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독재를 넘어선 어머니의 분노와 용기

$사람$

 

 

28년 전 광주 기독병원에서...

1980년 5월 21일은 오늘처럼 부처탄생일이었어요. 그래서 다른 병원은 다 쉬고 우리 병원은 기독병원이라 정상근무를 하니까 우리병원으로 집중적으로 온 거지. 내가 간호감독이라, 막 밀려오는 환자들의 (응급상태에 따라) 우선순위를 결정했지요. 그런데 너무 급하니까 우선 우리 피를 뽑아 일단은 수혈부터 시작하고 그랬어요.

환자들이 오면 청진기로 심장이 뛰는지부터 확인하는 거야. 인자 가족들이 어떻게 소식 듣고 막 따라 들어와 살려달라고 그래요. 몸을 만져보면 아직 따뜻하니까 “이리 따뜻한 데 왜 죽어요”하면서 통곡해요. 아무리 몸이 따뜻해도 죽었는데 어떻게. 영안실로 옮기면 응급실로 옮겨달라고 통곡하고 그런게 젤로 힘들었었지.

너무나 참혹해서 의사들도 울면서 ‘어떻게 이렇게 잔인하게 대검으로 살아있는 생명체를 찢기고 발길 수가 있을까’하면서 수술하고 했어요. 피가 부족하다는게 시내에 알려지니까 수혈하러 온 사람들이 병원 입구부터 저 사거리까지 줄을 서고... 그 중에서도 어떤 이는 자기는 내출혈이야. 내장에서 피가 나와 배가 막 불러오거든. 근데 옆에는 외상을 입어서 동맥이 천정까지 솟구치면서 정신을 잃어가는 사람이 있어. 환자 상태가 중한 것은 매한가진데 눈에 보기에는 외상환자가 더 중한 것 같은 거야. 그 내출혈하는 환자가 “아이고 나는 괜찮어요. 저 사람부터 살려 주세요” 그러지. “아니다. 당신은 내부에서 피가 막 나오고 있는 거다. 당신도 치료해야 한다”하면 “그래도 저 형제부터 살렸으면 좋겠어요” 그래.  자기고통보다 남부터 살렸으면 하는 그런 정신. 그게 광주항쟁의 인간적인 면이 아닌가 해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그래도 내가 먼저 살고 싶을 것인데 ‘저 사람 먼저 살려주세요’ 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광주는 하나였다 한 생명체였다는 게 실감이 되죠. 삼 십 여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5·18하면 그 현장에 서 있는 거 같아요.

 

영화 <화려한 휴가>

작년에 전씨 고향 합천까지 쫓아가서 영화 상영하고 그랬지. 한 삼천 명 모여서 같이 관람을 했는데, 거기 주민들이 실감을 하더라구. 그리 학살을 했구나 못된 짓을 했구나 하고. 그런 사람을 일해재단, 일해공원 하면서 기념한다고 하는 것이 정말 나쁜 짓이구나 하는 것을 느낀거지. ‘천년의 숲’ 원래 이름이 얼마나 좋아 그런데 일해공원이라니 역사의 흉악한 죄인을 고향사람이라고 해서 기념한다니 그건 역사인식이 없는 거야.

그런데, 현장은 그 영화보다 훨씬 참혹했다고. 10분의 1도 안 돼. 진짜 응급실은 피바다였어. 영화는 조금 덜한 거야. (살육)현장도 도청주변만 보여줬으니까 몇 분의 일도 안 되는 거여. 저기 광주고 앞에서 일어났고, 기차 역전에서, 터미널 근방에서, 교도소 근방에서도 일어났으니까.

  

부군 명노근 교수는

당시 명 교수는 박정희 시절에 민주교육지표 사건이라고 해서 해직된 상태였어요. 그러다가 10·26사태로 80년 3월 13일에 복직이 됐는데 5·18이 난거에요. 수습을 해 달라 해서 도청 본부도 가고 했죠. 그런데 전두환 노태우가 홍남순 변호사, 명 교수, 김성용 신부 이 셋을 구속을 시킨거야. 세 사람이 학생들을 선동해서 5·18을 일으켰다고 각본을 짜내려니 누군가 지도자급이 있어야 하는 거 아녀? 명 교수는 끌려가서 죽게 맞으면서도 ‘내 지시를 받았다는 학생을 찾아 내 앞에 데려오라’고 버텼대요. 정보부 사람들이 1주일 동안 학교를 뒤졌는데도 그런 학생을 찾을 수 없어서 겨우 내란수괴 죄에서는 벗어났지만 많이 고생하고 그랬었지요.

이 분은 모든 행동이 신앙에서 와요. 이것이 정의냐 불의냐 그리고 이 상황에서 예 할 것이냐 아니오 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사람이에요. 이 분은요, 예전에 논산 훈련소에서 무슨 일이 있어서 항의를 했는데, 거기 군인들이 “쏜다” 그러면서 공포를 쐈대요. 모든 사람들이 흩어지는데 눈을 딱 떠보니까 자기 혼자 서 있더래요. 그럴 정도로 이 사람은 한번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절대로 타협이란 게 없었죠. (인상을 강하게 보이려고) 수염을 기르면서 불법부당한 전두환 정권이 물러가기 전엔 안 깎는다고 했어요. 그 ‘민주수염’ 가지고 정보부에서 ‘수염 안 깎을 거냐고. 너 그 수염 힘줄 잡아 빼버린다’고 온갖 악담을 했죠. 암튼, 전두환이 진짜 물러가고 난 다음에 깎더라고요.

  

“분노가 힘이다” - 구속자 가족 대책위를 이끌고...

나는 정말 소심한 사람이었어요. 또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항상 인내하고 사랑하고 남을 용서하는 그런 신앙관을 갖고 살았기 때문에 남을 나쁘게 말한다거나 공격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어요. 교회와 직장과 가정. 이 삼각축에서 내 인생은 맴돌고 있었는데, 80년 민중항쟁을 만나가지고는 어떻게 나라의 국군이 양민을 학살할 수 있는가 그것도 아주 처절하게 대검으로 난도질을 할 수 있는가? 그 잔인성에 아주 치가 떨렸어요. 그래가지고 막 속에서 분노가 올라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 성격이 달라 지더라구. 군인이나 정보부에서 현장 확인을 오면 나도 모르게 “이것 봐라. 이게 인간으로 할 일이냐”고 항변을 하게 되더라구요. 내게 있던 두려움과 소시민적인 것이 다 어디로 가버렸어. 정말 ‘분노가 힘이다’는 것을 느꼈지요. 나도 내 속에 그런 용기가 숨어 있는 줄을 몰랐어요.

5월에 잡혀간 명 교수랑 시민군들 군사재판이 그해 9월부터 열렸어요. 우리도 누가 잡혀갔는지 몰랐지요. 군사재판을 하니까 가족 1인씩을 군사재판장으로 들어오게 하더라구. 거기서 여기가 누구 동생이고, 누구 엄마다 하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재판장에서 가족들끼리 서로 눈짓으로 모이자 해서 모이게 된 것이죠. 처음에는 5월 항쟁 구속자 가족회였다가 81년부터는 학생들이 계속 광주사태 진상규명하라고 분신자살을 하고 사방에서 데모하고 또 구속되고 하면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 협의회라 해서 유족이랑 부상자 가족까지 다 포함을 시켰죠.

81년에 명 교수가 나오고 나서도 아직 못나온 사람들이 있어서, 또 학생들이 계속 잡혀 들어가니까 이거는 끝도 없는 군부독재와의 계속적인 투쟁인거야. 그런데 그 소심하던 내가 완전히 변해가지고 가장 용기있는 엄마로 해서 사방에서 어려운 일만 있으면 나를 앞세우고 갈 정도였어요. 친정 오빠들은 형사들이 집에 찾아가면 ‘변해도 변해도 저렇게 변한 이가 없다. 그 순한 것이 저렇게 변해가지고 쌈닭이 되었다’고 그랬다고 해요.

구속자 가족회 회장까지 맡게 된 것은 그랬어요. 가족들을 만나보니, 이 엄마들 가슴에 한이 많고 좌절도 많더라고요. 소 팔고 바다에서 일해서 자식하나 잘 길러 놨더니 공산당이라며 다 잡아가, 동네에서는 경찰들이 저 가족은 공산당이라면서 유리시키고 접근을 못하게 해... 그러니까 엄마들이 기가 막히고 절망에 빠져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절대 그거 아니다하면서 지지해주고 이 가족들이 병이 나면 또 병원에 오라해서 주사 놔 주고 치료도 해주면서 가족 회장이 된 거야. 그러다보니 보안대에서 내 이름이 자꾸 오르내리는 거지. 그런데 이 여자가 현장에서 부상자들의 처참한 모습을, 그 피를 다 싸매고 수술을 하고 했던 사람이라서 그런지 나를 어쩌지도 못한 거여. 단지 ‘살인마 전두환이 외치면서 데모하고 자꾸 그러면 직장에서 해고한다’고 협박을 하더라고. 낮에는 데모를 하고 밤이면 병원에서 일하는데 보안대 요원들이 와서 협박을 하는 거지. 그때는 정말 쉬는 시간도 없이 24시간 항쟁운동을 했어요. 그런 부상과 죽음을 보면서 내 마음속에는 “나는 죽어도 좋다. 그 많은 사람이 죽어 갔는데, 아이들은 하느님이 살려주시겠지. 나는 죽어도 좋다”하는 각오가 딱 서니까 밤낮으로 데모하고, 밤에 또 근무하고 그랬어요. 하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광주 얘기를 하고 데모하고 돌아다니니까 검찰청, 경찰청, 보안대에선 이 안성례가 제일 골치아픈 거여. 그런데 워낙 내 주변에 가족들이 많이 운집해 있고, 나는 또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나를 잡아가두지도 못하고 해직을 하자니, 그러지도 못하고 하니 어떤 날은 공무원인 우리 조카가 집에 왔어요. “고모 죄송한데요. 밖에 못 나가게 붙들어 놓으라고 나를 여기로 출근시켰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가면 어떻게 되냐?” 물으니 “고모가 나가면 내가 시말서 쓰고 직장을 잃게 돼요.” 그러더라고.

  

“미국은 홍시감 빨아먹듯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우리를 쪽 빨아먹는 놈들”

광주 때 미드웨이 군함이 부산에 도착했다니 시민들이 와~ 박수치면서 좋아했어요. “거 보라고 미 군함이 저 나쁜 군인놈들을 물리치고 광주를 도와주기 위해서 왔다”고 시민들이 박수 친 거죠.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미국은 북한이 준동할까봐 온 거였고, 전혀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요.

81년 가을에 나하고 홍남순 변호사 사모님하고 정동영 부인하고 미대사관을 갔다니까요. 미 대사 밑에 브랫 모어라는 참사를 만나가지고 홍 변호사 사모님은 “홍시감 빨아먹듯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우리를 쪽 빨아먹은 놈들이 미국놈들”이라고 막 해댔죠. 그러면서 통역하는 사람보고 “통역을 똑바로 하소, 우리가 영어는 잘 몰라도 미국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있지 지금까지 우리 한국사람들이 믿었던 것처럼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니요. 왜 그 통역을 안하요. 우리도 그 단어를 다 아요. 빨리 통역하소”하고 막 항의를 하고 그랬어요. 그것들이 먼저 우리를 만나자고 한 거죠. 우리가 다니면서 미국 욕을 하고 다니고 미국 사람들이 5·18 얘기하러 오면 미국놈들 나쁘다는 소리를 막 해댔더니 그 정보가 대사관에 들어갔는지 우리를 만나자고 한 거지. ‘우리 국민들은 미국을 우리 조상처럼 떠받들고 우리를 위해서 싸워주고 오랑캐들도 물리쳐 준 줄 알았는데 5·18을 보니까 그것이 아닌 것을 확실히 알았다’고 소리를 치고 왔지.

  

‘오월어머니회’는

그 어려운 고비를 다 넘기고 세월이 많이 흘러갔죠. 그러다 보니 엄마들이 한두 분씩 돌아가시기도 하고 힘이 없이 늙어버리기도 하고요. 그렇게 힘들게 전경들 앞에서 ‘정말로 너는 에미 애비도 없냐’ 하면서 ‘내 아들 살려내라 내 자식 내놔라’ 그러고 외치면서 전경들이나 정보요원들 일말의 가슴을 찔리게 했던 그런 역할을 했던 엄마들이었는데... 내가 벌써 일흔 한 살 먹듯이요. 그래서 이분들에게 무엇인가 정말 돌아가실 때까지 긍지를 줄 수 있는 그런 모임이 다시 필요하다 그래서 2000년 오월여성회를 만들었어요.‘이 분들 가슴에 아직 한이 많구나. 이걸 풀어야겠구나’ 싶었던 거죠. 2005년에는 오월어머니집도 만들고요.

젊은 애들은 나중에라도 회유를 당하지요. 즈그 이익을 위해서 높은 자리 주겠다 그러면 입 다물고 있을지 몰라도, 우리 어머니들 가슴에 맺히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 빼앗길 수 없는 정의가 있어요. 때문에 우리 어머니들이 살아 있을 때 이 분들을 격려하면서 어머니집을 만들어야 되겠다 한거죠. 내가 청년들에게도 호소했어요. “느그 생각해봐라. 우리 엄마들이 얼마나 고생했냐. 그 80년 5월 이후에는 검거 선풍이 불어가지고 아주 숨도 못 쉬는 공포 속에 광주 어머니들은 살아온 거다. 누구도 말 한마디 못하고 있는데 우리 엄마들은 전두환이 살인마다 이놈 물러가라 내 자식 살려내라 내 자식 석방해라 했다.” 그 엄혹한 공간을 메우면서 외친 것은 어머니들의 용기였단 말이어요. 다 잡혀 들어가거나 두들기고 고문받고 죽어가니까 전부 다 숨어서 말도 못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계속 외치고 다녔으니까. 기동대들이 우리를 짐짝처럼 싣고 갖다 던지고 닭장차에다 막 던지고 그래도 도청 앞에 열명이라도 모여서 전두환이 살인마 외치고 그러면 옆에서 사람들이 ‘저 어머니들 대단하다’ 그러면서 우리가 곤봉으로 뚜들겨 맞아서 기절하면 얼른 데려다가 물도 먹여주고 했어요. 전경들이 지랄하면 대갈빡에 동전지갑을 던져 불고 별 짓을 다했죠. 이런 과정이 있었으니까 끊어지지 않고 민주항쟁에 대한 항의가 일어났지, 우리 엄마들이 조용했다면 2~3년 동안 그 흐름이 끊어지고, 그러면 운동이 잘 일어났겠나.

그래서 어머니집을 만들었는데 여기는 도청 가는 길이라 광주의 배꼽이에요. 여기가 작지만 큰 집이여. 여기서 5월의 증언들을 계속 품어내면 좋겠다 싶어. 증언만큼 강한 것이 없잖아. 여기 일을 보는 분도 녹두서점 김상윤씨 부인이야.


△구 도청 전시관에 관람 온 어린이가 시민군의 흉내를 내고 있다.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내가 여생의 할 일이 통일운동이다 생각했어. 그리고 기장 여신도회에서 평화통일 위원장도 했고. 앞으로 통일운동을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가 어머니 통일운동단을 만들까 그런 생각도 했는데 이제 나이가 일흔살이 넘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안성례 어머니, 인자 나이 들어서 보기 힘들어 보이요’ 해서 ‘그래 알았다. 내 일선에 안 나서마.’ 했다니까. 내가 여러분들이 하는 일이 옳은 일이니까 도와주기는 하되 내가 앞에 나서서 하기가 좀 그래.

 나는 이제 확실히 나이는 나이더라고. 예전에 같으면 명 교수가 ‘계란에 바위치기라도 해야지. 그러면 흰 바위라도 된다. 검정 바위가 흰바위 되도록 쳐야 된다.’하면 그런가 했는데 지금은...

암튼, 홍근수 목사님하고 김영 목사님 하고 친하기도 하고, 모셔서 강연도 듣고 했는데, 또 김병균 목사님하고도 친하재. (그래서 평통사 활동을 같이 하게 되었다)

자기들만 하면 안 돼. 어떻게든지 시민 속으로 들어가서 나라가 바르게 되려면 우리가 사실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그놈의 미군이 주둔함서 비용도 우리한테 다 내라 하고 전쟁 안할라 그래도 무기 사라 해서 우리가 힘들다고 쉽게 풀어가지고 시민들한테 힘을 받아야 해.

 그리고 미국 시민들한테도 영어로 계속 호소문을 보내는 거야. ‘앞으로 미국이랑 우리가 사는 길은 한미관계가 평등하게 되는 거다. 언제까지 지배구조로 갈라고 하냐. 인제 그거는 정말 안 되니까 작전통제권도 반환하고 그리고 미군도 철수시키고 해야지 이렇게 느그들 일방적으로 할 수가 있냐’고. 이번에 소고기 협상 타결을 보더라도 이때다 싶어 억지로 아구를 찢어가지고 멕이니, 즈그들도 안 먹는 거를.

암튼, 그런 식으로 미국 국회와 미국 시민들에게도 우리 입장을 보내고, 여기서는 (미군) 나가라는 것 하고 두 가지로 해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이 시대에 평통사 운동만큼 필요한 운동이 없고, 애국하는 운동이 없어요. 그런데 항상 진짜는 외롭잖아요. 그래서 앞으로 우리 온 국민들, 특별히 어떤 의미에서는 학교에서도 평화통일 교육 반드시 시켜야 된다고 생각해요. 제일 시급한 것이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우리가 정말 분단되어 있고 이 속에서 미군이 긴 동안 우리나라에 점령,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이런 속에서 지금 우리가 사실은 잘 사는 것 같지만 외채도 많다고...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부터 가볍게 평화통일도 가르치고 해서 평화통일 이 실현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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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 평화통일 , 화려한 휴가 , 군부 독재 , 오월 어머니회 , 광주 기독병원 , 명노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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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 정동석 / 정리.사진 - 오미정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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