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욱 열사가 맺어준 소중한 인연, 한독운수 노동조합

$특집2-투쟁하는 민중의 자화상, 허세욱 열사$

 


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던 지난 4월 6일(토) 오후, 봉천동 봉일시장 옆에 있는 한독운수 노동조합을 인터뷰를 하기위해 찾아갔습니다. 황규금 노조위원장님께 연락을 드리니 마침 근처에서 식사중이시라 사무실로 들어가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눈에 띈 것은 한쪽 벽을 꽉 채우고 있는 택시노동자 현황판이었습니다. 한독운수의 택시 번호가 일렬로 적혀있고 그 아래에 일하고 계시는 분들의 사진이 담긴 이름표가 하나하나 걸려있는 현황판이었습니다. 한분 한분의 사진과 이름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한쪽에 걸린 허세욱 선생님의 이름표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순간 가슴 한구석이 찡하게 아려왔습니다. 열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한독운수 분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허세욱 선생님의 이름표를 바라보며 서 있는데 “커피 배달 왔습니다.”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황규금 위원장님께서 종이컵에 담긴 커피 두 잔을 들고 씽끗 웃고 계셨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본격적으로 인터뷰에 들어갔습니다.

 

허세욱 열사를 떠나보낸 지 1년이 되었습니다. 그 감회는 어떠신지요?

(위원장 사무실 창문을 가리키시면서) 지금도 세욱 형님이 저 창문에 얼굴을 내밀고 눈을 깜빡거리며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할 거 같아요. 세욱 형님과 평상시처럼 대화를 하고 있는 것만 같고... 돌아가셨다는 게 실감이 안 나는데... 1주기가 되어서 추모 행사를 준비하다 보니 형님이 가셨다는 게 현실로 다가오네요. 

한독운수에서 허세욱 열사는 어떤 분이셨나요?

항상 남들 앞에 서 있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계시던 분이예요. 겸손하고 성실한 그런 분이셨죠. 집회가 끝나면 가장 늦게까지 남아서 쓰레기 치우고, 그렇게 마무리를 다하셨어요. 여기 봉천동에서 정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소년소녀가장, 독거노인, 푸드 뱅크 등 어려운 이웃을 돕고 연말행사도 함께 주최했습니다. 무엇보다 세욱 형님은 박봉을 쪼개서 지방 사업장의 집회에도 가고 평택 미군기지 확장반대 투쟁에도 찾아갔어요. 폼으로 그냥 갔다 오시는 게 아니라 갔다 오시면 유인물을 한 아름 들고 오셨어요. 그리고 제게 주면서 읽어보라고 하셨죠. 워낙 그렇게 다니시니까 교통비, 식대로 들어가는 돈을 사무장에게 청구하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세욱 형님을 노조간부로 선임해서 노조활동비로 그런 비용을 부담하게 했어요. 그렇게 몇 년을 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렇게 해서 그나마 마음이 덜 아파요. 또 언젠가 형님이 당신은 늘 허름한 잠바를 입고 다니면서 내게 “위원장님은 항상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닌다.”며 근처 할인매장에 가서 억지로 옷을 사주겠다고 하는 걸 겨우 뿌리친 적이 있어요. 그렇게 남을 배려하는 분이셨어요.

 ♣허세욱 열사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택시 노동자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택시노동자로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해주세요.

‘죽지 못해서 산다.’는 말이야말로 택시노동자의 삶을 잘 드러내는 거 같아요. 노사 단체협약을 앞두고 교섭위원끼리 어제 수련회를 했어요. 정말 이제는 대정부 투쟁을 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해요. 택시노동자야말로 전 사업을 통틀어서 근로조건이 가장 열악해요. 12시간 맞교대 근무에도 생활임금이 안되고, 낙후된 차량 탓에 건강문제도 심각하고...또 사고가 나면 그 책임을 기사에게 넘겨버리고... 그래도 한독운수는 그나마 상황이 나아요. 전국의 1,780개 택시 사업장 중에 근로조건이 0.3% 상위 안에 들어가요. 쉽게 말해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거죠. 운수법도 완벽히 지켜서 세금도 서울시 택시사업장 중에서는 2등으로 많이 냅니다. 여기는 사납금제도 없고, LPG주유도 회사에서 부담해요. 성실하게 근무하면 근로조건이 좋은 편이인데 지금 LPG 가격도 오르고 간접비용이 너무 많이 들게 되면서 회사가 적자경영을 하고 있어요. 회사에서 택시기사들의 처우를 잘해주고 싶어도 못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대정부 투쟁에 나서야된다는 거예요. 주식도 바닥을 치면 위로 올라간다고 하는데 지금 택시회사는 회사나 노조나 바닥을 치고도 오히려 그 바닥을 파고 들어가는 실정입니다.

허세욱 열사 기념관을 한독운수에 두게 된 사연을 듣고 싶어요.

지난 1984년 11월 30일에 “내 한 목숨 희생하더라도 더 이상 기사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로 해야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하신 박종만 열사 추모행사를 23년째 택시연맹이 기리는 것을 봤어요. 택시노동자로서의 마지막을 조직에서 영원히 기려야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땅히 좀 더 넓고 좋은 장소로 해야 하나 여러 사정상 기념관을 건립하기 전에 이곳에 임시로 열기로 했어요. 준비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어요. 회사에 부탁해서 사무실 한 칸을 무상임대 받았고 평통사, 참여연대, 진보연대, 민주노총, 민주택시연맹, 한독운수가 함께 추모관 개관을 위해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어서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어요.

 ♣앞으로 기념관 운영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기념관을 항상 열어놓을 겁니다. 세욱 형님을 기억하는 분들이 언제든지 와서 함께 할 수 있도록 말이죠. 노조간부 중에 기념관 관리자를 두어서 공간을 방치시키지 않고 잘 살려놓을 예정입니다.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것이 아니라 교육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위원장님과 노조 간부들이 서울 평통사 회원으로 함께 가입을 하시게 된 계기를 이야기해주세요.

세욱 형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열심히 평통사 활동을 하시는 걸 보면서 회원 가입을 생각했었는데 그때는 정신적인 여유가 없어서 못했어요. 세욱 형님 돌아가시고 형님의 뜻을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에 노조 간부들 불러놓고 “세욱 형님의 뜻을 우리가 이어가야 하지 않겠냐? 그 뜻을 이어가기 위해서 한독운수의 전 조합원이 나서야 하지만 간부들이 먼저 활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렇게 간부들과 회원 가입을 하였습니다. 이제 다른 조합원들도 점차적으로 평통사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도록 해야죠.

 평통사를 어떻게 보세요?

정부 보조금을 받지 않고, 진정으로 자신을 희생하면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활동한다고 봐요. 얼마 전 여의도 한나라 당사 앞에서 1인 시위하다가 전경들에게 폭력적으로 들려나오는 모습을 보고... 개인이면서 개인이 아닌 대중을, 전체 민중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부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거죠. 노조활동 하느라 평통사 활동을 많이 하지 못하고 있어서 미안할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서울 평통사 회원으로서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

택시노동자들은 소수를 빼고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매몰되어 다른 것을 볼 여유가 없죠. 그래도 평통사 이야기를 듣고 뜻이 좋다고 적극 협조하겠다는 노동자도 있습니다. 평통사가 어느 단체보다 희생하고 고생을 하고 있다는 걸 압니다. 지금과 같은 헌신적인 자세로 주한미군 내보내는 평화협정 실현운동을 기필코 이뤄냈으면 좋겠습니다. 그 길에 저도 할 수 있는 만큼 일조하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한독운수 입구에 걸린 ‘열사의 뜻 이어받아 평화통일 앞당기자!’는 커다란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현수막을 보면서 허세욱 열사가 맺어주신 아름답고 소중한 인연이, 평화와 통일을 앞당기는 길에 귀중한 씨앗이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 씨앗이 무력무럭 자라나 ‘주한미군 내보내는 평화협정 실현’의 열매로 맺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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