구조와 운동법칙을 밝히는 것을 그 내용과 목적으로 하는 경제과학의 가치․가격 론, 노동가치론이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상품의 가격이란 자본주의적 시장기구에 의해서 결정되는 가격이다. 시장기구에 의해서 그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것이 경제학이고 그 가치․가격론 , 노동가치론이지, 그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경제학이나 그 가치․가격론 , 노동가치론이 아니란 뜻이다. 실제로 경제학의 대상이 되어온 가격은 심지어 ‘독점가격’까지도 , 혹은 지대나 임금, 이자까지도 시장에 의해서 결정되는 가격이다. 고정자본이 그것을 이용하여 생산한 상품의 가격을 통해서 그 가치를 조금씩 조금씩, 혹은 저들의 표현을 빌면, ‘평균 원리’ 에 따라 회전시키는 것도 물론 시장기구를 통해서 결정되는 상품의 가격에 의해서이지 시장외적인 어떤 강제를 통해서가 아니다. 미국시장에서의 판매가격보다 2천만 원이나 비싸다는 현대자동차의 제네시스의 가격조차, 조세 차이에 의한 것을 빼면, 시장외적 강제에 의해서 결정되고 유지되는 것 이 아니다.

만일, 상품의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경제학과 그 가 치․가격론의 대상이어야 한다면, 김 박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경제학은 완전히 새롭게 쓰 여져야 한다.”

그리고 정보재의 경우 상품의 단위는 버전이라든가, 그 연구개발노동이 ‘평균 원리’에 의해서 카피에 균 분된다든가 하는 저들의 주장, 저들의 논의의 말기 부르주아적 혁명성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다.

오늘날 범용 쏘프트웨어의 가격은 분명 시장기구에 의해서 결정되는 가격이 아니다. 그것은, 누차 얘기하 는 것이지만, 이른바 ‘지적재산권’, 국가의 폭력에 의해서만, 즉 시장기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장외적인 강제에 의해서 결정되고 지탱되는 극히 작위적인 독점가격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이 점을 경시하면서 그 가격이 마치 시장기구에 의한 가격이라도 되는 듯이 ‘평균 원리’ 운운하는 혁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의 모든 논의는 사실은 범용 쏘프트웨어의 ‘연구개발노동’, 그 ‘연구개발비용’이 어떻게 보상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문제의식, 그것도 자본주의적 생산을 전제한 위에서 그것이 어떻게 보상되 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강박관념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다.

자본주 의적 생산양식 속에서 범용 쏘프트웨어를 상품화하기 위해서는 ‘지적재산권’이라고 하는 시장외 적 강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그 쏘프트웨어의 생산, 그 기술이라는 생산력이 더 이상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그 생산양식과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저들은 한사코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연구개발비’ 혹은 ‘연구개발노동’이 자본주의적으로 보상되 어야 한다는 자신들의 문제의식 자체, 그 강박관념도, ‘평균 원리’ 운운하는 그에 기반한 논의 ․주장들도 사실은 그러한 양립 불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들의 뿌리 깊은 체제 변호 본능, 그 열정의 소산이다.

이 본능 , 이 열정이, 한편에서 내가 쏘트트웨어를 생산하는 정보재 산업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간의 부조 응을 강조했을 때 류동민 교수로 하여금 ‘사도행전’ 운운하며 적의를 숨기지 않도록 했던 것이며 , 다른 한편에서 내가 쏘프트웨어 가격의 자의성을 지적하자 김창근 박사로 하여금 마치 내가 “정 보재 산업에서 ‘판매량의 불확실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정보재의 가치가 ‘사실상 0’이라...(고 ) ... 주장”45)했다는 식의 어이없는 왜곡을 감행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김 박사의 논의․주장은 나의 논의에 대한 순전한 오해 혹은 몰이해―이러한 오해 혹은 몰이해가 혹시 나의 서술상의 요령부득에 기인하는 것일지는 모르지만― 에 근거하고 있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를 굳이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상천 외한 논리, 궤변들도 동원되고 있다.

우리의 논의 대상인 정보재는 ‘지적재산권’이라는 국가의 폭력, 시장외적 강제에 의해서만 그것이 상품 으로서 되고, 그 극히 작위적인 독점가격이 유지되는 것이라는 나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 김 창 근 박사는 “정보재의 특성과 국가의 역할”이라는 항목을 설정, 이렇게 주장한다.


정보재 가 상품가격을 지불하지 않는 사용자들의 사용을 배제하기 힘들다는 ‘비배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품화될 수 없는 것’이지만, 국가권력에 의해서만 상품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만 ‘상품화될 수 없는 것’, 즉 상품화가 ‘불가능한 것’을 국가‘폭력’에 의해서 상품화됐다[ 원문대로!]는 주장은 쉽게 수용하기 어렵다. 만약 상품화가 ‘불가능’하다면, 국가가 폭력을 행사 하여 강제로 구매하게 하지 않는 한, 상품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46)


내가 주 장하는 것은 바로 그것, 즉 ‘상품화될 수 없는 것’, 즉 상품화가 ‘불가능한 것’을 국가가 폭력 을 행사하여 강제로 구매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적재산권’이라는 국가의 폭력이 강제하지 않는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예컨대 마이크로쏘프트의 윈도우XP나 오피스를 구매할까? 그런데 김 박사는 위에 이어서,


그래서 정보재의 상품화에서 국가가 상품화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 하다.47)


고 말한 다. 참으로 흥미진진한 논리의 전개인데, 더 들어보면 이런 것이다.


오히려 정보재의 경우 국가의 역할은 비배제성을 가지고 있는 상품을 ‘배제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만드 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국가는 정보재의 가격을 기꺼이 지불하고 사용하려는 사용자에게는 ‘폭 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 상품화가 ‘불가능한’ 정보재가 국가 ‘폭력’에 의해 상품 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반면 사용자들이 정보재의 가격을 지불하지 않고 사용하려고 할 경우 국가가 정보재 자본의 이익을 위해 ‘폭력’을 행사하여 ‘비배제성’을 극복하려 한다. 그래서 국가는 상 품화 불가능한 정보재를 ‘상품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화의 범위를 인위적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정보재 자본의 이익을 보장해 준다.48)


“정보 재의 경우 국가의 역할은 비배제성을 가지고 있는 상품을 ‘배제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국가는 상품화 불가능한 정보재를 ‘상품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화 의 범위를 인위적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정보재 자본의 이익을 보장해 준다!” 즉, “나는 황소를 도 둑질한 것이 아니라 논두렁에 있는 새끼줄을 하나 들고 왔을 뿐인데, 그 끝에 황소가 따라왔을 뿐 이다!”

“국가 는 정보재의 가격을 기꺼이 지불하고 사용하려는 사용자에게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 상품화가 ‘불가능한’ 정보재가 국가 ‘폭력’에 의해 상품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반면 사 용자들이 정보재의 가격을 지불하지 않고 사용하려고 할 경우 국가가 정보재 자본의 이익을 위해 ‘폭력’을 행사하여 ‘비배제성’을 극복하려 한다.” 권총을 든 강도에게 기꺼이 바친 재물은 강 탈을 당한 것이 아니다! 강도가 무력을 과시하고 행사하는 것은 재물을 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 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저항을 극복하려하는 것일 뿐이다!

한편, 조원희 교수는 말한다.


정보재 의 독점이윤은 채소장이 주장하듯 국가의 폭력장치에 의해 인위적으로 유지되고 있는가? 기업들은 기술적 비밀을 무조건 국가의 특허, 지적재산권으로 보호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이 경우는 그 내용이 공개되므로 ... 많은 경우 기업들은 특수한 기술에 대해 국가보호를 요청하지 않는다. ... 그리하여 많은 기술은 국가의 폭력장치가 아니라 스스로의 보안에 의존하게 된다.49)


이러한 논의는 일종의 사기이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가 지적재산권이라는 폭력을 동원하여 예컨 대 윈도우XP의 복제사용을 금지하고, 김창근 박사의 표현을 빌자면, “비배제성을 가지고 있는 상 품을 ‘배제 가능’하게” 하여 마이크로쏘프트 사가 일방적으로 정한 ‘가격’에 그것을 구매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함으로써 “정보재 자본의 이익을 보장해” 주는 것인데, 엉뚱하게도 “기술적 비밀” 운운하면서 자신의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 교수 는 제 발이 저린 나머지 아주 흥미 있는 주장도 한다. “채소장은 나에게 다시금 강단 학자의 딱지 를 붙이고 매우 분개할지 모르나 나는 국가에 의한 특허와 지적재산권의 보호가 무조건 퇴행적이라 고 보지도 않는다”50)라고.

이렇게 되면, 내가 “국가에 의한 특허와 지적재산권의 보호”를 “퇴행적”, 그것도 “무조건 퇴행적”이 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국가에 의한 특허와 지적재산권의 보호”가 퇴행적이니 아니니 하는 논의, 사고는 조 교수 같은 분들의 논의, 사고일 뿐이지, 나의 그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단지 그렇게 시장외적 강제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 소위 정보재 산업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조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분개하는 것은 그렇게 내가 하지 않은 말, 자신들의 풍차에 불과한 것을 마치 나의 것인 것처럼 제시하는 저들의 태연함이다.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범용 쏘프트웨어의 문제를 조 교수가 어떻게 물타기 하는가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는 범용 쏘프트웨어와 관련한 이른바 ‘지적재산권’의 문제, 그 강제와 폭력, 폭리의 문제를 슬 그머니 특허 일반의 문제로 바꿔치기하여 이렇게 말한다.


특허는 동일한 기술의 중복투자를 막고 그 시장을 안정적으로 보장함으로써 기술개발을 촉진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물론 얼마 동안 그 권리를 인정할 것인가는 정책판단의 문제로서, 인위적으로 독점이 윤을 보장할51) 때의 부정적 효과가 이러한 긍정적인 효과 를 능가하지 않도록 배려하면 좋을 것이다. 부정적인 효과가 지나치게 클 경우에는 사회적인 압력 을 행사하여 그것을 막을 필요도 있다.52)


백보 양 보하여 “동일한 기술의 중복투자를 막고 그 시장을 안정적으로 보장함으로써 기술개발을 촉진시키 는 효과”라는 특허․지적재산권 등의 목적에 대해서는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 법률에 의해서 수십 년씩이나 그 ‘독점’을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있으면서 “부정적인 효과가 지나치게 클 경우에는 사회적인 압력을 행사하여 그것을 막을 필요도 있다”? 얼마나 야바위적인가 ?

아무튼 그에 이어서 그가 하는 말씀을 들어보자.


디지털 콘텐츠와 관련하여 보자. 주지하듯이 그동안 음악의 무단 복제로 인해 음반시장이 급격히 위축되었 다. 채소장도 아마도 최근 음악파일의 무단 복제로 인해 음반산업 전체가 위축되고 시장에 다양한 음악이 공급되지 못하는 현상을 바람직하다고 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혹시 음악산업, 정보 재 산업, 정보서비스 산업 모두가 공적 소유가 되면 이런 문제가 애당초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주 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 산업의 발전이 사회주의국가에서 더욱 잘 될 것이라는 발상 을 납득하지 못한다.53)


“채소 장도 아마도 최근 음악파일의 무단 복제로 인해 음반산업 전체가 위축되고 시장에 다양한 음악이 공급되지 못하는 현상을 바람직하다고 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 정말 제멋대로이다. “필 자는 이들 산업의 발전이 사회주의국가에서 더욱 잘 될 것이라는 발상을 납득하지 못한다”(?) 여 기서만큼은 솔직하군. 그러나 역사는 조 교수의 납득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이 전개되는 것이 다.

마지막 으로 한 마디만 더 하자.

어떤 사 람이 어떤 상품을 구매했을 때, 그 구매자가 자신이 구매한 물건을 어떻게 사용하든, 그가 그것을 혼자서 사용하든, 누군가와 나누어 사용하든, 그것은 모두 그 구매자의 마음대로이다. 그 상품의 판매자가 그 대금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든 그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시장에서의 상품교환 이고, 그 효과이다.

따라서 시장에서 상품의 판매자가 자신의 상품을 판매하면서 구매자에게 그 상품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어떻게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강제하려 든다면, 혹은 상품의 구매자가 상품의 판매자에게 이 대금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강제하려 든다면, 그러한 강제는 통용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필시 ‘미친 놈’ 취급을 받기가 십상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장이다.

그런데 소위 정보재 상품의 경우 어떤가?

구매자 가 판매자에게 그 대금의 사용을 지정하진 않지만, 판매자는 구매자의 사용권을 극도로 제한하면서 지정하고 있고, 그에 따르지 않을 경우 ‘지적재산권’이라는 강제를 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러 한 기묘한 시장, 기묘한 상품거래를 저들 경제학자님들께서는 당연한, 정상적인 시장현상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평균 원리’ 운운하면서!

그렇게 그들은 경제학의 혁명을 수행하고 있다. <노사과연>


1) 강남훈 등, ��정보재 가치논쟁��, 한신대 학교 출판부, 2007.


2) ��소프트웨어의 가치와 가격에 대한 연구: ‘정보재 가 치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8. 2.


3) 조원희, “사소한 문제, 큰 소동-��정보재가치논쟁 ��에 대한 논평을 겸하여”, ��진보평론�� 제35호, 2008년 봄, pp. 238-39.


4) 강남훈, “정보혁명과 지대에 대한 소고”,(강남훈 등, ��정보재 가치논쟁��), pp. 262-62. 이에 대한 비판은, 채만수, “지 대의 관점에서 본 정보재의 가치․가격에 대한 비판”(강남훈 등, 같은 책), pp. 222-24 참조 .


5) 박성수, “정보재 가치논쟁에 대한 방법론적 시각”(강남훈 등, 같은 책, pp. 135-52) 및 동, “지대 범주와 독점”(같은 책, pp. 268-95) 참조.


6) 그의 이러한 인품은 문제의 그의 글에서 나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훈계 하고 있는 데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에게는 레닌 이후 자주 사 용된, 사람을 검열하고 사상적 딱지를 붙이는 태도도 일부 발견되는데 이는 정치경제학이라는 과학 의 영역에서는 불필요하며, 그의 전문 분야인 노동운동, 정치운동에 관해서도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조원희, 같은 글, p. 239.) “정치경제학이라는 과학의 영역”! 우리는 곧 그가 그 ‘과학의 영역’에 어떤 혁명적 기여를 하고 있는지를 볼 것이다.


7) 김수행 역, ��자본론�� III [하], 2004년 , p. 991; MEW, Bd. 25, S. 822. 단, 여기에서 의 번역문들은 김수행 교수의 그것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8) 김수행 역, 같은 책, p. 993; MEW, Bd. 25, S. 824.


9) 류동민, “디지털복제 시대의 ‘노동가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논평 ‘진보평론’의 정보재 가치논쟁에 대하여”, ��교수신문�� 2005. 4. 9.


10) 류동민, “디지털 네트워크 경제의 특성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 강철규 외, ��21세기 한국 사회경제의 발전전략��, 여강출판사), p. 263.


11) 예컨대, 채만수, 같은 글, p. 214.


12) 하도 재주가 많은 자들이라서, 예컨대, “마이크로쏘프트사도 일정한 토지 위에 사업소를 가지고 있고, 그 토지 위에서 쏘프트웨어를 생산할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 ‘ 토지소유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느냐” 하고 덤벼들기라도 할라치면, 고백컨대, 나로서는 앞발뒷발 다 들 수밖에 없다.


13) 김창근 박사도, 저들이 이렇게 지대 개념을 ‘확장’하는 것을 논하면 서, 몇 개의 중간고리를 논하면서이긴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 ― “강남훈이 자신이 ‘노동가치론 ’에 입각하고 있다면서 출발하여 지대 개념을 정보재로 확장하겠다고 했지만, 그의 결론은 노동가 치론에 대한 ‘부정’일 뿐”이고, (그의 논리의 연장선상에서는) “경제학은 완전히 새롭게 쓰여져야 한다”(김창근, “정보재 가치 논쟁에 대한 비판적 평가”,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5권 제1호, 2008년 봄. p. 281. 강조는 인용자)라고.


14) 조원희, 같은 글, p. 247.


15) 조원희, 같은 글, p. 255.


16) 김수행 역, ��자본론�� II, 비봉출판사, 2004, p. 594; MEW, Bd. 24, S. 484.


17) 조원희, 같은 글, p. 254.


18) 조원희, 같은 글, pp. 254-55.


19) 조원희, 같은 글, p. 255의 주 8).


20) 조원희, 같은 글, p. 255.


21) 조원희․조복현, “디지털네트워크 경제의 가격형성과 축적동학 ”,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방법론 모색��(��사회경제 평론�� 제18호), 풀빛, 2002, p. 149.


22) 참고로, “특별잉여가치란 어떤 상품의 개별적 가치가 그 상품의 시장 가치 혹은 사회적 가치보다 적음으로써 그 차이만큼 얻는 초과이윤이고, 따라서 그 개별적 가치가 그 시장가치 혹은 사회적 가치와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더 큰 상품의 생산자는 특별잉여가치를 취 득할 수 없기 때문에, 소프트웨어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상품에서도 특별잉여가치가 상품가격의 일 반적 요소가 될 수는 없다”(강성윤, 같은 글, p. 23). 사실, 시장가치보다 작게 개별적 가치를 생 산하는 상품생산자가 취득하는 특별잉여가치는 시장가치보다 크게 개별적 가치를 생산하는 상품생 산자가 잃는 가치일 뿐이다.


23) 채만수, “과학기술혁명과 상품의 가치․가격―이른바 ‘정보재 ’ 가격 문제를 중심으로”, ��진보평론�� 제20호, 2004년 여름, p. 238; 채만수, 같은 제목의 글, 강남훈 등, ��정보재 가치논쟁��, p. 74.


24) 조원희, 같은 글, pp. 255-56.


25) 조원희, 같은 글, p. 256.


26) 조원희, 같은 글, p. 244.


27) MEW, Bd. 25 (��자본론�� 제3권), S. 783.


28) 채만수, “과학기술혁명과 ...”, ��진보평론 ��, p. 238; ... ��정보재 가치논쟁��, pp. 73-74.


29) 채만수, “과학기술혁명과 ...”, ��진보평론 ��, p. 225; ... ��정보재 가치논쟁��, pp. 59- 60.


30) 채만수, “과학기술혁명과 ...”, ��진보평론 ��, pp. 247-48; ... ��정보재 가치논쟁��, pp. 86- 87.


31) 강성윤, 같은 글 및 “정보상품 가치논쟁의 전개와 쟁점들”(강남훈 등, ��정보재 가치논쟁��, pp. 13-52) 참조.


32) 조원희, 같은 글, pp. 242 이하.


33) 김창근, 같은 글, p. 257.


34) 채만수, “과학기술혁명....”, ��진보평론 ��, p. 59, 주 6).


35) 김창근, 같은 글, p. 258.


36) 김창근, 같은 글, pp. 267-68.


37) 마츠이시 가츠히코(松石勝彦), “現代資本主義と商品論”, 八尾信光 외, ��“現代資本主義と「資本論」�� I, 新日本出版社, 1991, p. 49.


38) 채만수, “정보재 가치와 관련한 몇 가지 쟁점에 대하여”, ��현장에서 미래를��, 제104호, 2004년 12월, pp. 103-05.


39) 김창근, 같은 글, p. 269.


40) 강성윤, ��소프트웨어의 가치와 가격에 대한 연구: ‘ 정보재 가치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중심으로��, p. 64.


41) 이 문장은 비문(非文)인 것처럼 보인다.


42) 강성윤, 같은 글, pp. 64-65.


43) 강성윤, 같은 글, p. 65.


44) 이들 기업들조차 사실 대개는 상업용 버전을 따로 배포하고 있고, 그 것들은 ‘지적재산권’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45) 김창근, 같은 글, p. 262.


46) 김창근, 같은 글, p. 270.


47) 같은 곳.


48) 같은 곳.


49) 조원희, 같은 글, p. 252.


50) 같은 곳.


51) “인위적으로 독점이윤을 보장”한다고 말할 때, 조 교수 역시 정보재 의 가격이 ‘작위적인 독점가격’임을 부지불식간에 인정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 다.


52) 같은 곳.


53) 조원희, 같은 글, pp. 2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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