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욱 열사의 당부, "그냥 그대로 쭉 가세요"

$기획$


 

2007년 3월 25일, 밤 9시가 조금 넘었다. 낮부터 용산에서 열린 한미연합연습 규탄 집회와 시청에서 열린 한미FTA 저지 총궐기대회를 연이어 참가하고 사무실로 들어온 터였다.
허세욱 회원한테서 전화가 왔다. 특유의, 수줍어 하면서도 살짝 애교섞인 목소리다.
“국장님 어디계세요?”
“사무실이에요”
“아~ 전 FTA 집회끝나고 뒤풀이 중이에요.”
“네. 저두 집회갔다가 한미 연합연습 투쟁 준비 때문에 사무실로 먼저 들어왔어요.”
“그렇구나. 냉정한 것 같아보여도 다른 거에 흔들리지 않고 그렇게 하는게 맞는 거 같아요. 그냥 그렇게 쭉 가세요.”
‘뭐? 냉정하다고? 내가 쌀쌀맞았나?’ 살짝 갸웃거리며 장난을 걸었다.
“지금 나보고 냉정하다는 거예요? 언제?”
“아니, 그게 아니라....”
“낄낄낄낄, 술 많이 잡숫지 마세요. 건강하시구요.”
“네. 국장님도 건강하세요.”
며칠 후 열사는 분신을 했고, 보름 후에 숨을 거뒀다. 머리 속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자꾸만 마지막 전화통화가 떠올랐다.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그것은 나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이것 저것 건드리지 않고, 냉정할 정도로 한미동맹 문제에 집중하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평통사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 길이 맞는 것 같다는 칭찬, 그러니 그대로 쭉 가라는 당부였다.

돌이켜 보면, 허세욱 열사야말로 한반도의 자주와 평화, 통일 문제를 줄기차게 제기하지 않았나?
그것은 열사의 자료를 찾아내고, 정리하는 와중에 확실해졌다.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과 평택 대추리의 빼앗김이 열사에게는 동일한 문제였던 것이다.
기억을 더듬으며 열사의 투쟁을 따라가 봤다.  

정리 오미정


2003년 11월 18일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 참가차 한국에 온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이 송탄 K55 공군기지에 왔다.

이라크전에 한국군을 파병하라는 미국의 요구가 있던 차였고, 용산 미군기지의 평택이전을 위한 한미간 협상이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평통사는 16일부터 18일까지 럼스펠드가 도착하는 성남공항, 숙소인 신라호텔, 회의가 열리는 국방부 앞, 럼스펠드가 방문한 국립현충원 앞, 청와대를 쫓아다니며 한국군 파병 요구 중단과 평택 대체부지 제공 반대 요구를 들고 그림자 시위를 벌였다.

18일 낮 2시에 평택 주민들과 같이 규탄 시위를 하였는데 서울에서 평택까지는 민주노동당 25인승 버스를 타고 갔다.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보니, 평통사는 9명, 민주노동당 회원은 3명이었다. 운전하시는 분과 자통국장, 그리고 허세욱 열사였다.

투쟁을 마치고,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첫 인사를 했다. 봉천놀이마당에서 풍물을 쳤었다고, 윤영일(서울평통사 회원)을 알고 있다며.                                                    

                                                    △2003.11.18 송탄미군기지앞
 



△2004. 6.12 종로

2004년 6월 12일, 용산미군기지 이전 협상의 중단과 전면 재협상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에 열사도 함께 했다.

2004년 4월 탄핵 촛불에서 다시 열사를 만났는데, 그때도 서울평통사가 ‘미군이 이사가는 데 우리보고 돈을 내라고?’하며 캠페인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그 유명한 벌꿀 차 몇개를 사 갖고 와서 아는 척을 했다. 그후부터 허세욱 열사를 자주 보게 되었다. 주로는 사무실로 찾아와 용산관련 유인물을 갖고 가기도 하였고, 직접 캠페인 장소로 나와 같이 캠페인도 하였다. 택시 손님들에게 나눠준다며 조금씩 갖고 가더니 하루는 천장 정도를 달라고 한다. 같은 민주노동당 당원인 서울대생을 꼬셔서 봉천사거리에서 유인물을 나눠줄 계획이란다. “내가 다른 데서도 유인물을 받아가는데, 평통사 게 제일 좋아요. 읽기도 쉽고 설명이 잘되어 있어서..”

그 즈음 열사는 드디어 평통사에 가입하였다. 오랜 기간 지켜보고 함께 실천하고 난 후의 결정이었다.
 

 


△2005.12.21 국방부 앞

2005년 10월 21일, 또 SCM 회의가 서울에서 있었고, 럼스펠드가 한국에 왔다. 그림자 시위를 하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릴때였다. 모두 우비를 뒤집어쓰고, 비닐을 덮고 앉아 농성을 하였다. 열사는 근무중이었는데 잠시 짬을 내서 왔다고 했다.
 

 



△2006. 3.14 대추초등학교

2005년 하반기 언젠가, 허세욱 열사가 좋은 구호가 생각났다며 현수막을 만들어서 평택의 대추초등학교에 걸자는 것이다. 그 구호는 “효순 미선 죽인 미군을 몰아내자”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평택 주민들의 정서나 우리의 요구가 “우리땅을 지켜내자” “내년에도 농사짓자” 정도 였지, 미군 철수까지는 올라오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열사가 낸 구호는 과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열사를 설득했더니 열사는 이해가 가지 않는듯 했다. 살짝 삐지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몇 번 현수막을 만들어 달자고 하였다. 그러다가 몇 개월이 지나고 나서 어느날, 자랑스럽게 씨익 웃으며 “국장님, 제가 노조에 얘기해서 택시 노조 이름으로 현수막을 만들었어요” 그 현수막은 2006년 3월까지 대추초등학교 한 켠에 달려 있었다.

2006년 5월이 되니, 강제 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평통사는 “효순 미선을 잃은 우리, 황새울마저 잃을 순 없다”는 구호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2007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주한미군 내보내는 한반도 평화협정 실현 운동’을 펼치며 미군 철수를 얘기하니, 열사가 살아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06. 8.31 국방부 앞

2006년 8월 31일, 국방부 앞이다. 대추리가 철저히 봉쇄되는 때라, 주민촛불 2주년 행사를 국방부 앞에서 하였다.

“국장님, 사진 좀 찍어 주세요. 오늘 노조 교육이 있는 날인데요. 아무래도 여기 나와야 할 것 같아서 왔어요. 땡땡이 친거 아니라는 증거를 남겨야 해요. 사진 찍어서 노조에 보내야 해요”

사진은 찍었지만, 열사께 챙겨 주지는 못했다. 교육을 땡땡이 쳤다고 혼났을까?
 

 



△2006. 5. 4 도두리 들판

2006년 5월 4일, 대추초등학교가 무너지고, 들판에 철조망이 쳐진 날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추 초등학교에 모여 있었고, 평통사와 몇몇 노동자들, 도두리 주민들만 들판에 들어오는 군인들을 막아 나설 때였다. 멀리, 군인들이 농로를 따라 들어오고, 십수대의 헬기가 굉음을 내며 거대한 철조망 덩어리를 곳곳에 토해내고 있었다. 우리의 숫자는 불과 50여명, 이제 막 씨를 뿌린 논에서 철퍽거리며 사방에서 전경들과 군인들, 철조망과 뒤엉켜 붙잡고 막아서고 하는 와중이었다. 순간, 저 앞에서 헬기를 향해 내달리는 열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현장 투쟁 경험도 많지 않을텐데, 사람들과 같이 움직이면 좋겠다’ 생각하며 열사를 만류하려고 덩달아 같이 뛰었다. 그러다가 숨이 차서 쫓아가기를 포기하고 멈춰서 찍은 사진이었다.

헬기와 철조망, 군인에 맞서는 우리는 정말 ‘몸’과 ‘깃발’ 밖에 없었다. 열사는 “온몸으로 막아내자”는 절박한 구호를 철저히 행동에 옮긴 것이었다.
 

 



△2007. 2. 8 국방부 앞

2007년 2월 8일, 몇개월 만에 열사를 다시 만났다. 한미안보정책구상(SPI) 회의가 열리는 국방부 앞이었다. 회의 주제에 평택 기지 확장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평통사는 다른 단체들과 함께 농성중이었다. 농성 참가 인원이 채 30명이 안됐다. 평택 기지 문제가 막바지인데, 왜 이리 사람이 안 모였냐며 답답해 하셨다.
 

 



△2006. 6.13 반미연대집회

2006년 6월 13일, 효순 미선이가 목숨을 잃은 지 4년이 되는 날이었고, 반미연대집회가 있는 날이었다. 소녀들에게 헌화하는 아저씨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그리고 1년 후인 2007년 6월의 반미연대집회에서는 두 소녀의 영정과 열사의 영정이 함께 놓였으니, 그 기막힌 심정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2007. 6.12 반미연대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