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통史 - 94년, 창립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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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통史┃

2003년 재창립 후 벌써 5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같은 해 41호 평통사 회지는 <평화누리통일누리>라는 새 이름을 달았다. 이번 65호 <평화누리통일누리>부터는 94년 창립때부터 줄곧 공동대표였으며 재창립 후에는 상임대표로 헌신중인 문규현, 홍근수 두 분에게서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의 지난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그 와중에 40호까지의 평통사 회지에 실렸던 소중한 내용들도 다시 소개하는 기회를 얻고자 한다. 첫번째 이야기는 홍근수 상임대표로부터 들었다. - 편집자 주 -

 

평통史 - 94년, 창립에 이르기까지

“평통사가 생기기 전에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라는 것이 있었어요. 92년 즈음에 김낙중 선생, 손병선 선생, 김진균 선생, 기세춘 선생 등이 활동하던 ‘평화통일연구회’가 김낙중 선생과 손병선 선생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고 이러면서 활동이 힘들어지게 됐지요.

하루는 기세춘씨가 나를 찾아와서 활동을 같이 하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나는 ‘같이하는 데 맨 꼴찌로 이름을 넣어주세요’ 그랬어요. 그런데 마침 총회하던 날 볼에 뭐가 나서 너무 아프고, 열도 나고 해서 못 나갔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상임의장이 돼 있더라구요.”

 

당시 ‘연대회의’ 창립선언문에는 ‘연대회의’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한반도 비핵지대화를 추진하고 핵무기없는 세상의 건설을 위해 노력할 것, △평화정착을 위해 실제적이고 과감한 군비축소를 위해 싸울 것,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여 평화체제를 시급히 정착할 것. △정치군사적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주한미군 철수운동을 할 것 등이 그것이다. 반핵평화운동연합과 평화통일연구회가 통합되고 각계각층 66여명의 인사가 발기인으로 참여한 ‘연대회의’는 1993년 6월 18일 창립하게 된다.

 

“그 다음에 ‘새로운 평화운동 대중단체’를 준비하던 분들과 1년 가까운 논의 끝에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로 통합하게 됐죠. 그런데, 준비기간이 좀 길어지다 보니까 내가 회장으로 있던 임수경 후원회 쪽 분들은 많이 참여 못하게 됐죠. 사실 문규현 상임대표를 개인적으로 처음 만난 날도 임수경이 석방돼서 환영식이 열렸는데 바로 그 전날 임수경네 집에서였어요. 다음날 임수경 환영식에서 문규현 신부가 감동적 연설을 했었던게 기억나요.”

 

변연식 공동대표의 기억에 의하면 문규현 홍근수 상임대표 두 분은 대전에 있는 목욕탕에서 서로 회합을 가지고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창립을 의논했다고 한다. 1994년 6월 4일 종로성당에서 드디어 평통사는 창립총회를 하게 된다. 당시 통일운동의 분열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의지와 역량을 더 크게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대의에 입각하여”(평통사 창립총회 경과보고문) 창립한 평통사는 창립때부터 ‘단결’의 정신을 구현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이 2003년 각 지역에서 산개해 투쟁하던 단체들이 ‘통합과 전진’이라는 기치아래 더 큰 평통사를 만들어 낸 정신이 아니었을까?

‘평통사 창립총회 경과보고문’에는 이어 “이 땅에서 평화와 통일은 박수치는 두 손바닥이다. 마주잡는 두 손이다. 그렇다. 평화는 통일을 여는 길이고, 통일은 평화를 여는 길이다.(중략) 이제 우리는 크나큰 대중의 여망과 역량을 끌어안고 오직 한 길, 평화와 통일을 여는 그 기로 힘차게 나아갈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당시 창립총회문을 ‘우렁찬 목소리로 낭독했던’ 이가 ‘연대회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는 권병길 회원(배우)이다. (평통사 회지 1호)

 

이렇게 출범한 평통사는 기본적 사업영역으로 △핵문제 해결, △평화체제 구축, △군축과 민생복지로의 전화, △국제연대, △민주적 병역제도 실현, △군사문화 청산과 평화문화 확산, △남북 교류와 협력 등의 사업 계획을 제출하였다.

“그래서 94년부터 방위비(국방비) 삭감 운동을 활발히 했죠, 토론회도 하고, 엽서보내기도 하고, 무기도입 저지운동도 하고 그랬죠. 또 미국에 지원하는 방위비 분담금에 대한 문제제기도 했어요. 그때 조임숙씨가 있었는데, 그 분이 아주 열심히 했어요. 또 돌아가신 김진균 교수가 평화군축분야에서는 아주 권위자였는데, 거의 일주일에 한번씩 (분회모임)식의 토론모임을 주도했었죠.”

 

 

 

실제 회지 1호에는 조임숙 씨의 쓴 ‘NPT 조약, 무엇이 문제인가?’과 이선태 씨의 ‘북한 핵문제와 통일문제의 전망’ 같은 글이 실려 있고, 회지 3호에는 강정구 교수의 ‘새로운 동북아 질서와 통일 및 군축’ 조임숙 씨의 ‘방위비(국방비) 삭감, 왜 해야 하나?’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 94년에는 평시작전통제권이 반환된 해로 이에 대한평통사의 논평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연합 권한 위임사항의 문제점을 짚고 있다.

 

“사실 그때 같이 했던 사람들 이름들이 다 기억이 안나요. 그중에는 한명숙이나 지은희처럼 정계진출 한 사람들도 있는데, 마음이 안 좋죠. 또 그때는 참 열심히 했지만 지금 평통사 활동에 같이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사람들이 그립기도 하죠.”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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