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 김정호, 국가의 '프레임을 그리다' - 박범신의 장편소설 "고산자"

[문화]

△ 문화사랑방 인서점 심범섭 씨입니다.

 목적지만 입력하면 ‘100미터 앞에서 좌회전하라’ 또는 ‘우회전하라’고 하는가 하면, ‘급커브를 조심하라’느니 ‘사고다발지역’이라느니 ‘이제부터 안전운행 하라’느니 온갖 잔소리를 해가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손금을 보듯 안내하는 시대에 대동여지도는 지독히도 고리타분한 옛이야기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하나의 바다 이름을 가지고 ‘동해’니, ‘일본 해’니 하면서 아귀다툼을 벌리는 건 도대체 뭔 짓거리란 말인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눈길로 모든 길을 ‘이리 가라 저리 가라’고 명령하는 시대에 길도 아닌 땅의 주인조차 누구인지 몰라서 시비거리로 등장하는 우스운 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도 옆 사람들이 웃고 있지만 우리의 뒷날 사람들은 우리를 얼마나 비웃겠는가. 생각해 보라. 이래도 우리가 미개함을 벗어났다고 우겨댈 용기가 있단 말인가.

 이런 우매함에 선견지명이라는 말이 딱 들어 맞는 일화가 떠 오른다. 뭐 북쪽 땅의 이야기니까 꼭 확실하다고 장담할 수야 없지만,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두 강을 좌우로 벌리고 동해와 서해로 물길을 뻗어내 흘려 보낸다. 거기서 발원하는 압록강과 두만강은 구불텅거리며 천리 장 강을 흘러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는데 이때 같이 물길을 동무해서 내려간 모래는 바다에 이르러 쌓이고 또 쌓인다. 이른바 삼각주 평야다. 평야라기보단 쓸모없는 늪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쓸모없는 늪지대는 늘 주인이 없게 마련이다. 바로 중국과 조선이 마주보고 있는 압록강 하구의 이 주인 없는 땅에 뚝을 빙 둘러 쌓고 ‘비단섬’이라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 놓은 이가 있다. 어떤 사전에서 보았지만 그렇게  한 사람은 김일성 장군이었다고 한다. 60년대라고 했다.

 생각해 보라. 그 때 그 일이 없었더라면… 그렇잖아도 국가 중흥을 이룬 듯 한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아주 특별한 설계도를 가지고 현재가 아니라 긴 역사를 지평으로 열어놓고 텃밭으로 경영해 나가는 걸 보고 있자면, 빤하게 보이는 조선과 중국의 시비거리일 게 틀림없는 이 압록강 하구의 쓸모없는 늪지대를 미리 내 땅으로 제작해서 ‘비단섬’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나라의 경계를 명확하게 작정하는 선견지명이 얼마나 큰 일인가를… 눈이 있고 생각이 있어야 역사는 읽어지고 설계되고 제작되고 경영되는 것이다.

 작가 박범신은 대동여지도를 그린 고산자 김정호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고산자인들 어찌 오늘의 지정학적 한중관계나 한일관계를 예견했을까만 그래도 ‘그는 도대체 왜, 압록강 하구의 ‘녹둔도’나 또 중국과 아라사가 서로 제 땅이라고 우겨대는 두만강 하구의 ‘신도’는 대동여지도에 그려 넣었으면서도 음! 오늘을 예견하지 못하고 독도를 그려 넣는 걸 빼 먹어서,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어린 초등 학생들까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줄창 같이 노래를 불러대게 하느냐’고 조금은 지나친 원망을 한다.  

 그건 그렇고 말 길을 돌려보자. 도대체 이 조선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일 수 밖에 없는 ‘대동여지도’의 작가 고산자 김정호가 어찌해서 ‘고향은 물론 출생과 죽음, 심지어는 조선시대 우리 민족이 그렇게까지 아껴서 소중히 여기던 본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이냐?’고 작가 박범신은 분개하고 한다. 이건 분명 조선시대의 그 못된 신분제도 때문이라고 매섭게 질타한다. 그래서 천재였으나 하층민으로 태어난 운명을 짊어지고, 이 못된 신분질서 속을 살아낸 고산자 김정호의 억울하고 분하고 슬픈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도대체 그놈의 신분제가 뭣이길래 이 위대한 인물의 삶이 일궈낸 결과를 깡그리 무시하고 푸대접을 해야 했단 말이냐고 조선시대 그 ‘완강 침묵의 힘’ 본질을 추궁해 따져 묻는다.
하여간, 박범신의 상상은 제법 선은 굵고 틀의 넓이와 깊이가 있다. 그래서 우리의 발길과 맘 길을 무겁게 하는 대목도 있지만 듬성대며 등장하는 무겁지만 낮선 대목에서 우리의 독서가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들을 걷는 재미를 잠시 더해주곤 한다. 더러는 그것이 지나쳐서 재미를 허물어뜨리기도 하지만 말이다. 허기야 그런 점들이 오히려 늘 배고픈 우리의 인문학적 상상력을 돋워주고 채워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소설이 주는 가벼움의 실망을 벗어나게 한다.

 이를테면 무슨 원한의 끈인 양, 아버지를 죽인 현감이 고산자로 하여금 ‘이 땅 삼천리의 산천과 그 산천이 품어 안고 있는 길을 찾아 떠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천신만고 끝에 고산자가 대동여지도를 다 그리고 드디어 이 위대한 작품을 세상에 내 놓기에 이르는 마지막 단계에서 그 악업의 끈은 또다시 비극적으로 해후하게 되는데, 이는 선악을 극단으로 배치해서 민중과 양반이 상하로 대칭된 관계에서 하늘과 땅을 극적으로 역전시키고자 하는 의미일 것이다.

 민중의 희망과 꿈이 역사의 진보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민중만의 노력이 아니라 현실을 작동시키고 있는 권력 안의 양심을 에너지로 동원하고 있는 작가의 인문학적 성찰은 문학적의 진보대안이 아닐까 한다.

→ 관련자료 : [글나루/인사랑 소식지] "글나루" 18호, 종합판(009년 6월호)

→ 관련자료 : 인서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