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友(창우) 친구들에게

$평화협정 실현운동$

 



窓友(창우) 친구들에게

 

그 동안 健剛(건강)하고 家內平和(가내평화)하리라고 믿네.

나 역시 친구들의 관심과 성원으로 보람된 삶을 이어가고 있네.

窓友(창우) 모임에 부득이한 사정으로 참석치 못한 점 理解(이해) 바라네.

비록 참석은 못했지만 친구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변함이 없네.

李明博 政權(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 그동안 움츠리고 있던 親日親美(친일친미) 事大主義者(사대주의자)들의 亡靈(망령)들이 날뛰고 있어 개탄스럽고 우리 민족의 앞날에 어둠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도 하지만 거짓은 결코 오래 갈 수 없고 眞實은(진실) 반드시 승리한다는 宇宙萬物(우주만물)의 攝理(섭리)를 믿고 希望(희망)을 가져보네.

오늘 친구들에게 글을 쓰게 된 動機(동기)는 ‘平和(평화)와 統一(통일)을 여는 사람들’(일명‘평통사’)이란 단체에서 發行(발행)하는 월간지 7, 9월호를 보고 羞恥(수치)스러운 마음이 들어 내 고향이고 동창 친구들에게 나의 심경을 말하려고 하네.

평통사 발행 7, 9월호(平和누리 統一누리) 책을 보면 평통사에서 추진위원 1만명 입회 목표로 각 지역에서 2개월여 기간 동안 활동한 결과 1위 서울 165명, 2위 인천 153명, 3위 전남광주 126명, 4위 중앙 평통사 125명, 5위 대구 23명, 6위 군산 19명 등이었네.(책자 참고)

누구나 개인의 意思(의사)에 따라 평통사에 입회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겠지만 韓民族(한민족)의 統一(통일)은 우리 時代(시대)의 最大 課題(최대 과제)라는 것에 異義(이의)를 提起(제기)할 자가 있겠는가. 평통사 資料(자료)만을 前提(전제)한 意識(의식)수준을 評價(평가)할 수는 없지만 이웃 群山(군산)보다, 수구세력들의 바탕인 大邱(대구)보다, 全北(전북)이 너무도 무관심 한 것 같아 안타까운 심경이었네. 한편으로는 全州(전주) 金堤(김제) 지역에 평통사 사무실과 선도적 추진위원이 있었다면 大邱(대구)나 群山(군산)에 뒤지지는 안했을 것으로 믿고 싶네.

現代史(현대사)에서 전북지역은 어느 지역보다 지난 反民主 反統一(반민주 반통일) 軍事政權(군사정권)에 협력을 거부했으며 民主回復(민주회복)과 平和統一(평화통일) 政策(정책)을 일관되게 主唱(주창)하신 金大中(김대중) 선생의 政治路線(정치노선)에 대한 積極支持(적극 지지)와 성원으로 1997년 12월 金大中(김대중) 선생 大統領(대통령) 당선에 큰 공헌을 한 傳統的(전통적)인 進步性(진보성)이 강한 내 고향이었다고 자부하는데 친구들도 同意(동의)하리라고 믿네.

뿐만 아니라 獨立(독립)운동가였고 制憲(제헌) 의원이었으며 反獨裁(반독재) 투쟁의 先鋒(선봉)에 서셨던 양일동 民主統一(민주통일)당 총재를 비롯, 漢承憲(한승헌) 변호사, 柳甲鍾(류갑종) 前의원, 統一部(통일부) 장관과 18대 民主堂 大統領(민주당 대통령) 후보로서 선전한 鄭東泳(정동영) 前의원, 苦難(고난)의 民族史(민족사)에 온 몸으로 저항하신 민중의 촛불 文정현 신부님(4·9 평화통일재단 이사장), 文규현 신부님(평통사 상임대표)등 많은 人材(인재)를 배출한 전북이 아닌가. 나 역시 전북 出身(출신)이란 自負心(자부심)을 잊어 본적이 없었네. 전북 지역에 대한 見聞(견문)이 짧은 나로서 이외의 훌륭한 人材(인재)들을 미처 알지 못함을 理解(이해)하여 주기 바라네. 다만 친구 鄭註鉉(정주현) (金堤市(김제시) 文化院長(문화원장))의 아들 鄭勳(정훈)씨가 民主化(민주화)운동 有功者(유공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네. 수년전 鄭註鉉(정주현) 친구에게 훌륭한 아들을 두어 祝賀(축하)한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네.

친구들이여!

우리의 餘生(여생)은 나의 意志(의지)와 관계없이 人生(인생)의 終着(종착)점이 좁혀오고 있음을 實感(실감)하면서도 世俗(세속)의 障壁(장벽)을 克復(극복)하지 못하고 한번 밖에 없는 나의 生涯(생애)에 무의미한 終着(종착)을 맞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은 深思熟考(심사숙고) 돌아보고 싶네.

金堤(김제) 月村(월촌) 初等學敎(초등학교) 23회 동문들이 祖國統一(조국통일)에 寄與(기여)한 歷史(역사)의 記錄(기록)이 남기를 바라네.  

2008년 11월 14일 이상준

이상준 선생님은

1936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시고, 양천구 초대 시의회 의원(민주당)으로도 활동하셨습니다. 지난 7월 27일 한겨레에 평화협정 실현 운동 광고를 보시고 마지막 남은 생을 평화협정 실현운동에 매진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부인께는 “사람이 사회에 태어나서 죽는 것은 매한가지야. 사람이 어울려 사는 이 사회는 사람들이 풀어야 할 역사적 과제가 있는 것이고, 죽기 전에 그 숙제를 풀고 생을 마감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지금에 있어 그 역사적 과제가 바로 ‘통일’운동이지” 하셨답니다.

선생님은 지금 마음이 급하십니다. 당신이 생을 마치기 전에 통일된 나라를 꼭 보고 싶으셔서 말입니다. 그런데 <평화누리통일누리>를 보니 선생님의 고향 전북의 추진위원이 다른 지역보다 숫자가 적다는 통계를 보시고 자존심이 상하셨던 모양입니다. 급기야 3년이나 연락을 못하고, 만나지 못했던 친구분들께 평화협정 운동을 함께 할 것과 평통사 활동을 함께 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쓰시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친구분들이 이 뜻에 함께 할지는 모르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작지만 무언가 하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입니다.

-인천평통사 유정섭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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