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계각층 대중운동의 비약적 성장을 배경으로 반핵평화운동은 핵발전소 건설 저지를 위한 범국민적인 운동과 송악산, 매향리, 군산, 평택, 안면도 등 미군기지, 핵관련 시설, 핵폐기물에 대한 민중의 처절한 생존권 투쟁으로 발전해 왔다. ‘반핵평화운동연합’은 이와 같은 평화운동의 자랑스런 전통을 계승하고 평화롭고 해방된 삶의 주체인 민중과 함께 이 땅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억압과 폭력에 맞서 싸워나갈 것이다” (창립 선언문 중)
1990년 6월부터 공해추방운동연합 반핵평화위원회 위원들을 중심으로 한 준비모임이 수차례 열렸고, 1991년 초에는 미-이라크 전쟁(걸프전)에 대한 반전활동을 전개하면서 590명이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창립하게 된 것이다. 초대 공동의장은 김남주 시인과 김현 원불교 총무가 맡았다. 지도위원 명단에서는 반가운 이름 임종철 공동대표를 찾을 수 있다. 반핵평화운동연합은 1991년부터 1992년까지
핵폐기장, 핵발전소 건설 저지 투쟁. 주한미군의 핵무기 폐기 촉구 투쟁,
일본 군국주의 부활 저지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투쟁 등을
과제로 삼고, 일본 자위대의 PKO 파병, 한국군의 PKO 파병, 한미전시접수국
지원협정을 주요 사안으로 공청회, 집회, 국회비준 반대 투쟁 등 실천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러나 1992년 말, 대선을 거치며 김낙중 선생과 손병선 선생 등 반핵평화운동연합의 지도부가 구속되는 등 공안탄압을 받으면서 반핵평화운동연합은 “조직 자체가 존망의 위기에 놓”인다. 반핵평화운동연합의 회지 <반핵평화> 8호에서는 실무자 명의로 “설령 저희 단체가 발전적 해체를 겨냥하여 간판을 내릴지라도 그것은 ‘반핵평화’의 사상-조직적 기반을 오히려 넓히기 위한 잠정적인 ‘깃발내림’일 뿐입니다. 분단 상황이 지속되는 한, 반핵평화운동연합이 지향했던 ‘비핵’, ‘군축’, ‘평화’, ‘통일’의 이념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그 이념은 1993년~1994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연대회의와 새로운 평화운동단체 준비모임 등을 거쳐 평통사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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