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작년 철도와의 공투가 유실된 이후 화물연대는 내부 진통의 과정을 거치면서 올해는 조직 확대와 내부단결력을 강화하는데 집중하자는 사업계획을 세우고 느긋하게 한해를 출발하고자 했다. 그러나 갑자기 터져 나오는 여러 상황들이 애초의 계획을 뒤집어 버렸다.
1주일간의 짧은 파업투쟁을 마무리 했지만 언제 어떻게 또 일이 터질지 모를 일이다. 촛불과 네티즌의 지지에 화답코자 미국산쇠고기운송저지투쟁을 독려하고 있는 지도부와 파업기간 중 손실을 만회하고자 운전대를 놓지 않는 조합원들 사이에 미국산쇠고기로 의심되는 냉동컨테이너번호가 빽빽이 적힌 선전물이 오가고 있다. 그러나 긴장감은 보이지 않는다.
1. 유가폭등
국제 경유수요의 급증과 투기자본의 원자재에 대한 집중으로 ’97년 376원이었던 경유가는 2007년 1,272원에서 2008년 5월이 되어서는 1,800원대로 치솟았고, 휘발유가격을 앞질렀다. 휘발유가격대비 경유가격을 85%수준으로 유지할 것이라는 정부의 에너지세재개편에 따른 목표가격비가 무색하게 되었다.
지난 10년 동안 운송료는 오르지 않았고, 갑작스런 유가폭등으로 인해 운송을 해봐야 고스란히 적자로 되돌아오는 현실에서 화물운송노동자들의 불만은 분노로 타올랐다. 일례로 부산 ― 구미 간 275,000원의 운송료를 받고 기름값 236,250원과 고속도로 통행료 3만원, 두끼 식대 1만원, 보험료 등 고정비용 하루 32,000원을 떼고 나면 33,250원이 적자가 난다. 사정이 이런 까닭에 비조합원들과 가정살림을 이끄는 부인들이 화물연대에 파업투쟁을 촉구하며 자신들도 동참할 것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노동조합의 전화통은 불이 날 지경이 되었다. 지난 시기 비조합원들의 비협조에 불만이 많았던 화물연대 일부열성조합원들은 오히려 비조합원들이 적극적으로 조직과 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스스로 나설 때까지 화물연대파업을 좀 더 유보하자는 주장들도 많았다.
2. 광우병쇠고기반대 촛불시위
4월부터 시작된 중고생들의 촛불시위가 시민들에게 확산되었다. 연일 서울시청광장엔 수만의 촛불이 불을 밝혔고, 그 수는 점점 더 불어만 갔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촛불시위는 번져갔다. 광우병쇠고기 반대로부터 시작된 촛불시위의 내용은 이명박 정권의 교육, 의료, 환경, 전기, 가스를 비롯해 운하반대 등 그의 모든 정책을 반대하는 내용으로 풍부해졌고, 이명박 퇴진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87년 6월 항쟁을 이야기 하였고, 지금의 촛불시위를 제2의 6월 항쟁으로 만들자는 주장들이 많았다. 그리고 6월 10일, 서울시청광장에는 50만명의 시위대가 모였고, 부산에서도 서면 로타리를 가득 메운 시위대가 2만여 명에 달했다.
네티즌 사이에서의 자유로운 소통은 각양각색의 다양한 시민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모아냈고, 미국산쇠고기 운송을 거부하겠다는 화물연대의 입장발표에 서버가 다운될 정도로 열렬한 지지를 보내왔다. 노동조합이, 더군다나 부르주아 언론에 의해 온갖 폭력적인 이미지로 도배된 화물연대가 민중들의 지지를 전폭적으로 받고 있다는데 많은 조합원들이 고무되었다. 이렇게 광우병쇠고기수입반대투쟁과 촛불시위와 네티즌 그리고 화물연대가 하나로 엮여가고 있었다.
3. 5월 10일 부산역집회
경유가 폭등으로 인해 갑자기 터져 나오는 화물운송노동자들의 불만과 분노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에 화물연대는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전국선전전에 돌입하였다. 비조합원들의 화물연대 가입문의가 쇄도했다. 조합원가입원서는 등록 처리를 하는데 일손이 딸릴 정도로 많아졌다. 5월 10일 부산역집회에는 7천여 명의 화물노동자들이 참가했다. 이날 집회참가 인원수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화물연대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정부는 화물노동자들의 분노가 어느 시점에서 어떤 식으로 표출될지 초미의 관심사였으며, 5월 10일 집회참가자 수는 화물노동자들이 행동으로 나서는 출발점에서의 이후 파괴력을 예단할 수 있는 바로미터였다.
6월 6일 화물연대 확대간부회의가 옥천에서 열렸다. 800여명의 간부들이 참가한 열띤 분위기속에서 파업투쟁을 결의하였으며, 6월 9일 파업찬반투표를 진행하고 11일~12일 확대간부 파업과 13일 전면파업돌입의 투쟁일정을 결정하였다.
6월 9일 ARS로 진행된 파업찬반투표결과는 90.8%라는 압도적인 찬성을 보였다. 모든 언론에서 화물연대파업기사를 톱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과거와는 달리 국민들의 시각변화 만큼이나 언론에서의 보도내용도 화물연대의 입장을 지지하는 내용이 다수였다. 하루에도 여러 건씩 언론사에서 조합원들 동행취재요청이 들어왔고, 인터뷰요청이 쇄도했다. 네티즌과 시민들의 화물연대에 대한 격려와 지지글이 인터넷과 팩스를 통해 멈출 줄 몰랐다. 파업을 안하면 이상할 정도로 이미 분위기는 외부로부터도 형성되어 있었다.
4. 교섭
화물연대의 핵심요구는 ‘경유가 인하/ 표준요율제 시행/ 운송료인상’이었다. 조직건설이후 줄곧 제기해 왔던 ‘노동기본권 보장’은 뒤로 빠져 있었다. 대정부요구안이 경유가 폭등에 대한 대책과 작년에 합의했던 표준요율제의 시행, 그리고 운송료교섭을 위한 적극적인 역할이었다면, 대자본요구는 30%의 운송료인상안 이었다. 표준요율제라 함은 최저임금제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최저임금제가 임금을 최저임금수준으로 하락시키는 영향을 가져 왔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표준요율제 또한 지금은 아닐지라도 이후 운송료인상에 질곡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지금의 절박한 생존을 위한 주요한 요구로 내걸려 있다.
이번 교섭은 중앙교섭과 지부교섭이 분리되어 진행되었고, 투쟁 또한 본부차원의 대정부투쟁과 각 지부별 대자본투쟁의 성격으로 분리되어 출발했다. 각지부에서는 해당지역의 주요 화주사와 운송사를 상대로 교섭을 요구했고, 일부는 앞서 개별사업주를 상대로 조기파업에 들어갔다. 이로써 화물연대본부차원의 전국파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전북, 전남, 경남 등 전국각사업장에서의 화물연대파업이 불붙기 시작했으며, 본부파업이 종료 선언된 이후에도 각지부별로 개별 자본을 상대로 한 파업투쟁은 전국각지에서 일정기간 지속되었던 것이다. 중앙과 지역을 분리한 교섭투쟁전술의 유효성은 지부별로 그 차이가 존재하다 할 것이다.
정권이 바뀐 후 6월 13일 전면파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화물연대와 정부는 4~5차례에 걸친 교섭이 있었다. 정권교체 이후 새 정부는 화물연대와의 교섭에 소극적이었고, 지난 정권이 화물/철도 공투의 과정에서 합의했던 ‘표준요율제’의 시행 마저도 이행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유가폭등으로 인한 화물노동자들의 분노가 점점 더 거세지고 촛불을 든 민중들과 화물연대의 끈끈한 연대가 형성되고 언론의 호의적인 보도가 이어지고, 무엇보다도 화물노동자들의 투쟁이 점점 현실로 나타나게 되자 정부의 교섭태도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파업돌입 직전 교섭에서 정부는 몇 가지 안을 제시했으며, 다급해진 정부에서는 유가보조금 2년 연장과 경유가가 1,800원을 넘어갈시 인상분의 50%를 지원하겠다는 고유가대책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였다. 이것은 파업투쟁전선을 교란하고자 하는 기만적인 조치였다. 정부는 파업참가자에 대해 ‘유가보조금 지급중단/운송방해 엄벌’ 등의 협박 또한 잊지 않았으며,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만든 ‘업무복귀명령제’라는 악법을 동원하고자 했다.
대자본교섭은 중앙차원에서 진행된 CTCA(컨테이너운송협회)교섭과 각지부별 대자본교섭이 있었다. 화물운송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법에서 인정치 않은 이유를 들어 자본가들은 화물연대를 교섭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사업장별 화물연대파업은 장기파업이 되고 불법으로 내몰리며 후유증을 많이 남긴다. 힘겹게 투쟁하여 어렵사리 합의를 했다하더라도 합의문에 도장찍는 문제가지고 싸움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어려움이 있기에 이번에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적극적으로 교섭을 주선하여 운송료교섭이 성사될 수 있도록 요구된 상황이었다. 파업상황을 빨리 종결짓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아니면 교섭주선을 요구받아서인지는 몰라도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빨리 교섭이 타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5. 파업
6월 11~12일 진행된 간부파업에 이어 13일부터 시작된 전면파업은 19일까지 1주일간 지속되었다. 각지부에서는 지역 내 거점을 확보하여 조합원들을 배치하고 봉쇄투쟁, 또는 파업동참선전전을 진행하였다. 지난 시기의 투쟁에서는 파업불참차량에 대한 고민이 많았지만, 이번 투쟁에는 비조합원들의 자발적인 파업참여가 많아서 투쟁하는 조합원들 또한 여유로왔다. 민중의 뜨거운 지지와 언론의 호의적인 반응, 그리고 비조합원들의 자발적인 파업동참이라는 사상초유의 호조건 속에서 진행되는 파업투쟁의 결과 전국 주요물동량의 대부분이 멈춰 섰다. 부산항의 장치율은 90%을 넘었고, 주요부두의 장치장은 포화상태였다. 화물연대파업의 효과는 전 산업으로 번져갔고, 조업을 중단하는 공장들이 늘어갔다. 파업의 효과가 위력적이었던 만큼 정부와 정보기관의 파업파괴를 위한 공작 또한 집요했다. 단련되지 못한 간부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의 공작에 영향 받을 수 있으며 투쟁전선이 교란되는 만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6. 결과
파업이 진행되는 동안 몇 차례의 교섭이 있었고, 그 결과로 대정부 교섭에서는 표준요율제의 2009년 시행과 심야시간대 고속도로요금 할인혜택의 확대적용, 그리고 감차(減車)를 위한 차량의 정부구입, LNG엔진 전환비용지원 등의 합의를 이끌어 냈다. 운송사단체(화련)와는 노조활동을 보장하고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내용의 단체교섭을 체결하였고, CTCA교섭에서는 19%의 운송료인상을 합의하게 되었다. 이로써 중앙차원의 파업은 종결되었고, 지부투쟁으로의 전환 이후 각지부별/ 사업장별 운송료 인상 또한 많게는 30%인상까지 쟁취하는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상당한 성과를 쟁취했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에 합의내용에 대한 조합원들의 불만도 있다. "이행강제력이 없는 표준요율제는 무용지물이다"라는 것과, 19%인상에 대한 기준이 타리프요율이 아닌 CY요율이어서 인상효과가 미흡하다는 것. 경유가인하에 대한 성과가 미흡하다는 것, 그리고 정부의 감차대책과 LNG엔진으로의 교체비용지원은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 오지 않을 좋은 기회인 데도 노동기본권의 요구를 전면에 내걸지 않았다는 것과, 조급하게 파업을 종료했다는 현장의 비판 역시도 많다.
7. 나가며
신자유주의 파쇼정권에 대한 저항의 물결이 전사회적으로 폭넓게 흐르고 있는 이때, 노동계급의 조직된 투쟁의 깃발로써 화물연대의 짧은 파업투쟁은 의의를 갖는다. 5,6월 촛불정국과 함께 타오른 화물연대의 물류총파업에 연속하여 건설기계(덤프)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이어지는 투쟁국면은 87년 6월항쟁에 뒤이은 7ㆍ8ㆍ9월의 노동자대투쟁을 상기하게 한다. 2008년의 7월 2일 민주노총 2시간 총파업과 총력투쟁기간으로 정한 7월 한달 동안 얼마나 노동계급의 투쟁이 조직될지는 알 수 없으나 아직 촛불은 꺼지지 않고 있다. 촛불을 끄고자 하는 이명박 정권의 폭력탄압이 오히려 종교계까지 촛불마당으로 불러들였다. 민중들과 함께 반신자유주의투쟁을 현장으로부터 다시 조직해야 하는 데 있어 화물연대도 예외일 수는 없다. <노사과연>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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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의" 정세와 노동 37호 (2008.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