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방문기 - 60년만에 찾은 아버지의 고향

$회원들의 이야기 마당$

 

 박연폭포로 가기 위해 가로지르는 개성시내 풍경은 한마디로 충격에 가깝다. 우리가 배운 남측의 기준대로 말하면 오가는 차량은 고사하고 이렇다 할 건물 하나 눈에 들지 않는다. 주거 밀집지역으로 보이는 고층아파트단지라야 기껏 몇 층을 넘지 않으며 그것도 색이 바라 영락없이 쇠락해 보인다. 이곳저곳 그리고 도심 깊숙한 곳까지 올망졸망 어깨를 맞댄 수많은 주택들과 그리고 그 사이를 잘도 헤집고 다니는 실루엣 같은 골목길들이 아스라이 땅과 하늘을 이어주고 있다. 그러나 서울의 어느 대로보다 결코 좁지 않은 개성의 주요 도로들은 자동차가 아닌 자전거가 점령하고 있고, 양 옆 인도에는 질서 있게 제법 많은 북녘 인민들이 여유롭게 제 갈 길을 재촉한다. 어떻게 알았는지 한 켠 공터에서 저들만의 놀이에 빠진 아이들이 돌연 차를 쫓으며 싱그러운 웃음으로 손을 흔든다. 버스 안, 지난 과거를 회상하듯 관찰자가 되어 버린 우리 남측 관광객들도 문득 일제히 손을 들어 화답한다. “반갑습니다. 동포여!”

내가 탄 버스의 북측 안내원은 매우 정렬적인 남성이다. 말투는 북측의 전형적인 말씨로 그 억양이 유난히 드세고 힘이 넘쳐 보인다. 하지만 그 강단 있는 성격과 달리 매우 솔직한 편이다. 개성공단을 지날 때이다. “이곳 개성공단은 남측에서 자금과 시설을 투자하고 북측에서 인력과 설비를 제공하여 조성된 곳으로 우리 민족의 위대한 힘의 상징이자 또 북남 간에 반드시 이뤄내야 할 통일의 초석이기도 합네다. 앞으로 우리 북측 인민들은 많은 남측 기업이 이곳에 투자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네다.” 사뭇 너무 진지해 잠시 차내 침묵이 흐를 정도였다. 그러나 내가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이 북측 안내원의 남측 손님, 즉 우리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다. 지난 시절 반목과 적대를 통해 굳어진 “남한”과 “북한” 그리고 “남조선”과 “북조선”이라는 용어보다 상대방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남측” “북측”. 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정겨운 이름이던가!

남측의 자본주의적 시각으로 보면 개성 시는 정말 음산하고 썰렁한 곳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어떤 경이로움이 도처에 숨어 있다. 먼저 거리를 활보하는 시민들을 자세히 보자. 놀랍게도 얼굴이 모두 한결같이 곱고 만면에 여유가 묻어난다. 결코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한편 시내 거리는 매우 깨끗한 편이다. 대량 소비와 대량 폐기를 통해 지탱되는 자본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남아도는 쓰레기가 없어서라고 주장할 수 있을 테지만 하여튼 거리는 너무나 청결했다. 또 동승한 북측 안내원의 설명에 따라 개성시내 건물 배치의 어떤 특징도 읽어낼 수 있다. 사회주의 체제상 공동체 생활을 중요시 할 수밖에 없음이니 당연히 건물배치와 안배도 이에 따랐다. 구역에 따라 각종 학교와 도서관, 인민학습당이 같은 생활권에 묶여있고 시민들의 편리를 봐주는 관련 관공서들이 함께 붙어 있는 것들이다. 이런 이유로 거주지를 중심으로 도보생활관이 형성되는 것이며 당연히 같은 구역에 사는 공동체 구성원끼리 결속력과 단결력 그리고 연대의식이 매우 강하게 드러나는 것일 테다. 남측의 잣대로 들여다보아도 이 점은 우리가 과거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당일 개성관광 일정은 오전 북측 CIQ를 통과하여 5분여 거리에 있는 개성공단을 가로질러 곧바로 차량으로 박연폭포로 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오후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의 일화가 서려있는 선죽교와 숭양서원을 방문하고 이후 고려박물관 관람으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한다. 박연폭포는 송도삼절의 하나로 숭앙 받을 정도로 개성의 최고 명승지로 꼽힌다. 한편 박연폭포는 그 명성답게 들어선 자태가 매우 웅장하고 신비로워 멀리서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옛날 박연폭포의 절경에 취한 황진이가 즉석에서 머릿단을 풀어 일필휘지로 글을 새겼다는 전설을 안은 룡바위에서 박연폭포의 그 신화는 그 절정을 이룬다. 이어 관광은 박연폭포를 품은 송악산 관음사까지 약 1시간여의 산행을 겸한다. 관음사로 오르는 여정에 바위 곳곳에서 마주치는 북측의 선전구호는 언뜻 당혹감을 준다. 적어도 크기와 규모로 본다면 결코 금강산에 뒤지지 않는다. 우리 일행 중 어느 한 분이 도저히 그 궁금증을 감추지 못하고 몇 번을 주저하다 안내원에게 질문하고 말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글자들을 새겨놓은 것이오?” 다소 예기치 않은 당돌한 질문이기에 잠시 긴장했는데 북측 여성 안내원이 화사하게 웃으며 답한다. “느낌이 어떻습네까? 우리 인민들이 우리 공화국의 대한 드높은 충성심이 읽혀지십네까? 그렇게 우리 공화국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 보여주는 것입네다” 의외의 대답이었지만 그 말 속에서 우리가 흔하게 듣던 북에 대한 편견들, 이를 테면 가난이거나 구걸 또는 비굴과 같은 그런 것들을 결코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결코 호락호락한 국가는 절대 아니라는 매우 강한 인상만이 남겨진 셈이다.

사실 이번 개성 관광은 급작스럽게 이뤄졌다. 어릴 적부터 듣던 아버지의 고향은 개풍군 이만리이다. 말씀에 따르면 지금의 개성공단 근처라고 한다. 3월 초순 어느 날이다. “아무래도 새 정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자칫하다간 개성방문도 장담할 수 없으니 되도록 날을 좀 빨리 잡았으면 한다만…” 그렇게 해서 급기야 서두른 것이 지난 3월 26일이다. 좀 뭐하지만 이른바 60년 만에 고향 방문인 셈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날은 남북관계에서 매우 긴박했던 하루다. 먼저 우여곡절 끝에 올림픽 예선 남북축구가 평양에서 상하이로 옮겨져 치러진 날이다. 또 이날 저녁은 전날 통일부장관의 북핵관련 발언이 빌미가 되어 개성공단 내 우리측 인사가 추방당한 날이기도 하다. 문득 이날 개성관광 내내 나와 오랜 이야기를 주고받은 그 북측 안내원이 북측 CIQ에서 헤어질 때 악수하며 나눈 마지막 인사말이 뇌리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북과 남, 남과 북, 이젠 민족으로 다시 만나야 합네다. 통일된 조국의 미래를 위해서요. 그리고 또 자주 만납시다” “그래요 또 만납시다.” 서로가 똑바로 시선을 맞추지도 그렇다고 피하지도 못한 어정쩡한 상태에서 가볍게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비무장지대를 통과하는데 멀리 판문점 넘어 분단의 상징, 기성동과 대성동의 껑충한 깃발들이 불쑥 눈에 들어온다. 태극기와 인공기. 아아, 그런데 누가 저 분단의 깃발들을 감히 내리지 못하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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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 개성공단 , 개성 , 박연폭포 , 선죽교 , 고려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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