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전략사령부, 한미정상회담 그리고 평화협정 실현운동

$현장_글로벌 네트워크 국제회의 참가기 및 교포 간담회

 

인천 국제공항에서 오마하로  

 4월 11일 금요일에 인천 공항을 출발하여 도쿄, 시카고를 거쳐 무려 24시간 만에 오마하 공항에 도착했다. 나와 고영대 대표가 미국 중부지역 시골 도시 오마하까지 온 것은 이 곳 크레이턴 대학에서 개최되는 글로벌 네트워크 국제회의에 참가해서 한반도 평화 문제를 알리고, 이어 뉴욕에서의 한미정상회담 규탄 시위에 참여하는 한편 워싱턴, 뉴욕, LA 동포들에게 한반도 평화협정 실현운동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인천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는 중에 징걸이가 문제로 되었다. 징걸이가 커서 UA 항공 측이 휴대를 거부한다는 이유였다. 또한 휴대 배낭 속에서 과일 칼이 나와 다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검색 직원이 사정을 봐주어 출국 수속을 도와줬던, 이미 귀가 중인 박석분 팀장을 도로 오게 하여 칼만 돌려보내는 것으로 출국 검색 과정의 혼란은 수습되었다. 경비와 일정 문제로 나리타와 시카고를 경유하느라 고생했지만, 그래도 시카고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는 순조로운 편이었다. 그러나 때 아닌 오마하의 기상 악화로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발이 묶이게 되었다. 승객 중 일부는 펜실베이니아 주로, 어떤 이는 오웰 공항으로, 여행을 취소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시카고에서 오마하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 거리인데, 4시간 이상을 시카고에서 묶여 있을 판이니 오마하 공항에서 우리를 마중 나오기로 되어 있는 이현정과 최성희씨는 어찌하랴 싶었다. 이행우 의장에게 알리고 이리저리 연락해 다행히 마중 나올 분들의 수고를 덜 수 있었다. 밤늦게 도착한 아담한 크기의 오마하 공항에는 이현정, 최성희 씨, 그리고 숙소를 제공해 준 패트릭(크레이턴 대학 교수)이 나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미 전략사령부는 한반도 평화 위협의 주범이자 지구에서 가장 위험한 곳

 오마하에는 미 전략사령부 기지가 있다. 4월 11일 오후에 미국에서 모인 200여 명과 전 세계 10여 개국에서 온 20여 명의 회의 참가자들은 눈보라가 날리는 전례 없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략사령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12일 오전부터 밤늦게까지 전략사령부의 새로운 임무, 전 세계의 미군기지,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미사일 방어망(MD) 구축 문제 등을 주제로 전체가 참가하는 회의(plenary session)와 워크숍과 기조(키노트) 연설이 차례로 진행되었다. 우리 일행을 비롯하여 이번 행사에는 영국, 캐나다, 호주, 독일, 스웨덴, 이탈리아, 체코, 인도, 일본, 필리핀 등 12개국에서 온 220여명의 활동가들이 참여하였다.

오후에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의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을 주제로 한 워크숍에서 ‘동북아 TMD에 한국을 편입시키려는 미국의 기도’에 대해서 고 대표가 주제 발표를 했다. 시간이 너무 짧고 참가자들의 관심도가 다양해서 내실 있는 토론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워크숍이 끝난 뒤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참가한 한 여 교수가  자신이 운영하는 워킹그룹에서 발간하는 신문에 고 대표 발제 글을 싣겠다며 동의를 구했다.

저녁 식사 시간에는 고 대표가 ‘미 전략사령부는 한반도 평화파괴의 주범’*이라는 제목으로 기조연설을 하였다. 고 대표의 발표는 설득력이 있었고 통역을 맡은 현정씨도 뛰어났다. 그들은 연설 도중 여러 번 박수를 받았고 연설이 끝나자 기립박수까지 받았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영문 발제문을 받아보기를 원했으며, 후에 글로벌네트워크 코디네이터 브루스 개그넌의 소개로 유명한 웹진인 <Counter Punch, After Downing Street>에 실리기도 했다고 한다. 나중에 들으니, 고 대표의 연설이 한반도 문제에 대해 잘 몰랐던 각국의 활동가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고 대표는 연설 전에 미국의 활동가들 중에서도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 많아 연설에 반발할 참석자도 있을지 모르겠다고 우려하였으나, 나는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므로 걱정할 것 없다며 그의 사기를 북돋우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고 대표 연설 후에 ‘논쟁적인’(?) 토마스 검블턴 주교의 강연이 있었다. 그는 디트로이트에서 사목을 하는데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미 전략사령부가 있는 오펏 공군기지의 출입금지 선을 넘는 Line Cross로 6차례나 감옥에 갔다 온 사람이다. 그도 강연을 아주 잘 하였다.

  

내년도 글로벌 네트워크 연례회의 개최 문제

 13일 일요일. 아침 일찍부터 글로벌 네트워크의 총회가 열렸다. 글로벌 네트워크와 평통사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했던 최성희 씨는 내가 내년 글로벌 네트워크의 연례회의의 서울 개최를 수락한다는 의사를 발표하도록 성화였으나 고 대표와 의논해서 시간을 더 두고 결정하기로 하였다. 고 대표가 서울에서 회의를 개최하려면 한반도 정세와 주체적 조건 등이 성숙되어야 가능하다고 조언하였다. 글로벌 네트워크의 총회가 끝난 뒤 개그넌 등 글로벌 네트워크 코디네이터들과의 약식 간담회를 가졌는데, 개그넌은 앞으로 글로벌 네트워크와 평통사가 직접 교섭하자고 제안하였으며, 내가 7월 서울에 돌아가서 최종 결정하겠다고 제안했더니 그들도 흔쾌히 양해하였다.                                 

오후에는 오마하 시내를 관광하였다. 패트릭 교수의 안내로 전통 시장과 철도박물관 등을 돌아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미 대륙 횡단철도공사가 시작된 지점이고, 세계 제일의 부호인 워런 버핏도 이곳 출신으로 지금도 오마하의 평범한 주택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패트릭은 전략사령부를 제외하고는 크게 내세울 것이 없는 인구 30만의 이 시골 도시를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 같았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이곳은 박용만 선생이 1913년에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군사학교를 설립한 곳이며, 또한 김일성 주석과 항일투쟁을 같이했던 손원태 박사가 살았던 곳이기도 해 한국과 인연이 꽤 깊은 곳이었다.

 

 워싱턴 펜타곤 앞 시위와 나카(미주동포전국협회) 사무실에서의 평화협정 강연

우리는 그날 저녁에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으로 갔다. 오마하 공항에서 고 대표는 일반 승객들과 달리 특수 보안 검색을 받았다. 이유를 물었으나 그들은 달리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또한 우리가 탑승할 비행기가 아주 소형이어서 징걸이를 그곳에 버려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발생했는데, 다행히 중년의 스튜어디스의 호의와 기지(?) 덕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녀가 조종사에게 부탁하여 문제의 징걸이를 조종실에 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워싱턴에서는 이재수 씨 부부가 마중 나왔다. 밤이 깊었는데도 이재수 씨 집에서 정성스럽게 준비된 식사를 하게 되었다. 모처럼 먹어 보는 김치찌개 식사였다. 식사 후에 메리엇 호텔로 가서 이행우 의장과 만났다. 메리엇 호텔은 서혁교 씨 부인이 근무하는 곳이라 싼 값에 편안하게 묵을 수 있었다.

14일 월요일. 새벽 3시 반쯤 잠이 깨 내친 김에 그대로 일어났다. 아침 7시부터 펜타곤 앞에서 시위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출·퇴근하는 국방성 직원들을 상대로 한미동맹 폐기와 한국의 미사일 방어체제(MD) 및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 참여를 반대하는 우리의 뜻을 알리고자 했다. 이들 이슈는 이명박과 부시 정상회담의 의제이기도 했다.

8시까지 진행된 시위 도중 적지 않은 국방성 직원들이 10여 미터 앞을 지나쳤으나 대부분 관심이 없었고, 일부가, 그 중에서도 특히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관심을 갖고 피켓 내용 등을 살펴보기도 하였다. 그런데 약 40여분에 걸친 시위 도중에 40세 안팎의 국방성 명패를 단 여성 직원 두 명이 10여 분 간격으로 시위 장소까지 와서 우리들의 주장을 지지한다는 적극적인 의사를 보이고 갔다. 펜타곤 보안 요원들과 카메라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 촬영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와 같이 시위를 한 가톨릭 워커스(Catholic Workers)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매주 펜타곤 앞에서 시위를 하는 단체다. 지하철 펜타곤 역에 자전거를 세워두는 곳이 집회 공간이다. 이곳을 못 찾아 20여 분을 헤맸는데,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 명의 할머니들과 고등학생인 손녀, 그리고 리더 격인 중년의 남자(아트 래핀)가 우리와 함께 시위를 벌었다. 펜타곤 주변은 시위가 금지되어 있고 사진도 찍을 수도 없다. 아트 래핀의 말에 따르면 9·11 이전에는 펜타곤 주위를 돌면서 자유롭게 시위를 할 수 있었는데, 그 이후로는 경비가 매우 삼엄해져 시위가 거의 불가능해졌다고 한다. 아무튼 가톨릭 워커스 회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한국에서 준비해 간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할 수 있었다.

저녁때에 워싱턴의 원로라는 사람들이 모여 회식을 하였다. 수도 교회에 나가는 강 장로는 내가 왔다는 소문에 어렵게 나온 것 같았다. 강 장로는 김영 목사 덕분에 인연을 맺은 사람이다.

식사 후에 고 대표의 ‘주한미군 내보내는 한반도 평화협정’ 강연이 있었다. 25명 정도가 참여하였는데, 양미강 목사와 수도교회의 조 목사도 만날 수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강연 내용을 새롭게 받아들였으며 적극적인 동의 의사를 나타냈으나, 일부는 부담을 갖는 것 같았다.  

  

이색적인 삶을 살아가는 가톨릭 워커스

 15일 화요일, 뉴욕으로 출발하였다. 이행우 씨, 이재수 씨 부부, 최성희 씨와 함께 자동차로 달렸다. 뉴욕으로 가는 길에 가톨릭 워커스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고 대표의 제안에 따라 다시 래핀을 만나러 워싱턴 근교에 위치한 바실리카 성당으로 갔다. 유럽의 중세 교회 못지않게 화려하고 큰 규모의 국립 성당이었다.

우리가 성당에 도착했을 때 한편으로는 꽃단장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보안 공사를 하고 있어서 매우 궁금했었는데, 아트 래핀이 그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미국을 방문한 교황이 다음날 이 성당에 들를 예정이라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교황이 방문하기 전에 우리 일행이 시찰 나온 격이 되었다.

래핀에게 들으니 가톨릭 워커스는 1930년대 형성되기 시작하여, 소유, 직장, 임금, 이윤 추구 등을 반대하며 오로지 노숙자들과 같은 사회 약자를 위해 평생을 바치는 가톨릭 내 집단으로, 우주의 군사화나 이라크 전쟁 등 미국의 군사정책에 대해서도 줄곧 문제를 제기하며 시위를 해 왔다고 한다. 펜타곤 시위 때 그들이 들고 있던 피켓 중 하나가 “Reject the orders to kill(죽음의 명령을 거부하라)”이었다.  

그들은 매주 금요일 백악관 앞에서도 시위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앞으로 평통사가 워싱턴에서 시위를 할 경우에 적극 협조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뉴욕 플라자 호텔 앞 시위와 노둣돌에서의 평화협정 강연 

우리가 뉴욕으로 향한 날은 마침 이명박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을 하러 미국에 온 날이었다. 이에 우리는 이명박 대통령과 교포들의 연회장인 뉴욕 플라자호텔 앞에서 뉴욕의 청년단체인 노둣돌 등과 시위를 하기로 하였다. 길을 잘못 든 데다가 교통체증까지 겹쳐 뛰다시피 시위 장소에 도착해보니, 이미 노둣돌 청년들과 현지 단체 회원 등 30여 명이 커다란 앰프를 설치해 놓고 씩씩하게 시위를 하고 있었다. 우리도 현수막을 들고 한미동맹 폐기, 평화협정 체결, MD와 PSI 반대, FTA 반대 등의 구호를 외쳤다. 노둣돌 회원들은 한국말을 잘 못했지만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집회에 참가했다. 호텔 정문 앞에는 한인 자동차들로 붐볐지만, 끝내 이명박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안에 들어가 있었던지 아니면 후문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정문이 아닌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어쨌든 우리 시위 행렬을 피하고자 한 그들의 행보는 당당하지 못했다.    

이어서 노둣돌 사무실에서 회원들을 상대로 고대표의 평화협정 강연이 있었다. 미국인, 남미인, 필리핀인 등 외국인들을 포함하여 30여 명이 참석하였는데, 참석자들이 다양하여 고대표가 강의의 초점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강의는 1시간 30분 쯤 진행되었다. 참가자 다수에게는 워싱턴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세적 한미동맹의 실상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자리가 된 것 같았다.  

4월 16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월가 증권거래소 방문과 반기문 유엔총장 방문에 맞춰 고 대표와 함께 시위를 할 계획이었으나 노둣돌과의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무산되었다. 따라서 미국에 온 지 6일 만에 처음으로 시간이 나 권혁건, 최성희 씨의 안내로 뉴욕을 돌아보았다. 저녁에는 모처럼 정화가 시간을 내어 고 대표에게 식사 대접을 하려고 했으나 노둣돌에서 재차 강연을 하게 되어 고 대표는 식사 중간에 일어서야만 했다. 나중에 들으니 2차로 진행된 노둣돌 강연에는 한국말을 알아듣는 회원들 중심으로 참가했다고 한다. 노둣돌 회원들은 미국의 핵 전쟁계획 등에 대해 알고 싶어 했으며, 매우 진지했다고 한다.   

 

LA에서  

17일 목요일. 이날은 LA로 비행하는 날이다. 이곳에서 사흘을 머물렀는데, 첫날은 조 사장이 경영하는 호텔에서 묵었다. 둘째, 셋째 날들은 곽건영 목사 댁에서 머물렀다.

LA에서도 교포들과 모임을 가졌다. 오인동 선생이 의장으로 있는 6·15 서부위원회 모임과 민화협 인사들이 20여 명 참가했다. 고 대표는 강연 전에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을 터인데 주한미군 내보내는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심된다며 상의해 왔다. 나는 고 대표에게 구애받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말해주었다. 고 대표는 아주 강연을 잘 하였다. 그의 강연은 언제나 설득력이 있었다. 뒤풀이에 남은 몇 몇 분들은 이명박 정권에 대한 큰 우려를 나타냈으며, 평화협정 실현 운동이 분열되어 있는 국내외 진보진영을 단결시킬 수 있는 계기로 될 수 있을 것 같다며 큰 희망과 기대를 나타냈다.

다음날인 19일에는 오인동 의장과 아침 식사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오 의장은 전부터 평통사를 알고 있었다며 전에 열린 2003 한민족평화포럼에서도 평통사에서 온 참가자(박기학)가 가장 내용 있는 발제를 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저녁에는 고 대표가 나성 포럼 전 회장 김현정 양 등을 만나 LA 지역에서의 평화협정 실현 운동을 함께 모색하였다. 그 역시 평화협정 실현 운동이 입장의 차이를 떠나 단결하여 실천할 수 있는 고리인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고 한다.  미주 지역에서 평화협정 실현운동에 대한 최소한의 토대는 세워졌다는 느낌이다.  

다음에는 곽건영 목사가 온천장으로 유명한 팜 스프링스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가 이용한 온천장은 한인 손님으로 유지된다고 할 정도인데, 영락교회에서 단체로 온 손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오후에는 선우학원 박사를 만났고, 저녁에는 안식교 구약학 교수인 김원일 씨(김수임 씨 아들)를 만나 저녁을 같이 하였다.

관광에는 별 관심이 없던 고 대표가 유일하게 가보고 싶어 한 곳이 그랜드캐니언이었지만 아쉽게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랜드캐니언 여행에는 2박 3일이 걸리는데, 그 시간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요일에 LA를 떠나야 했다.

곽 목사는 주일인데도 아침 일찍 우리를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다. 곽 목사에게는 여러 가지로 죄를 지은 셈이다. 곽 목사가 우리에게 호의를 베푼 것을 보면 주일날 설교도 해야 하는데 주일날 떠난다고 하니 섭섭했을 것이다.  

나와 고 대표는 공항에서 수속하다가 서로를 놓쳐 버렸다. 공항 안에서 배회하다가 고 대표의 기지로 탑승 출구 근처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10여 일 동안 미국에서의 활동에 대해 간단한 의견을 나눈 뒤 우리는 작별 인사를 했다. 고 대표는 서울로, 나는 뉴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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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협정 , MD , 펜타곤 , 한미정상회담 , 워크숍 , LA , 오마하 , 전략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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