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빛깔과 향기의 그대들에게

제목 없음

┃책을 열며┃

 

봄이 왔으나 봄 같지가 않습니다. 걷고 있으나 땅에 발을 딛는 것 같지 않고 무슨 일을 해도 헛손질이 잦아졌습니다. 허망함과 깊은 슬픔이 밀려옵니다. 저의 마음이 이러할진대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마음이 어떠하실지, 그동안 함께 해 오신 여러분들의 마음이 어떠하실지… 가슴이 아파옵니다. 차마 이런 글도 쓰고 싶지 않아 오랫동안 망설이다 펜을 들었습니다.

 

지난 3월 초 대보름 행사를 위해 평택에 다녀왔습니다. 2월 13일의 합의이후 그곳을 떠나야 하는 분들을 위로하고 그곳에서의 마지막 대보름을 지켜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을에 도착하자 여기 저기 무너진 폐허 속에서 지난날의 추억들이 물밀듯이 밀려왔습니다.

연푸른 수줍음으로 우리에게 인사하던 감나무 이파리들, 담 밑에 떨어져 있어도 요염하던 능소화 꽃잎들, ‘에덴동산이 이런 곳이었을 거야’하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살구나무 근처의 동산… 이 모든 것들과 이별해야 하다니 헤어짐의 인사대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심한 듯 청정하게 떠오르는 대보름 달빛 아래에서 황새울 철조망 사이로 새로 나는 길 ‘신작로’를 바라보았습니다. 미군기지에는 밭과 공장만 빼고 세상의 모든 것이 들어선다는데, 그 어여쁜 가르마 같은 농로를 무참하게 파헤치고 ‘제국의 길’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괴물 같은 그 길로 또 얼마나 많은 괴물들이 날라져 올는지요? 또 얼마나 괴물 같은 일이 벌어질는지요. 아마도 오키나와처럼 5년 먹을 전쟁 비축 식량도 땅속에 숨겨놓으려 할지 모르겠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생산해 내던 그 땅에…

제국의 탐욕 때문에 그 땅을 일궈내고도 그 땅과 이별하고 그 땅의 죽음을 바라보아야 하는 주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김지태 주민 대책위 위원장님을 비롯한 여러분, 힘내십시오, 그동안 잘 싸우셨습니다. 다만 우리의 힘이 부족했을 뿐입니다. 이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았으며 우리는 평화를 위한 미군기지 확장 저지 싸움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이 참담함, 이 슬픔 속에서 다시 그대들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새로운 결의로 새봄을 맞이해야 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 우리는 다시 동지의 손을 맞잡습니다. 각기 다른 빛깔과 향기를 가진 여러분 한분 한분을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내용을 잘 채워서 저 괴물들을 정밀하게 ‘타격’해주시는 분, 피켓을 잘 만드는 분, 사진을 잘 찍으시는 분, 사회를 잘 보아서 집회나 모임을 살아있게 해 주시는 분, 백 마디의 말보다 그림으로 말해주시는 분, 노동의 힘든 일정을 접고 집회에 참석해 주시는 분, 대중연설을 잘하시는 분, 조직을 잘해주시는 분. 이역만리에서도 따뜻하게 후원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분… 그대들의 각기 다른 빛깔과 향기를 사랑합니다.

이 모든 능력에 지혜를 모아 올해에는 대중에게 더 쉬운 말로, 쉬운 언어로 다가가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힘내시고 결코 녹녹치 않은 개인의 현실도 꿋꿋이 이겨내면서 서로에게 평화로운 기운을 퍼뜨리는 한해가 되도록 만들어 갑시다. 저에게도 많은 위로를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평화를 택한 평화운동가의 운명이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그대의 하루가 화창한 봄날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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