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통제권 제대로 되찾기 1만인선언'을 성사시킨 주역들 - 가식 없는 순수함, 기본에서 벗어나지 않는 충실함으로 1만인선언을 성사시킨 평통사 회원들 이야기 -

[이달의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

'작전통제권 제대로 되찾기 1만인선언'을 성사시킨 주역들
- 가식 없는 순수함, 기본에서 벗어나지 않는 충실함으로 1만인선언을 성사시킨 평통사 회원들 이야기 -

부천평통사 최경순

신문 한 면 전체가 깨알보다 작은 글씨로 된 이름들로 가득 채워진 11월 5일자 한겨레신문을 보셨는지요.
과연 1만명 달성이 가능할까 의구심을 갖고 시작한 1만인선언이 회원들의 노력으로 10,481명으로 마감되면서 초과 달성이 되었습니다.
이 같은 평통사 회원들의 열정적인 활동으로 전체 시민사회 진영이 이번 39차 SCM 의제인 작전통제권 환수 요구를 자신들의 요구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이를 보편화시킨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성과입니다.
또한 처음 방한하는 게이츠 미 국방장관 일행에게 우리 국민들의 분명한 요구를 보여주고 주한미군 철수 의지를 알려낸 것도 자부할 만한 일입니다.
이번에 1만인선언을 성사시킴으로써 우리 회원들의 힘으로 1만 명을 조직하고, 10만 명의 힘으로 유엔사를 해체하고 작전통제권을 제대로 환수하며 주한미군 없는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지난 8월 일꾼대회에서의 결의가 결코 빈 말이 아니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목표치 달성을 위한 분담으로 배정된 인원에 비추어 보면 대구가 200%, 전북이 150%를 달성했으며 서울, 인천, 부천은 초과 달성이거나 목표치에 근사하게 이루었습니다. 전체 1만명 이상되는 선언자 중 평통사 회원들이 7천명 이상을 조직해낸, 놀라운 성과입니다.
우리 회원들은 무리한 목표를 잡지 않았는가 하는 우려를 불식시켰습니다.
최선을 다해 열성적으로, 창조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1만인선언을 전개한 회원들의 힘이 아니었다면 1만인선언을 성사시킬 수 없었습니다.

한 회원은 가족모임에 대자보를 만들어 갔다고 합니다. 말로만 설명하지 않고, 준비한 대자보를 바닥에 좍 펴놓고 설명했더니 가족들이 쉽게 이해하고 모두 흔쾌히 서명에 동참했다고 합니다.
허세욱 열사가 생전에 일하셨던 한독운수 노조에서는 조합원 2백여 분 가운데 무려 150여 분이 동참하셨습니다.
전체적으로는 기존의 조직된 단체들 보다는 발품을 팔아 받은 서명이 많았고, 오래된 회원들 보다 신입회원들이 더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면서 사는 힘든 조건 속에서 나름대로 창의적인 노력들을 하는 모습에 실무자들은 깊은 감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 회원들은 자신들이 자주 가는 술집, PC방, 편의점, 미용실 등에서 서명을 받아왔고, 그러한 과정에서 여러 우여곡절도 있었습니다.

서울 평통사


△ 신재훈 회원

<신재훈>
얼마 못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열심히 했다고 하니 민망합니다. 그래도 반드시 이번 서명받은 경험들을 전국적으로 같이 공유해서 부족한 점이 무언가, 채워야 할 것인 무엇인가를 정리하고 이후에 활용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명을 받기위해 주변 선, 후배 직장 동료, 교회, 공원, 역도경기장, 서울역으로 다니면서 느낀 점은,
- 상대방이 작통권 환수 서명을 하면서 왜 유엔사는 해체되어야 하냐?고 물어서 유엔총회에서 해체결의를 해서 유엔사 존속 근거가 상실되었고 그러한 유엔사로 전시작전통제권을 행사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자, 공부 더 하고 오라고 할 때 참 막막했습니다.
- 그래도 미군때문에 우리나라가 있는 것 아니냐고 물어올 때 보은론? 은혜론? 하면서 머리에서 생각은 뱅뱅도는 데 명쾌한 답은 안 나왔습니다.
- 94년도 평시 작전통제권을 환수 받을 때 미군이 연합권한위임사항으로 평시 작전통제권의 핵심사항을 다시 가져간 기만성과, 전시작통권을 반환한다면서 94년과 마찬가지로 전쟁개시권과 위기관리권을 미군이 가져가고, 각 군사기구를 층층이 두어 이전보다 더욱 종속된다고 교과서적으로 설명을 했지만 뭔가 이해하기 쉽고 ‘아 그래 그랬구나’ 하는 시원한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미진함이 남아있습니다.
- 질문이나 반박을 할 때 버벅대며 설명을 못한 점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래도 그 중 쉽게 설명하였던 것은 층층이 한미협조기구를 두어 사실상 미군이 작전을 주도하려고 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이것을 농사짓는 과정에 빗대어 설명하니, 농사를 이해하는 분들인 쉽게 이해했습니다.
- 전쟁개시권, 위기관리권, 공군작전통제권 등을 설명할 때 이해하기 쉽고 동의를 이끌어 내기 쉬운 멘트들, 남녀노소, 노동자, 농민, 학생 등 대상에 따라 더욱 다가 갈수 있는 아이디어를 같이 고민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 윤영일 회원

<윤영일>
저는 주로 평통사 회원들과 이랜드 집회장 비정규직 집회장 공무원노조 출범식장 강동 송파 민노당 주민행사장을 갔고, 개인적으로는 평택 대추리 지킴이하면서 알게 된 평화 활동가들, 사회에서 아는 사람들 중 평화운동과 인연이 없는 사람들, 학교 동창들, 과거에 나랑 운동 단체에서 활동했지만 지금은 활동하지 않고 일상 생활하는 사람들, 강화도 산마을고등학교(대안학교) 학생과 선생님들에게 서명을 받았어요.
인상적이거나 기억에 남는 경우는, 흔히 사람들은 노인들은 보수적이고 젊은이들은 비교적 진보적일 거라고 생각들을 많이 하는데, 이번 선언을 받으면서 고정관념이 깨졌어요.
젊은 사람들 중에도 시기상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미국이 강대국이고 우리는 약소국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며 선언에 반대 입장을 갖는 사람들이 있어요. 노인들 중에도 흔쾌히 선언에 동의하시는 분들도 있고요. 물론 노인들 중에도 반대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동의하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았어요.
어려운 점이나, 선언을 방해 하거나 시비를 거는 사람들은 없었어요.
그런데,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장에서 선언을 받는데 "(기득권세력)이 작통권을 되찾더라도 (노동자 농민 서민 대중들) 우리들에게 곧 바로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안 하겠어요" 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더라고요. 순간 당황스러웠어요, 평화 활동가들 중에도 생각이 다른 사람도 있구나 하고.
앞으로는 작통권이 미국에 있으면 우리 국민들 우리 자신들에게 어떤 피해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근거를 대서 대중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막연히 주한미군 철수해야 한다, 작통권 되찾아야 한다는 원론적인 것만 얘기해가지고는 대중들이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게 하기 어렵죠. 그렇게 해서는 반론을 제기하면 답이 막혀 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저도 그런 경우가 많이 있었죠.
이번 1만인선언을 받으면서 성과는, 미 제국주의에 반대하지만 운동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하기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또 일상에 묻혀서 사회에 관심을 안 갖고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구요. 이런 사람들에게 참여하는 기회를 갖게 해준 게 성과인거 같아요.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깨운다고 할까요.
인상적인 경우는, 공무원 노조 4기 출범식을 갔는데 150명 정도 온 거 같은데 통일 운동에 열정적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매우 적극적으로 서명을 했어요.
또 하고 싶은 얘기는, 우리는 어릴 때 위인전을 보는데 나폴레옹이나 징기스간 이런 사람을 영웅으로 생각하지요. 닮고싶어하고 따라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행위를 당연히 여기게 길을 들이잖아요. 치밀하게 길들이기 때문에 사람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지요.
이런 대중들에게 내용을 쉽게 잘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천평통사


△ 김원식 회원

<김원식>
저는 50명 정도 서명을 받았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더 많이 못 받았다고 생각해요. 서명받는 중 가장 아쉬웠던 일 한 가지를 들라면,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거의 서명을 다 받았는데 딱 한 사람만 못 받았어요. 평소에 족보로 아저씨뻘이라고 해서 무척 친한 형 동생으로 지내는 친구가, 자기 형이 미군부대에서 일한다고 절대 안하겠다고 거절한 일이었어요. 그 친구에게만 못 받은 일이 참 아쉬웠어요.
재미있던 일 하나는, 제가 서명을 권하자, 얼핏 보고선 작통권 환수를 하면 안 된다는 말로 알고 펄쩍 뛰던 분이 있었는데, 옆에 계신 분이 ‘일단 2천원 주고 나서 읽어 봐!’ 하는 통에 같이 웃던 일이 있습니다.
화물연대에서도 많은 분이 해 주셨는데, 전에 활동하시던 분들이 서명비의 2배가 넘는 돈을 주시고 지금도 열심히 해 줘서 고맙다고 하는 말을 듣고 뿌듯했어요.
고향 친구들에게 서명을 받을 때는 ‘네가 왜 그런 일을 하냐, 어떻게 된 거 아니냐’ 고 면박도 듣고 황당한 말도 들었지만 -내가 안하면 누가 하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치적으로 여권과 한나라당에 맘이 있는 사람은 반미투쟁을 싫어하고, 이런 사람들을 바꾸는 데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만 보면서 조급해 하지 말고 우리끼리라도 열심히 해야 하고, 또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 예전과는 다르게 좋은 쪽으로 바뀐 것도 느꼈어요. 계속 열심히 합시다.

부천평통사


△ 최희준 회원

<최희준>
어느 날, 집에서 쉬고 있는데 한 종교단체 포교원들이 찾아왔어요. 그 날 날씨가 많이 쌀쌀해 두 여자 분이 너무 추워 보이셔서 들어오라 하고 차를 대접했어요. 그리고선 처음에는 금방 가겠지 하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어요.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도 갈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문득 1만인서명이 생각나서 그 분들에게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 주었으니 내 얘기도 들어달라’하고 이번 서명의 취지를 말씀드렸고, 서명을 받았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선언비는 받지 못했습니다.


△ 김숙희 회원

<김숙희>
주변 동료들과 친구들에게만 서명을 받다가 기회가 되어 민주노동당 여성 정치학교에 유한경 회원과 함께 참가하면서 서명을 받았었는데, 부천 평통사 목표치가 다 찬 줄 알고 한경 씨에게 더 많은 서명지를 가져가시게 했어요. 나중에 보니 부천도 수가 다 안 찼다길래 쪼끔 후회도 했죠.
여성정치학교에서 서명을 받는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경우는 한 아주머니가 딸을 데리고 와서 설명을 해 달라고 하시면서 받았던 서명이었어요. 직접 참가비를 내시지 않고 딸에게 판단을 맡긴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더함분회 전윤미, 장해영, 김정훈 회원

<전윤미>
분회 모임 중, 우리가 자주 가는 술집의 주인 언니에게 서명을 받자는 제의가 있었고 모임이 끝나자마자 분회원 모두가 서로 먼저 받기위해 50미터 단거리 달리기를 하듯 앞다투어 술집으로 뛰어갔어요.
도착해서 분회장님이 선언 참가를 권유하자 단골집 주인 언니는 흔쾌히 해 주셨고, 다른 손님들께 더 받아주겠노라며 서명용지를 몇 장 더 받아두셨어요. 그리고 며칠 후, 손님 중 몇 분의 서명을 더 받아서 주셨다. 그것을 제가 챙겼지요.
또 하루는, 다른 손님에게 내용을 설명해 주는 것이 어려웠던 단골집 언니가 그 날 뒤풀이를 하던 또 다른 회원에게 눈짓을 마구 보내시고, 그 회원이 용기를 내서 손님들에게 설명을 해 드리고 해서 몇 분의 서명을 더 받아주셨어요.

<김정훈>
술 마시고 택시를 탔다가 문득 1만인 선언이 생각나서 알콜의 힘(?)을 빌려 평통사 활동에 대한 이야기와 선언에 대한 설명을 기사님께 했습니다.
기사님은 40대 후반 정도 되는 분이었는데, 서명에는 동참하겠다 하시고 연락처는 안 주시더라구요. 내용에는 동의하는데, 어떠한 불이익을 당할까 봐 두려워하시는 것 같았어요. 아직까지 이런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현실이 참...
기사님께서는 택시를 내릴 때, 딱 2천이 나온 택시요금을 안 받으시는 것으로 서명비를 대신하셨어요.
또 자주 가는 미용실에 머리 깎으러 갔다가 서명을 받았는데, 30대 후반 정도 되는 미용사님께서는 평소에 정치 정세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는지, 이미 작통권에 대해 잘 알고 계셨고 흔쾌히 해 주셨어요. 너무 쉬웠죠.
그리고 옆집 아주머니께 전기요금 받으러 갔다가 서명을 받기도 했는데 '총각,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뭐 이런 걸 해~' 하면서도 서명을 해 주셨습니다.
이외에 친구들은 물론, 자주 가는 식당이나 술집에서도 받았는데 서명비는 꼭 받아서 챙겼습니다. 서명비를 받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숙경이 누나가 신신당부 했거든요.

<장해영>
저는 재밌던 일도 없고 너무 밋밋한데... 그냥 친구들과 선후배들, 일 관계로 만나는 분들께 서명을 받았어요.
스스로는 재밌던 일이 별로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지켜 본 다른 회원이 전하는 말로는 '눈을 반짝이면서 무섭게 받으러 다니더라' 고 하더군요.

대전충남평통사


△ 박석진 사무국장

<박석진>
주로 일꾼들이 과기처 노동자 대동제, 민주노총 강의, 민주노동당 여성 정치학교 등을 다니면서 서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회원들에게는 전화통화를 통해 서명을 취합했습니다.
작전통제권 환수가 되면 절대 안 된다고 막무가내로 주장하는 아주머니들을 만났을 때는 진땀을 빼기도 했지만, 이미 조직된 단위들을 중심으로 받아서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그러나 그런 단위 내에서도 직접 몸으로 부딪치지 않고 한 다리 건너 부탁하는 것만으로는 성과가 없었습니다. 직접 발로 뛰어야 소득이 생겼지요.

광주전남평통사


△ 정동석 국장

<정동석>
인상적이었고 모범적이었던 경우는, 전남 무안의 박석종 목사님 사모님께서 서명용지가 부족하니까 직접 A4지에 서명용지를 프린트해서 주변 분들과 신자들 70분 이상을 받으신 일이었습니다. 주로 실무자가 다니면서 서명을 받았는데, 자발적으로 적극 실천해 주신 모범적인 사례지요.

대구평통사 준비모임

<백창욱>
서울촌놈이 대구로 이주한지 일 년도 안된 터라 대구에는 사돈의 팔촌도 한명 없는 처지에서, 아는 사람 찾아다니면서 서명을 받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대구에서 같이 운동하는 목사님들이 있었고, 활동가들 모임에 몇 번 출입하면서 그들로부터 받은 명함이 있었다.
사실 서명 받는 데는 약간의 노하우가 있다.
작년에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기독인연대’사무국장으로 일할 때, 성탄절을 맞이하여 “대추리 주민과 연대하는 기독인 1225인 선언”모집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 때 서명만 받은 것이 아니라 대추리 주민들 겨울나기를 돕고자 선언 참여비로 천 원 이상씩 모금도 했었다. 이번 평통사 1만인선언 모집과 방식이 아주 비슷했다.
이때의 경험과 이참에 대구평통사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내가 한 일은 하느님의 기운에 힘입어 약간이라도 끈이 닿는 사람에게 1만인선언에 협력해 달라고 요청한 것뿐이다. 사실 조금은 염치없는 일이기도 했다. 목사님들 쪽은 몰라도 활동가들과는 안면 한 두 번 접촉한 것이 전부여서 부탁할 때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평통사 이름이 뒤에 있고, 너무나 분명한 현안인지라 말하기도 떳떳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보내주는 서명지나 선언비를 그때그때마다 지체하지 않고 평통사 중앙으로 부지런히 전달했을 뿐이다.
중앙일꾼들이 1만인이 넘는 서명자를 정리하여 신문에 낸 일이나, 미 국방부장관 방한에 맞서서 투쟁하며 겪은 노고를 생각하면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쑥스러운 일이다. 다만 구약시대 예언자들이 퍼포먼스를 펴며 하느님의 심판을 선언한 것처럼, 오늘 평통사의 투쟁에도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있다고 믿기에 이 일에 동참하는 것이 기쁘다.

관련자료 : 작전통제권 환수 및 유엔사 해체 1만인 선언문 및 참가자 명단

관련기사 : 작전통제권 완전 환수! 유엔사 해체! 미군없는 평화협정 체결 촉구! 39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 즈음한 1만인 선언발표 기자회견

관련자료 : 39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 대응 투쟁(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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