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조작ㆍ이데올로기 투쟁으로서의 ‘노동개혁’
‘노동개혁’, ‘노사관계 개혁’.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에는 사실상 들어본 적이 없는 구호이다. 몇몇 경제적 사정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당시까지는 노동자들이 사실상 전적으로 무권리 상태에 있었고 자본의 파쇼적 독재가 거침없이 관철되고 있어서, 자본 즉 국가 측에서 볼 때 ‘개혁’이니 뭐니 할 필요ㆍ근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경했던 구호가 그 대투쟁 이후에는, 특히 1996년 4월 당시 대통령 김영삼이 “신노사관계 구상” 어쩌구 떠들고 나온 후에는 신물이 날 만큼 자주 그리고 시끄럽게 들리고 있다. 그만큼 자본이 노동자계급을 무력화시켜야만 할 정치적ㆍ경제적 필요와 열정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 역시 지난 해 말부터 “4대 구조개혁” 운운하며 시동을 걸더니, 금년 하반기부터는 “4대 구조개혁 중 노동개혁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모든 정책역량을 최대한 집중할 것”1) 운운하면서 아예 작정을 하고 밀어붙이려 덤벼들고 있다.
그런데, ‘개혁’이라는 말을 사전에는 대개 “제도나 체제를 새롭게 뜯어고침”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그렇게 중립적인 말이 아니다. 말하자면, “제도나 체제를 새롭게 뜯어고쳐 좋게 함” 정도로 풀이될 수 있는 말, ‘개정(改正)’ㆍ‘개량(改良)’과 닮은 말이고, 따라서 계급ㆍ계층 간에 이해가 서로 대립되는 어떤 “제도나 체제”를 뜯어고치려 할 때, ‘과연 개정이냐, 개악이냐’ 하고 서로 다투는 것이다.
굳이 이 좀스러운 얘기로부터 시작하는 까닭은, 이러한 개혁 소동은 동시에 치열한 이데올로기 투쟁, 혹은 더 절실히 얘기하자면, 자본, 즉 국가 측의 집요한 대중 이데올로기 조작이기도 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의 ‘노동개혁’ 몰이에서도 저들은 그러한 허위 이데올로기 조작, 대중조작을 강화하고 있고, 아예 노골화하고 있다. 예컨대, 보도에 의하면,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최경환은 “‘구조개혁이 강력한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개혁에 대한 국민의 공감대 형성이 핵심’이라며 개혁의 필요성 및 지연 시 문제점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를 주문했다”2)고 한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이 사회, 한국의 언론이란 게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사실상 극우언론이요 관변언론인데, 이들이 모두 나서서 대대적으로 ‘노동개혁’의 필요성ㆍ당위성ㆍ시급성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나서고 있을 뿐 아니라, 청년실업이 만연한 것은 이른바 임금피크제 도입 및 정규직 노동자의 해고요건 완화를 거부하는 정규직 조직 노동자들의 이기주의 때문이라는 식으로 청년들을 세뇌, 극우적으로 동원하여 민주노총을 공격하고 있다. 이러한 식의 민주노총, 정규직 조직노동자 공격은 수년 전에는 사회원로를 자처하는 늙은 속물들의 몫이었는데, 그 역할의 극우성ㆍ속물성이 폭로되어 그들이 더 이상 어릿광대로 나서지 않게 되자 이제 순진한 청년들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그렇게 모든 정책역량, 선전역량을 최대한 집중하여 이른바 임금피크제 및 정규직 노동자의 해고요건 완화의 법제화를 핵심으로 하는 저 이른바 ‘노동개혁’이 심각한 실업문제, 특히 팽대한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완화하는 길인 것 같은 허위선전을 강화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허위 이데올로기, 대중조작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을 분열시켜 서로 대립하게 하여 무력화시키고, 그리하여 이윤의 극대화라는 자본의 탐욕을 최대한 채우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저들 자본의 ‘노동개혁’ 몰이와 투쟁하는 데에서는 저들이 유포ㆍ선전하는 허위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이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임금피크제’와 해고요건 완화로 청년실업 축소한다는 사기극
먼저 확인하자면, 이른바 ‘노동개혁’을 둘러싼 저들과의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선, 우리의 무기는 과학이다. 왜냐하면, 저들이 바라는 대로 법제화를 통해서 이른바 ‘임금피크제’를 강제하고, 정규직 해고요건을 완화했을 때, 과연 그 효과가 청년실업 혹은 실업 일반의 감소로 나타날 것인지, 아니면 그 증대로 나타날 것인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닐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당연히 어디까지나 과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저들 자본은 왜 이 시기에 ‘노동개혁’이라는 소동을 벌이며 마구 몰이를 해대는 것일까?
1987년의 노동자 대투쟁과 그 이후의 일련의 투쟁을 통해서 특히 대기업 노동자의 상당 부분이 조직되어 있고, 그리하여 비록 경제주의적이지만 상당한 권리를 획득하고 있다는 조건에서 이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자본의 본성적 탐욕은 별도로 하자. 저들이 지금 이 시기에 특히 ‘노동개혁’ 몰이를 하는 이유만을 보자면, 그것은, 주지하는 바이지만, 실업문제가, 특히 청년층의 실업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달해 있고 악화돼가고 있는 추세여서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자칫 자본주의라는 착취체제 자체의 존속을 위협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사회상태가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간에도 심각했던 청년실업률이 최근에는 정부가 발표하는 통계상으로조차 10%를 훌쩍 넘어 40만 명 이상의 20대가 실업자인 것으로 발표되고 있고,3) 실제의 청년실업자수는 1백 수십만 명에 이른다는 것이 공공연한 추산(推算)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정부는 실업자 82만 명… 실제로 따져보니 480만2000명”4)이라는 기사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추산조차 실제를 과소평가한 것일지 모른다.
바로 이렇게 실업문제, 특히 청년층의 실업문제가 심각한 상태에 있을 뿐 아니라 상황이 좀처럼 호전될 전망이 없기 때문에, 또 바로 그러한 상황을 빙자하여 ‘노동개혁’ 몰이로 정규직 조직노동자들을 타격하고 있는 것인데, 저들의 ‘노동개혁’은 과연 이 심각한 실업문제를 조금이라도 완화할 수 있는 것일까?
청년실업 문제를 포함하여 실업문제가 이렇게 심각해지고 있는 직접적인 배경 혹은 원인은, 역시 주지하는 바이지만, 2007년 하반기 이후 지속되고 있는 대공황, 즉 시장의 부족이다. 그러나 좀 더 멀리 바라보면, 자본주의 역사에 실업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던 적은, 전쟁 시기나 그 직후의 복구기 같은 특수하고 예외적인 상황과 시기를 제외하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더구나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바로 그 발전, 즉 경쟁에 의해 강요되는 기술의 혁신과 그에 따른 노동생산력의 발전이 원인이 되어,5)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본주의라는 생산체제, 생산관계 속에서의 노동생산력의 발전이 원인이 되어 실업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져 왔다.
하지만 저들의 ‘노동개혁’에는 이러한 문제의식, 즉 자본주의적 생산체제ㆍ생산관계 속에서 자본주의적 경쟁에 의해서 강제 받는 기술혁신, 그에 따른 노동생산력의 발전이야말로 실업문제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인식은 눈을 씻고 보려야 볼 수가 없다. 아니, 개별자본들은 개별자본들대로, 총자본의 대표 박근혜 대통령님 각하께서는 대통령님 각하대로, 소위 “창조경제”를 추구하며, 거꾸로 실업문제를 심각화시키는 데에 매진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기야 기술혁신, 노동생산성의 증대와 실업과의 관계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경쟁에, 경쟁에 매진하면서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역할이요 운명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탐욕에 눈이 먼 저들은 중ㆍ장년층의 실업률에 비해서 청년층의 실업률이 월등히 높다는 점에만 주목하여, 그리고 또 그 점을 기화로 이른바 ‘임금피크제’의 확대도입과 해고요건 완화를 선전ㆍ선동하면서 물불 가리지 않고 밀어붙일 기세인데, 이들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
우선, 사실은 언급할 가치도 없는 것이지만, 해고요건 완화에 대해서 보자. 저들은, 앞에서 언급했던 이른바 ‘신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하고, 소위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구성하여 노동 관련법을 개악할 당시부터, 그러니까 근 20년 전부터 해고요건이 까다롭기 때문에 ‘기업’이, 즉 자본이 노동자 채용을 기피한다고, 따라서 해고요건을 완화해야 고용이 증대된다고 주장해왔다. 얼마나 파렴치한 주장인가!?
해고요건의 완화는 어디까지나 해고요건을 완화하는 것이지, ‘고용요건’ㆍ‘채용요건’을 완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취업노동자들의 해고를 쉽게 하는 것일 뿐, 노동자들의 채용, 취업을 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해고요건을 완화하는 이른바 ‘정리해고제’를 법제화했지만, 그 정리해고제는 해고자수를 늘렸을 뿐, 결코 취업자ㆍ고용자 수를 늘리지 않았다. 그것은 기술혁신에 따른 과잉노동자를 손쉽게 ‘정리’하는, 해고하는 제도일 뿐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파렴치하게도 해고요건을 완화해야 고용이 증대되고, (청년)실업률이 낮아진다는 미친 가락을 계속 부르고 있다.
이른바 ‘임금피크제’란 임금의, 말하자면, 일종의 역(逆)연공서열제여서 일정 근속연수 혹은 일정 연령 이후에는 임금을 점차 삭감해가는 제도인데, 이러한 제도가 정말 청년실업의 완화ㆍ해소에 조금이라도, 정말 ‘눈꼽만큼’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것일까?
저들은 그러한 제도가 그렇게 임금을 삭감하는 만큼 ‘기업’의 부담을 덜어주고, 그리하여 기업은 그 덜어진 부담을 고용을 확대하는 데에, 즉 청년노동자를 고용하여 청년실업을 완화하는 데에 쓰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선전하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 그에 의해서 절약된 돈으로 청년층의 고용을 늘릴 수 있는데, 기득권을 가진 정규직 노동자들이 그 완고한 이기주의 때문에 이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 저들의 설명이자, 청년실업자들에 대한 선동의 요지다.
정부와 자본, 그리고 그 나팔수들인 언론과 그 전문개들에게는 이러한 주장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사실은 참으로 기괴하고 파렴치한 주장이다. 이 기괴하고 파렴치한 주장이 그야말로 ‘눈꼽만큼’이라도 논리적 타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기업이 인력난, 즉 인력 부족난을 겪고 있다는 것, 그런데 ‘고임금’의 부담 때문에 노동자들을 채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저들은 결코 그것을 입증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업은, 인력난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공황에 따른 세계적인 시장의 축소로 오히려 일종의 인력 ‘과잉난’을 겪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기 때문이고, 전자동화ㆍ무인생산화로 수렴하고 있는 비약적인 기술혁신에 의한 노동력의 끊임없는 배제가 오늘날의 과학기술혁명의 내용이요 추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업은 ‘고임금’의 부담 때문에, 즉 ‘자금난’ 때문에 생산을 축소하고 고용을 회피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 때문에 노동자들의 해고요건의 완화를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다른 의미의 ‘자금난’, 즉 자금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수익성 있는 투자처를 찾지 못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게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는, 저들 재벌의 나팔수들인 극우언론들이 기회만 있으면, ‘기업들이 천문학적 규모의 사내유보금을 쌓아둔 채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한탄하는 데에서도 명백하다.
그렇더라도 임금부담을 줄여서 상품의 가격경쟁력을 높이면 수출, 즉 판매시장을 확대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다시 생산이 증대되면서 그만큼 일자리를 증대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나설지도 모른다. 그럴 듯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주장이 그럴 듯하게 들릴 수 있는 것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현실을 보지 않고 앙상한 형식논리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뿐이다. 예컨대 이웃 중국을 보라. 최근 10여 년 사이에 중국 노동자들의 임금이 ‘많이 올랐다’고는 하지만, 단순히 환율로 환산해서만 비교해보자면, 아직도 한국보다 훨씬 낮다. 그렇다고 중국 노동자들의 기술 수준이나 노동생산력이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중국은 첨단기술 제품에 있어서도 ‘세계의 공장’이다. 이 ‘저임금’과 높은 기술 수준, 노동생산성이 바로, 재벌이고, 중소기업이고 가릴 것 없이 수많은 한국의 기업들이 앞을 다투듯이 중국에 공장을 세워 생산을 하는 주요 이유이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중국에서조차 오늘날 생산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축소되고 있다. 당연히 실업문제도 악화되고 있다. ‘농민공들’의 폭동이 곳곳에서 일어날 정도로!
그런데도 법제화, 즉 강제를 통해 임금피크제가 확대ㆍ도입되면 청년고용이 증대된다?
파렴치한 사기극이다!
더구나 이른바 임금피크제의 확대도입은 정년연장을 전제로 추진되고 있다. 생각해보라. 정년을 연장한다는 것은 기존의 취업노동자들이 그만큼 오래 계속 일자리에 남아서 노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취업노동자들의 정년연장은 어떤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의 신규 채용을 억제ㆍ축소하는 조건이지 결코 그것을 확대하는 조건이 아니다.
이는 바보가 아닌 한, 누구에게나 명확한 사실이다. 그 때문에 대통령님 각하의 명을 받들어 ‘노동개혁’의 총대를 메고 나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최경환조차 이렇게 말한다.―“내년부터 정년 연장이 시행되면서 (향후 3-4년간) 고용절벽 우려가 커지고 있다.”6)
그런데, 그러고 나선 바로 뒤돌아 떠들어댄다.―임금피크제로 청년실업을 줄이자고!
참으로 파렴치한 사기극이다!
진보언론 ≪한겨레≫와 어떤 진보 교수
문제가 이러한데도 우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진보언론’ ≪한겨레≫에서 임금피크제와 관련한 놀라운 글을 읽게 된다. 미국의 코넬대학(Cornell Univ.) 노사관계학 박사, 중앙대 교수 이병훈의 “임금피크제, 대화로 풀자”(≪한겨레≫ 2015. 7. 28.)라는 기고문ㆍ제안이 그것이다.7) 기고자는 기고자대로 영향력 막강한 ‘조중동문’에가 아니라 ≪한겨레≫에 기고한 것은 스스로 진보적이라 자임하기 때문일 터이고, ≪한겨레≫는 ≪한겨레≫대로 ‘진보언론’으로 자임하면서 이 기고문이 분명 진보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게재했을 터이며, 또 우리는 우리대로 ‘노동개혁’ 몰이는 동시에 치열한 이데올로기 투쟁이라고 했던 터인 만큼, 이 놀라운 ‘제안’을 최대한 최대한 정중히 세밀히 들여다보는 예의를 가져보자.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임금피크제가 노ㆍ정 관계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내년 법정 정년 60살의 시행을 앞두고 임금피크제를 강행하려는 정부와 이를 결사반대하는 노동계 사이에 치열한 공방의 하투가 벌어지고 있다.
뭐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다. 이렇게 이어진다.
메르스 사태가 국가 경제에 미치는 타격이 막대하여 민심도 흉흉한 요즘 이러한 노ㆍ정 대립을 바라보는 국민 여론은 그리 달갑지 않을 듯하다.
“메르스 사태가 국가 경제에 미치는 타격이 막대하여”? 입증된 사실이 아니라 그렇고 그런 상투어지만, 뭐 그냥 넘어가자. 그런데 이렇게 이어진다.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 모두는 우리 사회의 핵심 난제로 지적되는 고령화와 청년실업의 문제를 대처하기 위해 실천되어야 할 개혁과제임에 틀림없다.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 모두는 … 고령화와 청년실업의 문제를 대처하기 위해 실천되어야 할 개혁과제임에 틀림없다”?―참으로 진보적이고, 진보적인 발언이며, 대학 교수님다운 참으로 과학적이고 과학적인 발언이다!
그러면 노사관계학 박사님이시고 현직 교수님이신 이 진보적 지식인께서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 모두는 … 고령화와 청년실업의 문제를 대처하기 위해 실천되어야 할 개혁과제임에 틀림없다”라는 것을 어떻게 입증하시는지를 보자. 우선, 정년연장에 대해서,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가운데 연금 수급 연령이 60살 이후로 늦춰지는 여건에서 정년연장을 통해 중고령자들이 직장에서 일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올바른 제도 개선이다.
이것이 ‘정년연장’이 “실천되어야 할 개혁과제임에 틀림없다”는, “올바른 제도 개선”이라는 그의 입증이다.
그런데 수상하다. ‘정년연장’은, 그것이 ‘개선’이든 ‘개악’이든, 변경가능한 “제도”의 문제임에 비해서, 즉 어느 집단인가의 이익을 위한 정책의지가 반영될 수 있는 문제임에 비해서, 어째서 ‘연금 수급 연령’의 인상은 그러한 “제도”의 문제,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여건”, 즉 ‘주어진 조건’ 혹은 ‘논의의 여지가 없는 전제’란 말인가? ‘고령화의 급속한 진행’이야 말하자면 자연적(?)이고 바람직한 추세8)라지만, ‘연금 수급 연령’의 인상 역시 그러한 자연적 추세란 말인가? 정말 그렇게 ‘정년연장’은 제도의 문제이고, ‘연금 수급 연령’의 인상은 여건의 문제입니까? 박사님, 교수님!?
정년연장의 문제, 그리고 그것과 관련한 ‘연금 수급 연령’의 인상의 문제는 좀 뒤에서 다시 보기로 하고, 교수님의 말씀을 계속 들어보면,
또한 연공형 임금체계가 대다수 사업장에서 상당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정년연장으로 인해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이 커져 청년실업의 해결이 더욱 난망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임금피크제의 도입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는 중고령세대와 청년세대가 당면하는 그들의 일자리 문제를 풀기 위해 세대간 상생의 활로로 함께 시행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방금 본 것처럼, 노사관계학 박사 이병훈 교수님의 사악한 논법대로라면, “연금 수급 연령이 60살 이후로 늦춰지는” 것은 “여건”, 즉 ‘주어진 조건’ 혹은 ‘논의의 여지가 없는 전제’이기 때문에 “정년연장을 통해 중고령자들이 직장에서 일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올바른 제도 개선”이 된다. 그런데, 그렇더라도 그것이 왜 ‘임금피크제’의 법제화ㆍ강제를 정당화하는가?
그에 의하면, “연공형 임금체계가 대다수 사업장에서 상당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정년연장으로 인해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이 커져 청년실업의 해결이 더욱 난망해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연공형 임금체계가 대다수 사업장에서 상당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그는 ‘대다수 사업장이 연공형 임금체계를 채택하고 있다’고도, ‘연공형 임금체계를 채택하고 있는 사업장의 비중이 상당하다’고도 쓰지 않고, 바로 저렇게 쓰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정년연장으로 인해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이 커져 청년실업의 해결이 더욱 난망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임금피크제의 도입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쓰고 있다. 무슨 뜻인가?
우선, “대다수 사업장”에 들지 않는 다른 사업장들의 노동자들, 그리고 “대다수 사업장”에서도 “상당 비중”에 해당하지 않는 노동자들은 “연공형 임금체계”가 아니라 성과급 임금체계하에서 시달리고 있거나 비정규직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정년연장으로 인해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이 커져 … 임금피크제의 도입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할 때, 그것은 “연공형 임금체계”하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임금도, 성과급 임금과 비정규직의 임금 수준으로까지는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가능한 한 최대로 그들의 임금과 비슷한 수준으로 낮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저 진보적인 노사관계학 박사님ㆍ교수님이 노리는 바이고, 자본과 그 국가가 사회의 양극화,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해소’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말씀 중에 “정년연장으로 인해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이 커져 청년실업의 해결이 더욱 난망해질 수 있다”고 쓰고 계시는 것도 보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오늘날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 농숙한 말기 자본주의의 만성적인 과잉생산과 특히 현재 진행 중인 대공황 때문, 즉 시장의 부족 때문이 아니고,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 때문이란 말인가?! 다른 것도 아니고 노사관계의 전문가로서는, 자본의 후안무치한 나팔수가 아니고서는, 혹은 영혼이 없는 어릿광대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분명 감히 내뱉을 수 없는 망발이다.
아무튼 그가 볼 때, “이처럼,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는 중고령세대와 청년세대가 당면하는 그들의 일자리 문제를 풀기 위해 세대 간 상생의 활로로 함께 시행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추진하는 방식뿐이다. 그에 의하면,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는” 이렇게 “세대 간 상생의 활로로 함께 시행될 필요가 있는 것”인데,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노ㆍ정 대립이 정부가 일방 강행하려는 무리수로 인해 빚어지고 있다.” “아무리 취지가 옳다 하더라도 추진 방식이 그릇되면 오히려 그 일만 망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정부의 임금피크제 추진 방식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 되어 “일방강행의 무리수로 노동계를 자극하여 공연한 갈등을 유발하고 있는 정부의 태도는 무지스러운 하책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수님께서는 정부가 “필요성을 설득하고 그들의 우려사항들을 해소하려는 보완 조처를 강구”할 것 등, 전문가답게 주옥같은 조언들을 쏟아내고 있는데, 그런 너저분한 얘기들은 대강 넘어가고 여기에서는 한 가지만 확인하기로 하자.
“노동계와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거센 반발”이니, “공공부문 노조들과의 일촉즉발 격돌 상황을 연출”이니, “양 노총 산하의 공공부문 노조들은 정부의 정상화 방침에 맞서 9월과 10월에 연이어 공동파업을 벌이겠다고 공언”이니 하고 말씀하시더니, 이어서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임금피크제 때문에 정면충돌할 기세로 나서고 있는 정부와 노동계가 그 싸움의 고삐를 풀고 세대간 상생의 해법을 찾기 위한 대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지금의 어수선한 사회경제 상황에서 국민들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싸움의 고삐를 풀고 세대 간 상생의 해법을 찾기 위한 대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 국민들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누가 국민이고, 누가 비국민인가? 바로 임금피크제를 법제화하고자 하는 정부와 자본이 국민이고, 그에 “결사반대하는 노동계”, “정면충돌할 기세로 나서고 있는” 노동계, 즉 노동자들은 비국민이다. 맞는 말이다. 저들이 말하는 국민은 언제나 자본과 그 이익의 옹호자, 그 이데올로기의 추종자들이다. 그리하여, “임금피크제를 둘러싸고 충돌하지 말고 대화로써 그것을 도입할 것을 국민들이 바라는 바”라는 말씀이야말로, 아니 오직 그 말씀만이 우리가 최대한의 예의로써 검토한 교수님의 말씀 중에 유일하게 옳은 말이다. 진보언론 ≪한겨레≫에도 물론 같은 찬사를 올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교수님께서 해고요건의 완화를 정당화하고 나서지 않은 데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감사해야 한다, 그 침묵에! 왜냐하면, 그가 해고요건 완화라는 문제에 대해서 일언반구 발언하고 있지 않은 것은 그 해고요건 완화라는 것이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임금피크제와 한 묶음으로 제기되고 있는 것이고, 그리하여 노동자들이 밀려 임금피크제가 법제화된다는 것은 바로 해고요건의 완화도 법제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은폐하고자 하는 교활한 침묵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이 얼마나 고마운 침묵인가!
정년연장 문제
― 노동자들은 정년의 단축을 위해 투쟁해야!
앞에서 본 것처럼, 저들 자본과 그 앞잡이들, 그 나팔수들은 임금피크제 법제화의 필요성을 주로 정년연장 및 청년실업의 심각화에서 찾고 있다. 다시 반복하자면, 정년연장에 따른 자본의 ‘인건비 부담’의 증대 때문에 청년실업이 심각해지고 있는바, 임금피크제를 도입, 자본의 인건비 부담을 경감해줌으로써 자본이 청년고용을 늘리도록 해줘야 한다는 논리다. 앞에서도 인용했지만, 다음과 같은 주장도 그 전형의 하나다.
연공형 임금체계가 대다수 사업장에서 상당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정년연장으로 인해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이 커져 청년실업의 해결이 더욱 난망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임금피크제의 도입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는 중고령세대와 청년세대가 당면하는 그들의 일자리 문제를 풀기 위해 세대간 상생의 활로로 함께 시행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정년연장을 얘기할 때 저들은 그것이 노동자들의 요구의 반영이요 따라서 국가와 자본이 노동자들에게 베푸는 특혜ㆍ은전이라도 되는 듯이 선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들이 그 특혜ㆍ은전에 무언가로 보답해야 하게 되며, 즉 무언가를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고, 저들이 요구하는 그 양보가 바로 임금피크제가 되는 것이다.
하기야 자업자득이다. 민주노총 소속의 노동조합들조차, 그 중에서도 가장 선진적이라는 조합들조차 위원장단 선거 때만 되면 ‘정년연장의 실현’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는 형편이니 국가ㆍ자본과 그 이데올로기적 앞잡이들이 취업노동자들의 정년연장을 무슨 대단한 특혜ㆍ은전이라도 베푸는 것처럼 떠드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선진적인 노동자들, 선진적인 노동조합조차 정년연장을 요구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에게는 “준치는 썩어도 역시 준치”라는 옛말이 생각난다. 유럽의 노동자들 얘기다. 유럽의 경우, 그 노동운동이 아무리 개량주의적으로 타락하여 철저히 체제내화 되었어도 어느 나라에서나 노동자들은, 우리와는 정반대로, 정년연장에 반대하여 싸우고, 정년을 단축하기 위해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는, 작금의 상황에 대하여 영국의 어떤 신문인가를 모방하여 ≪한겨레≫(2015. 7. 27.)도 그 제1면의 제목을 “그리스의 살점 뜯는 ‘유럽의 샤일록’”9)이라고 뽑고 있는 그리스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정년연장을 공약으로 내걸고 또 요구하는 ‘선진노동자들’과 노조들에 묻노니, 어떤가? 저 유럽의 노동자들, 그리스의 노동자들은 그 ‘살점을 뜯는 샤일록’이 베푸는 은혜로운 복을 배은망덕하게도 걷어차고 있는 것 아닌가?
유럽이나 북미처럼 자본주의의 역사가 길고 발달한 나라에서 누군가 ‘노동자들은 그 정년연장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필시 둘 중의 하나 취급을 받을 것이다. 자본의 앞잡이, 아니면 미친 사람. 아니, 자본의 앞잡이도 그냥 자본의 앞잡이가 아니라 정신 나간 자본의 앞잡이!
한국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들이 ‘정년연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주지하듯이 은퇴 후의 생활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년연장을 요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정년을 불과 몇 년 연장하고 불안을 몇 년을 늦추는 것일 뿐, 전혀 은퇴 후의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전적으로 빗나간 요구이다. 성매매라는 불운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동정한답시고, 성매매ㆍ매춘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라고 요구하고 투쟁하는 대신에, 성매매는 성노동이니 성노동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일부 알량한 ‘인권운동가들’, ‘여성운동가들’의 요구가 전적으로 빗나간 요구인 것처럼 말이다.
정년연장은 결코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의 특혜ㆍ은전이 아니다. 그것은 거꾸로 착취의 연장이고, 숙련노동자들의 착취의 연장일 뿐이다. 이 정년의 연장이 노동자들의 은퇴 후의 안락한 생활을 보장한다면, 그것은 이 정년의 연장, 피착취의 연장이 노동자들의 생명을 대폭 단축함으로써이다!
바로 그리하여 앞에서 그 말씀을 죽 인용해 온 진보적 지식인인 노사관계학 박사 이병훈 교수님께서도 “임금피크제 시행에 보완될 사항으로” “(60살까지로 연장된) 법정 정년의 실질 보장, 60살 정년 사업장에 대한 추가 정년 연장의 허용” 등을 들고 있는 것이다. 임금피크제의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서!
노익장이란 말이 있다. 문자 그대로라면 나이가 먹을수록 더욱 기운이 좋아진다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늙었으나 기운이 좋다는, 혹은 그런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런데 그런 의미의 노익장이란 말이 쓰이는 것은 사실은 늙으면 누구나 어쩔 수 없이 신체기능이 저하되고 체력이 쇠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50대 중반을 경계로 누구나 신체기능이 급격히 저하되며 노동에 의한 체력소모가 급증한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는 사실이다. 더구나 보약을 위시해서 몸에 좋다는 것은 늘상이다시피 입에 달고 살고, 항온항습기를 위시한 온갖 호화시설을 갖춘 헬쓰클럽이나 경치 좋고 공기 좋은 ‘필드’[꼴프장]에 나가 유유도일(悠悠度日)하는 유복한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들, 늘상 고된 노동과 빈곤, 걱정에 시달리며 사는 노동자들의 건강, 신체기능은 당연히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늙은이들의 피땀을 빨아먹으려는 게 정년연장이고, 그것도 싸구려로 빨아먹으려는 게 임금피크제다. 겉으로는 청년실업을 걱정한다고 하면서도 저들은 실제로는 그렇게 싸구려로 늙은 숙련노동자들의 피땀을 빨아먹으려 한다. 그것도 파렴치하게 마치 그 늙은 노동자들에게 크나큰 은전이라도 베푸는 듯이 생색을 내면서!
저들은 일반적으로 수명이 길어진 것을 내세우고 있지만, 수명이 길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50대 중반을 경계로 신체기능이 급격히 저하되고 체력소모가 급격히 증대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 한국의 노동자들도 정년의 연장이 아니라 정년의 단축을 요구해야 하고, 정년의 단축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정년연장은 자본에게 크게 세 가지를 선사한다.
하나는, 숙련노동의 제공이다. 게다가 저들이 추진하는 임금피크제가 법제화되게 되면, 반복되는 얘기지만, 저들은 그 숙련노동을 싸구려로 이용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저임금 노동 일반의 이용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정년의 연장은 어떤 경우에도 노동자들의 신규고용을 억제하는 것으로, 즉 실업문제를 악화시키는 것으로 작용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업문제가 악화된다는 것은 당연히 노동시장에서의 취업경쟁의 격화로 노동자들의 임금 일반이 저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적 세뇌를 통해서든, 박정희나 전두환의 군사독재 시대에 특히 그랬던 것처럼 공권력이라는 폭력에 의한 억압을 통해서든, 그것 즉 임금 일반의 저하가 노동자들의 폭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실업문제의 악화와 그에 따른 저임금은 자본으로서는 얼마나 매력적인 상황인가!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연금 지급 부담의 경감 및 그 부담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저들은 ‘연금개혁’ 소동을 벌이면서 ‘고령화ㆍ저출산 추세 때문에 한 사람의 노동인구가 한 사람의 노인을 부양’ 어쩌구 떠들어댔지만, 즉 노동자들이 은퇴자들의 생계비로서의 연금을 책임지는 것처럼 선전해댔지만, 노동자들에게는 노동력의 재생산비로서의 임금밖에는 주어지지 않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직접적으로 연금 지급의 부담을 지는 것은 국가, 즉 자본이다. 그런데 정년연장으로 노동자들이 늙어서까지 노동을 한다면, 연금 지급의 시기가 늦춰짐으로써 그만큼 지급의 부담을 덜고, 노인노동으로 수명이 단축되면 단축되는 만큼 그 지급의 부담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니, 자본의 입장에서 이 역시 얼마나 매력적이겠는가! 오늘날 재정위기로 비극적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그리스 사태를 보면서 저들 자본이 무엇보다도 ‘연금’을 특히 문제 삼고 나서는 것을 보라.
그러면, 정년의 연장이 노동자들에게 베푸는 은전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노동의 고통과 건강의 악화, 수명의 대폭적 단축이다. 정년연장을 주장하는 ‘선진노동자’ㆍ‘선진적 조합’이여, 이 역시 얼마나 매력적인 은전인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 선진노동자들의 새로운 각오와 혁신적 활동이 요구된다
박근혜 대통령님 각하께서는 8월 4일 여름휴가에서 복귀하시자말자 “노동시장 개혁은 한 마디로 ‘청년 일자리 만들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며, “임금피크제 도입, 윈ㆍ윈해야”10) 한다고 일갈하셨다고, 그렇게 궤변을 농하셨다고 한다.
“윈ㆍ윈해야”?―그것을 저들이 그렇게 읽어주기를 바라는 대로, ‘노동자들과 자본이 모두 윈ㆍ윈해야’라고 읽어서는 안 된다. 바보만이 그렇게 읽는 것이다. 노동자의 이익과 자본의 이익은 결코 같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서로 적대적인데 어떻게 ‘모두 윈ㆍ윈’할 수 있겠는가?!
“윈ㆍ윈해야”!―저들이 그렇게 말할 때, 그것은 당연히 ‘자본이 이기고, 또 이겨야’라는 뜻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에게 대해서는 거듭된 선전포고이고, 자본과 관료, 그 앞잡이들에게는 사기 내지 전의의 강력한 독려 내지 채찍이다.
노동자들도 물론 응전을 다짐하고 있다.
그런데 잘 될까?
물론 잘 돼야 하고, 그리하여 저들의 음흉한 의도를 꺾어야 한다. 그리고 그 투쟁의 과정 속에서 노동자들의 정치적ㆍ계급적 의식도 발전해야 하고, 조직도 확대ㆍ강화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바람[所願]이고, 당위이다.
그런데 회의(懷疑)와 걱정이 앞서는 것은 비단 이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투쟁ㆍ파업ㆍ총파업을 거듭거듭 다짐해왔지만, 무기력에 무기력을 거듭해 온 것이 최근 20년 가까운 운동의 추이(推移)이기 때문이다.
회고해 보면, 우리 노동운동은 그 상승ㆍ발전기와 후퇴ㆍ정체기가 뚜렷이 구분된다. 1960년대 이후만을 보자면, 제1의 짧았으나 힘찼던 상승ㆍ발전기는 1960년 4월 혁명에 의해 촉발되어 그야말로 비온 후에 죽순 솟아나듯 여기저기에서 떨쳐 일어섰으나 1년 남짓 만에 박정희ㆍ김종필 일당의 군사쿠데타에 의해 압살당한 그것이었다. 그 후 근 10년은 박정희 군사독재에 의해 강요된 후퇴ㆍ정체기였다. 그러나 저들이 근대화라고 부르는 것, 즉 농지개혁에 의해 창출된 소농들이 1960년대 후반부터 전반적으로 몰락하고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대대적으로 시작ㆍ전개되면서 노동과 자본 간의 모순ㆍ대립이 심화되었고, 이 모순과 대립은 드디어 1970년 11월 전태일 노동열사의 분신과 1971년 8월의 광주대단지 빈민폭동으로 폭발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노동운동은 자주적인 민주노조를 위한 운동ㆍ투쟁으로 부활하여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면서 꾸준히 발전ㆍ상승했다. 그리고 1980년의 광주항쟁ㆍ학살에 자극받아, 전두환 정권의 극악한 폭압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은 새로운 정치적 질을 획득하면서 혁명적으로 발전하다가 1987년엔 6월 민주항쟁의 반쯤의 승리로 열린 정치적 공간에서 드디어 7ㆍ8ㆍ9월의 대투쟁으로 폭발하여 1996년 말-97년 초의 총파업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4반세기 가량의, 한국 노동운동사상 최장ㆍ최대의 상승ㆍ발전기이고, 특히 1980년대 중엽 이후 90년대 초까지는 초기적인 정치적 혁명성을 동반한 발전기인데, 여기에서는 두 가지를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인바, 하나는 80년대 중엽 이후 노동운동의 정치적 발전과 한국사회에서의 사회과학의 부활이 그 궤를 같이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노총에 의해서 주도된 1996-97년의 총파업, 한국 노동운동사상 최대의 총파업이 사실은 그 자체 내에 후퇴ㆍ정체기로의 전환의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 파업 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추세적으로 무기력과 내리막의 길을 걸어오지 않았던가?
이는 그 총파업이 형태상 상승ㆍ발전기의 정점을 이루지만, 사실은 상승ㆍ발전을 추동했던 요인들이 이미 그 이전에 쇠퇴하기 시작했고, 그 파업은 그 이전의 추동력을 말하자면 관성적으로 총괄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노동운동의 새로운 상승ㆍ발전을 위해서는, 그리고 저들이 하반기 이후 대대적으로 벌일 것임에 분명한 ‘노동(시장)개혁’이라는 노동자 무력화 기도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운동의 상승ㆍ발전과 그 추세적 하강의 요인들이 무엇인지를 규명해야 할 것이고, 그리하여 운동을 상승ㆍ발전시켰던 요인들을 더욱 확보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운동의 상승ㆍ발전과 그 추세적 후퇴와 무기력을 결정한 요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마 선진활동가들의 열정과 활동방식의 차이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객관적 요인들을 무시하거나 경시해서가 아니다. 다만, 그것들은 노동운동에 주어지는 유리하거나 불리한 조건들이어서, 주체가 확고히 서면, 그 주체가 이용하거나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확고히 서면, 유리한 조건은 이용하고 불리한 조건은 극복하는 것이지만, 주체가 확고히 서지 못하면, 유리한 조건도 활용하지 못한 채 불리한 조건만이 일방적으로 지배할 것이며, 심지어는 유리한 조건들조차 불리한 그것으로 전화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1995년의 민주노총의 건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1996년 말-97년 초의 총파업에 대해서 비록 그것이 민주노총에 의해서 조직되고 형태상 상승ㆍ발전기의 정점을 이루지만, 사실은 상승ㆍ발전을 추동했던 요인들이 이미 그 이전에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그 파업은 그 이전의 추동력을 말하자면 관성적으로 총괄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던 것을 여기에서 상기시키고 싶다. 민주노총의 건설은 분명 운동 발전의 유리한 조건의 조성이고, 바로 그 유리한 조건이 작용하여 당시의 총파업을 조직해 낼 수 있었지만, 그 건설은 동시에 과거에 운동의 상승ㆍ발전을 추동했던 요인들, 즉 선진활동가들의 열정과 활동방식에 커다란 차이를 가져오는 계기, 그리하여 그 요인들이 쇠퇴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건설 전에는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교양ㆍ조직하고, 그들이 자주적인 노동조합을 만들고 투쟁하도록 독려하는 모든 책임이 사실상 선진활동가들의 어깨 위에 지워져 있었고, 선진활동가들은 또 그러한 부담과 책임을 열정적으로 떠맡아 대중 속으로 파고들며 활동했다. 자주적인 조합이 존재하는 곳이든, 어용 한국노총 산하의 작업장이든, 전혀 무노조의 사업장이든 가리지 않고 그들은 열정적ㆍ헌신적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민주노총이 건설된 후에는 그 열정도 활동의 방식도 크게 달라졌다. 과거 선진활동가들이 떠맡았던 사업의 대부분이 민주노총이나 그 산하 연맹ㆍ조합들의 사업으로 되었다. 그들의 활동의 장은 기본적으로 민주노총 작업장으로 한정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은 노동자 대중을 교양ㆍ조직하는 활동도 그만두게 되었다. 그것들은 모두 조합의 활동이니까! 그리고는 주로 ‘정치조직화’에, 그러나 자신들만의 ‘정치조직화’ㆍ‘정치사업’에, 그리고 민주노총이나 조합 내부에서의 주도권 다툼에 몰두했다. 민주노총의 존재라는 조건을 그들은 주로 그렇게 활용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조합주의ㆍ경제주의의 지배, 대중의 피동화(被動化), 그리고 그에 따른 운동 전반의 무기력화, 후퇴와 정체이다.
기층노동자 대중이 정치적으로 교양되고 조직되어야만, 그리하여 그들이 계몽되고 적극적인 인자들로 되어야만 민주노총도, 민주노총이 조직하는 파업도,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진출도 역동적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민주노총이나 그 소속 조합들의 공식적인 활동과는 상대적으로 다른, 상대적으로 자립적인 선진활동가들ㆍ선진노동자들의 활동, 열정적인 대중 교양, 대중 조직화 활동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 건설 후 선진활동가들ㆍ선진노동자들의 활동은 그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다.
노동운동의 새로운 상승ㆍ발전을 위해서는, 그리고 당면한 저들의 ‘노동개혁’ 의도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선진활동가들, 선진노동자들의 새로운 열정과 활동방식의 혁신이 요구된다. 그들은 민주노총 소속 사업장들에서의 조합의 내부 및 외부에서는 물론, 한국노총 사업장들과 무노조 사업장들에서 민주노총 건설 이전에 못지않은 열정과 각오로 활동해야 한다. 각 사업장의 구체적인 조건들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방식의 기층노동자 조직들을 만들어 사업장의 문제들, 사회적ㆍ정치적인 다양한 문제들을 끊임없이 토론하게 해야 한다. 기층노동자들의 그러한 모임들, 토론들이 열렬하면 열렬할수록 그들 기층노동자들은 선진노동자들로, 노동운동의 적극적인 인자들로 성장ㆍ발전할 것이고, 조합과 파업 역시 역동적으로 조직되어 자본 및 국가와의 투쟁에서 승리할 것이고, 결국은 노동자계급 정치의 활로를 열게 될 것이다. 경제주의ㆍ조합주의는 물론 사민주의와 민중주의를 극복하고 혁명적인 노동자 정치의 활로를 열게 될 것이다.
국가와 자본은 물론 끊임없이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 정권 시대와 같은 가혹한 파쇼체제의 회복을 꾀하고 있지만, 정치적 상황은 아직 선진활동가들ㆍ선진노동자들에게 유리하다. 이러한 조건을 서둘러 활용해야 한다. 선진활동가들ㆍ선진노동자들이 이 유리한 상황을 자신들만의 정치놀음으로 허비한다면, 운동의 현재와 같은 정체와 후퇴는 어쩔 수 없이 계속될 것이다.
대중 속으로! 대중 속으로! 대중 속으로! <노사과연>
1) “최경환 ‘노동개혁에 최우선 두고 정책역량 집중’”, ≪연합뉴스≫ 2015. 7. 28.
2) 같은 기사.
3) “청년 실업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상반기 우리나라 20대 실업자는 41만 명으로 …” (<http://news.jtbc.joins.com/html/043/NB10977043.html>).; “일하거나 학교에 다니지 않고 취업 의지도 없는 청년, 즉 니트(NEET)족이 147만1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식 통계로 잡히는 청년 실업자보다 3배 이상 많은 수치로, 취업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청년들이 노동시장 진입 자체를 아예 포기하고 있다는 분석마저 나온다.”
(손영일 기자, “‘일자리 찾아봐야…’ 취업의지 버린 ‘니트族’ 147만 명”, ≪동아일보≫(인터넷판) 2015. 5. 14.)
4) 김종철, “‘통계의 거짓말’? 82만이라는 실업자 사실상 480만”, <ohmynews> 2013. 1. 9.
5) 이 요지경 세상에는 경쟁이라는 강제법칙에 얼이 빠져 기술혁신이야말로 일자리를 증대시킨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얼간이 ‘전문가들’도 물론 없지 않다. 예컨대, Janet Rre-Dupree, “Innovation Should Mean More Jobs, Not Less”, (<www. nytimes. com> January 4, 2009>)를 보라). 하기야 이 자야 기술혁신의 지체가 경제위기의 원인이라던, 저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의 거성(巨星) 슘페터(Joseph A. Schumpeter)의 아류에 불과하겠지만!
6) 박은호ㆍ곽창렬 기자, “청년 일자리 3년간 7만여 개 만든다”, ≪조선일보≫ 2015. 7. 28.
7) 아래 인용문들 중에 전거를 표시하지 않은 것은 모두 이병훈 교수의 이 기고문으로부터 따온 것이다.
8) 자본은 물론 이를 바람직한 추세가 아니라 위험한 추세라고 포장하여 선전하고 있지만!
9) 물론 이는 결코 정확한 상황전달이 아니다. 살점을 뜯기고 있는 것은 그리스가 아니라 그 노동자ㆍ인민이기 때문이다. 올리가르히로 불리는 그리스의 독점자본들 역시 그 샤일록의 일부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10) 이동훈 기자, “휴가서 돌아온 박대통령, ‘청년 일자리’ 드라이브”, ≪조선일보≫, 2015. 8.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