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노동자들의 연대와 희망 월간금비

비정규직과 법

근로계약 해지의 근거로서 근무평정의 객관성 -2006. 2. 24. 선고, 대법 2002다62432 판결-

차라리 없는 게 나은 법

지난 4월 12일 국가인권위 배움터에서 비정규직노동자증언대회가 열렸습니다. 환노위를 통과한 비정규직법안에 대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있으나마나 한 법’ 아니, ‘차라리 없는 게 나은 법’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근로기준법의 기간의 정함이 있는 근로계약은 오직 사업의 완성을 위해 필요한 경우 외에는 1년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지만 비정규직법안은 이 조문을 폐지하고 유기근로계약을 2년으로 확장한 셈이니까요. 또한 사업의 완성을 위해 필요한 경우만을 1년의 유기근로계약의 예외로 정하고 있으나 비정규직법안은 사업의 완성뿐만 아니라 “특정한 업무의 완성”마저도 2년의 기간제한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줌으로써 결국 사용자가 특정한 업무를 세부적으로 구분하려는 약간의 노력만 한다면, 2년의 기간제한 마져도 유명무실하게 할 수 있어, 이 법은 매우 광범위하게 유기근로계약을 합법화하려는 것이 아닌가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정말 없는 게 차라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더 나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문제는 비정규직보호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의 현실을 인식하고 법을 해석하는 것

사실 현실의 문제의 상당부분은 단지 법의 부재 때문이라기보다는 존재하는 법의 해석을 얼마나 현실의 실정에 맞게 해석해내는가에 달려있다 할 것입니다. 유기근로계약의 문제 역시 고용불안을 악화시키고 결국 헌법상의 노동3권의 실현을 제약하는 현실을 인식하고 판례를 구성함으로써 상당부분 해결이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법원은 그러한 현실을 읽는데 매우 소극적이다 못해 보수적인 경향을 띄어왔습니다. 초기의 판례들은 유기근로계약에 대하여 원칙적으로 기간의 만료로서 계약을 당연종료 된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최근 하급심 판례들은 유기근로계약이라도 그러한 외관은 형식에 불과하며, 그 실질은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과 같다면, 재계약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근로기준법 제30조의 해고의 정당성을 갖출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기간의 정함이 형식에 불과한 정도에 이르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갱신횟수나 계약체결관행 등 제반사정을 고려하여 재계약의 기대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거나 업무능력을 평가하려는 목적으로서 기간의 정함이 시용기간으로 해석될 경우, 재계약 거부는 사회통념상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고 판시함으로써 무분별하게 만연된 유기근로계약의 관행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습니다. 최근 대법원에서 판결이 이루어진 한국씨티은행사건 역시 그러한 판례 흐름에 일부를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해고 회피수단으로서 유기근로계약

IMF 이후 금융권 통폐합으로 금융권의 노동자들을 대량정리해고의 칼바람에 서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자본가들은 영업양도에 의한 고용승계를 회피하기위해 자산을 이전하면서, 노동자들을 시용계약을 통해 고용을 선별하는 방법으로 효과적으로 정리해고의 법리를 회피하여 구조조정을 시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정리해고된 자리에는 어김없이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채워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자본의 전략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법적 저항을 해왔습니다. 합병에 의한 고용승계를 주장하거나 기간제근로계약의 형식성을 주장하는 방법, 그리고 유기근로계약의 경우라도 재계약거부의 합리적 이유 없음을 주장하는 관점들이 그것입니다. 이번 한국씨티은행의 경우에는 시용계약의 근거가 된 근무평정의 기준과 절차의 불합리함과 객관성의 결여를 지적함으로써 유기근로계약의 재계약거부의 근거가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고 보았고, 일정규모의 인력을 편의적으로 정리하고자 하였던 자본의 전략을 무력화시키고자 했습니다.

근무평정의 객관성과 하위등급자수 할당의 정당성

한국씨티은행은 IMF파동이 한창이던 1998년 (구)금융산업의구조개선에관한법률에 근거한 금융감독위원회의 계약이전결정에 의해 경기은행의 자산과 부채를 인수하고, 직원일부를 고용하기로 정하였습니다. 그래서 경기은행 각 지점에 이를 통보하고, 인사고과 상위70%에 해당하는 자들과 ‘근로자는 취업에 앞서 6개월의 범위 내에서 사용자가 정하는 시용기간을 거쳐야 하며 피고은행은 위 기간 중과 종료시에 근로자를 해고할 수 있다. 다만, 필요한 경우에는 시용기간을 저치지 아니하고 직원으로 임용할 수 있다’라는 내용의 근로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리고 6개월 후 계속고용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근무성적평정을 실시하여 736명 중 42명을 계약해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원심의 판단 중에서 “피고은행이 각 지점별로 C 또는 D의 평정등급 해당자수를 할당한 점, 피고은행이 근무성정평정표가 작성, 제출된 후 일부 지점장들에게 재작성을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일부 지점장들이 평정자 및 확인자를 달리하도록 정한 평정요령에 어긋나게 혼자서 근무성적평정표를 재작성한 점, 원고들에 대한 근무성적평정표 및 평정의견서만으로 원고들의 업무수행능력이 어느 정도, 어떻게 부족하였는지, 또 그로 인하여 업무수행에 어떠한 차질이 있었는지를 알 수 없는 점”들을 받아들여, 근로계약을 해지에 정당한 이유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하여 사용자의 상고를 기각하였습니다.

즉, 한국씨티은행의 재계약거부의 근거가 된 근무평정은 평정결과에 상대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업무수행태도 및 의욕(60%)’이라는 요소가 모호하고 불분명한 기준이고 평정자의 주관적 견해에 좌우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근무평정기준의 객관성이 결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평정요소 중 ‘업무수행능력 및 성과(40%)’의 경우 “원고들의 업무수행능력이 어느 정도, 어떻게 부족하였는지 또는 그로 인하여 업무수행에 어떠한 차질이 있었는지”를 파악하여 개개인의 실제 업무능력을 판단한 것이 아니라 각 지점별로 고용해지 대상인원인 C 또는 D등급자의 수를 할당하여 근무성적표를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던 것이기 때문에, 재계약이 거부된 근로자들의 업무수행능력이 계속고용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의 사회통념상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없으며, 실제로 이러한 근무평정결과는 비율을 할당하여 일정인원을 정리하고자 하는 의도가 재계약 거부의 본질적인 목적이었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해고 회피의 편법으로서 재계약거부의 부당성

한국씨티은행사건에서 대법원은 이러한 사용자의 본래적 의도에 관하여는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시용기간 6개월을 정하여 사용자가 해고권을 유보한 상태에서 계속고용을 판단하기 위해 기준으로 삼았던 근무성적평가가 타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근무평정기준 자체의 객관성과 합리성이 보장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을 적용하여 실제로 재계약이 거부된 근로자가 구체적으로 계속고용하기 어려운 상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고, 그러한 근거들을 반영하는 근무평정결과를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당해 사건의 경우, 그 평가과정과 기준의 객관성이 결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할당된 인원을 정리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제반사정을 바탕으로 그러한 근로계약해지는 사회통념상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정리해고법리를 회피하고 시용계약이라는 유기근로계약에 의해 일정한 인원을 정리하려한 사용자의 편법에 일정한 제약을 가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합리성의 엄격한 의미해석

기존의 법원의 해석에서 인사평가는 인사권의 영역으로 인사권자인 사용자의 고유한 재량처럼 비춰졌고, 인사평가에 대한 합리성의 판단은 그 설정기준에 대한 추상적인 준거가 외관상 객관적으로 보여진다면 대체로 합리적이라고 보았고, 그러한 기준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객관성과 공정성을 가졌는가를 판단하는데 있어서는 상당정도 둔감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씨티은행사건은 그러한 판례흐름에서 인사평가가 단지 사용자의 고유한 인사권의 영역이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그 기준이 아무리 객관의 외관을 지녔다 하더라고 그 적용에 있어서 진정한 객관성과 공정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면 법이 인정하는 “합리성”을 구성한다고 볼 수 없음을 확인하여 주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기간제 근로관계에 대한 재계약 거부의 ‘합리성’의 의미를 판단하는데 있어 기존의 방만한 해석에 엄격한 한계를 가하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말

글쓴이 박주영 - 노무법인 현장에서 노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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