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공간이 전선인 시대, 문화는 우리의 무기

$사람$

 

1980년대 말은 6월 항쟁 이후 고조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인한 사회과학서점의 전성기였다. 전국에 140여 개의 서점이 있었으니, 큰 규모의 대학교 앞에는 하나씩 있었다고 보면 맞겠다. 사회과학 전문서점으로 1982년 건국대 앞에 문을 연 <인서점>은 마땅한 책도, 서점도 없던 시절 ‘사람중심’의 가치를 내걸고 인문사회과학의 중심 공간이 된다. 이제는 문화사랑방으로 진화한 <인서점>을 30년 가까이 지키고 계신 심범섭 아저씨(67세, 아저씨와 인서점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저씨’라는 호칭을 좋아한다)를 만나서 과거를 추억해보고 현재와 미래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 긴 세월 <인서점>과 함께 하신 소회가 남다르실 텐데요.

= 서점이 문을 연 82년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었어요. 당시에는 대통령 별명(대머리)을 많이 불렀는데 그런 얘길 지나가는 사람이 들으면 바로 신고해서 형사가 다 잡아갔어요. 그런데 요즘은 안 그렇지요? 어제도 촛불집회에 가보니까 ‘이명박은 사기꾼이다 물러가라’ 그러더라구요. 예전 같으면 국가보안법 위반이에요. 중범죄자들이죠. 모두 붙잡혀 갔을 거예요(웃음). 그만큼 세월이 변한 거죠. 그럼 그냥 변했냐하면 그렇지 않아요.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 흘리고 매를 맞고 더러는 목숨을 바친 결과겠지요. 당시 피 흘리며 도망다니던 사람들 중에 인서점과 인연 맺은 사람들이 꽤 많기 때문에 하나하나 얼굴을 떠올리면 고맙고, 한편으로는 그들이 고생할 때 나는 그늘에 앉아서 따뜻한 밥 먹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죠.

- 사회과학서점을 하시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인서점은 82년에 문을 열었지만 그 전에도 서점은 운영하고 있었어요. 길동 사거리에서 했었는데 당시 서점을 드나들던 학생들이 대학가로 이사를 가자고 권유해서 여기로 오게 됐지요. 사회과학 지식이 투쟁의 무기가 돼야 하고 사람 중심의 생각들을 전면에 걸고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사람 ‘인(人)’ 자를 써서 『인서점』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게 됐어요. 명확하게 자기 정체성을 갖기 시작한 거죠.

- 사회과학서점의 역할이 무엇이었나요?

= 우리 서점이 한 일을 보면 두 가지를 들 수 있어요. 한 가지는 정보교환의 장소 였죠. ‘광주에서 사람이 많이 다쳤다더라’, ‘김영삼이 단식투쟁했는데 며칠 째 라더라’는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 때로는 고대생이 남긴 쪽지를 연대생이 받아가는 쪽지와 언어의 소통공간으로서 사회과학서점이 필요했었지요. 또 한 가지는 당시에 복사기가 아주 귀했는데 다행히 우리 집에 복사기가 한 대 있었어요. 문건의 생산거점 역할을 했지요. 책을 판다기 보다 믿음의 공간, 사상의 소통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 사회과학서점에서 문화과학서점으로, 문화사랑방으로 변천해온 <인서점>의 역사가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각각 그 시대적 소명을 생각하신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 88년 무렵, 더러 여러 사람 앞에 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얘기를 했요. ‘투쟁은 3가지가 있다. 혁명투쟁, 준혁명투쟁, 민주화투쟁이다. 혁명 투쟁은 적과 적이 전선을 그어놓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대결하는 것이다. 힘이 센 쪽이 이긴다. 준혁명투쟁은 전선, 조직, 투쟁의 무기에 상당한 변화가 있다. 투쟁의 무기가 바로 사회과학이라는 지식이다. 투쟁의 방식도 논리적이고 설계에 의한 명확한 대안 제시다. 전사들이 나가 논쟁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민주화투쟁 시기는 혁명투쟁과는 정 반대이다. 조직과 전선도 사라지고 개인적인 삶의 공간이 전선이 되고 문화가 투쟁의 무기가 된다. 90년을 넘어서면 바로 민주 전선시기가 도래하기 때문에 문화의 투쟁을 해야 한다’고 말했었죠. 그런 뜻에서 시대의 변화에 맞게 서점의 성격을 조금씩 바꿨습니다.

- 그간 인서점을 운영해 오시면서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습니다만,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요?

=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건 90년대 이후에요. 80년대에는 영장도 없이 붙잡아가는 일이 많았어요. 경찰들이 수시로 들이닥쳐 책을 몇 백 권씩 압수해가면 힘들죠. 그래도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었는데,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상황이 호전되기는커녕 점점 더 군사독재 정권의 험악한 공세가 밀려오더니 마침내 86년에 박종철이 죽고 이한열이 죽고 그러면서 학생들이 공부 다 팽개치고 길거리로 나가잖아요. 그 때 내가 과연 서점을 해서 저 사람들 저렇게 징역가게 해야 하는가, 서점을 과연 해야 되는가 하는 깊은 고민에 빠졌었어요. 형사들도 ‘당신이 책 팔아서 학생들 잡혀가는데 계속 그 일 하지 말고 다른 사업해라. 어려운 점 있으면 우리가 도와줄 테니까 말해라’고 회유를 해요. 아닌 게 아니라 마음이 흔들려요. 당시에 일곱식구가 조그만 방에 살아서 난 가게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자는데, 새벽 1시쯤 밖에서 누가 문을 막 두드려요. 깨어나서 열어보니 도망가던 학생들이에요. 들어오게 해서 라면 끓여 막걸리 한잔 같이 마시며 얘기해보면 한 사람 한 사람들이 너무나 진실하고 아름다워요. 역사와 정의에 대한 그들의 뜨거운 열정을 보면서 아... 이들을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했죠. 그들과 함께 눈물 흘리면서 마음을 다잡곤 했어요. (이 대목에서 선생님은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셨다)

- ‘인서점을 사랑하는 사람들’(인사랑)이라는 모임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 97년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자 사람들의 사회적 관심사가 바뀌게 됩니다. 문화가 새로운 삶을 건설할 수 있는 중심적 가치로 바뀌죠. 그러다보니 점점 책이 안 팔리기 시작해요. 이데올로기 시대에는 이데올로기 서적을 파는 데 긍지를 가졌는데 문화과학의 시대가 오니까 재미가 없어. 서점들이 문을 닫기 시작하고 학생들도 사회적 문제보다는 개인의 문제로 관심이 옮아가요. 또 IMF 시대 엄청난 경제폭탄이 떨어지면서 사회전체가 충격에 빠지게 되잖아요. 즉, 문화도 경제도 정치도 아닌 뒤죽박죽 가치 혼란의 시대를 맞게 됩니다. 2005년에 우리 서점도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요. 그 때 청년건대를 중심으로 ‘인서점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고 조합을 꾸려 1억 3천만 원을 모금했어요. 그래서 지금의 이 자리로 옮겨주었어요. 그 조합이 바로 ‘인사랑’이에요. 조합원은 현재 40여 명이고, 준 조합원이 100여 명 될 겁니다. ‘인사랑’은 <인서점>이 우리 역사에서 추억의 공간으로, 상징적 공간으로서 꼭 있어야 한다고 해요. ‘인사랑’이 주축이 돼서 해마다 모임을 갖는데 2006년부터 ‘강변문화제’라는 이름으로 했어요. 강, 산, 사람을 주제로 봄에는 자연과 함께, 가을에는 사람의 삶속으로 찾아가자는 취지로 1년에 두 번 열립니다. 자료집도 만들고 글쓴이를 초대해서 이야기도 나누고 사진전, 도서전도 열자는 계획을 세웠어요. 그런데 올해에는 광화문에서 열리는 촛불문화제에 참석하는 것으로 대신 했어요. 흩어지면 안 되잖아요.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씨앗으로 미래로 끌고 나가고자하는 데 동지로서 함께 가려고 합니다.

- 광진구 6.15 공준위 대표도 하시고 지역활동을 많이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평소에는 주로 어떤 일을 하시는지요?

= 대표를 맡아서 여러 해 동안 활동을 했는데, 나이 먹어 하는 일 없이 감투만 쓴 거 같아 진즉에 내 놓으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요. 그러다 지난 가을에 젊은 사람들에게 맡기고 내려왔지요. 평소엔 서점이 역사가 되다보니까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요. 주로 그 분들 만나는 게 일입니다. 지방에서 오시는 분, 해외에 갔다가 추억이 있어서 찾아오시는 분, 오늘도 22년 만에 왔다는 손님이 있었어요. 반갑고 즐거운 일이에요. 그 외에는 칼럼이나 서평을 씁니다. 작년까지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썼었어요. 별 일 아닌 거 같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어야 하니 이것저것 찾아봐야 할 게 많고 아는 게 없으니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구요. 한 달에 두 번 서평 준비하는 일에도 시간을 많이 씁니다. 20-30권과 씨름해서 두 권을 골라내야 하니까 수월치 않더군요. 서평은 제가 후원자들에게 드리는 <글나루>에 싣고 민주노동당 기관지에 하나 보내고, 인터넷 공간에도 올리고 그럽니다. 허허~

- 평화협정 실현운동 추진위원이기도 하신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 평통사에서 하는 일에 박수를 보냅니다. 실제로 같이 뛰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보탬이 돼야겠다는 생각입니다. 평화협정이 우리가 무조건 해야 한다고 주장만 해서 되는 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평화협정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내려앉게 해야 되겠지요. 그래야 거부하지 못하는 역사의 한 온도로 되요. 마치 두꺼운 옷을 입었다가 봄이 되면 벗어버리듯이 그렇게 민중들의 마음에 평화협정에 대한 열망이 내려앉아야 합니다. 생각을 다듬은 사람들이 먼저 가면서 설계를 하면 민족과 통일이라는 큰 집은 나중에 지을 수 있는 거겠죠. 지금은 그런 토대를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강정구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전문가들이 시안을 만든 작업은 매우 어른다운 역할을 찾아서 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결코 주저해서도 안 되고 오히려 치밀하게 해 나가면서 뒤에 쳐져있는 사람들이 위기를 느끼지 않도록 여유롭게 추진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이 땅의 청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통일을 하고자 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같은 거예요. 이것이 바로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인간의 본성입니다. 민족은 그냥 그리운 거고 형제는 그냥 보고 싶은 거예요.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초월해야 됩니다. 입에 발린 말이나 위장된 행동이 아니라 마음속에서부터 통일은 됐어! 라는 믿음과 열정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다 헤쳐갈 수 있지요. 봄이 오면 봄을 맞는 사람이 있어야 하죠. 통일 역시 통일을 맞을 사람이 있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에요. 느긋한 마음으로 민족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을 다독여서 키워 가면 꽃을 피울 것입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아저씨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흡사 부처의 그것을 닮은 듯 인자한 미소에 반하지 않을 사람 누가 있을까. 뿌리 깊은 사람에 대한 애정이 30년 질곡의 세월 속에서도 책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이었으리라.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67세 청년, 그의 미소가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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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 황윤미 / 정리&사진 - 김현진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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