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비정규직 싸움의 현장 한복판에서 선 사람,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 서훈배 위원장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오리털 코트와 목도리, 마스크로 무장을 했지만 버스에서 내려 잠깐 걷는 5분을 참기 힘들었다. 신대방동 보라매공원 근처의 대교본사 앞, 안팎의 기온차로 얼음이 서걱서걱 끼어있는 한 겹짜리 비닐 천막은 매서운 추위를 막기엔 턱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최근한 눈높이 선생님이 해고통지를 받은 게 작년 12월 말이다. 해고 사유는 ‘회원감소’였지만 실은 12월에 있었던 대법원의 ‘학습지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다’는 판결을 등에 업은 노조탄압이었다. 그는 학습지노조 대교지부장이었다. 학습지노조는 1월 13일 ‘해고협박 중단’, ‘노조탄압 중단’, 구호를 걸고 대교 본사 앞에 천막을 쳤다.
서훈배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평통사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이런 내용들이 꾸준히 올라오면서였다. 그리고 평통사 회원으로 가입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국회앞에서 단식농성을 하던 작년 가을의 그를 기억해냈다.

농성이 일상사업이냐구?

늦은 아침식사 시간, 왁자지껄 맛나게 밥 먹다가 지지방문 온 누군가가 묻는다. “학습지노조가 장기투쟁사업장이야?” 순간의 정적 후 서훈배 위원장이 어이없어 하며 대답한다. “그럼, 6년 째 장기투쟁 중이지. 맨날 농성하고 있으니까 이젠 이게 일상사업으로 보여?” “하긴 지금은 100일짜리 투쟁사업장은 장기투쟁 축에도 못 들지…” 다시 이어지는 잡담 속에 묻혀 버렸지만, 학습지노조가 만들어진 2000년 이후 6년째 계속되는 투쟁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아침 식사 후 짧지만 긴장감 있는 회의가 진행되었다. 이날은 최근한 선생의 재계약 기한 마지막날. 사실상 해고상태에 들어서는 날이었다. “설령 대표이사 면담이 성사된다 하더라도 우린 우리 중심을 틀어쥐고 가야 해요. 소식지나 만드는 조합이 아니라 20일 이상 계속된 농성의 성과를 조합원들에게 알려내고 함께 가는 게 중요해요. 이젠 ‘노동조합인정’과 ‘원직복직’ 구호를 걸고 길게 가야 합니다”

“회사가 교육기업이잖아요. 회사가 굉장히 약아요. 괜히 불거져서 여기저기 소식이 알려지고 하면 골치 아프니까 농성 천막도 그냥 놔두고 다 법대로 하자고 해요. 대법 판결도 로비하고 해서 다 유도하는 거거든요. 교육기업이지만 전형적인 자본의 모습이에요. 사법부를 자기편으로, 하수인으로 만들어 놓고 모든 것은 법대로 하자고 해요. 겉으로는 순하게 나오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탄압의 칼날을 휘두르는 거죠. 아마 좀 있으면 손배 가압류도 들어올 거예요. 그런데 우리 입장은 노조 지부장까지 해고하는 판에 노조의 사활이 달린 문제인데 물러 설수 없죠. 그거 각오하고 판 벌린 거죠”
이번 농성투쟁은 한 조합원의 해고통지로부터 시작되었지만, 특수고용노동자들의 전략적 과제인 ‘노동자성을 쟁취’하지 않고서는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대법원 판결은 황당 그 자체! : 우리가 노동자가 아니라니…

골프장 경기보조원, 화물차 및 덤프운전자, 학습지 교사, 보험설계사… 위탁계약이나 도급계약을 회사와 맺는 이들은 이를 이유로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더불어 산재보험, 고용보험, 의료보험, 국민연금 등 4대보험도 적용받지 못한다. 매년 재계약을 해야만 일을 할 수 있는 이들의 이름은 비정규 특수고용직 노동자. 비정규직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현실에 놓인 노동자들이다.
“특수고용노동자는 위장 자영인이에요. 회사에서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위탁, 도급계약으로 자영인화 시켜놓은 거죠. 회사는 꿩먹고 알먹고 인 셈이죠”
서훈배 위원장은 IMF가 터지기 전에 보험회사를 다녔다. “재밌는 것은 그때 제가 주로 골프장 경기보조원, 백화점 판매원, 학습지교사들의 단체보험을 많이 했어요. 회사에서 해주는 보험이 없으니까 민영보험으로 단체보험을 많이 하는 거죠” 그때 서위원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특수고용직인줄도 몰랐다고 한다. 당연히 자영업자라고 생각했다고.
“그런데 나중에 학습지교사 일을 하다 보니 너무 문제가 많은 거예요. 같이 일하는 여선생님이 다쳐서 병원에 갔는데, 산재도 안 되고 그냥 관두라고 하더라구요. 회사가 이렇게까지 일방적일 수 있나… 기계로 쓰다가 쓸모가 없어지니까 버리는 거잖아요. 기계는 고쳐서 쓸 생각이라도 하잖아요. 아예 한번 써서 버리는 소모품 취급을 하는 거죠.”

노동자가 아니니 근로기준법상의 권리도 갖지 못한 이들. 그렇다면 이들의 조직인 학습지노조도 불법인가? 아니다.
지난 1999년 재능교육교사 노동자들의 완고한 투쟁으로 이들은 노동조합설립필증을 받았다. 위탁계약신분에도 노동자임을 인정받고 조합건설을 승인 받은 것이다. 2000년에 출범한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도 엄연히 합법적인 노조이다. 그런데 대법원은 이들이 노동자가 아니라고 한다. 사측은 당연히 자신들에 유리한 법원의 판결을 들고 학습지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응당한 노조의 권리인 교섭에조차 응하지 않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나라 사법부와 노동부가 입장을 다르게 갖고 있다는 거예요. 같은 국가기관인데 노동부에서는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중재, 조정도 하고 하는데 회사가 부당노동행위를 해서 우리가 고소를 하고 재판에 가면 사법부에서는 우리보고 노동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특수고용노동자의 본질적 문제에요. 노조는 노동자들이 만드는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보고 노동자가 아니라니…”
게다가 학습지교사의 경우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정규직 노동자였다. 90년대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회사측은 노무관리 차원으로 위탁계약을 도입하였고, 지금은 학습지교사의 노동자성도 부정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비정규직 싸움은 노동운동의 성패를 가름하는 문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시키고 노동조합을 만드는 등 사회의 주요세력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폭발적인 노동운동의 상승으로 전노협과 민주노총을 건설하였고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흘렀다.
그러나 그동안의 노동조건 개선과 노동자의 위상이 높아지는 소중한 성과들은 일부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한정될 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정과 상대적 박탈감, 사회적 신분의 하락이 현존하는 것도 사실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힘 모아서 사회 양극화를 해결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다. 투쟁의 절실함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서위원장은 비정규직, 그중에서 더 힘든 조건의 특수고용직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소명의식 같은 게 있다고 했다. 그는 향후 노동운동의 성패를 가름하는 것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라고 본다. 학습지노조 위원장으로서 전체 노동운동에 대한 책임감과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불과 2-3년 만에 새로운 노동운동흐름의 주체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서고 있어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2006년 현재 노동운동을 이끌어나가는 사람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에요. 물론 전체 노동운동의 대의구조는 정규직이나 대공장 위주지만, 실제 현장에서 투쟁을 선도하고 노동운동을 이끌어가는 부분은 비정규직 운동이라고 봐요. 물론 정규직 동지들이 전체 노동운동을 고양시켰던 성과들을 인정하고 계승하면서 가야죠”

“힘들다고 관두면 비겁한거 아니에요?”

학습지노조에는 노조전임자가 없다. 서위원장 자신도 1주일에 한번은 서산으로 내려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노조간부들은 아이들 수업이 끝난 밤 10시 이후와 주말에 노조일을 한다. “학습지노조를 올빼미노조, 주말노조라고 해요. 어떤 날은 밤새 회의를 하고 잠도 못자고 다시 일을 하러 가야 하죠. 노조 인정도 못 받지, 경제적으로도 힘들지, 체력적으로 그로기 상태가 되요” 그래서 이들에겐 가족의 지지, 지원이 커다란 힘이 된다.
“이거 꼭 써줘야 해요. 너무너무 훌륭한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아내도 같은 학습지교사였다가 지금은 공부방교사로 있죠. 제가 지금 넉달째 천막 생활 중인데, 아내가 경제적인 문제도 그렇고 많이 힘들 텐데 저에게 엄청난 도움을 줘요. 지난번 단식할 때나 힘들 때마다 ‘힘들다고 해서 판 떠나면 비겁한거 아니냐’고 아내가 격려를 해 주죠.”
올해 나이 38살, 그 또래들이 다 그렇듯 그 또한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운동을 시작하였지만, 복학과 졸업과정에서 마음 한켠에는 동료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었다.
“많이 힘들때는 학생때 가졌던 막연한 신념이나 의리 같은 게 힘이 되요” 학습지노조 충청지회 사무장, 충청지회 지회장, 대교지부장, 학습지노조 위원장으로 단계별로 승진한(?) 서위원장은 현장출신 지도자답게 현장 동지들의 대한 의리, 운동선후배들에 대한 의리, 가족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오늘도 농성장을 사수하고 있다.

“저는 평통사 세모회원이에요”

“사실 노조활동 하다보면, 내 부문의 운동에 대해서는 전문가지만 다른 것들은 많이 놓치고 가요. 예전에 이수정 동지(학습지노조 선전국장, 평통사 회원)가 평통사에서 나온 이거(평화누리통일누리)를 읽으라고 주더라고요. 나중에 보니까 다 작전이었어…(웃음) 평택 미군기지 문제였는데 제가 머리가 나빠서 읽어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두세 번 밑줄 그으면서 읽었죠. 대중국 포위니, 전략적 유연성이니, 뭐 이런 표현 있잖아요? 그렇게 읽다 보니 아, 이래서 기지가 확장되면 안 되는구나 하는 감이 생기는 거죠. 모르는 거 긁어주는 글들이 많은 것 같아요. 처음에는 지적욕구로 시작됐는데. (이수정 동지가) 한 권 더 주길래 읽었더니 지금은 통일이나 미국문제에 대해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알겠더라고요. 회원가입을 하고 회지 받아보고 그러는 거죠”
그렇게 그는 작년 가을에 평통사 회원이 되었다. 그런데 사실은 학습지노조운동을 하다보니 평통사 회원활동엔 한번도 참여 못했단다.
“회원으로 치면 세모회원쯤 되나? 완전 동골뱅이 회원은 못 되고…” 머쓱하게 웃으면서 하는 말이다.

평통사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바람은 있다.
“평통사가 주로 정치군사적인 얘기들을 많이 다루잖아요. 물론 그런 정치군사적 내용들은 노동자들의 신자유주의 투쟁이나 농민들의 반세계화, 식량주권의 문제와 다 연관되어 있다고 봐요. 하나의 큰 흐름, 전 세계적인 반제국주의 운동, 반미운동이라고 보는 거죠. 그런데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얘기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는 거 같아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각각 현장의 운동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 총체성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평통사의 내용도 더 풍부해져야 한다고 봐요.”
“평택 기지이전 문제 문제만 하더라도 심정적 동의라는 게 있으니까 팔뚝질은 같이 할 수 있죠. 하지만 노동자, 농민들도 큰 틀에서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야 되는 거죠. 그래서 제가 밑줄 그으면서 읽은 그 글을 서산에서 농사짓는 제 후배에게 읽어보라고 권해줬죠. 사실은 작업을 하고 있거든요. 이수정동지가 했던 것처럼…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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