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세계공황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을 진앙지로 한 세계공황은 금융위기의 폭발이라는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자본은 이에 대해 대규모 공적 자금 투입이라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그러한 대응이 세계적 차원의 공황을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공황의 원인과 그 영향 등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 시급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썩을 대로 썩어서 악취가 진동하고 있는 지금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구성체의 전망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는 쏘련 붕괴이래로 사회주의라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무너진 뒤로 새로운 정치적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의 극복이 여전히 사회주의인가, 사회주의라면 20세기와 같은 오류와 한계를 극복하는 전망은 가능한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필연이라면 사회주의 건설의 합법칙성은 무엇인가, 나아가 사적 소유의 폐지라는 생산관계의 변혁을 넘어 계급사회의 잔재를 완전히 일소하는 전망은 가능한가 등이 시급한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쟁점들에 대해 쏘련 등 기존의 20세기 사회주의의 정치경제학은 나름대로 많은 설명을 해왔고 전망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내용들은 쏘련 붕괴로 압축되는 20세기 사회주의의 한계와 오류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기존의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은 사회주의 사회가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했다는 것, 노동자가 해방된 노동을 했다는 것, 착취가 사라졌다는 것 등 자본주의와 구분되는 사회주의적 관계였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한다. 그러나 쏘련 붕괴의 원인이 되었던 상품-화폐관계의 전면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와 상품-화폐관계의 절충 등 오류 또한 고스란히 담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 사회주의 건설의 합법칙성
1) 경제적 측면에서 본 쏘련 붕괴의 교훈
20세기를 새롭게 열었던 러시아 혁명은 인류가 새로운 발전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리는 시금석이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착취를 폐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것, 천대받던 노동자계급이 새로운 사회건설의 주역이라는 것,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에 비해 생산력 발달의 새로운 단계를 연다는 점 등 러시아 혁명이 20세기 인류사회에 끼친 공헌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이에 따라 러시아 혁명을 통해 건설되었던 쏘련이 이룩한 업적은 거대한 것이었다. 생산력의 급속한 발달, 착취를 소멸시킨 사회주의적 생산관계, 각 민족 간의 평등, 문화혁명으로 인해 문화와 예술의 거대한 신장,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지원 등 20세기 인류사는 쏘련의 업적을 기초로 규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쏘련은 1990년에 붕괴되어 20세기를 마감하는 주역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쏘련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그 붕괴가 인류의 자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 쏘련은 거대한 발전을 이루었고 그 경험을 많은 나라에 나누어주기도 했다. 특히 쏘련의 경험은 사회주의 건설에 일정한 합법칙성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쏘련이 그러한 사회주의 건설의 합법칙성을 따랐을 때는 빠른 속도로 거대한 발전을 이루었고 그러한 합법칙성을 위배하고 무시하고 왜곡할 때 급속히 침체되고 결국에는 붕괴로 치달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1965년 코시킨 개혁에 의해 상품-화폐관계가 경제에서 전면화하기 전까지 쏘련은 세계에서 가장 경제발전이 빠른 나라였다. 그러나 코시킨 개혁에 의한 상품-화폐관계의 전면화는 국유와 협동조합적 소유라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와 충돌했고 그에 따라 쏘련 경제는 심각한 불협화음을 내며 침몰했던 것이다. 이는 쏘련 붕괴의 교훈을 통해 경제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합법칙성을 규명하는 것이 절실함을 말해준다.
2) 사회주의에서 경제법칙의 성격
경제에서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합법칙성의 문제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성립하는 경제법칙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성립하는 경제법칙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핵심적인 경제법칙은 사회주의의 기본적 경제법칙과 균형있는 발전법칙이었다. 사회주의의 기본적 경제법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의 원리에 대당하는 것으로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생산의 목적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즉, 사회 전성원의 완전한 복지와 각자의 인격의 전면적 발전을 위해 생산을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균형있는 발전 법칙은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이 각 부문의 균형과 비례성을 고려하여 조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의 무정부성과 대칭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법칙들은 언듯보면 일종의 당위를 법칙이라고 규정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법칙들은 그를 위배하면 사회주의 사회의 경제건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제법칙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즉, 법칙이란 그를 위배하면 주체의 올바른 작용을 이루어낼 수 없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사회의 경제법칙도 하나의 법칙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더구나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성립한 후에는 그에 걸맞는 경제법칙이 성립하는 것은 일종의 필연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의 경제법칙은 발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쏘련의 성립 후 1929년 계획적 경제로 이행한 초기에 사회주의 사회에는 역사의 필연이라는 점에서 성립하는 경제법칙은 없고 국가가 의식적으로 조직하면 즉, 예를 들어 5개년 계획 자체가 하나의 경제법칙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비과학적인 것이다. 아무리 의식성을 하나의 성격으로 하는 사회주의 경제라도 일정한 생산관계에서 비롯되는 경제법칙은 필연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최초로 설명하고 위 2개의 경제법칙을 규명한 사람은 스탈린이었고 그는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제문제라는 논문에서 이를 설명했다.
3)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국가자본주의론의 허구성
이러한 점들을 볼 때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쏘련을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비과학적임을 알 수 있다. 쏘련을 자본주의라고 본다면 자본주의의 경제법칙이 쏘련에서도 관철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더구나 쏘련은 국유와 협동조합적 소유라는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경제법칙이 성립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이 쏘련을 자본주의 사회라고 규정하는 것은 현실과 맞지가 않는 것이다. 쏘련에서는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잉여가치의 법칙도 없고 평균이윤율의 법칙도 없다. 즉,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을 이루는 기본적 경제법칙이 쏘련에서는 사라졌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쏘련이 기본적으로 착취를 폐지한 생산관계였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의 계승자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결정적 차이는 착취가 존재하는가, 즉, 잉여가치 법칙이 존재하는가이다. 그러나 쏘련에서 잉여가치 법칙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증명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거꾸로 쏘련은 경제에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에 의해 붕괴되었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그런 점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실사구시의 방법론을 가져야만 한다. 제국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반쏘련 등을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의 전망을 닫아버리는 것과 같다.
2. 사회주의 생산관계에서 고유하게 발생하는 경제법칙들
1) 사회주의의 기본적 경제법칙
사회주의의 기본적 경제법칙은 생산의 목적을 규정하는 것이다. 사회 전 성원의 완전한 복지와 각자의 인격의 전면적 발전을 위해 생산을 조직하는 것이 사회주의 사회의 기본적 경제법칙이다. 바로 이러한 최고의 법칙에 충실했기 때문에 쏘련은 1965년 코시킨 개혁 이전까지 거대한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제법칙이 사회주의에서 발생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즉,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결합이 자본주의와 달리 자본과 상품의 관계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무매개로 직접 결합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이 더 이상 상품이 아니고 생산수단이 더 이상 자본이 아닌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노동자는 착취관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직접 결합하여 해방된 노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자연스레 생산의 최고목적이 변경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의 최고목적은 이윤의 실현이다. 이를 맑스는 잉여가치의 취득이라고 분석했던 것이다. 그러나 생산수단이 더 이상 자본이 아니게 되고 노동자에게 단순한 물적 조건으로서 마주하게 될 때는 잉여가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또한 사회주의의 기본적 경제법칙은 경제에서 발전의 무한한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는 임금, 즉,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의 구매력과 욕구는 무한정 발전할 수 있고 자본주의와 같이 노동력 재생산 비용에 의해 제한받지 않게 된다. 이렇게 노동자의 욕구의 발전에 기초하여 생산을 무한정 발전시킬 가능성을 사회주의의 기본적 경제법칙이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 기본적 경제법칙이 사회주의 생산관계에 기초하여 합법칙성을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최고의 경제법칙에 충실할 때만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은 순조롭고 경제도 급속히 발전하는 것이다.
2) 균형있는 발전의 법칙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에 기초하여 주요하게 발생하는 또 하나의 법칙은 균형있는 발전의 법칙이다. 즉, 생산의 각 부문의 균형, 생산과 유통의 균형, 소비와 축적의 균형 등 경제에서 주요한 균형을 이루어야 사회주의 생산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법칙은 자본주의 사회의 무정부성의 법칙과 대비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본가들이 아무리 의식적으로 경제를 조직한다 해도 무정부성을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적인 이윤추구가 최고의 목적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아무리 거시적 조정을 해도 개별적 자본들은 무정부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균형있는 발전의 법칙은 사회주의에서 고유하게 발생하는 법칙이다. 이 법칙에 기초하여 사회주의 국가는 경제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거꾸로 균형있는 발전법칙이 있기에 국가의 경제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즉, 5개년 경제발전 계획 등 국가의 주요한 계획은 균형있는 발전법칙에 의거하는 주체의 능동적 작용이다. 이는 국가 또한 경제법칙에 종속되어 그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법칙은 스탈린이 처음으로 규명했다. 그러나 이 법칙은 짜골로프의 교과서에서는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즉, 균형있는 발전 법칙 대신에 계획성 법칙으로 수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짜골로프의 오류이다. 왜냐하면 계획은 경제법칙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계획은 주체의 대상에 대한 능동적 작용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객관적인 경제법칙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계획이 경제법칙이 된다면 경제관료의 지시나 명령이 경제법칙이 된다는 것이고 또한 5개년 계획과 같은 국가의 정책 자체가 경제법칙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주관과 객관을 혼동하는 것이다. 법칙은 객관적인 것이다. 따라서 계획성 법칙이라는 것은 오류이며 이는 정당하게 균형있는 발전법칙으로 정정되어야 한다.
3) 노동생산성의 끊임없는 향상
사회주의에서 고유한 경향으로 나타나는 것이 노동생산성의 중단없는 끊임없는 향상이다. 사회주의에서 노동생산성 향상의 중요성에 대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노동생산성은 결국 새로운 사회제도의 승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주요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농노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노동생산성을 만들어냈다. 사회주의는 그보다 훨씬 높고 새로운 노동생산성을 만들어 냄으로써 자본주의를 최종적으로 타도할 수 있고 또한 최종적으로 타도할 것이다.”1)
이와 같이 노동생산성의 향상은 새로운 사회건설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고 자본주의를 최종적으로 극복하는 물적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비한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생산성의 급속한 향상은 단지 주관적 희망사항이 아니라 그 객관적 기초가 주어져 있다. 먼저,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와 달리 공황에 의해 주기적으로 생산력 발전이 중단되지 않는다. 이는 노동생산성 향상이 사회주의에서는 중단없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객관적 기초를 이루는 것이다. 실제로 쏘련에서 노동생산성 향상은 미국 등의 2배의 속도로 이루어졌다. “1951-1970년에 쏘련 공업에서의 노동생산성의 연평균 증대는 6.3%였는데, 미국에서는 불과 3%였다”2). 이와 같이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생산성이 급속하게 향상되는 것은 사회주의사회에서는 자본주의와 같은 노동생산성 향상의 한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맑스는 자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만약 기계를 다만 생산물을 싸게 하는 수단으로만 본다면, 기계를 사용하는 한계는 기계 자체의 생산에 드는 노동이 기계의 사용에 의하여 대체되는 노동보다 적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자본가가 기계를 사용하는 데에는 그 이상의 한계가 있다. 자본가는 노동에 대해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하는 노동력의 가치만을 지불하므로, 자본가에 의한 기계사용의 한계는 기계의 가치와 기계가 대신하는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차이에 의해 설정된다.”3)
맑스의 이러한 분석으로부터 자본주의를 극복한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기계사용의 채용은 그 한계가 매우 넓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기계와 노동력 가치의 차이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가치와 기계가 절약하는 노동의 가치의 차이에 의해 기계사용의 한계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그만큼 노동생산성의 향상이 기계의 광범한 채용에 의해 급속히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분석은 새로운 과학기술의 산업적 채용에 대해서도 원용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새로운 과학기술의 채용이 당면의 이윤의 증대에 봉사하는가에 의해 규정된다. 더구나 독점자본주의 하에서는 과학기술의 채용은 독점의 이익에 봉사하는가에 의해 규정된다. 이에 대해 독점자본들은 새로운 과학기술이 자신의 독점적 이익을 침해할 것으로 판단되면 새로운 과학기술을 의식적으로 사장시키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고유한 한계를 알지 못하며 새로운 과학기술은 생산의 전 영역에 급속히 확산될 수 있다. 또한 사회주의에서는 자본주의에 고유한 영업비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따라 특정 기업에서 발전한 노동생산성 향상의 방식은 곧바로 전 국유기업에 확산되어 노동생산성의 향상을 자극한다. 이와 같은 사례는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와 사회구성체 자체가 달라서 노동생산성의 급속한 향상의 객관적 기초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노동생산성 향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위와 같은 객관적 조건만이 아니라 주체, 즉, 노동자의 자질의 향상이다.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의 사회적, 문화적 자질은 높이 발전할 수 없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보수로 주어지는 임금은 노동력 재생산비용으로 한정되어 있어서 노동자의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자질이 제대로 향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무한하게 발전하는 노동자의 사회적, 문화적 자질은 그 자체가 바로 노동생산성 향상의 기초가 된다. 새로운 기술을 능동적으로 개발하고 채용하고 노동조직을 개선하는 창의적 노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에서 노동생산성이 중단없이, 계통적으로 끊임없이 향상되는 것은 하나의 합법칙성으로 주어져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사회주의 혁명이 새로운 생산력을 해방한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생산관계의 변혁을 통해 이루어지는 생산력의 향상이 구체적으로는 노동생산성의 급속한 향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소비물자의 가격을 계통적으로 인하하는 경향이 생기는 것이다. 실제로 쏘련에서는 계획경제가 정착되기 시작한 1930년대 후반, 그리고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 소비자 가격이 지속적으로 인하되었었다.
4) 노동에 따른 보수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의 보수는 임금으로 나타난다. 즉, 그 형태가 어떠하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보수는 노동력의 재생산비용으로 한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똑같이 임금이라는 용어는 사용하고 있지만 그 본질이 달라진다. 생산수단이 더 이상 사적 소유의 대상이 아니게 되어 자본으로 성격을 상실함에 따라 그리고 노동자가 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생산수단의 주인이 되어 더 이상 노동력이 상품이 아니게 됨에 따라 임금의 본질도 달라지는 것이다. 또한 실질적으로 노동력의 매매는 금지되어 임금은 노동력의 가격으로서의 성질을 상실한다. 그에 따라 임금은 개개의 노동자와 사회주의 국가에 의해 대표되는 전 사회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전화된다.4)
이렇게 임금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회주의 생산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와 달리 분배에 있어서 욕망에 따른 분배, 필요에 따른 분배를 즉각적으로 실시할 수 없다. 이는 근본적으로 생산력의 발달수준의 한계, 계급사회의 잔재로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 도시와 농촌의 대립 등이 잔존하기 때문이다. 맑스는 고타강령 비판에서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인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에 따른 분배가 될 것이라 전망했다. 이러한 전망은 현실이 되었는데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숙련노동과 비숙련노동, 고급기술자와 단순 노동 등 노동의 질과 양에 따라 분배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동에 따른 분배는 자본주의의 노동력가치에 따른 분배와 비교할 때 역사적 진보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노동에 따른 분배방식은 일정하게 불평등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등은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인 사회주의에서는 불가피한 것이다. 노동에 따른 분배는 그러한 불평등으로 말미암아 노동의 질과 양에 따른 물적 자극이 된다는 점에서 한편으로 생산력의 발달을 촉진하는 것이다. 즉, 노동이 제 1의 욕구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노동에 따른 차별적 보수로 인한 물적 자극이 불가피한 것이다. 그리하여 개별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숙련노동의 지향, 새로운 기술의 습득을 자극받게 되고 그로 인해 노동생산성이 급속하게 향상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에 따른 보수가 의미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자본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생산수단에 대한 관계에서는 평등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노동에 대한 보수는 여전히 노동의 질과 양에 따른 차별이라는 부르주아적 권리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존의 쏘련에서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노동에 따른 보수를 실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동에 따른 보수를 넘어서서 노동자의 욕구와 필요에 따른 분배를 부분적으로 실현했었다. 즉, 교육, 의료, 문화, 휴양 시설 등을 사회적 소비기금에 의해 지출하여 노동자들은 노동에 따른 분배 이외에 자신의 욕구를 실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소비기금의 성격에 대해 짜골로프의 교과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사회적 소비기금은 그 경제기능과 분배양식이라는 점에서도 사회주의 태내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공산주의의 맹아이다. 노동에 따른 분배가 공산주의적 분배로 이행하는데 중요한 경제적 전제들을 준비한다고 하면, 사회적 소비기금 그 자체는 장래의 공산주의적 분배로의 과도적 형태를 표현하고 있다.”5)
“사회적 소비기금에 의하여 필요생산물이 분배되는 경우에 작용하는 원칙은, 이미 노동에 따른 분배원칙은 아니지만, 아직 욕구에 따른 분배원칙도 아니며, 욕구에 균형을 이루는 분배원칙에 의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한 분배원칙에서 다른 분배원칙으로의 과도적 형태이며, 인간의 욕구에 대한 충족은 어쨌든 일꾼의 노동급부와는 무관하게 사회에 의해 실행되며, 무엇보다도 저소득 가족 및 물질적 보장도가 낮은 가족을 위하여 이루어진다”6)
이렇게 볼 때 사회적 소비기금의 성격은 노동에 따른 보수를 넘어서서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의 맹아를 분배에서 실현하는 과도적 형태라 할 수 있다. 사회적 소비기금 자체가 필요에 따른 분배 자체는 아니지만 그와 유사한 분배라고 할 수 있다. 즉, 사회주의 태내에서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의 분배형태의 싹이 자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소비기금의 비중에 대해 짜골로프 교과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61-70년에 주민의 실질소득 증대 가운데 약 64%는 노동에 따른 지불기금의 증대가 차지하고, 약 1/3이 사회적 소비기금의 증대(1961-65년에는 30.5%, 1966-70년에는 32.2%)에 의한 것이었다”.7)
이러한 상황은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에서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이행이 분배의 측면에서 본다면 노동에 따른 보수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사회적 소비기금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쏘련에서는 공공운수, 문화시설, 사회서비스 등을 모두 무료로 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이들 서비스의 이용을 사회적 소비기금에서 지출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분배영역에서 사회주의 발전의 합법칙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에 따른 보수를 골간으로 하되 사회적 소비기금을 점차로 확대하여 결국에는 필요에 따른 분배로 이행하는 것이 가능한 전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더 짚을 필요가 있는 것은 사회주의에서 노동에 있어서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구분이 필요한가이다. 우선 맑스 자신의 언급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생산형태의 폐지는 노동일을 필요노동만으로 제한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렇지만 필요노동은 다른 사정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범위를 확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편에서는 노동자의 생활조건이 더욱 풍부하게 되어, 그들의 생활상의 요구들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한편에서 오늘날 잉여노동의 일부분은 필요노동으로, 즉 사회적인 예비재원과 축적재원의 획득에 필요한 노동으로 계산되게 될 것이다.”8)
“잉여노동일반은 주어진 욕구의 정도를 넘는 노동으로서 항상 존재하여야 한다.”9)
위의 맑스의 두 언급은 상호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언급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구분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불필요하며 그것은 필요노동의 범위가 확대되기 때문이라 했다. 이는 노동자들의 욕구의 범위에 개인적 소비만이 아니라 사회적 욕구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언급에서는 잉여노동 일반은 모든 생산양식에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잉여노동이라 함은 개인적 욕구를 넘어서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맑스의 언급은 노동자에게 개인적 욕구와 사회적 요구가 있고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을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 구분할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궁극적으로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구분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맑스의 언급이 궁극적인 언급이라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인 사회주의에서는 노동이 아직 제 1의 욕구가 되지 못하고 필요에 따른 분배가 아니라 노동에 따른 분배를 하는 단계이다. 그에 따라 노동자의 개인적 욕구와 사회적 욕구를 구분하여 전자를 필요노동으로 규정하고 후자를 잉여노동으로 구분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에 따라 보수도 필요노동에 해당하는 것은 노동에 따른 보수가 되어 임금으로 지불되고 잉여노동에 의한 것은 사회적 소비기금의 형성, 확대재생산을 위한 기금, 국가의 관리, 국방 등으로 지출되는 것이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국가로 집중되는 잉여생산물의 범위를 명확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노동에 따른 보수를 위한 기준이 명확하게 된다는 장점도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구분은 일정하게 의미가 있고 이러한 구분은 개인적 욕구와 사회적 욕구가 융합되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서는 맑스의 언급대로 소멸할 것으로 전망된다.
3. 잔존하는 상품-화폐관계의 성격
1) 사회주의에서 상품-화폐관계가 잔존하는 이유
기존의 쏘련에서는 상품-화폐관계가 잔존했다. 나아가 쏘련에서 상품-화폐관계가 잔존하는 것을 넘어 전면적으로 확대되었을 때 쏘련은 붕괴의 길로 치달았던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에 잔존하는 상품-화폐관계에 대한 규명은 쏘련 붕괴를 딛고 다시 시작되는 사회주의 운동에 있어서는 핵심적 이론적 쟁점으로 되고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에서 반드시 규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스탈린은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제문제라는 논문에서 쏘련에서 상품-화폐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이것의 근거로는 공업에서 전인민소유인 국유형태와 농업에서 협동조합적 소유라는 서로 다른 소유형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들었고 노동자와 농민이 생산물의 교환에서 상품-화폐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생산물의 교환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었다. 그리고 집단농장에서 농민들이 개인적 부속지에서 생산하는 사적 생산물이 시장을 통해 거래되는 것도 상품-화폐관계의 하나로 들었다. 이러한 스탈린의 언급은 정확한 것이다.
서로 다른 소유형태의 교류를 위해 상품-화폐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는 뒤집으면 집단농장의 협동조합적 소유가 공업과 같이 전인민소유로 발전하면 상품-화폐관계가 소멸할 것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농업에서 협동조합적 소유는 착취가 없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적 소유라는 점은 분명하다. 농민이 부속지에서 생산하는 생산물은 소생산의 잔존물인데 이 또한 착취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농업에서 이렇게 공업의 전인민소유와 달리 협동조합적 소유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단지 생산관계의 측면만 주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농업에서 협동조합적 소유가 존재하는 근본적 이유는 농업의 생산력발달이 공업에 비해 낮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업에서 생산력 발달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농업과 공업이 융합되는 단계에 이르면 농업에서도 협동조합적 소유가 공업과 같이 전인민소유로 발전할 것임을 전망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하나 언급할 것은 국유기업에서 생산하는 생산물이 상품의 성격을 가지는가이다. 이에 대해서 쏘련에서는 경제학자들 간에 입장이 많이 엇갈렸는데 1965년 코시킨 개혁에 이르러서는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I부문과 소비재를 생산하는 II부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생산물에 상품적 성격이 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을 보다 엄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상품생산은 사적 생산자의 생산물이 교환을 통하여, 즉, 화폐를 매개로 거래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를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물에 적용하면,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I부문의 생산물은 사적 생산자가 아닌 국유기업에서 생산하여 국유기업으로 생산수단이 이전된다는 점에서 상품이라 할 수 없다. 이렇게 생산수단이 상품이 아니라는 것은 위의 스탈린의 논문에서는 명확하게 지적되고 있는데 이를 1965년의 코시킨 개혁이 뒤집은 것이다. 그리고 소비재를 생산하는 II부문의 생산물이 상품인가도 쟁점이 된다. II부문의 생산물은 사적 생산자의 생산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상품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소비재는 화폐를 매개로 노동자 개인과 농민에게 이전된다는 점에서 상품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II부문이 생산하는 소비재는 상품이 아닌 성격과 상품인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은 사회주의 사회가 자본주의를 계승했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짜골로프의 정치경제학 교과서는 보상관계를 통해 인도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물 전체가 상품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1965년의 코시킨 개혁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이다. 직접 인용해보자.
“구체적․역사적 기능조건에 관계없이, 상품 관계의 가장 단순하며 가장 기초적인 표지를 이루는 것은 생산물이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보상방식을 통해 인도된다는 것이다. 보상관계로서 상품관계는 사회주의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볼 수 있다.”10)
그러나 상품관계의 성격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규정의 핵심은 보상관계, 즉, 대가를 갖는 유상교환 전체를 상품관계로 보는 것인데 만약 이렇게 본다면 상품생산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한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 사회 또한 상품생산 사회의 한 변종으로 보게 되는 근거가 된다. 이렇게 보면 상품생산의 반대는 무상교환이 된다. 즉, 대가없이 얼마든지 무상으로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매우 안이하고 비과학적인 접근이다. 상품생산은 본질적으로 사적 생산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상품생산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다. 따라서 상품생산의 반대는 사적 생산이 아닌 사회적 생산으로 되는 것이지 무상교환이 상품생산의 반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상품생산의 하나의 표지로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교환이 화폐를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유상인가 무상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품생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화폐를 매개로 하는가가 상품생산을 규정하는가의 기준이 된다. 따라서 화폐의 존재 자체는 그 사회가 상품생산사회라는 것이다. 쏘련에서 화폐가 존재했다는 것은 쏘련에서도 상품관계가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쏘련에서 생산수단은 사적 생산도 아니며 화폐를 매개로 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상품생산이 아니고 소비재의 경우 상품이 아니면서 동시에 상품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농업에서 협동조합적 소유가 전인민적 소유로 성장할 경우 상품-화폐관계 전체가 소멸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상품-화폐관계에 대해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가 반동적인 코시킨 개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상품-화폐관계에 대한 활용
이렇게 상품-화폐관계의 존재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민감한 주제가 된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존재하는 상품-화폐관계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상품-화폐관계는 ‘잔존’하는 것이다. 즉, 사회주의 경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고 주도적 역할을 상실한 채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경제를 규정하는 지배적 법칙은 사회주의의 기본적 경제법칙과 균형있는 발전 법칙 등이다. 이들이 생산의 목적과 자원의 배분을 결정하는 법칙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품-화폐관계는 잔존하면서 공업에서 국유와 농업에서 협동조합적 소유라는 차이를 보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보면 사회주의에서 잔존하는 상품-화폐 관계는 배척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활용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에 기초하여 잔존하는 상품-화폐관계를 통제할 힘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코시킨 개혁처럼 상품-화폐관계를 경제 전체에 걸쳐 전면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없다면 상품-화폐관계는 사회주의 경제에 봉사하면서 점진적으로 소멸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3) 가치법칙에 대하여
상품-화폐관계가 사회주의에 잔존하는 상황은 상품생산에 고유한 법칙으로서 가치법칙을 존재하게 한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쏘련이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가치법칙이 쏘련에 존재한다는 스탈린의 언급을 거론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다.
가치법칙은 자본주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봉건제하의 상품 생산 등 상품생산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법칙이다. 왜냐하면 상품생산은 사적 생산자의 생산이 화폐를 매개로 교환되는 것이기 때문에 가치라는 규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거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자본주의는 가치법칙에 기초하여 잉여가치의 취득이라는 법칙으로 더 발전했을 뿐이다. 자본주의의 유산을 물려받아 공산주의로 전진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부분적으로 상품-화폐관계가 잔존하고 그 결과로서 가치법칙도 존재하는 것이다.
가치법칙에 대해 스탈린은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제문제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치법칙의 작용은 상품유통의 범위에 국한된다. 그것은 물론 생산으로 뻗친다. 사실, 가치법칙은 우리의 사회주의 생산에서는 조정기능을 가지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에 영향을 미치며, 이러한 사실은 생산의 방향을 잡을 때에도 무시될 수 없다. 사실상, 생산의 과정에서 소비되는 노동력을 보충하는 데 필요로 되는 소비재는 가치법칙의 작용의 영향을 받는 상품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고 실현된다. 가치법칙이 생산에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이와 관련하여 비용계산 및 이윤성, 생산비용, 가격 등과 같은 것들은 우리의 기업에서 실제로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의 기업은 가치법칙의 고려없이 기능할 수 없고 또한 기능해서도 안된다.”11)
이와 같은 스탈린의 언급은 사회주의에서 가치법칙이 존재하며 그것은 활용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가치법칙의 존재 자체가 자본주의사회라는 주장의 근거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에서는 잔존하는 상품-화폐관계의 활용을 위해 가치법칙 또한 활용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한편 상품-화폐관계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도달함에 따라 소멸하는 것에 맞추어 가치법칙 또한 소멸한다. 즉, 가치법칙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상품생산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스탈린의 언급을 들어보자.
“가치법칙은 영속적인 법칙이고 역사발전의 모든 시기들에 대해 구속적이고, 만약 그것이 공산주의 사회의 두 번째 단계에서 교환관계의 조정자로서 그 기능을 상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생산의 다양한 분야들 사이의 관계의 조정자로서의, 그것들 사이의 노동 분배의 조정자로서의 그 기능의 발전의 이러한 단계에서도 존속한다고 말해진다.
그것은 완전히 비진실이다. 가치법칙과 마찬가지로 가치는 상품생산의 존재와 관련된 역사적 범주이다. 상품생산의 소멸과 더불어 가치 및 그 형태와 가치법칙 역시 소멸한다.”12)
이러한 스탈린의 언급은 정확하다. 가치법칙과 상품생산의 연관의 필연성을 언급하고 있고 상품생산이 완전히 소멸하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가치법칙 또한 소멸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폐지된 후 가치법칙의 운명에 대해 말한 맑스의 언급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 둘째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철폐된 뒤에도 사회적 생산이 유지되는 한, 가치규정은 다음과 같은 의미--즉 노동시간의 규제, 상이한 생산분야로의 사회적 노동의 분배, 그리고 이것에 관한 부기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지배적이다.”13)
맑스의 언급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철폐된 후에 가치규정이 노동시간에 대한 규제, 노동의 분배, 부기 등이라는 의미에서 여전히 지배적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규정은 언듯 보면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도 가치법칙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잘못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맑스의 언급은 가치법칙이 위와 같은 의미로 해소된다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가치라는 규정 자체는 노동이 그 자체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응고된 노동으로, 물화된 노동으로만 평가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이는 상품생산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맑스의 위 언급에서 상품생산이 유지된다는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서 가치법칙은 소멸한다는 스탈린의 언급은 타당하다.
4. 코시킨 개혁의 반동성
1) 코시킨 개혁을 통한 상품-화폐관계의 전면화
1965년의 코시킨 개혁은 쏘련에서 상품-화폐관계를 전면화시킨 것이었다. 즉, 생산수단을 포함한 국유기업의 모든 생산물과 협동조합적 농업의 생산물 모두를 상품으로 규정하고 이윤실현을 강제하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각 기업은 의무적으로 약 15%에 이르는 이윤율의 실현을 강제받았고 또한 고정생산기금과 유동생산기금에 대한 사용료를 약 6% 국가에 지불해야만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윤원리를 전반적으로 확산시키자 생산수단의 가격이 오르게 되었고 이는 1967년의 도매가격 인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코시킨 ‘개혁’을 반영하여 짜골로프의 정치경제학 교과서는 사회주의 사회가 한편으로 계획성 원리가 지배하고 다른 한편으로 상품생산 원리가 지배하는 대극적인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라고 규정하기까지에 이른다. 그러나 이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토대 위에서 각 개별기업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적으로 기업을 운영하라는 지시에 다름 아니었고 이는 심각한 불협화음을 내면서 쏘련 경제 전체를 침몰시키게 되었다.
후루시초프가 전인민당, 전인민국가를 내세우면서 정치와 사상에서 수정주의를 시도했다면 브레즈네프 시대의 코시킨 개혁은 경제에서 수정주의를 전면화시킨 것이었다. 이렇게 경제에서 수정주의가 전면화되고 상품-화폐관계, 이윤원리가 각 개별기업을 지배하면서 사회주의적 창발성은 질식되게 되고 생산의 무정부성이 점차 가시화되면서 중앙정부의 계획이 마비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코시킨 개혁이 행해졌던 원인,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주요한 것은 각 국유기업의 거대한 시설의 활용도, 수익성이 높지 않았다는 것을 수정주의자들은 들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고정기금과 유동기금에 대해 막대한 사용료를 징수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각 개별 국유기업의 효율성을 높이는 문제는 노동생산성의 향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인데 1965년 당시 노동생산성 향상이 정체되었다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에 비해 2배 가까운 노동생산성의 향상이 있었다는 자료만 존재한다. 따라서 수정주의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일종의 변명에 지나지 않고 자신들의 잘못된 노선을 합리화하는 구실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각 개별기업을 이윤추구의 단위로 변경시켜야만 경제가 발전한다는 주장인데 이는 그전까지 거대한 발전을 이루었던 사회주의 경제의 성과를 무시하는 것이다. 각 개별기업은 물론 수익성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스탈린 하에서도 이윤이라는 개념은 존재했고 각 개별기업은 수익성을 올리는 것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기여였던 것이다. 그러나 코시킨 개혁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기업의 목적 자체를 이윤추구로 변경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개별기업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하라는 지시에 다름아니었다.
끝으로 코시킨 ‘개혁’은 그 정당성의 하나로 개별 노동자에 대한 물질적 자극기금을 확대하기 위해 기업의 이윤의 폭을 확대할 필요를 들고 있는데 이는 레닌의 물질적 자극이라는 원칙을 악용하여 자본주의적인 반동적 개혁을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물질적 자극은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 자체가 경제운영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또한 노동자는 노동에 따른 보수이외에 사회적 소비기금에 의해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어서 사회의 발전에 직접 이해관계가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사회주의적 창발성의 발휘를 기본으로 하고 그에 더해 물질적 자극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코시킨 개혁은 이윤추구 원리를 전면화하기 위해 물질적 자극이라는 것을 내세웠던 것이다.
2) 노동해방에 대한 부정
또 하나 코시킨 개혁의 반동성은 노동해방이라는 사회주의 대원칙에 대한 부정에서 드러난다.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성립함에 따라 노동자들은 해방된 노동을 하게 되었다. 자본가로부터의 착취가 소멸되고 노동자와 생산수단의 관계는 직접적 결합, 무매개적 결합, 개인과 사회의 직접 결합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생산력의 거대한 해방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착취가 전면적으로 폐지되는 새로운 단계로 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코시킨 개혁은 자본주의적 이윤원리를 전면에 내세움에 따라 노동해방이라는 대의를 부정한 것이었다.
코시킨 개혁은 무엇보다도 각 국유기업에서 국가로 약 6%에 이르는 고정생산기금과 유동생산기금의 사용료를 징수하는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기업이 수익성을 내서 그것을 사후적으로 국가에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정기금 사용료를 원천적으로 징수한다는 것은 사회주의 원칙에 대한 중대한 위반이었다. 이는 고정기금이라는 과거의 노동이 스스로 가치증식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과거노동이 스스로 가치증식한다는 것은 생산수단이 자본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동자가 자본주의에서 착취를 당하고 자본에 예속되는 것은 과거노동이 산 노동, 즉, 노동자의 우위에 서서 산 노동을 빨아먹기 때문이다. 이 관계를 역전시키는 것, 즉, 산 노동이 과거노동, 즉, 생산수단의 우위에 서는 관계가 설 때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성립하고 노동자는 해방된 노동을 하게 되는 것인데 코시킨 개혁의 고정기금 사용료는 산 노동과 과거노동의 관계를 뒤집은 것이었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창발성은 급격하게 사라졌고 브레즈네프 시대는 우울하고 침체된 시대라는 양상을 빚게 된 것이었다.
3) 국가의 역할에 대한 비과학적 태도
코시킨 개혁은 한편으로 국가에 대한 비과학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코시킨 개혁은 사회주의 원리와 자본주의 원리를 절충시킨 것이었다. 짜골로프 교과서에는 이를 대극적 원리의 통합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반된 원리를 통합하는 주체가 국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국가에 대한 맹신을 보여주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경제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주체라는 것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국가 또한 객관적인 경제법칙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이지 객관적 경제법칙을 창조하거나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자본주의 원리를 국유기업에 도입하고서 이를 국가가 알아서 통합하라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가의 전반적인 계획과 개별기업의 활동은 괴리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브레즈네프 시대에 온갖 부패와 탈법, 사기가 횡행하기 시작한 것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일례로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새로운 공장의 건설이 광범하게 진행되었지만 많은 공장들이 완성이 안되고 공장건설이 미완성의 상태로 남는것이 광범하였다. 이는 공장건설을 지속하여 국가로부터 물자를 계속 타내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원리를 도입해서는 안되며 사회주의적 창발성을 경제발전의 기본으로 하고 노동에 따른 보수라는 원칙에 맞게 적절한 물질적 자극을 주는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의 역할은 이러한 사회주의적 경제가 활성화되도록 경제법칙을 활용하고 공산주의로 전진을 자극하는 것이어야 하지 이윤추구원리와 사회주의 원리를 통합하는 주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4) 철학에 있어서 절충주의
코시킨 개혁은 한편으로 철학적으로 절충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코시킨 개혁은 거대한 생산설비의 효율화라는 목적을 위해 사회주의 원리를 강화하는 어려운 길을 간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기존의 성과를 갉아 먹고 자본주의적 탐욕을 도입하는 쉬운 길을 택한 것이었다. 이러한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이미 후르시쵸프 수정주의에 의해 사상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전인민국가, 전인민당 노선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상실한 지도부는 과학의 진전이 아니라 절충을 택했던 것이다. 사회주의원리와 자본주의 원리는 경제에서 절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의 발전은 자본주의의 원리를 철저히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잔존하는 계급사회의 잔재를 혼신의 힘을 다해 극복하는 길을 통해 사회주의가 발전하고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점차로 접근하는 것이다.
5) 생산력주의적 편향
다른 한편 코시킨 개혁은 생산력주의적 편향을 보여준다. 사회주의 발전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다같이 중요하고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성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코시킨 개혁은 자본주의 요소를 확산시키더라도 생산력만 발전시키면 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이러한 편향은 등소평에게서 전형적인데 중국의 경우 이로 이해 자본주의로 변절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짜골로프의 교과서에서는 사회주의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의 차이점의 핵심을 낮은 생산력으로 들고 있다. 이는 틀린 것은 아니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와 차이가 나는 결정적인 지점은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막 탄생하였기 때문에 계급사회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생산력도 당연히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비해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렇게 문제를 총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단순한 생산력의 차이라는 것으로 보면 문제를 그르치게 된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 도시와 농촌의 대립, 국가의 존재, 상대적으로 낮은 생산력 등을 통일적으로 이해하여 사회주의와 높은 단계공산주의와의 차이점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5. 높은 단계 공산주의의 전망
1)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사회의 발전은 바로 이러한 주요모순의 운동의 결과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쏘련의 경우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후 과도기가 계속되었다. 전시공산주의, 신경제정책의 시기(NEP)에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성립하지 못했고 이 시기에는 ‘누가 누구를’이라는 원칙이 지배하였다. 즉, 타도된 자본가계급이 반혁명으로 노동자계급을 타도하고 자본주의 복고를 이룰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계급이 농민과 연합하여 착취를 폐지하고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성립시킬 것인가가 핵심적인 문제였다. 이 시기의 주요모순은 노동자계급 대 자본가계급,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의 대립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29년 이후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성립한 후로는 문제가 달라진다. 스탈린은 1936년에 사회주의의 승리를 선언했는데 이는 실제로는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성립했다는 선언에 다름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스탈린의 선언은 다소 경솔한 점이 있다.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성립과 사회주의의 승리와는 일정하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는 계급사회의 잔재가 완전히 소멸하여 사회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도약하는 것, 즉, 사회주의 자체가 소멸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문제는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성립하고 난 후에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은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누가 누구를 이라는 원칙은 사라졌지만 계급사회의 잔재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주의에서는 계급사회의 잔재를 둘러싼 투쟁이 주요모순으로 전화한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이 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도시와 농촌의 대립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외화라는 엥겔스의 언급을 염두에 둔다면 핵심적인 것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확립된 뒤로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을 극복하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 사회주의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의 운동과 지양을 통해 사회주의 사회는 점차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접근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라는 모순은 적대적 모순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사회주의 생산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고 노동자계급 내부의 대립이라는 점에서 비적대적이고 국가와 사회, 그리고 노동자계급 전체의 의식적 노력을 통해 극복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 고착화된다면 쏘련 붕괴에서 보듯이 적대적 모순으로 전화할 수도 있는 것이다.
2)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사회주의)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의 차이
기존에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의 차이는 주로 맑스의 고타강령 비판에 나오는 정식들로 이해되어 왔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는 쏘련의 성립과 발전, 붕괴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를 반영하여 이를 보다 정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고타강령 비판에서 직접 인용해보자.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에서, 즉, 개인이 분업에 복종하는 예속적 상태가 사라지고 이와 함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도 사라진 후에; 노동이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차적인 생활욕구로 된 후에;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고, 조합적 부의 모든 원천이 흘러 넘치고 난 후에--그때 비로소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신의 깃발에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게 된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14)
이러한 서술은 매우 풍부하며 종합적인 시야를 제공하고 있다. 분업,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 노동이 일차적 욕구로 되는 것, 생산력의 성장, 그리고 능력에 따라 필요에 따라라는 원칙 등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의 주요 지표를 제공하고 있다.
이를 정리하면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와 달리 계급사회의 잔재를 완전히 극복하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빠진 것은 국가의 소멸이 언급되고 있지 않은 점이다. 국가의 존재는 그 자체가 계급대립의 비화해성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도달하여 계급사회의 잔재가 사라진다면 국가 또한 사라진다는 것은 합법칙적이다.
3) 경제에 있어서 높은 단계 공산주의의 전망(상품-화폐관계 소멸의 전망)
상품-화폐 관계가 부분적으로 사회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것은 경제에서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와 구별되는 결정적 지표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상품-화폐관계의 영역은 점차 축소되고 결국에는 소멸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쏘련에서 소비재의 가격이 경향적으로 인하되었다는 것이다. 주로 스탈린 시대에 그러했는데 이는 한편으로 노동자들의 손에 있는 화폐의 구매력을 높여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소비재가 경향적으로 낮아지는 것은 노동생산성의 향상의 결과를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인민 전체가 향유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결과가 가능해지는 과정을 좀 더 추적해보자.
사회주의에서는 평균이윤율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와 국가가 자원의 배분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I부문의 생산물의 가격은 자본주의에 비해 매우 낮을 수밖에 없다. 그에 따라 생산수단의 가격이 낮아지면 당연히 소비재의 가격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어 가격의 인하가 일정한 경향성을 가지게 되면 이는 다시 역으로 노동생산성 향상의 자극제가 된다. 이러한 메카니즘의 결과로 I부문과 II부문은 상호자극을 주게 되고 이는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한편에서 농업의 발전으로 협동조합적 소유가 점차 전인민적 소유로 이행하게 되면 상품-화폐관계의 영역은 매우 축소되게 되고 궁극적으로 소멸하게 된다. 이렇게 공업에서의 가격인하, 농업에서 전인민적 소유로의 전화 등이 결합되어서 상품-화폐관계는 최종적으로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공업과 농업의 융합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기존의 쏘련에서는 공업과 농업의 융합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농업의 공업화로 파악했다. 짜골로프 교과서에서 잠깐 인용해보자.
“ 농업노동이 공업적 노동의 한 변종으로 전화하는 과정은 사회의 물질적-기술적 토대의 발전에 의해 뒷받침된다. 농업의 물질적-기술적 토대를 개조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은 다른 부문들의 그것과 마찬가지이다. 즉, 전화, 복합적 기계화, 농업 전부문을 포괄하는 자동제어 기계체제로의 이행, 화학화 등이다.”15)
농업노동의 공업적 노동의 한 변종으로 전화라는 관점에 기존 쏘련에서 농업을 대하는 태도가 응축되어 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농업은 결코 공업과 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의 관점은 농업의 특수성을 무시하는 발상이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극복이 육체노동의 정신노동화가 아닌 것처럼 농업은 결코 공업의 한 변종으로 될 수 없다. 농업과 공업의 융합을 위해서는 농업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전제가 필요하다. 농업은 공업과 달리 자연의 재생산이라는 본질적 특성을 갖고 있다. 이는 공업에서 찾을 수 없는 농업의 특성이다. 논과 밭, 산림을 재생산하는 농업의 특성은 식량과 원료의 생산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 자연 자체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농업과 공업은 융합될 수는 있어도 농업의 공업화는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도 육체노동의 정신노동화로 파악되어서는 안된다. 육체노동의 가치와 기쁨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대립을 극복해가야 한다. 이는 모순론의 견지에서 보면 대립하는 두 측면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로 전화되는 것이 아니라 두 측면 모두의 지양으로 새로운 질이 창출된다는 것을 상기해도 그러하다. 이렇게 농업의 특수성, 육체노동의 가치를 모두 인정하고 전제해야만 대립들의 극복이 가능해진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짚을 점은 새로운 사회의 기본단위는 농공복합체라는 것이다.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 극복된다는 것, 공업과 농업이 융합된다는 것은 산업의 측면에서 농공복합체가 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쏘련에서는 1950년대부터 농공복합체가 광범위하게 출현했었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 인민공사는 농,공,상,학,병의 통일체였는데 이는 농촌을 중심으로 한 중국혁명의 특성과도 맞아떨어지고 또 공산주의 사회의 기본세포라는 점에서도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맺음말
쏘련의 붕괴는 코시킨 개혁으로 인한 상품-화폐관계의 전면화, 자본주의원리의 경제에 도입으로 발생한 것이었다. 짜골로프 교과서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사회주의 원리와 자본주의 원리는 대극적인 것이다. 이는 적대적인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무리 국가가 역할을 한다고 해도 이 원리를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절충주의가 쏘련 사회의 파탄을 불러왔던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사회주의 사회에서 상품-화폐가 잔존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 사회에서 상품-화폐관계가 잔존하는 것은 불가피하며 상품-화폐관계와 가치법칙은 활용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지배적인 관계는 사회주의적 관계이고 지배적인 법칙은 사회주의의 기본적 경제법칙과 균형있는 발전법칙이다. 이들 법칙에 충실할 때 사회주의 사회는 발전하고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사회주의 건설이 단지 이상의 추구이어서는 안되고 일정한 합법칙성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쏘련의 경우 그러한 합법칙성을 따랐을 때 사회주의 건설을 순조롭게 할 수 있었으나 코시킨의 반동적 개혁으로 그러한 합법칙성을 위배했을 때 사회주의 건설은 파탄되었고 결국에는 붕괴로 치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류사회는 20세기를 통해 사회주의 건설이 현실 가능하다는 것, 착취의 폐지가 현실가능하다는 것,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비해 한없이 우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제 21세기의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은 쏘련 붕괴를 딛고 새로이 시작될 수 있다.
쏘련의 경험은 철학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절충주의는 손쉬운 선택이지만 그것의 결과는 파탄이라는 것, 따라서 어려운 길이지만 과학의 추구를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쏘련 붕괴의 교훈을 정확히 체득한다면 21세기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전망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의 함성으로 가득찰 것이다. <노사과연>
1) 김윤환 편역, 정치경제학 3, 인간사, p. 209에서 재인용
2) 짜골로프 감수, 정치경제학 교과서 II-1, 새길 출판사, p. 216.
3) 맑스, 자본론 1권, 비봉출판사, 제 1판, p. 500.
4) 김윤환 편역, 정치경제학 4, 인간사, p. 98-99.
5) 짜골로프 감수, 정치경제학 교과서 II-2, 새길, p. 61.
6) 위의 책, p. 63.
7) 위의 책, p. 67.
8) 맑스, 자본론, 짜골로프 정치경제학 교과서 II-1, p. 181에서 재인용.
9) 맑스, 자본론, 짜골로프 정치경제학 교과서 II-1. p. 184에서 재인용.
10) 짜골로프 감수, 정치경제학 교과서 II-1, 새길, p. 317.
11) 「스탈린 선집 2, 전진 출판사, p. 241.
12)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제문제」, 스탈린 선집 2, 전진 출판사, p. 243.
13) 맑스, 자본론 3권 제 1판, 비봉출판사, p. 1049.
14) 맑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선집 4, 박종철 출판사, p. 377.
15) 짜골로프 감수, 정치경제학 교과서 II-2, 새길, p. 326.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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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의" 정세와 노동 제39호(20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