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항미군기지이전저지 - 투쟁사례

[조직강화를 위하여 - 강연회 지상중계]

녹취 : 부천평통사 최경순
정리 : 회원사업팀 유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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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1일, 부천평통사 강의실에서 민점기 민주노총 통일위원장을 모신 가운데 ‘광양 미군기지 저지 투쟁에서 배운다’는 주제로 조직강화를 위한 1차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교육팀이 주관한 이 강연회는 평통사가 전개한 투쟁들도 잘 정리하여 회원들에게 교양해야 한다는 과제와 함께 평통사 조직력의 강화가 이후 전개될 모든 투쟁의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이 날 강연 내용을 지상중계합니다. 녹취를 하느라 애쓰신 부천평통사 최경순 회원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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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양 투쟁에는 애향심이 동력이 되었습니다. 지방, 특히 시골공무원에게는 애향심이 더 있어요. 그리고 전 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공무원을 하면서 애향심이 남달리 쌓였습니다. 섬진강 줄기 따라 내려가면 광양만이 둥그렇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가을에 전어잡이가 유명합니다. 전어축제를 제가 만들었습니다. 몇 백 년 전부터 내려오는 노동요인 전어잡이 노래가 있습니다. 이를 발굴하게 되었습니다. 70~80세 노인에게서 노래를 전수받고 이걸 살려야겠다 생각해서 축제를 만들었습니다.
광양은 매화마을, 매화의 본산지입니다. 광양 매실이 최고 맛있습니다. 그래서 매화축제를 제가 만들었습니다.
광양 북놀이도 유명합니다. 광양 농악에서는 북 테두리를 절묘하게 꼭 때립니다. 덩덩 따따 덩덩 따 이렇게요... 보쌈놀이, 전래놀이도 복원시키고, 남도문화제에서 상도 탔습니다.
이런 일들을 하면서 제가 다른 공무원들보다 더 우리 것에 대한 애착, 우리 땅에 대한 애착이 커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광양항 문제가 터지면서 정말 너무 화가 났습니다. 또 노조활동을 하면서 함께 했던 사람들이 씩씩하게 함께 투쟁에 나서게 됐습니다. 이런 것들에 기초해서 투쟁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코 제가 뛰어난 활동가였거나 이 분야에 학식이 있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 광양항 전경. 매립공사가 한창이다. [사진 제공 - 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그 전에는 군수물자가 광양을 통해 들어오는지 몰랐습니다. 한미전시증원연습 때 오끼나와에서 큰 배로 헬기, 탱크 부품이 들어오고 도착 후 조립해서 열차로 싣고 전방으로 옮겨지고 하는 일들이 2, 3년 사이에 있었는데 몰랐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문제 삼은 이후로는 이런 일들이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았고 올해는 헬기도 뜨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밤에 다양한 방법으로 군수물자가 이동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창고가 필요하지 않느냐, 미 군수물자를 포함해서 항만은 물건이 얼마나 많이 들고 나느냐에 평가와 통계수치가 나오니 비 안 맞을 창고는 지어야하지 않느냐 하는 얘기들이 여전히 나오고 있습니다.
창고만 짓겠습니까? 창고를 지으려면 일반물자에서 병기, 화학물품, 탱크 이런 것이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든 것입니다. 긴장을 풀지 말고 눈여겨 봐야합니다. 워낙 위치가 좋아서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투쟁 경험을 말씀드리면, 기본적으로 싸움을 시작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정했습니다.
첫 번째는 여론을 선점하자는 것입니다. 투쟁은 여론전입니다. 우리가 정책이나 군사 관련해서 정책을 이반하는 과정의 기밀을 알 수도 없습니다. 확정된 후에는 싸우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민들을 분노로 들끓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확실한 기반을 마련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한 지지가 아니라 앞장선 대표들이 돈이 필요하다면 돈도 내주고, 사람이 필요하다면 사람도 내주는 조직반이 필요했습니다. 특히 노동대오 조직적 기반을 확실히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광양시청 공무원 노조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돈도 내고 사람도 내고, 충실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상대방의 약점을 확실히 물고 늘어지자는 것이었습니다. 투쟁대상의 약점을 샅샅이 뒤져서 폭로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자유구역청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신설조직이기에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이었고 또한 다른 공무원들이 반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습니다. 또한 지역주민을 직접 상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적인 교류도 없었습니다.
자유구역청은 주로 바이어를 상대하기 때문에 접대문화가 있습니다. 공무원 규정상 예산을 가지고 접대비로 자유롭게 쓸수 없게 되어있어 바이어를 접대하려면 편법을 써야하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네 번째는 여론을 기반으로 하되 대중적, 군중적 기세로 초기에 기선을 제압하고 끈질기게 싸운다는 것이었습니다.
광주패트리엇기지, 평택미군기지 등 미군, 군사 문제는 특히나 어려운 싸움이기에 이런 자세로 해야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쉬움도 있습니다.
우선 시민참여를 끌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시민들의 심리적인 지지, 80%이상 시민들의 전폭적 지지는 받았지만 일반시민들이 집회에 참가한다든가 촛불을 든다거나 하지는 못했습니다.
후원금 주신 몇 분 있는데 아줌마 두 분을 포함해서요. 역시 아줌마들이 낫습니다. 주로 조직적인 노동대오에서 후원금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뛰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열기가 올랐다면 후원계좌로 후원금도 들어오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우리가 가가호호 2만장을 돌리기도 했거든요.
두 번째는 관변화되어 있는 봉사단체, 상공인 단체들이 찬성 입장을 내지는 못했습다만 투쟁대오에서 이탈했습니다. 물론 전회원이 그렇지는 않았지만 대표들이 이탈했습니다. 그리고 시민단체가 처음 시작은 성명서도 같이 내고 잘 싸웠는데 나중에는 엉거주춤하게 입장을 취했습니다. 힘차게 능동적 자세 가지도록 견인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군수물자 수송을 저지하지는 못해 아직 문제의 불씨가 남아 있습니다.
경제자유구역청장 입장에서는 미군기지 추진일정이고 우리입장에서 봤을 때는 투쟁일정입니다. 이 과정을 소개하면서 얼마나 긴박하게, 우리가 발 빠르고 집요하게 투쟁을 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2005년 12월 13일에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때는 제가 공무원노조 중앙에서 부위원장을 하고 있을 때였고, 2006년 2월까지가 임기였습니다.
경제자유구역청장이 2005년 6월에 주한미군 수송장교 11명을 광양항에 초청해서 브리핑을 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 항구가 기막히게 좋으니 이용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량을 유치하기 위해서 군사물자든 뭐든 가리지 않고, 광양항 실적이 된다면 유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자유구청장은 해양사무관 출신으로 주한미대사관과 미국 현지에서 가 있기도 했습니다. 해양물류에도 해박하고 미대사관과 미군측에도 인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9월에는 한미연합사 수송고위층관계관을 초청해서 물량 넣어 달라 요청하고, 11월에는 하와이 태평양사령부까지 가서 유치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11월 13일 건설부장관에게 가서 광양항에 대해 브리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직후 KBS, CBS 방송을 통해 “미군은 아시아지역의 모든 군사병기와 병참기지를 광양항에 둔다는 계획 하에 2006년 2,3 월경 미국방부 소속 군수사령부가 직접 조사에 나서기로 했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제가 그 때까지 광양민중연대 상임대표를 맡기는 했지만 한일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총파업 등으로 구속되기도 하고 석방 후에는 해고자 문제, 조직복원 등의 활동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얘기를 듣고 바로 내려왔습니다.
일단 바로 할 수 있는 조치로 12월 17일 민중연대 성명서를 내고 이어 시민단체를 조직하고 12월 23일 화물연대 등을 조직하여 차량시위를 벌였습니다. 적은 인원으로 손쉽게 할 수 있는 투쟁이었습니다.
26일 백옥인 경제자유구청장을 만나기로 계획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사이에 평택미군기지 투쟁에서 미군기지에 쉽게 찬성하는 사람들이 사람이 상공인이다는 얘기를 듣고, 상공인들을 10흘 간 전부 제가 직접 뛰어다니면서 만났습니다. 실제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구청장과의 간담회 자리에 상공인을 포함하여 30명이 모였습니다.

 이날 간담회 애피소드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청장이 거품을 물고 장한 일을 했다고 설명을 하더군요.
일단 자리배치부터 문제 삼았습니다. 강연식으로 자리배치가 되어있어 강의 들으러 온 것 아니라 대화하러 온 것이라고 주장하며 정면으로 구청장과 마주보고 앉았습니다. 이때 열 받아서 구청장에게 호통을 정말 많이 쳤습니다. 당신이 미국공무원이냐고 하면서요...
그러자 자유구역청장이 열 받아서 “시민단체 여러분은 컨테이너박스 하나라도 끌어오려 한일이 뭐있냐 관공서나 괴롭히기나 하지 않았냐”며 공무원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습니다.
이 날 간담회에서 중요한 내용을 확인하였습니다. “미군기지 유치는 6월부터 추진한 것이다. 아직 국방부와 주한미군이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조사 후 확정하리라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막기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입장을 표명하고 간담회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12월 23일 무렵 주한미군, 국방부, 청와대에 “왜관에 100만평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주한미군 병참기지가 광양으로 온다는 것이 맞느냐?”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주한미군은 우리가 보낸 문서로 만든 공문에 대해 “1월5일 현재는 계획이 없다.”며 이메일로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2, 3월 중에는 국방부와 청와대에서 “공식적인 방침을 정하거나 발표를 한 적 없다.”고 답변이 왔습니다. 미군보다 훨씬 답변이 늦더군요.
어쨌든 물밑에서는 계획이 오고갔으나 공식적으로 방침을 정하거나 계획을 발표한 적인 없다고 했기 때문에 경제자유구역청장을 상대로 싸움을 전개해나가면 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경제자유구청장 임명권한이 있는 도지사에게 파면요청을 하였습니다. 도지사 지시도 없이 멋대로 100만평 땅을 미군에게 팔아먹으려는 자유구청장 파면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는 1월 3일 민중연대가 나서서 지역언론사와 함께 왜관에 갔습니다. 경제자유구청장의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를 깨기 위해 우리의 대응논리를 만들기 위해 간 것이었습니다.
왜관미군기지가 경제발전에 얼마나 악 영향을 미쳤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도시 가운데 미군기지가 차지하면서 계획적 도시개발에 결정적 장애가 되고 있었습니다. 미군기지가 들어선지 60년이 되었는데 기지 근처 가게들이 미군들이 물품을 자체 공급하여 사용함으로 문을 닫고 어려워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확인 된 사실들을 지역신문사에서 대서특필하였습니다. 매주 1탄, 2탄 등으로 내보내고 방송도 나가고 했습니다.
“미군기지 문제는 광양의 자존심과 존폐가 걸린 문제다, 미군기지가 들어서면 미군범죄, 환경오염 등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이다.”
두 번째 왜관 답사를 1월 10일에 갔습니다. 이번에는 의회, 시청관계자, 시민단체와 함께 말입니다. 정말 볼수록 그 문제점을 더욱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왜관 칠곡군 관공서에서 94년도에 ‘미군기지 이전 의회결의’가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고, 그 곳 공무원들은 “미군기지는 지역개발에 암적 요소다.”고 까지 하였습니다. 물론 돌아와서 즉시 이를 알려내었습니다.
의원들은 의회에서 며칠 고민하다가 1월 17일 광양에 미군기지가 들어서면 안 된다는 입장정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표는 못해 우리가 대신 환영논평을 내어 의회의 결정을 공개하였습니다.
1월 7일에는 팽성주민대책위 트랙터순례단이 방문하여 같이 기자회견도 하였습니다.
민중연대가 시의회, 시청, 해양수상청, 여수항만청 등과의 합동 간담회를 통해 미군기지 유치에 반대 입장을 내지는 못하더라도 찬성입장을 내거나 앞장서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1월 16일 민중연대가 대책위 제안하여 1월25일에는 170단체가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광양 순천 여수 쪽 시민단체, 민중단체가 다 참가하고 광주전남은 진보연대, 통일연대, 경남 서부지역까지 단체들이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노조 대의원대회, 농민 대의원대회, 당 행사에 참가 찾아다니며 경과설명 도움 호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아파트 주1회 가가호호 방문 때 여수, 순천에서 어김없이 몇 명이 와서 작업을 같이 도와주기도 하였습니다.


▲ 2006년 3월 4일 오후 광양시민과 시민단체 회원 등 500여명은 광양미군기지 이전반대 1차 범시민대회를 열고 가두 행진을 벌였다. [사진 제공 - 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이 와중에 도지사가 1월 도지사 업무보고에서 우호적인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5월 지자체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 현직 도지사도 예비후보였습니다. 각 당 후보 예비후보들을 시청 노조사무실로 불렀습니다. 언론 접촉도 쉽고 후보들이 부담 없이 오기도 쉬운 시청이야말로 적절한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자유구역청장과 투자유치부서 간부들의 판공비에 대한 정보공개청구를 하여 자료를 얻어냈습니다. 실사해보니 투자유치를 위해 외국 선주들을 데려다가 고급호텔에서 재우고 10만원자리 밥도 사주고 한 것이었습니다. 공무원 노조 조합원들이 자료 분석을 하니 공무원이 공무원을 잘 안다고 자료 분석을 아주 잘하였습니다.
이 과정에 단체들끼리 특성을 살려 역할 분담도 하였습니다. 한 단체는 정보공개청구 내용을 가지고 자료검토를 하고 시민단체는 감사원에 고발하도록 하였습니다.(검찰은 시간 끌고 뭉개버리기 쉬우니 일단은 신속하게 접수 처리하는 감사원을 통한 것입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며 검찰 고발까지 해서 옷 벗기겠다. 끝장을 본다는 자세로 약점을 캐고 물고 늘어졌습니다.

 7월 18일 드디어 경제자유구청장이 만나자고 하더니 항복 선언을 하였습니다.
자유구역청장도 직접 주민들을 만나고 여론을 만들어나간 우리 활동을 보고 그대로 따라 했었습니다. 동사무소 돌면서 행정의 실핏줄이며 여론을 주무르는 통장, 부녀회장 회의에 음료수 사들고 찾아가고, 상공인 간담회도 하며 여론을 뒤집으려 무지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먹히지 않았습니다. 와서 알지 못할 어려운 얘기들만 늘어놓으니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우리의 여론전에 밀린 것이었습니다.
“자유구역청장이 와서 한 것이 무엇이냐. 암적 존재다. 오히려 행정만 복잡해져서 시민들에게 불편만 주고 하라는 투자유치는 제대로 못하고 있다. 실적 없으니까 미군기지로 실적 올리려하는 것 아니냐.”
부산, 인천 자유구역청과 비교표를 시리즈로 뽑아서 뒤떨어지는 점들을 언론에 내고 홈페이지에 폭로하고 하니 무지 피곤했을 겁니다.
그러나 간담회 내용대로 직접 기자회견까지는 어렵다고 하여 우리가 간담회 내용을 공개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기로 하고 일단락 지었습니다.
그러고는 이 투쟁을 통해 꾸려진 동력을 한미FTA 저지 투쟁 동력으로 전환하였습니다.

 투쟁에서는 홍보가 중요합니다.
문안을 어떻게 만드느냐. 어렵고 복잡하게 쓰지 않아야 합니다. ‘광양을 살립시다’, ‘자유구역청장 투자유치하라니 미군에게 땅 팔아먹으려한다’, ‘미군기지 건설에 5년은 걸리는데 그 기간이면 충분히 물량유치 가능하다’, ‘미군와도 자신들 물품 가져오지 우리 것 안 쓴다’, ‘미군기지 들어오면 겨우 300명 일자리 생기지만, 100만평에 공단 들어서면 2만~3만 명 일자리 많게는 10만 명 일자리까지 생긴다’는 등 말입니다.
그리고 미군기지가 있는 여러 곳의 예를 들어 환경오염, 성범죄, 왜관의 문제점, 군사기지가 들어옴으로써 미군의 통제를 받게된다는 점등을 직접 제가 문안을 시민들이 알기 쉽게 풀어서 손을 보았습니다.

 투쟁전략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속도전이 중요합니다. 누가 얼마나 빨리 시민들의 마음 여론을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냐에 승패가 걸렸습니다.
두 번째로 투쟁대상을 정확히 정하고 정신없이 두들기는 것입니다. 동시다발로 말입니다. 정신 못 차리게... 물총고기가 있습니다. 이파리에 앉아있는 파리를 잡는데 수많은 물총고기가 동시에 물을 뿜어 댑니다. 성공확률이 80% 랍니다. 물총고기처럼 정신없이 동시다발로 1인 시위, 집회, 선전전, 정보공개청구, 고발 등을 하는 것입니다. 절대 우군을 확보하지 못하게 차단하고 투쟁대상을 철저히 고립시켜야 합니다. 도지사도 동의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세 번째로 대신 우군은 넓게 확보해야 합니다. 시민단체, 상공인, 봉사단체 들을 초반에 만나서 설득을 시켜내는 것은 물론, 종교인들도 조직하였습니다. 원불교, 기독교 등, 한 예로 목사님의 도움으로 700명이 참가하는 노회 총회에 찾아가 유인물을 돌리기도 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노회 성원들이 다양하여 자신이 직접 나서지는 못하지만 행사 때 옆에서 유인물을 돌려 투쟁을 알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진보연대 등을 통해 광양상황을 계속 알려냈습니다. 그리고 제주해군기지부터 광주, 광양, 평택으로 이어지는 대북, 대중국 서해안 벨트를 막아내야 한다고 알려냈습니다.
네 번째로는 우직하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전물을 2만부 찍었습니다. 4만 가구가 있습니다. 시내를 중심으로 2만부를 돌리기로 하였습니다. 아파트, 밀집 주책가 등에 말입니다. 투쟁 처음에는 여론 환기를 위해 집회 등을 주로 하지만 결국 여론전이 본격화 될 때는 시민들 깊숙이 들어가야 합니다. 시민들의 마음속에 미군기지 반대가 신념으로 자리잡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제대로 알려야 하고 이는 투쟁에 나선 우리들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저는 선전전을 이렇게 하였습니다. 애피소드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야 하기 때문에 아침산책을 선전전으로 대신하기로 맘먹고 한 시간에 2백 가구 정도를 돌아다녔습니다. 유인물을 문 앞에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5년 야쿠르트 배달을 하는 집사람이 사람이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데 당신이 꼭 그 꼴이다. 당신이 새벽 6시에 붙이면 7시부터 청소부들이 다 떼간다. 그러니 청소가 끝나는 오후4시 이후에 붙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하여 아파트는 오후에 붙이고 주택가는 아침에 붙이고 이렇게 동지들과 꾸준히 선전전을 하여 2만가구들 돌 수 있었습니다.
술집 등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이 사는 원룸에도 열심히 붙였습니다. 이분들이야 말로 서민들이고 많은 사람만나는 사람들이라 도움이 많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다섯 번째로 유연함을 가져야합니다. 싸움 잘하고 막판에 마무리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앞에서 얘기한 시의회 입장공개나 자유구역청장의 항복 선언을 우리가 공개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 등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조직과 사람을 남기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육성하는 싸움 말입니다. 우리는 미군기지 싸움을 FTA저지 싸움으로 연착륙 시켜냈습니다.
실제로 투쟁과정에 어민회가 함께 해주었고 시민단체, 또 진보연대를 결성하는 과정에 지역단체의 연대를 끈끈히 하는 과정으로 되었습니다.

 미군기지 이전 저지 투쟁이 성공한 이유는 지방 사람들 특유의 애향심이 강하게 작용한 이유를 첫째로 들 수 있지만, 아직은 싸움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수시로 탱크나 헬기 등의 군수 물자들이 수시로 광양항에 드나들고 있고, 병기창을 세우자거나 하는 시도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 미군기지와 한국의 미군기지를 연결하여 대중국 봉쇄망을 펼치려는 전략적 유연성에서 본다면, 최적의 전략적 요지로서의 광양항을 포기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이 날 강연회에는 수도권 중심으로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실무자와 핵심회원 등 30여 명이 참가했다.

→ 관련글 : 조직 강화를 위한 1차 강연회

→ 관련자료 : [보론2] 광양 미군병참기지 이전반대투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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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문섭

    담담하신 여러분 이러한 일은 국익을 생각핫고 하시지요. 혈맹에 대한 배려는
    해봤는지요. 홀로 살수는 없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