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연입지후예양육달성" 학산 윤윤기의 삶을 뒤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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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발발 한 달 후인 1950년 7월 22일, 전남 보성군 미력면 예재 고갯길. 수많은 주검들이 아무렇게나 포개지고 널브러져 있었다. 온몸이 철사로 결박당해 있고 입과 코가 찢어지고 이는 모두 부서져 빠진 처참한 시신이 발견된다. 학산(學山) 윤윤기(1900~1950), 민족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그를 경찰이 잔인하게 살해한 것이다. 그의 아들 윤호상 회원을 만나 단정ㆍ단선에 반대하며 민족화합에 애쓴 선각자 학산 윤윤기 선생의 역정을 되돌아본다.

아버님이 북에서 반일애국열사로 인정상을 받으셨다고요?

네, 2007년 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에서 반일애국열사로 추서 받으셨어요.

그럼 남에서는?

지금까지 사인도 밝혀지지 않았고, 진실화해위원회에 사인 조사를 요구했지만 3년이 지난 지금도 감감 무소식이에요. 

아버님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굉장히 과묵하시고 없는 사람들한테 인정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전남 사범학교 강습과 전 과목을 졸업하셨고 그때 당시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초임발령을 전남 장흥군 안양보통학교 훈도로 부임하셨지요. 그때부터 베일에 싸인 항일저항운동을 하셔요. 민족교육에 뜻을 두고 “민족혼을 놓으면 안된다”, “조선은 일본보다 우수한 민족이다”, “일본사람은 후지산을 자랑하지만 우리나라의 금강산은 세계의 명산으로 우리가 지키고 가꿔야 한다”고 강조하셨답니다. 많은 가난한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이게 해서 야학을 운영했고 우리나라 전래동요, 한글, 역사를 가르치셨습니다.

아버님은 한학을 대학과정까지 마쳤기 때문에 신학과 구학을 겸비하셨어요. 그 과정을 마쳤으면서도 전남 사범학교 강습과에 들어갔지요. 일본인만 들어갔던 강습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일본어에 능통했다는 얘긴데요. 광주 교육대학교 70년사에 그 부분이 나옵니다. ‘왜 학산은 전남 사범학교 강습과에 입학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일본어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당시 학산은 김형직 선생이 주도한 조선국민회에 가입했는데, 지하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본을 가셔서 신 학문과 의술을 배우시고 와서 24살 늦은 나이로 사범학교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내가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과감히 적진에 들어가서 적한테 공부를 배우고 내 민족을 위해 써야겠다’ 즉 ‘분연입지후예양육달성’을 목적으로 민족교육에 평생을 바치신 겁니다.

의술도 뛰어나셨지요?

네. 항상 청진기를 갖고 다니셨고 산모들을 많이 구출했다고 합니다. 애기도 많이 받고 무통분만을 할 정도로 의술이 뛰어나셨다고 해요. 또 누가 애기를 낳았다고 하면 미역과 쌀을 보내주고 간병인으로 부인을 보냈습니다. 위생적으로 산모를 해먹이도록 부인을 교육시켜서 말이죠. 어떤 사람은 미역과 쌀을 얻어가기 위해 거짓말로 집사람이 아이를 낳았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부호가 될 수도?

그 당시 교육자는 굉장히 큰 돈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 달 봉급으로 논 3마지기를 살 수 있을 정도니까요. 9백 평을 살 수 있는 월급을 받으셨다고 보면 되지요. 아버님은 집의 전 재산을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에 바치셨어요. 남동생과 처갓집에서 마련해주신 논과 밭까지도 팔아서 활동하시기도 했지요. 외갓집에서 사준 1,800평 논밭까지 파실 때는 어머님이 이것만은 안 된다며 사정을 하셨어요. 당시 기억으로 아버님이 굉장히 화를 내신 것으로 압니다.

평생 연금인 은급까지 거부했다고…

만 15년 봉직하면 받는 은급이 있어요. 은급은 일본천황이 내려주는 엄청난 급여를 말하는데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연금이 나와요. 봉급은 봉급대로 나오고, 연금은 봉급의 60%가 나오는데 그 자격 취득 6개월을 앞두고 39년도에 사직서를 과감히 던지십니다. “더 이상 일본으로부터 봉급을 받을 수 없다”, “나는 내길을 가겠다” 하고는 전남 보성군에 양정원이라는 학교를 세웁니다. 민족교육을 위해, 공교육에서 완전히 탈피를 해버렸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공교육에서 민족교육의 한계를 느끼신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런 결정은 목숨을 내놓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이라 최후의 발악을 하던 시기였거든요. ‘창씨개명, 신사참배’하고 은급을 받으라는 종용도 많았다고 합니다.


△보성 건준 박태규 위원장이 민주주의 민족전선 대회를 앞두고
학산 선생에게 몸조심 할 것을 당부한 서한

학교령까지 어겨가며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하던데요?

1934년 천포 간이학교로 발령받아요. 본인이 자원했다는 말도 있고, 그때는 이미 교장훈도이고 조선인이기 때문에 발령을 내주지 않는 상황이었거든요.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천포간이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시켰어요. 근데 간이학교 제도에도 없는 중등교육까지 비밀리에 가르치셨죠. 원래 간이학교는 1~2학년까지만 가르치게 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인상 깊은 것은 소사한테 축음기를 메고 다니게 해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음악소리를 듣고 나오면 흑판을 걸어놓고 한글을 가르치셨답니다. 약 4년 반 동안 온몸으로 문맹퇴치에 심혈을 기울이셨지요. “상해에는 김구선생이 있고, 한양에는 몽양 여운형이 있다”, “우리 조선독립군이 일본군과 저항을 하고 있다”, “일본은 반드시 패망한다”, “징용군으로 끌려가면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절대로 일본의 총알받이가 되어서는 안된다” 결국 이런 교육이 음으로 양으로 일제 경찰로 흘러들어가 담임도 못 맡는 보성보통학교로 발령받게 됩니다.

양정원이라는 학교는?

1939년 학산 선생이 일본왕의 은급을 거절하고 민족교육의 장을 열기위해 전남보성군 해천면 봉강리에 조선 최초의 무상교육기관을 설립합니다.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교육이념이 문맹퇴치, 빈민타파, 불항아 수용 세 가지 슬로건을 걸고, 사회사업을 하신 거죠. 아버님은 학교를 세우기 위해 퇴직금과 전 재산을 내놓으셨어요. 그리고 민족자주교육에 뜻을 같이한 봉강 정해룡 선생에게서 땅 2천 평을 무상으로 임대 희사 받았죠. 그리고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면민의 힘이 동원되어 1939년 4월 12일 무상교육과 무상진료를 실시한 양정원이 세워지게 됩니다. 1940년 개원시 500명의 학생이 모였고 오전부터 야간까지 혼자 다 가르치셨어요. 1942년 이후부터는 학산의 민족교육사상에 공감한 후학들이 뜻을 이어받아 학생들을 가르치게 됩니다. 1947년 폐교할 때까지 2,0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지요.

양정원 운영에 많은 자금이 필요했을 텐데

아버님이 광산사업에 손을 대십니다. 거기서 나오는 광물을 판매해 그 수익금을  양정원 교육비로 쓰셨어요. 그리고 철광석을 유출해 독립군 부대로 보냈고요. 일제가 광물에 혈안이 된 점을 역이용 하신 거죠. 후배들의 증언에 의하면 광산에서 벌어들인 돈의 상당액을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으로 보냈다고도 합니다. 아버님이 현명하셨던 것이 광산업은 또 다른 혜택이 있습니다. 광산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은 병역 특례 해택을 받을 수 있거든요. 양정원에 다니거나 이미 졸업한 젊은이들 가운데 적잖은 이들이 징병대상이었는데 광산에서 일하게끔 하고 징병을 피하게 해준거죠.

양정원에서는 42년까지만 활동하셨다고 했는데. 그 이후는?

아버님은 조국광복회 핵심성원으로 활동하셨어요.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몽양 여운형 선생과 뜻을 같이해서 1944년에 건국동맹을 조직하십니다. 그리고 그해 만주로 가서 항일연군과 조선독립동맹, 김일성 장군의 유격대를 방문해서 조선으로 진군하라는 비밀임무를 띠고 연결을 시도하시지요. 하지만 조선독립동맹만 연결이 됐다고 합니다.


△학산 윤윤기 선생의 아들, 윤호상 회원

아버님은 언제 돌아가셨나요?

학산은 1950년 7월 22일, 이승만 정권시절 그 하수인인 보성경찰서장 이봉하의 호출을 받고 자진 출두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서장이 부른다고 경찰이 왔는데 그냥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두 번째도 돌려보냈는데 세 번째에는 경찰서장이 직접 와서 자문을 구할게 있다고 하면서 가자고 했답니다. 그렇게 나가신 분이 새벽에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온몸이 사람형상으로서는 알아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으로 말이지요. 이것은 일개 경찰서장의 소행이 아니고, 이승만의 직접지시라고 봅니다. 학산이 단선 단정 수립을 반대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의 정적이라고 볼 수 있죠.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그때 저희 가족은 어머니, 그리고 7남매가 허허벌판에 남았죠. 막내는 유복녀였습니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재산과 생명과 지식을 다 바치셨기 때문에 가족들은 쌀 한 톨 없는 지경이라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큰 형님은 그때 당시 전남 보성에서 민주청년학생 위원장으로서 산사람(빨치산)이 되었습니다. 결국은 어머님 권유에 자수를 했죠. 저희는 장흥으로 피난을 가게 됐고 셋째 윤성식은 외가로 보내고, 큰 누나는 둘째 이모님 집에 맡기게 됩니다.

가족이 생이별을 하게 되었네요

아버님 돌아가신 1950년 이후 6년 만인 1956년 처음으로 남산 공원에서 재회하게 돼요. 사회의 냉대와 홀대 속에서 참으로 어렵게 살았지요. 지금 세형님은 다 돌아가시고, 누나 두분하고 여동생만 생존해 있습니다. 둘째인 윤종순 누님은 지금 광주전남평통사 회원이시기도 합니다.


△앞줄 왼쪽부터 큰딸 봉순, 넷째아들 호상, 셋째딸 복순, 둘째딸 종순,
뒷줄 왼쪽부터 둘째아들 호철, 셋째아들 성식, 학산의 아내 김연애.
1956년 장흥읍 남산공원에서 큰아들 호택이 찍은 사진이다.

생계는 어떻게?

제가 신문을 팔거나 어머님이 땔감을 주워 팔아 이어갔습니다. 큰형님이 일부 생활비를 보내왔지만 많은 돈은 아니었습니다. 식구들이 보통 하루 한 끼 정도 먹으며 살았다고 보면 됩니다. 지금에서야 웃고 하는 얘기지만 ‘자운영’이라는 풀이 있습니다. 거름용 풀인데 봉순누님이 남의 논에 심어놓은 것를 몰래 뜯다가 들킨 사건이 있습니다. 누님이 놀래서 달음질 쳤는데 그만 신발이 벗겨진 거죠. 그런데 그 신발 땜에 들통이 나게 됩니다. 학산 선생의 딸이 도둑질 했다고 동네에 소문이 났어요. 아버님이 지역에서 독립운동가로 유명하신 분이라 당시에는 큰 이슈거리였죠. 이런 일은 비단 우리 가족만의 일은 아니었어요. 독립운동가들의 가족들 생활상이 다 그랬거든요.

어머님이 많이 힘드셨을 텐데…

성냥도 파시고 비누도 파시고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갔기 때문에 많이 힘들어 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큰 아들 호택, 둘째 아들 호철, 셋째 아들 성식은 이제 컸으니 본인들이 알아서 살라 하셨고, 12살 미만인 봉순, 종순, 저, 복순까지는 어머니께서 바느질을 하시거나 비누보따리를 이고 이집 저집 다니시며 먹여 살리셨어요. 하지만 전쟁 전후 어려운 시기라 장사가 전혀 안되었습니다. 그런 소문을 듣고 아버지의 제자들이 연락을 곳곳에서 주어 자신들도 어려운 형편인데 쌀과 보리를 보내주어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어머니는 고등학교까지는 시기를 놓치면 안된다하시며 막내까지 고등학교 입학을 시키셨습니다.

어머님 교육열이 남다르셨나 봐요?

넷째는 광주사범학교를 나와 교사가 되었고, 그 외의 자식들은 직장을 다니며 야간대학을 졸업했어요. 어머님의 교육열이 열심히 살 수 있도록 본을 보여주셨기에 가능하였다고 봅니다. 아버님께서 민족교육이나 혁명가의 길을 끝까지 매진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님의 강한 내조의 힘이라 여겨집니다.

어머님이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어머님이 자신의 병을 알았을 때는 이미 암 말기였습니다. 평소에 아프단 말씀을 전혀 안하셔서 몰랐지요. 종순 누님과 함께 병원에 갔다가 아시게 된 겁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소리는 안내고 입모양으로만 암이라고 누님에게 알려줬다고 해요. 처음에 몰랐다가 나중에 불치병이라는 걸 알게 됐죠. 결국 7~8개월 투병하시다가 58세로 운명하시게 됩니다. 돌아가실 때 17세인 유복녀를 걱정하시며 “밥 수저는 바꿔먹어도 되나 여자는 잠자리를 바꾸면 안된다”는 부탁의 유언을 남기시며 한 많은 생을 마치셨지요.   

아버님의 명예회복을 위해 많이 애쓰셨다고…

세월이 57년이 지나고 많은 제자들이 운명을 하고 학산 윤윤기 선생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갔죠. 그래서 ‘자식이라고 이렇게 있으면 되겠느냐’ 하고는 2002년부터 자료 수집을 하러 다녔어요. 그 전에 많은 얘기를 들었지만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서 각종 자료집을 뒤져보니 어느 정도 윤곽이 나오더라고요. 사람들도 숨죽이고 있다가 DJ정권 때부터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어요. 살아있는 제자들의 증언과 자료를 모아 2007년에 ‘민족의 참 교육자 학산 윤윤기’라는 책을 내게 된 거죠.

평통사는 언제부터

홍근수 목사님 때문에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입은 못하고 있었지요. 이후 평통사가 우리나라 통일문제에 가장 앞장선 단체인 것을 알고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건강이 좋지 못하고 사업이 힘이 들어 집회도 못나가고 하는데 어느 시기에는 힘을 합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은

저는 아버님의 명예회복을 위해 뛰어 다녔지만 비단 학산만을 부활시키려는 것은 아닙니다. 학산을 뒷받침해 주었던 많은 분들이 이름없이 쓰러져갔습니다. 그분들은 일제 강점기에서는 조국해방을 위해 학산을 도왔고, 해방 이후에는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학산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분들의 생을 다시 조명하여 복원하는 것이 유족의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