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우리 시대의 거울, 권정생

-권정생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


      

아! 권정생, 벌써 그 님이 가신지 두 해 가까이 되지만, 조용히 눈을 감고 그의 삶과 이야기를 돌이켜보면 권정생의 삶보다는 오히려 그의 삶 뒤안길로 해서 다가오는 것은 우리의 모습이다. 아니 나의 모습이다. 그의 삶은 우리의 거울이다.  그 거울 앞에 서 보자.  

검정 고무신 두 짝이 가지런히 놓여 있던 다섯 평 오두막 작은 문간방, 그 댓돌 위에 나의 신발을 벗어 놓자. 그리고 옷깃을 여며야 할라나…원! 그 차가운 방 아랫목에 그의 영혼이 떠난 뒤 그의 껍데기와 그 껍데기가 걸치고 있던 단 한 벌의 입성 앞에 앉아 보자. 방 안엔 무엇이 있던가. 그가 그렇게 소중히 하던 ‘없음’이 가득 차 있을 뿐, 아무 것도 없다. 권정생은 우리에게 이 무를 남기기 위해 이 땅을 방문했는지도 모른다. 이 공허의 무, 허무함의 무를 창조하기 위해 우리를 찾아 왔다가 그 무가 완성되자 문득 떠났다. 

그 앞에서 우리의 호사스러운 입성과 신발과 집과 말들과 생각은 유의 껍데기를 벗어 던지지 못해 찢어지다가 끝내 피를 흘린다. 상상해 보라. 몇 천 몇 억이 오르내리는 우리들의 집은 그 앞에서 부끄러운 세상이 된다. 번쩍거리는 온갖 치장과 자동으로 조절되는 냉난방은 집이 아니라 차라리 성채이거나 천국이지만 이 거울 앞에서 그 모든 것은 거꾸로 보인다. 큰 것과 작은 것이, 그리고 높은 것과 낮은 것이 자리를 바꾼다. 선과 악, 추와 미, 그리고 진과 위, 상과 하, 무와 유가 자리를 바꾼다. 왜 그런가.   

그렇다. 권정생이 남긴 이 거울 「우리들의 하느님」 이 우리의 모든 것들을 그렇게 가혹하리만큼 그리고 또 확실하게 전복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알고 보면 너무 쉽고 너무 간단하고 너무 단순하고 너무 순진해서 무슨 이치랄 것도 없는 상식일 뿐이다. 그 동안 우리가 ‘이게 바로 인간의 길이야’라고 죽자 사자 달려왔던 저간의 걸음이 실은 아주 잘못된 길이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달려온 인간의 역사는 정작 인간의 역사도 아니었고 인간의 길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반대쪽이었음을 권정생의 삶과 담론 「우리들의 하느님」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보잘 것 없이 살다간 권정생의 삶에 집중되는 우리의 관심과 존경과 사랑에서 그리고 그 담론을 거울로 해서 느끼고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달려 온 그간의 길이 실은 동물이 되는 길이었음에도 그걸 인간의 길로 착각한 것이었다. 이 엄청난 착각을 어찌하랴. 악전고투 끝에 지구를 평정하고 문명이라는 찬란한 깃발을 막 꽂고 난 터에 그것이 착각이라니…… 그렇다. 지금 인간이 도착한 자본주의라는 공간에서 발견한 무한경쟁의 신자자유주의는 결국 인간이 지식을 가진 무서운 동물이라는 것과 이제 곧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악마의 길에 접어 들 것임을 우리는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 길을 거부하고 가난하게 살아왔던 한 평범한 아저씨 권정생의 삶을 통해 이제 우리가 깨우치게 되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나무장수를 시작으로 인생의 길에 접어들어 고구마장수, 담배장수, 점원노릇을 하다가 결핵이라는 병마를 짊어지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런 그가, 고향에 돌아와 병든 몸을 내려놓은 곳은 조그만 교회의 헛간이다. 거기서 종 줄을 당기며 서른 해가 된 즈음에 그는 비로소 ‘돌예수꾼’이 되었다고 술회하였지만, 그 때 권정생은 어렴풋하나마 ‘진짜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그의 꿈 이야기를 들어보자. ‘내가 만약 교회를 짓는다’면 ‘한 백 명쯤이 들어가서 떠들고 얘기 할 수 있는 오두막 교회를 짓되, 뾰족탑이라던가 교회간판 같은 건 만들지 않겠다’면서 그리고 ‘꼭 교회 이름이 필요하다면 그냥 <까치네 집>이라거나 <망이네 집> 또는 <심청이네 집> 이렇게 교회 이름을 붙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는 모여서 ‘세상살이 얘기도 하고 ‘성경책 얘기도 하고 가끔씩은 가까운 절간의 스님을 모셔다가 부처님 말씀도 듣고, 점쟁이 할머니도 모셔 와서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마을 서당의 훈장님같은 분께 공자님이나 맹자님 말씀도 듣고, 단오 날이나 풋굿 같은 날엔 돼지도 잡고 막걸리도 담그고 해서 함께 춤추고 놀기도 하고, 그래서 어려운 일, 굳은 일을 서로 도와가며 사는 그런 교회를 갖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종교는 단지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던가. 허기야 그는 ‘함께 일하고 함께 잘 사는 세상이 사회주의’라면 그런 ‘올바른 사회주의는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로 눈을 돌리면 ‘성공’ 담론을 내세워 성공한 이가 지도자가 되더니 그 성공담론을 따라 누구랄 것도 없이 다 함께 질주한다. 그 앞에서 권정생은 바보천치가 되고 우리는 한없이 초라해 지고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권정생의 무학과 가난과 무력과 무소유는 또다시 우리를 향해 덮쳐온다. 자본주의라는 욕망의 체계가 세상을 휩쓸어 간다. 그래서다. 권정생은 한 포기 이름 없는 풀처럼 살다가 그 풀들의 세상으로 갔다. 그 숲에서 토끼처럼 다람쥐처럼 살고 있을 것이다. 그가 우리를 부른다. 아직 희망은 있다. 아직도 우리들의 하느님 앞에 서면 그의 종 줄을 따라 종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