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의 소나무... 그리고 통일

$회원들의 이야기 마당$

 

밀라노, 파리, 피렌체, 아바나, 벨파스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고 마음 속 영사기를 통해 내 꿈의 영상들이 조화로운 그런 장소들이다. 그런 곳들은 우리나라에도 많다. 태백, 정선, 영주, 밀양, 통영, 고창, 양평, 그리고 금강산. 통일에 대한 염원이나 북한에 대한 지식과는 별개로 흘려듣기로 들은 묘사만으로도, 감명 받아 읽은 문장들에서도, 그 이름도 빛나는 조선의 ‘명산’ 아닌가. 지금은 마음대로 다닐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그 그리움이 더욱 애틋해져버린……. 그러나 또 요즈음 세대들에게 국내관광이란 어른들이나 즐기는 시시한 방문쯤으로, 게다가 금강산 관광은 북한에 대한 구질구질한 미련을 못 벗은 낡은 세대들의 고루한 집착쯤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나 또한 관동별곡과 겸재 정선이 아니었다면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리라. 방랑 시인 김삿갓과 칠칠이 최북의 애정이 깃든 곳이 아니었다면.

여행 당일은 다섯 시부터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 했다. 얼떨결에 새로 사버린 오리털 잠바에 몇 겹을 더 껴입으니 춥지는 않았지만 무지하게 피곤했다. 여행사를 통해 가는 단체 여행은 흡사 수학여행을 연상시킬 만큼 수박 겉핥기식에 자유마저 제한되기 일쑤이지만 아직 금강산은 개인이 마음대로 일정 정해 관광할 수 있는 곳이 아닌지라 어쩔 수 없었다. 버스로 네다섯 시간쯤 달려 강원도 고성에 있는 현대아산 휴게소에서 집결하고, 사실 강원도서 금강산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니 차타는 건 고성까지가 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 그렇게 얼마 안 되는 거리가 이토록 힘든 걸음이라니 기분이 묘했다. 북쪽으로 달릴수록 창 밖 풍경은 거칠고 또 웅장해졌다. 멀미를 하는 바람에 제대로 풍경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까울 만큼 눈 쌓인 강원도 일대는 평화롭고 고요했다.

도착한 남측 수속소는 공항과 비슷했다. 일찍 와서 몇 시간씩 기다리는 것도 공항이랑 똑같았다. 공항 검색대와 같은 무인 검열대를 지나고 마침내 ‘금강산 관광’이라고 쓰인 버스에 올랐을 때는 드디어 북측이구나 하는 흥분보다는 누워서 자고 싶다는 피로감이 더했다. 게다가 십 분쯤 가서 북측에서도 똑같은 수속을 거쳐야 한다니 지겨웠다.

그러나 막상 동해를 끼고 달리는 DMZ는 피로 이상의 것이었다. 황량한 들판, 수십 개의 지뢰가 숨어있다는 무인지대가 DMZ다. 현대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그 ‘무인지대’의 풍경은 말없이 철썩 대는 동해와 더불어 쓸쓸함을 넘어선 어떤 장엄함을 연출했다.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며 백석이 썼던 동해에 대한 애틋한 사랑노래가 구절구절 튀어나올 듯,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그리고 빽빽한 철책이나 높다란 시멘트벽쯤 될 거라고 생각했던 군사분계선에 어른 키의 반도 안 되는 작달막한 기둥 하나로 외로이 선 것을 보자 허무하고 어딘지 모르게 착잡했다. 그 기둥을 가운데 두고 서로는 가로등의 색깔이 바뀌고, 군복이 바뀌고, 말씨가 바뀌며, 국적이 바뀐다.

북측 수속소에 가까워질 무렵 언덕 위에 장난감처럼 뻣뻣이 서있는 북측 군인들이 띄엄띄엄 보인다. 손을 흔들거나 하는 자극행위를 하면 안 된다는 가이드의 말에 따라 신기한 눈초리 외의 아는 척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간혹 어린 초병들이 흘끗 눈초리를 하긴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서도 긴장과 추위 이외의 감정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마침내 공항 뺨치던 남측 수속소와는 달리 천막을 대충 이어 붙인 듯 남루한 북측 수속소에 도착했을 때 임시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던 북측 군인의 얼굴도 그랬다.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 가장하고 있는 것은 두려움이며, 그 두려움이 가장하고 있는 것은 무지이다. 그러나 또 그 무지 아래에는 똑같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갖는 애정과 호기심이 뜨겁게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문득 귓가에서 윙윙거리던 스팅의 노래가사가 떠올랐다. ‘We share the same biology, regardless of ideology…’

첫날은 도착하고 수속을 하여 방에 들어오는 것만 해도 해가 저물었는데, 여섯 시쯤부터 금강산 온천에서 피로를 풀 수 있었다. 금강산 온천은 예로부터 그 물의 효험이 유명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직접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수많은 왕실사람들을 거느리고 몸소 행차했다고 한다. 10여 일간 머무른 세조는 신하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불교를 진흥시키는 등 주유정책을 이곳에서도 지시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상원사에 들러 그 곳에서 운수보살이 그의 고질 피부병을 고쳐주었다는 설화가 빚어지는데 역사가들은 금강산 온천에서 머물렀던 효험이 그 때 나타난 것은 아닌가 추측한다고. 그렇게 귀한 물이라 그런지 괜스레 피부가 좋아진 것 같고 목욕 후에 금반지가 유난히 반짝여 보이기도 했다. 처음 가보는 노천탕에서 멀리 병풍처럼 펼쳐진 금강산 봉우리와 반달과 어둠과 별들을 배경으로 몸의 반은 40도의 물에, 반은 영하 10도의 찬바람에 내맡기고 있는 기분도 황홀했다.


옥류동, 구룡폭포와 상팔담은 둘째 날 일정이었다. 그런데 다섯 시쯤 겨우겨우 일어나 잠이나 깨자고 켠 TV뉴스에서 흘러나온 말에 의하면 오늘이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란다. 서울도 영하 10도를 육박하고 대관령은 영하 25도까지 떨어질 예정이라고 했다. 거참 날씨 한 번 제대로 잡았군.. 하며 옷 네 겹에 모자 장갑까지 착용하고 등반 준비를 마쳤다. 설봉산은 아름다웠다. 천하 절경이라거나 하는 말은 천하의 산을 다녀본 경험이 아주 없어 함부로 꺼내지 못하겠지만 나는 지금껏 이만큼 ‘예술적으로 완벽한’ 경치는 보지 못했다. 그냥, 그린 듯 했다. 시야가 그대로 도화지며 눈에 찬 풍경이 그대로 작품이다. 김홍도와 정선의 그림에서 종종 뿜어져 나오는 그 美가 산에서 뿜어져 나온다. 그런데 사진은 만족할 만큼 잘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풍경이 담고 있는 ‘혼’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풍경 자체가 담고 있는 ‘혼’이나 ‘정신’이 작품을 통해 보는 이에게 감성으로 녹아 나오는 과정에 있어서는 사진보다 그림이 훨씬 수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금강산이 갖고 있는 기운이 너무 세서 투명한 앵글을 통해 여과되기를 거부하고 투박한 붓을 통해 재탄생되기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그림에서의 김홍도 정도 되는 사진가가 아닌 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날씨가 날씨인지라 폭포와 계곡은 얼어있었다. 흐르는 모습은 필시 더욱 장관이었으리라. 넓은 계곡과 장대한 폭포들은 여태껏 본 적이 없는 규모였다. 간간이 얼음 깨진 곳으로 보이는 물이 너무 푸르고 맑아서 옛날 얘기에 나오는 젊어지는 샘물 같은 게 이런 물을 보고 나온 얘기가 아닌가 싶었다. 폭포 근처로 갈수록 많아지는 바위에 음각한 이름들. 십 년이 되었을지 백 년이 되었을지 모르는 그 글자들은 다소의 오만함으로 끝없이 금강을 탐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구룡폭의 깎아 지르는 듯한 암벽에 시문을 남길만한 배짱이 있는 사람들은 최치원과 송시열 같은 대가들뿐이었다지만 길 근처의 판판한 바위는 온통 옛 선비들이 같은 모양새의 욕심으로 긋고 간 획들이 확연하다. 옛날에는 이런 산에 석공들이 살아서 사람들이 돈을 주고 글씨를 맡기고 가면 그대로 똑같이 조각해주는 일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단연 최고봉은 해당 김규진이 구룡폭포 옆에 폭포의 길이와 맞춰 쓴 세 글자 ‘미륵불’이다. 그 글씨체의 단아함이나 필치의 당대함이 구룡폭포와 퍽이나 잘 어울린다고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 결국은 한 세기 남짓 살다 갈 인간의 유한함, 그렇기에 처절한 인간의 욕망을 대변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껄끄러웠다.

감상에 피로까지 겹치다 보니 오후 일정을 다 빼먹은 채 정신없이 쓰러져 잠들었다. 겨우 일어나 정신을 차리고 누운 꼴 그대로 나가 북한의 자랑거리라는 교예를 관람했다. 그런데 내게 놀라웠던 건 그들의 화려한 의상이나 묘기가 아니라 바로 음악이었다. 교예 내내 흘러나온 음악은 상당한 수준의 오케스트라 협연 곡이었다. 꼭 클래식이라고만 규정짓긴 뭐하고, 전통악기와 서양악기의 퓨전이 가미된 일종의 드라마틱한 배경음악들이었는데 더욱 놀라웠던 것은 중간에 무심코 눈을 돌려 바라본 2층에서 오케스트라가 라이브로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국가 전담으로 ‘훈련’을 받았을 테니 연주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짜임새가 유독 훌륭했다. 비록 지나치게 ‘쇼를 위한’ 곡이라는 느낌이 있었고 좀 과장된 통속적인 흐름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상당히 세련된 선율을 들을 수 있었다.

멋졌다. 밤에는 호텔 근처 ‘제한 안 된 구역’만을 쏘다니며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를 찌르는 찬 공기에 떠밀려 금강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금강산에서의 마지막 날의 아침은 옛날 신선들이 놀았다는-관동별곡에 자세히 나오는-삼일포와 바다의 금강이라는 의미의 해금강, 삼일포에서 맞았다. 깔끔하게 얼어버린 호수란 흔한 구경이 아니다. 그 은반 위에 날카롭게 반사되어 잘리는 무수한 햇빛의 손목들, 눈과 얼음과 호수와 뱃놀이의 전설, 한 눈에 시리게 들어차는 삼일포였다. ‘해금강’은 바다(海)의 금강산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내가 지금껏 살면서 와본 동해 중 가장 북쪽에 있는 동해가 아닌가. 파도가 바위에 와서 부딪치는 모양조차 남달랐다. 네가 필시 여기서 흘러 그리로 내려가고, 거기서 거슬러 이곳으로 섞여들었을 텐데, 하나 되어 부딪치는 그 눈부심에 우리는 결코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통일이라는 거창한 무언가를 구하기 전에, 안 그래도 마찰 많은 인간들 사이에서 떡 하니 버티고 있는 이념의 문제들 그것들이 우리를 파도처럼 살지 못하게 하는구나 하는 감상이 시리게 볼을 스쳤다. 쓸쓸했다. 어쩌면 이곳이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여행이 끝나는 것은 당혹스러울 만치 빨랐다. 버스를 타고 처음에 왔던 코스를 그대로 그러나 훨씬 빠르게 달리고 나니 돌아온 집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대로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시간이 갈수록 눈이 적어지고 산이 평야로 변하는 바깥 풍경을 담담히 바라보며 이번 여행에 잔뜩 고무된 반드시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던 많은 여행객들의 말을 생각해 보았다. 통일… 어렸을 때부터 너무 자주 듣던 말이라 이제는 그저 TV에 나오는 심각한 표정의 국가 원수들이나 황량한 얼굴의 남북 병사들 따위의 이미지들이 혼란스럽게 뭉쳐져, 이제는 정작 그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어쩌면 딱딱하고 상투적인 ‘개념을 위한 개념’이 되기 쉬울 것 같아서 되도록이면 말 안 꺼내려고 했는데, 여행지가 여행지이다 보니 한번쯤 입에 담지 않고는 여행기를 마무리할 수 없겠다. 내가 2박 3일 이북에서 ‘이남사람’ 취급을 받으며 여행하면서 흘끗 바라본 통일이란 금강산의 소나무에 있다. 비봉폭포의 얼음으로 수놓은 봉황날개에, 해금강 잔물결과 삼일포 눈 덮인 호수에 있었다. 더 이상 구닥다리 이념이나 희미한 민족정신 따위에 호소하기는 그만두자. 적어도 아름다움에 대한 그리움만은 살아있지 않은가. 아름다움만은 통일되어도 좋지 않을까. 피 끓는 동포애보다는 미적지근한 연민이, 반공으로 불타는 정신보다는 이질감으로 인한 서늘함이 잦았던 여행이다. 그러나 적어도 막대기로 덩그런 휴전선이 뭔지, 제가 오줌을 찍 갈길 커다란 바위 위 빨간 잉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또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새들의 자유를, 더 이상 부러워하고 싶지는 않다.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가운데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따위 원하지 않는다. 그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자유면 된다. 그리고 그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자격이란, 금강에 대한 골 깊은 사랑으로 족하지 않을까.

(이 글을 쓴 양다솜 양은 전북평통사 양재석 운영위원의 딸입니다. 좋은 글을 보내준 다솜 양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합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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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 사회주의 , 금강산 , 자본주의 , DMZ , 군사분계선 , 구룡폭포 , 옥류동 , 상팔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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