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진보 운동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알 수 있는 산리쯔카 투쟁

[해외평화운동]

 6월 16일 도쿄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며 5박6일의 일본 일정이 시작되었다. 이번 일정은 AWC(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아시아공동행동)가 주최한 학생 교류 활동이었다. 나는 인천공대 학생들과 함께 이번 행사에 참여하였다.
첫 번째 일정은 나리타 공항 확장 반대 투쟁을 벌이고 있는 산리쯔카 집회에 참석했다. 그동안 일본을 다녀온 평통사의 다른 동지들에게 ‘산리쯔카’는 들어보지 못한 곳이었다.
집회장 입구부터 사복경찰이 검문을 하고 전투경찰이 집회장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긴장감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집회장 분위기는 전투적 분위기였다.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빨간헬멧, 파란헬멧, 흰색헬멧을 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가리고 있었다. 집회 내용은 나리타공항 확장을 위해 숲을 파괴하려는 정부의 행태를 규탄하는 집회였다. 집회를 하던 중에도 나리타 공항을 이착륙하는 비행기가 머리 위를 바로 지나가고 그 소리에 고막이 터질듯 했다. 집회를 간단히 마치고 나리타 공항 확장 예정지를 행진했다. 나리타 공항 주변은 이미 사방이 높은 철판으로 둘러쳐 있었고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주변에는 밭작물이 예쁘게 자라고 있었다. 모두 유기농 농법으로 키운다고 했다.


△ 산리쯔카 집회 후 확장예정지역을 행진하고 있다.(맨 우측은 통역을 해주신 사코다 동지)

 산리쯔카 농민들은 일본 농업을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FTA 체결로 농업이 죽어가고 있었다. 일본 농업의 단면을 이곳 산리쯔카에서 본 셈이다.
일본 정부는 현재 나리타 공항의 활주로가 구부러져 있어서, 직선 활주로를 만들어야 하는데 농민들의 밭과 숲이 가로 막고 있다며 강제로 내쫓으려 하고, 이에 반대하며 산리쯔카 농민들이 투쟁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 정도로 처음에는 이해했다. 그러나, 산리쯔카의 역사를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는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리타 공항을 짓기 위해 농민들의 논과 밭, 그리고 집을 모두 강제 수용을 했고,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투쟁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삶의 터전을 지켜야 된다는 생각으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마음으로 열심히 투쟁했다고 한다. 그러나, 투쟁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일본정부가 민간공항을 짓는 것 뿐 아니라 주일미공군군기지를 함께 제공하기 위해 더 큰 공항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단순한 생존권 투쟁이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는 투쟁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농민들은 공권력에 맞서 치밀하게 투쟁을 준비했고, 과정에서 몇몇의 농민들이 죽었고, 경찰도 함께 죽었다고 한다. 이로써 산리쯔카는 일본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는 거룩한 투쟁으로 기록된 것이다.
지금은 1농가만이 남아 있다. 우리는 마지막 남은 산리쯔카 농민 ‘시마무라 쇼지’씨를 만나러 갔다. 아들과 함께 닭, 돼지를 키우고 있었다. 우리는 일하고 계시는 시마무라 쇼지씨를 만났다. 만나는 동안에도 3~4분마다 나리타공항을 이착륙하는 비행기가 우리 머리 위를 지나 다녔다. 한국에 매향리 폭격장에서 전투기가 날아다니듯이...
시마무라 쇼지씨는 40여년의 산리쯔카 투쟁에서 많이 지쳐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자신은 산리쯔카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현재 산리쯔카 투쟁의 대안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데 대한 고민도 함께 이야기 했다.
산리쯔카 투쟁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산리쯔카 지킴이’들이 함께 농사를 짓고 있었다. 산리쯔카를 거치지 않은 일본의 활동가는 없으며, 활동가가 되기 위해서는 산리쯔카를 거쳐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현재의 일본 운동을 낳는 산실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반면에 40여년의 투쟁을 통해 슬픈 현실도 있었다. 바로 내부의 분열인 것이다. 처음 산리쯔카 집회에 참석 했을 때 보았던 흰 헬멧(중핵파), 파랑 헬멧(해방파), 빨강 헬멧(통일위원회)등과 같이 내부는 많은 분열을 겪었다. 산리쯔카 투쟁이 낳았던 또 하나의 아픔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정파가 다른 투쟁에서는 서로 잘 화합하지 못하지만 ‘반기지 활동’과‘산리쯔카 투쟁’에서는 이렇게 하나가 되어 투쟁한다고 한다. 평택미군기지 투쟁을 할 때 한국의 진보세력들이 하나가 되어 투쟁했듯이 말이다.
우리는 그날 저녁 산리쯔카 지킴이들과 함께 교류회를 가졌다. 그곳에는 특별한 두 분이 오셨다. 한 분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현재 일본 천황제 반대 투쟁을 하시는 스즈끼 할아버지고, 다른 한 분은 산리쯔카 투쟁을 40년간 이끌어 오시는 80세된 사무국장이셨다.
우리를 보시자마자 일본이 한국에 저질렀던 죄를 용서해 달라시며 한국을 식민지화 시켰던 것에 대한 사죄를 먼저 하셨다. 80세가 넘은 할아버지가 머리를 조아리시면서 눈가에 눈물이 고이신 채로 우리에게 사죄하시는 모습에 우리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무국장님은 우리에게 힘주어 말씀하셨다. “인생은 로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산리즈카 투쟁을 통해 여러분의 미래를 밝히겠습니다. 작은 불은 반드시 커질 것입니다. 끝까지 투쟁하는 것. 저마다 투쟁은 다를 수 있지만 그 현장에 계속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산리즈카 투쟁은 일본 진보운동의 산실이며 앞으로도 그 역할을 계속 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투쟁 할 것입니다.”라며 우리의 눈을 바라보셨다.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아리랑’ 노래를 불러 달라는 요청을 하셨다. 나는 아리랑을 구슬프게 한 곡조 뽑았다. 그리고 미리 한국에서 준비해간 소주를 할아버지에게 따라 드렸다. 조금만 따라 드리라는 산리쯔카 지킴이 말대로 조금만 드렸다. 한잔을 들이키시더니 눈가에 눈물을 글썽거리시며 농담도 하시고, 노래를 해야겠다고 하시며 마이크를 놓치 않으셨다. 통역을 하셨던 사코다 선생님은 지킴이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무국장님이 저렇게 기분 좋아 하시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면서 이날의 분위기를 이야기 했다.
우리는 산리쯔카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후에 AWC교토, 고베 등을 다니면서 집회를 했다.
내가 발제한 것은 한반도에 북미간에 평화협정의 체결의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평화의 분위기가 오고 있지만 한편으로 한미동맹 재편으로 인해 또 하나의 위기가 오고 있다는 것. 특히 한반도를 전쟁연습장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에 맞서 한국민중들이 투쟁하고 있다는 발제를 했다. 그 중에 무건리 훈련장 확장에 대한 상황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이용남 선생님이 주신 사진자료 중에 1988년 훈련하던 미군장갑차에 깔려 죽은 한 어린이의 아버지가 장갑차를 막아서는 사진을 설명했다. 그러자 통역을 하시던 사코다 선생님을 비롯한 집회 참가자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집회가 끝난 후 뒷풀이 자리에서 사코다 선생님에게 왜 그 사진을 설명하는데 울었는지에 대해서 물어봤다. 그러자, 사코다 선생님은 자신에게도 4살된 아들이 있는데 자신의 아들이 그런 사고가 일어났다고 했을 때 자신은 아버지로써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나왔다고 했다. 나는 외세에 의한 민중들의 감정은 이곳에서도 똑같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일본의 AWC동지들을 만나면서 느꼈던 것은 한국의 운동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일본 동지들은 한국의 운동을 배우기 위해 한국말을 배우는 등 자신의 기득권을 상당부분 희생해 가며 열심을 다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한국의 활동가들도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한미동맹과 일미동맹은 더욱더 깊은 연관 속에서 함께 맞물려 갈 것이다. 반기지 평화운동을 통해 더욱더 연대의 틀을 높여 미군기지 없는 동북아, 나아가 전 세계에 미군기지가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AWC동지들과 함께 노력해야겠다.

→ 관련글 : [활동보고(活動報告)] AASJA(Anti-invasion Asian student Joint 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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